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세월호 추모관까지
김명식 지음 / 뜨인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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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공간에 스며든다. 어떠한 과학적 이유를 댈 것 없이, 기억은 선연히 공간 속에 남거나, 공간을 통해 기억을 추억하는 사람들에 의해 특정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특히 아픈 역사가 서려 있는 건축물이나 문화재를 방문하고 직접 발로 걸을 땐 온몸으로 기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기온은 적당한데 소름이 돋는 것 같고, 반대로 울컥해 열이 올라올 때도 있다. 건축은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우리 사회에 작용하고 있을까.

 

 건축은 잘 모르지만 제목에 쓰여 있는 ‘건축’이라는 단어보다 ‘아픔’이라는 단어에 조금 무게를 실어 미리 겁먹지 않고 읽어보기로 했다. 건축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쉽고 세심하게 건축을 가르쳐주려는 저자의 노력이 초반부터 돋보인다. 건축가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공간, 건물과 건축물의 차이, 예술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짚고 넘어간다. “건축은 건축물의 내부성과 도시의 공간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성을 지닌 형태를 만들어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삶의 장치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3쪽).” 건축은 예술성과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내부에서 공간을 활용하는 사람과, 외부에서 비치는 모습을 동시에 고려한다. 때로는 도시의 상징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고통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건축물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주제에서 거의 빠질 수 없는 공간은 군사정권 대표 건축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김수근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1980년대 후반, 그때 그 시절을 영상으로 재현한 매체들을 볼 때 가장 잔인하게 생각했던 내용들이 담겨 있다. 고문을 받는 자가 뛰어내릴 수 없게 완전히 축소한 창문, 몇 층이나 올라가는지 알 수 없게 하는 계단참이 없는 나선형 계단, 소리를 흡수함과 동시에 벽면 너머로 전달되게 하는 타공판으로 만든 벽…… 그리고 어느 하나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것이 없는 ‘의도에 걸맞은’ 완벽한 건축 형태. 이런 무시무시한 공간을 만든 건축가의 또 다른 건축물인 ‘경동교회’를 걷는 저자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건축가의 아이러니한 행보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뒤이어 그는 평화의 소녀상 옆을 걷는다. 평화의 소녀상이야말로 “타자의 비극이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되어 만들어진 가장 명료하고 시각적인 조형물 (97쪽).” 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외진 곳에 숨어 있듯 지어져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방문한다. 소녀상보다 대사관을 더 보호하는 듯 보이는 국가권력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박물관의 위치와 기능에 관해 의아함을 내비친다. 저자의 세심한 관찰력은 다음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복원된 여옥사가 국내 유일의 여성 독립기념관으로 개관된 것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아픔의 기억을 다루고 응시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월호 추모관도 마찬가지다.

 

“도열해 있는 지상의 묘비를 보면서 일종의 부러움이 생깁니다.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 인류 역사에 있어 이보다 더 잔인한 적이 없었던 독일의 역사를 수도 베를린 한가운데에 ‘명료한 시각적 상징’으로 현실화시키고, 가해자인 자신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전 세계에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의무를 다짐하는 명쾌한 이 선언이 어찌 부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209쪽,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 독일 베를린)

 

역사의 아픔을 다양한 형태와 상징으로 재현한 건축물들을 꼼꼼하게 설명하여 전해주는 글 뒤편에는 실제로 저자가 강의를 통해 시민들과 토론하고 의문점을 나눈 내용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책 자체가 일방적이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여정으로 느껴졌던 것은. 고통의 기억을 명료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그곳을 걸으며 공감하고

 

 

● 94쪽,
이 소녀상보다 더 강력한 상징과 의미 전달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술의 형태로 등장하는 비극과 고통의 구체적인 형상 앞에서, 돌아오지 못한 소녀의 빈자리에 누구든 앉아 함께 하자는 소녀상의 소리 없는 외침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은 힘겨운 투쟁과도 같습니다. 비정상이 종종 정상으로 여겨지는 한국에서는 이곳의 풍경 또한 그리 놀랄 만한 것이 아님을 직접 방문해보면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 119쪽,
발 아래 밟고 있는 얼굴들이 내는 소리는 은유적이지 않고 직설적입니다. 대번에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니까요.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들리는 울음소리는 벽을 타고 솟구쳐 끔찍한 비명으로 바뀝니다. 함께 걷는 이가 있다면 소리가 겹치면서 더욱 증폭되어 절규와 아비규환의 공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닥에 깔려 절규하는 얼굴은 어느덧 기차나 수용소 혹은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대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세상은 악마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살기에 위험한 곳이 아니라, 그것에 맞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대문에 위험한 곳이라고 했던 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전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처음에는 이웃이 가고 다음에는 친구가 가고 이윽고 내 가족의 차례가 찾아오는 순간,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위로하기 위해선 우리 모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226쪽,
고통을 기억하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기억의 형태화는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 그 새로운 부재에 대한 아픔을 딛고 만들어진 추모 공간 혹은 기념비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존재에 대한 찬양이고 기억입니다. 예술의 한 분야로 형태화된 고통의 공간을 통하여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려는 것은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한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249쪽,
옆 동료는 세월호 이야기가 나오자 "지겹다, 그만하자. 그만하면 많이 했다"라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는 아이를 사교육 시장에 내몰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고, 직원들에게 비타민을 챙겨주며 "약 드실 시간입니다"라고 농담을 건네 웃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세월호를 향한 그의 태도는, ‘악의 평범함’ 같은 거창한 말을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방심하여 생각의 시간을 늦추면 내게도 당도할 일상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저라는 인간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여진 경비원 감축 표결에 대한 안내문을 읽으며 왜 머릿속에 계산기를 눌러보지 않았겠어요. 방금 현관에서 그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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