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교육감 김상곤을 이야기할 때 '무상 급식'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김상곤이 공세적으로 제기한 무상 급식은 시혜적 차원에서만 이해되던 복지 논쟁을 언론도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논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대중이 무상 급식으로 대변되는 복지를 '권리'로 이해하고 환영하면서 진보 진영 내에 복지 담론이 끓기 시작했다. 결국 무상 급식은 '미래의 한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논할 화두가 됐다.

사실 이런 '무상 급식'이라는 구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시민사회가 꾸준히 무상 급식 운동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 급식이 지금과 같은 힘을 갖게 된 데는 그런 무상 급식 운동의 성과를 갈무리한 김상곤의 역할이 있었다. 지금 '김상곤 리더십'이 주목받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 <김상곤, 행복한 학교 유쾌한 교육 혁신을 말하다>(김상곤·지승호 지음, 시대의 창 펴냄). ⓒ시대의 창
지승호가 김상곤을 인터뷰해 내놓은 <김상곤, 행복한 학교 유쾌한 교육 혁신을 말하다>(시대의 창 펴냄) 역시 김상곤 리더십에 주목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과 '진보'가 또 '진보'와 '행정'이 좀처럼 어울리지 않은 상황을 염두에 두면, '성공한 진보적 행정가'로 꼽히는 그의 리더십을 꼼꼼히 따져볼 이유가 충분할 것이다.

김상곤 리더십이 가장 큰 효과를 낸 것은 교육청 조직과의 융화였다. "교육 혁신"을 표방하고 교육청에 입성한 그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고루하고 폐쇄적인 집단으로 꼽히는 교육 관료를 어떻게 통제할지는 처음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이런 어려움을 모를 리 없었던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처음 들어왔을 때 제일 고민되는 지점이 이 조직과 내가 얼마나 빨리 녹아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우선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나를 지지하고 뽑아준 유권자들이 바라는 정책을 펼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보궐 선거를 통해 당선됐기 때문에 제 임기가 1년 2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였는데요. (…) 참 다행스럽게도 취임 후 100일 이내에 그 과제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평가합니다." (65쪽)

"제가 들어와서 특별히 무슨 당근을 제시하거나 채찍을 가하는 권한을 행사하지도 않았어요. 또 그런 것들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다만 권위주의에서 탈피한, 즉 민주적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교육 관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거죠. 그것이 제 원래의 모습이므로 있는 그대로 접근하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충분히 듣자,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듣도록 노력하자 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탈권위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리더십 즉 수평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66쪽)

지승호가 인터뷰 내내 거듭 물은 것처럼 수평적 리더십이 어려운 까닭은 리더의 무한한 인내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이뤄야 할 과제는 많은 상황에서 구성원의 동의를 얻는 것은 어렵고 지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상곤의 경험은 수평적 리더십이 '혁신'을 이뤄내는 유일한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학생과 교사, 학부모와 교육 관료 등 관계자 모두가 바뀌어야만 변화가 가능한 교육 분야에서는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변화의 열쇠다. 김상곤은 '학자로서 이론적으로 생각했던 교육 현장과 직접 들여다본 교육 현장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깊어진 생각을 말한다.

"교육에 관한 큰 틀에서의 문제는 밖에서 볼 때나 안에서 들어와서 볼 때나 거의 같은데요. 다만, 그 문제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푸는 데는 훨씬 더 면밀한 검토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이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죠.

그래서 그런 면에서 보면 밖에서 거리를 두고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제대로 좀 하자'고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될 것 같은 생각을 하기 십상인데요. 그러나 교육이 지닌 메커니즘의 복잡성과 그 구성원들 각자의 차이들,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가면서 변화시키려면 엄청난 에너지 집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97~98쪽)

일부 보수 언론에서 '포퓰리즘'이라고 날을 세워 비난하는 김상곤의 교육 개혁이 현장에서 별다른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러한 신중함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무상 급식. 체벌 금지, 두발 자유화 등 학생 인권, 학교 혁신 정책이 아무리 옳더라도 선언적으로 무리하게 밀어붙이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상곤이 마냥 신중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11월 시국 선언 교사를 징계하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요구를 거부했다. 결국 교육과학기술부, 보수 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하고, 검찰의 기소를 거쳐서, 재판까지 받았다. 비록 법원은 1심에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그의 손을 들어줬으나, 교육과학기술부와의 갈등은 진행 중이다. 혹시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낮은 수준의 징계라도 한다면 전체적으로 중징계를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중앙 정부와 세게 부딪힐 필요도 없고) 지지자들이나 시민사회에도 면이 설 수 있지 않느냐는 취지에서 어떤 식으로든 징계를 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들이 많았습니다. 같이 활동했던 분들까지도 그런 조언을 많이 했죠. 하지만 제가 볼 때 (…)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는 것 자체는 합리적이지도 못하고, 인사권을 가진 교육감으로서의 재량을 포기하는 것이라 본 겁니다. (…) (재판 결과에 따라 교육감 직 수행이 어려워 질 수도 있었는데) 내가 볼 때 이 사안은 그런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봤던 거죠." (151쪽)

김상곤의 교육 개혁의 동반자로 일순위로 꼽는 이들은 다름 아닌 교사다. 사실 그를 비롯한 이른바 '진보' 교육감이 추진하는 '체벌 금지' 등과 같은 학생 인권 정책을 놓고서 (부추기는 보수 언론에 반응해서)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이들이 교사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가 할 말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교사들이 스스로 교권을 생각한다면 학생들의 인권도 존중해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요. 실은 아이들에 대해 교육자라는 입장, 그것도 때로 전근대적인 교육자상을 자임하는 흐름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그게 교사들의 집단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개별 교사들은 대개 다른 교사의 체벌이라든가 학생 인권 침해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인 생각을 분명히 가지고 있죠. 그럼에도 학교라는 조직 단위에서 집단적인 사고를 하다보면 개인의 사고에 기반을 둔 언행이 나오지 못하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매몰되어 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181쪽)

"교육을 위해서 일정 부분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할 정도의 강압적인 통제라면 부당하다는 취지에서 학생 인권의 내용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권리를 1대1로 대립해서 보기 시작하면 상충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보는데요. 실은 이해관계가 합치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 그러한 관계를 대립각으로 상정해놓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라고 생각합니다. 교사와 학생이 상호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고, 실제 선진국의 선진이라는 의미에는 그 점이 들어있습니다." (336쪽)

결국 김상곤 리더십을 꿰뚫는 열쇳말은 '역지사지'인 셈이다. 상호 이해와 대화를 전제로 한 리더십이야말로 그가 조직과 관료의 지지를 이끌어낸 힘이자 무상 급식, 학생 인권 정책을 뚝심 있게 밀어붙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가 던진 무상 급식 화두가 한국 사회에 복지 바람을 불러일으켰듯이, 김상곤 리더십이 경기도를 넘어 한국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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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바쁜 일상에 쫓기는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물가는 오르고 살 것이 많은 요즘에는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권력과 명예와 쾌락과 웰빙은 필요하다고 하지만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그룹의 "경영 철학" 같은 것 말고.

과연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할까? 이 문제에 답을 주려고 하는 책이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펴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왜 제목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인가 하는 점이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매 순간마다 철학이 필요하기에 굳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따로 설정할 필요는 없다. 책을 다 읽고 덮을 즈음에 나름대로의 결론이 났다. 독자들에게 철학적 편지를 보내고 그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철학적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하는 저자의 입장으로 볼 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제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우리들이기에 새삼스럽게 철학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철학이 필요한 시간>(강신주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이 책의 부제는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이다. 따라서 철학 상담을 하는 나로서는 더욱 끌릴 수밖에 없었다. 철학하는 장소로 상아탑보다는 시장을 선택한 저자가 인문학으로 어떻게 상담해줄까?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펴냄)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욕망에 의해 조작된 삶을 살아가며 상처받고 있는가를 고발했다면, 이 책에서는 상처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귀띔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마흔 여덟 개의 병에 각각 다른 편지를 담아 우리에게 보내고 있다. 각각의 편지들에는 저자가 철학의 고전을 읽고 받은 느낌과 생각이 적혀 있다. 제1부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에서는 나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도와주는 열여섯 편의 편지가 담겨져 있다. 우선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숨기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니체와 임제의 생각에 기대 허황하고 조작된 미래에 저당 잡히고 사는 우리에게 현재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있다. 타인에 의해 금지된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는 라캉의 말과 페르소나만큼 맨얼굴도 중요하다는 에픽테토스의 가르침도 전해준다. 또한 아무 생각 없이 눈치 보며 사는 우리를 개에 비유하는 이지와 쇄락의 경지를 가르치는 이통, 나라는 껍데기를 버리고 공(空)의 이치를 역설하는 나가르주나, 틀이라는 강박 관념을 버리라는 혜능,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에 충실 하라는 최시형, 습관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라베송, 배려함과 눈에 띔의 차이를 발견한 하이데거, 이론과 실천 모두를 강조하는 지눌,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미투라나, 언어의 의미는 구체적 사용과 그 규칙에 의해 결정된다는 비트겐슈타인, 최선을 다 한 후에 운명의 뜻을 기다리라는 맹자,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삶을 경시해서도 안 된다는 에피쿠로스의 편지를 전해준다.

제2부 '나와 너의 사이'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전해준다.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과 윈-윈(win-win)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가져야할 지혜들을 소개하고 있다. 책임을 위해서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칸트, 조화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고 고발하는 레비나스,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간파한 샤르트르, 진정한 배려인 서(恕)가 예(禮)의 핵심이라고 말한 공자, 수양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정약용, 순진함도 용서될 수 없다는 아렌트, 기쁨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는 스피노자,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라는 데리다,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인(仁)이라는 정호, 민감한 감수성은 관심과 훈련에 의해 닦여진다는 라이프니츠, 차이를 견디고 타자를 포용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을 주창한 이리가라이, 진정으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장자, 다시 사랑하기 위해 지금의 사랑을 비워야 한다는 원효, 진정으로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논리보다는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한비자, 논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편지를 전해준다.

제3부 '나, 너, 우리를 위한 철학'에서는 사회와 그 속에서의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들을 털어놓는다. 웃음의 생명성을 강조한 베르그송, 대량 생산에 의한 복제가 아우라를 파괴한다는 벤야민, 유행과 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허망함을 지적한 리오타르, 베버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기제를 소비와 사치로 고찰한 좀바르트, 비만과 과잉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에 증여를 통한 다이어트를 권하는 바타유, 스펙터클 사회에서 진정한 여가를 즐기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폭로하는 드보르, 운명을 받아들이는 지혜에 대해 말하는 왕충, 진정한 소통과 공감에 대해 이야기 하는 왕간, 현덕(玄德)의 의미에 대해 말하는 노자, 진정한 사랑을 역설하는 묵자, 진정한 사랑이란 실천에 있다는 베유, 주체로서 자유롭게 사는 방법을 말하는 바디우, 사랑은 객관적이라는 헤겔, 동등한 결연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들뢰즈, 노동보다는 놀이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라는 하위징아, 정치적 합의와 대의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랑시에르, 진정한 진보는 휴머니즘에 있다는 마르크스의 편지를 전한다.

이 책이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은 고전의 세계에 빠지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저자의 편지들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철학자들과 그들의 책에 대한 자세한 해제는 고전 내용 뿐 아니라 번역에 대한 평가, 관련 연구서까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더 읽어볼 책들'이 책의 말미에 "겸손하게" 붙어있는 점이 아쉽다. 각각 해당되는 장에 있었다면 그 장의 화두에 관한 편지를 읽고 그 지방으로 여행하려고 하는 독자들에게 주체적인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마흔 아홉 개의 편지들이 각각 완결성을 가지려면 책에 대한 소개가 병 속에 들어가야 한다.

사실 아쉬운 점들은 더 있다. 우선 논쟁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성철과 지눌을 대비시키는 장면 등 몇몇 곳을 제외하면 철학적 논쟁을 자극하는 점이 별로 없다. 서양의 전통에서 아르구멘툼(argumentum)은 논쟁을 의미하는 동시에 논증도 의미한다. 한 권의 책에서 너무 많은 철학자들을 소개하다보니 논증과 논쟁의 과정이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점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구조는 아닌 것 같다. 대립되는 철학적 입장을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실 너무 많은 편지는 초점과 깊이를 상실할 수 있다. 주체와 관계, 사회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전하려하다 보니 책 소개에 그치고 만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독과 외로움이 경감되고 인간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유리병편지는 가끔 우연히 발견해야 약효가 있지 않을까? 마흔 여덟 개가 패키지로 묶여 있는데도 자못 설렘을 억누르며 열어볼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 경고했다. 사색 없이 다독(多讀)하는 사람은 글씨본에 따라 글씨 연습을 하는 사람과 같다고. 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편지를 쓰기 바란다. 강신주가 철학자들의 편지를 읽고 자신도 우리에게 편지를 썼듯이, 이 책의 독자들도 편지를 써야 한다. 누구에게든. 그래야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생각이나 강신주의 생각이 곱씹는 과정 없이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는 일이 없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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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살아있는 물리학자 가운데 최고로 추앙받는 미국 텍사스 대학의 스티븐 와인버그의 교양 과학책을 몇 년 전에 번역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과학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저작을 읽으며, 프런티어 과학자로서의 그가 정말로 지금의 현대 문명을 이끌고 있는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구나(어쨌든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만들어 온 문명을 아끼면서 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점을 암암리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번역본 출간에 때맞춰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문명에 대한 질문들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내 주변의 동료 과학자들은 대개 "뜬금없이 웬 문명?"이라는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은 나이, 지위, 성별, 혹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언제인가 인문학자들과 함께하는 어떤 모임에서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많은 사람들은 물리학자가 '감히' '문명'을 생각하다니 기특하다는 듯한 격려의 말을 내게 던졌다.

비슷한 일들을 몇 번 겪으면서 나는 한국이 문명국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의 지상과제는 선진국 진입이 돼 버렸지만, 나는 한국이 진정한 문명국가가 되는 것이 거시경제 지표상의 몇몇 기준을 만족하는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문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보다 나은 삶의 양태"이나 나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독자적인 통찰이 가능한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생각한다.)


▲ <지금, 경계선에서>(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나처럼 '불경'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가 일종의 21세기형 비급(秘笈)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원제 'Watchman's Rattle'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인간 문명의 최전선에서 파수꾼이 보내는 경고음이다.

이 경고음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흥미롭다. 파수꾼 코스타가 보내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류 문명의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정도가 인간 두뇌의 인식이 진화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인식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는 사회적 복잡성에 맞설 수 있는 '통찰'이라고 하는 진화의 선물이 있어서 기존의 게임 법칙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잠재력이 있다. 통찰은 말하자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순간의 깨달음과 비슷하다. 통찰에 이른다는 것은 "이전까지 간파하지 못했던 여러 요소 사이의 연결고리를 포착할 수 있는 상태"로 갑작스럽게 도약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사회 복잡성과 두뇌 진화의 불균등한 발전이 야기하는 문명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길을 가로막는 데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슈퍼밈(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널리 만연하여 다른 모든 믿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억압을 가하는 모든 종류의 믿음, 생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상관관계, 소통 없는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슈퍼밈을 극복하고 단기적 완화책과 함께 근본적인 치유책을 함께 준비할 것을 주장한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인간 두뇌가 현대 문명의 복잡성을 모두 따라 잡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코스타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도 <블랙 스완>에서 현대 문명의 복잡성과 이에 뒤처지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고 그로부터 경험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탈레브나 코스타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인간의 다른 신체적인 한계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물속에서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세상이 아무리 눈 튀어나오게 빨리 돌아가도 인간의 걸음걸이와 달리기 속도는 그만큼 획기적으로 향상되지 않았다.

인간 두뇌가 현대 문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과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촉발된 두 번째 과학혁명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중요해지는 물리적 영역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거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상대론적인 효과를 보려면 물체의 속도가 광속(초속 30만km)에 근접해야만 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를 확인하려면 원자 수준으로 내려가서 세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두뇌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신체 기관은 이런 물리적인 영역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인간은 냉정한 자연선택의 결과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나 양자역학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양자역학이 태동했던 초기에는 양자역학의 출현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던 플랑크나 슈뢰딩거, 심지어 아인슈타인조차도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에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물론 철학자들조차도 왜 인간의 언어는 원자 이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하며 한탄을 했다고 한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레너드 서스킨트는 그의 최신작 <블랙홀 전쟁>에서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아예 자신의 두뇌 신경회로를 완전히 재배선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는 물리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물리학에 대해 강연을 하거나 글을 쓰면 나는 항상 내용이 어려우니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자들조차도 자신의 뇌신경을 재배선 해야만 한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은 대체로 자신의 신체 크기와 엇비슷한 척도의 자연환경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해왔다. 따라서 미시 세계를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양자역학처럼 시간을 많이 들여도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꼭 들려준다.)

비슷한 논리를 약간만 확장해 보면 현대 문명의 복잡다기한 상황을 인간이 단번에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에는 진화생물학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코스타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코스타는 이 한계를 극복할 진화의 선물로 '통찰'을 지목했다. 생물학이나 뇌 과학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코스타가 현대 문명의 돌파구로 제시한 이 통찰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강건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 슈퍼밈을 피해가며 진화의 선물인 통찰을 얻는다면, 지금 인류가 이상 기후, 자원 고갈, 테러, 경제 위기 등 현대 문명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지금 우리가 문명사적인 위기들, 자원 고갈이나 이상 기후나 테러리즘 등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그 문제의 해결책을 '통찰'해 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복잡성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여러 단계의 파생 상품을 거치면서 누구의 위험성이 누구에게 얼마만큼 전가되는지를 일일이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용에 위기가 생겼을 때 그 모든 체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점은 구석기 시대의 두뇌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중동 문제가 부족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던 시절의 문제와 비교했을 때 그 본질에 있어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는 정도의 통찰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일까?

우리가 아직 우리 두뇌의 통찰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사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통찰을 기다리는 것이 (아무리 갖가지 두뇌 훈련을 한다 하더라도) 과연 좋은 해결책인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그 통찰이라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궁극적인 해결책"의 다른 말이어서, 결국에는 인간이 문명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인식할 수 있는 진화의 선물이 있으므로 문명을 구할 수 있다는 동어반복적 논리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떤 문제든 궁극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내서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둘째, 설령 우리가 문명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코스타가 두 번째 슈퍼밈으로 책임의 개인화를 지목하면서 설명했듯이, 대부분의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발생한다. 시스템적으로 생긴 문제를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마찬가지로, 문명사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두뇌 개발을 열심히 하고 통찰에 이르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미국 에너지부 장관인 스티븐 추의 제안대로 모든 지붕과 도로를 흰색으로 칠한다면 지구 온난화에 획기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말하자면 노벨상 수상자인 추의 통찰이다. 그런데 왜 모든 나라에서는 지붕과 도로를 흰색으로 칠하지 않을까?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한 시스템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구조적인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제아무리 천지를 뒤엎는 통찰이라도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획기적인 기술을 가진다고 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풍토에서는 중소기업의 기술이 대기업의 갖은 압박을 물리치고 온전히 생산력으로 전환되어 안정적인 수익을 내려면 제도와 체제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코스타가 제시한 다섯 가지 슈퍼밈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이들은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오래된 믿음들이다.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슈퍼밈을 제대로 피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좀 더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태의 명확한 인식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오래된,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타파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수준의 고민을 요구한다면 또 다시 뜬금없는 욕심으로 치부되는 것일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일부 분야에서 세계 1등을 선점한다고 늘 스스로를 자부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문명사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지구 반대편까지 혹은 수백만 년 전까지 관심사를 확대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스스로를 잘 알기 위해서조차도 우리가 인류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라는 굵직한 정치 일정이 한국 사회를 지배할 예정이다. 그래서 예컨대 <진보 집권 플랜> 같은 고민들이 하나씩 세상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할 것이다. <진보 집권 플랜>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간이 되지 않은 곰탕을 먹는 느낌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이 문명사적인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앞으로 <진보 집권 플랜 2>가 나오든 혹은 <보수 집권 플랜>이 나오든,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은 <지금, 경계선에서>를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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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생생한 풍경이 있다. 2003년 폴란드에서 들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이제 유적지가 된 그곳에는 당시의 살풍경을 짐작케 하는 물품이 가득했다. 그중 나치가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들로부터 압수했던 안경과 신발(의 일부)을 쌓아놓은 전시가 있었는데,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보는 이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거의 모든 관광객들은 그 소름끼치는 장면 앞에서 말로 들었을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분노를 느낀다.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이렇게 되뇌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여러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괜히 아무런 죄 없는 안내원에게 시비를 걸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그 자리에서 쉽게 분노가 표출될 수 있었던 건 학습 효과 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릴 적부터 나치와 히틀러의 만행을 익히 배웠다. 그러나 그들이 어쩌다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군국주의와 전쟁, 학살 등의 관계를 벗기고 뒤집어보는 교육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국방의 의무를 당연한 국민의 의무 중 하나라고 배운다. 그러나 그것이 왜 의무인지, 의무라면 어떤 방식으로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고민할 기회도, 의문을 던질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교과서에는 그저 '국방의 의무'라는 활자 옆에 총을 들고 전방을 지키는 군인의 사진이 나와 있을 뿐이다. 그 총이 방위가 아닌 공격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향해, 혹은 전쟁터에 끌려나온 누군가를 향해 겨눠졌던 역사는 교육 과정에 없다.

그 당위성에 반대하며 병역 거부를 하는 이들이 있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를 지키려는, 평화를 지키려는, 신념을 지키려는 또는 내면의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지난 수십 년간 이들은 꾸준히 병역 또는 집총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수감됐지만 한국 사회는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군사주의라는 거대한 스피커에 묻혔던 병역 거부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나왔다. 그 자신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고, 현재 평화학을 연구하는 임재성의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그린비 펴냄)다. 지난 2008년 병역 거부자의 글을 모은 책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철수와영희 펴냄)이 출간되긴 했지만 이 책은 한 저자의 관점에서 한국 병역 거부의 역사와 논쟁점을 일목요연하게 담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병역의 의무는 신성하다? 과거엔 달랐다"


▲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임재성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아마 병역 거부 이야기를 꺼내면 상당수의 한국 남성(혹은 예비역)들은 울컥하는 반응부터 보일 것이다. 왜 그럴까? 저자는 그 이유를 '언어의 부재'로 표현한다.

"징병제에 대한 비판의 언어, 저항의 언어가 부재했던 상황에서 피해의식은 결국 '평등주의'에 대한 강박으로 폭주했다. (…) '애국자'들은 자신을 착취하는 국가의 언어에 기대서 '도덕'을 외쳤지만 결국 분풀이 이상의 무엇이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군대 문제, 징병제 문제에 대한 논의는 늘 이 틀 속에 갇혀 있었다. 여성과 장애인, 병역 거부자 등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지는 가난한 시민권을 손에 쥔 군필자들은 이 분풀이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보상받고자 하지만 그들 역시 배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작 군필자조차 자신에게 죽을 고생을 시킨 권력에게는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언어'도 갖지 못했다."

일본의 제국주의, 한국전쟁, 군부 독재를 거치며 한국 사회에서 군사주의에 반하는 언어는 사실상 소멸했다. 군사주의가 당연한 무엇으로 머리와 마음속에 박혀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병역 거부를 이어온 가장 큰 집단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었다. 기득권이 된 기독교가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한 상황에서 그들의 행위는 더욱 외면됐다.

그러나 우리가 몰랐던 역사가 있다. 군사 정권이 들어서기 전, 병역 기피 또는 병역 거부는 '보편적 현상'에 가까웠다. 저자는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1960년, 입영 대상자 중 병역 기피자의 비율은 35%에 달했다"고 지적한다. 요즘 예비역들이 외쳐대는 '병역은 신성한 임무'라는 문구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 정권은 권력의 근거인 군부를 강화하고 전 사회의 병영화를 위해 '입영률 100%'를 사회적 목표로 삼는다. 전 사회적인 통제, 기피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사회적 낙인 등의 집요한 노력을 통해 징집 체제를 완성해 나간 것이다."

병역 거부자에 대한 형량도 군사 정권을 거치며 높아졌다. 저자는 "1954년부터 유신 이전까지의 형량은 평균 10개월 정도였지만, 유신 직후인 1973년부터는 2배 이상으로 높아졌다"며 "박정희 정권은 병역 거부자들을 강제 입영시켰고, 이전까지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던 여호와의 증인들이 군사 법정에서 재판을 받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병역 거부는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도 떠올리지 않고, 따라서 선택하지 않는 조항이 됐다.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 중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없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여호와의 증인들의 병역 거부에 대한 평가 역시 달라졌던 점은 병역에 대한 사회의 관점이 얼마나 '가변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일제시기에 이들이 했던 병역 거부는 당시에는 '항일 운동'으로 찬양을 받았던 반면 정부 수립 이후에는 반국가적 범죄로 처벌을 받은 것이다.

'마취'되지 않은 사람들

2001년 오태양의 병역 거부 선언이 사회적 관심을 모은 이후 종교가 아닌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이들은 50명에 이른다.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언어를 잃은 한국에서 이런 선택을 한 이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저자는 인터뷰와 글을 통해 한국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분석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그 중 1991년 강경대의 죽음을 계기로 병역 거부를 결심했던 박석진이 "'거부'를 택한 이들이 특별한 '인간'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대목은 곱씹어볼 만하다. 이어 저자는 "나약함을 긍정하기"라고 표현하며 병역 거부는 자신 안의 두려움을 직시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한국 병역 거부자의 경우 역시 감옥행을 감수하면서도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이유가 강한 신념 때문인 것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살펴보면 전쟁과 군사 훈련, 남성성과 위계 질서의 폭력에 동화될 혹은 버텨 낼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국민으로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총을 들고 싸우라는 장엄한 호명에도 마취되지 않은 채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사람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만약 폭력에 동화되거나 저항하는 것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라면, 평화학이 천착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 두려움일 것이다."

군사주의에 물든 한국 사회에서 지워진 건 폭력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희생자로서의 기억은 남고 가해자로서의 기억은 지워졌다. 베트남에서, 국내 가두시위에서 시민을 향해 총을 들었던 이들은 다름 아닌 한국군, 국방의 의무를 다하러 나갔던 젊은이들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병역 거부자에게 향하는 "강도가 집에 들어와도 가만히 있을 것이냐"라는 질문이 '가장 섬뜩했다'고 밝혔다.

"국가의 공식 기억 속에서 지워진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가질 수 있다면, 집을 지키는 것과 군인이 되는 것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일임을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집을 지킨다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심지어 자기 식구까지 죽였다면 강도가 들어오기도 전에 그 집은 이미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이런 두려움과 기억을 잊지 않는 이들이다. 한편으로는 만연할 대로 만연한 군대 내 폭력에 예민한 이들일 수도 있다. 사실, '훈련'을 핑계로 폭력적인 문화까지도 의무라는 '상식'은 조금만 비껴나서 생각하면 누구나 그 허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도 평화도, 생각보다 가깝다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후퇴할 수 있다. 2008년, 양심적 병역 거부자(여기에서 말하는 양심은 '양심의 자유'와 같다)들의 대체 복무를 허용하려던 법안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무기한 보류됐고 아직도 1000여 명의 병역 거부자가 감옥에 있다.

그리고 2011년, 한국은 천안함 침몰, 연평도 사건을 거쳐 다시 전쟁의 그늘 속에 있다. 해병대 자원이 늘었다는 소식에 "20대의 안보 의식이 높아졌다"는 평가도 언론에 등장했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으로 주가를 올리던 배우 현빈의 해병대 자원 소식은 연초 가장 큰 화제 중 하나였다.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지만, 실제로 전쟁은 생각보다 가깝다. 긴장이 높아지고, 무력이 오가고, 죽고 또 죽이는 생지옥이 시작되는 것은 역사를 살펴보면 한순간이었다. 지금 병역 거부자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지점일 것이다. 자신 안의 두려움을 깨닫고 병역 거부를 하는 이들이 있듯이, 그 두려움을 제거하거나 마취시키면 쉽게 잔혹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 평화는 두려움을 제거하는 군사 훈련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나치는 외계에서 날아온 괴물이 아니었고, 가미카제 대원들은 어디서 제조된 로봇이 아니었다.

"20세기 역사 속에서 거대한 전쟁이 지나고 나면 늘 강력한 평화주의가 대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체험과 기억은 희미해져갔다. 매번 전쟁이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막지 못했을까? 왜 저항하지 못했을까? 각성과 반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흐려져 간다. 나는 병역 거부자들의 언어가 그들의 체험과 저항이 전쟁과 폭력의 본질을 또렷하게 전해줄 것이라 믿는다."

책이 두껍다. 아마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았을 것이다. 지난 10년 간 소수의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상대로 외쳤던 이야기가 어찌 책 한 권으로 정리될 수 있겠는가. 그간 무조건 병역 거부를 감정적으로 대했던 이들이나, 드러나지 않은 역사를 알고 싶은 이, 또는 평화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차분하게 이 책을 들여다보길 권한다.

'군대만이 안보의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한, 전쟁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언어에 공감한다면, 현빈 자신이 극중에서 연기한 김주원의 입버릇처럼 '사회 지도층의 선택'이 당당하게 병역 대신 대체 복무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그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세상 역시 전쟁과 우리의 거리만큼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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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단 와터스의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김한영 옮김, 아카이브 펴냄)는, 현대 정신 의학이 다양한 문화의 자생적 문제 해결 능력을 무시하고 미국 문화의 잣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재단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한 보고서다.

저자는 거식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정신 분열병, 우울증 등 서구에서 발견되고 분류되고 관리돼 온 대표적 정신 질환이 홍콩, 스리랑카, 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일본에서 퍼져나가는 양상을 세심히 관찰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서양 의학은 토착 문화의 자생력을 파괴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중 홍콩과 일본은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어서 특히 관심이 간다.

아마 현대 의학이 인류를 참혹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준 은인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질병 판매학>(알마 펴냄), <더러운 손의 의사들>(양문 펴냄), <제약 회사들은 어떻게 우리의 주머니를 털었나>(청년의사 펴냄) 등 현대 의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많은 책들이 출판되기는 했어도 의학이 인류 구원의 보루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아직 굳건하다.

이 책들은 제약 회사가 처방권을 가진 의사를 합법적으로 또는 탈법적으로 매수해서 꼭 필요하지도 않은 처방들을 남발하도록 조장한다고 폭로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약을 처방하는 대가로 제약 회사가 의사나 의료 기관에 지불하는 리베이트 문제가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은 의약 분업을 통해 약품의 유통 마진을 줄이려는 정부와 의사 집단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문제를 이런 측면에서만 보면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조정과 합의가 해결책이다. 실제로 의사들의 파업은 힘에 따라 이해관계를 재분배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단 와터스 지음, 김한영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하지만 이 책은 문제를 좀 더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낸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축적해가는 삶의 지혜, 즉 공동체의 문화에서다. 그런데 미국의 의사들이 중심이 돼서 만들어낸 '정신 질환 진단 분류 체계(DSM)'에는 서양과 다른 세계관의 삶을 담을 공간이 없다. 따라서 서양의 정신 의학은 서양인의 삶에서 형성된 정서와 문제를 기준으로 다른 문화권의 삶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홍콩의 거식증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날씬한 외모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경이 이 병의 원인이라는 서양식 설명은 실제 사례와 거의 들어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DSM은 특정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증상을 포함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만 있는 '화병'이 그중 하나다. 하지만 서양의 교향악에 국악 가락 한 소절을 집어넣는다고 그 음악이 국악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문화적 불협화음에 관한 것이다.

문제를 이해관계보다 더 큰 문화의 틀 속에서 찾아낸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의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 의학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대두된 여러 학문 중 하나인 의료 인류학의 접근법이기도 하다. 책에서 언급되는 하버드대학교의 아서 클라인만은 타이완에서의 정신병 연구를 통해 정신 질환에 대한 문화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서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문화적 폭력일 뿐 아니라 현지 주민을 새로운 의료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 사회·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식증과 정신 분열병의 사례가 주로 문화적 폭력에 대한 것이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의 사례는 주로 문화적 폭력이 경제적 수탈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은 각각 서구식 훈련을 받은 심리 상담사와 거대 다국적 제약 기업의 큰 시장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지인들을 서양인처럼 앓게(미쳐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계가 미국처럼 미쳐가는 이유 중 하나가 현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시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인들의 몸과 마음이 되어버린 그들 자신의 문화에 대한 반성의 부재다. 이 책의 초점은 전자에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도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이것은 의료 인류학이 갔던 경로이기도 하다.

최초의 의료 인류학자들은 과학에 바탕을 둔 서양 의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민지와 후진국에서는 건강에 관한 각종 미신과 토착 신앙 때문에 서양 의학이 잘 수용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연구해야만 했다. 이후 후진국의 신앙과 거기에 바탕을 둔 토착 의학을 연구하다 보니 비교 분석을 위해 같은 방법으로 서양 의학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문화적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양 의학의 전제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양 의학을 보급하기 위해 시작된 연구가 이제는 오히려 서양 의학의 문제점들을 반성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다른 문화의 믿음들을 깊이 탐구하면 우리 자신의 문화적 편향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책은 서양의 정신 의학이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지만, 거꾸로 다른 문화의 시선으로 서양 의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상에 대한 지나친 의료화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자동적으로 습득된 문제 해결 능력을 무력화시켜 오히려 병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이반 일리치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미토 펴냄), 그리고 프랑스의 정신 의학이 식민지 알제리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양상을 비판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펴냄)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도 이 책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진단명을 쓰지 않지만 50대 이상의 세대라면 히스테리와 신경 쇠약이라는, 서양에서 발명되고 수입된 증세에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증상을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유명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은 우울증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고, 아마 그 발병을 더 촉진시켰을지도 모른다. 또 천안함 사건에서 살아남은 승조원에게 실시했다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는 과연 어떤 문화적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지, 거기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혹시 치료를 빌미로 틀에 박힌 가치를 주입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적 반성 외에 우리들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문화에 길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이 책은 이 점을 상기시켜준다. 대중은 문화적 권위의 지지를 받는 틀 속에서 질병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 문화적 권위가 교회였지만, 근대 이후 급속히 과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자본과 소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히스테리 환자들은 이 분야의 문화적 권위였던 의사 샤르코가 진단하고 분류하고 기술한 그대로의 증상을 겪었다. 오늘날의 소년 소녀들은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외모와 행동과 소비 패턴을 규범으로 삼고 닮으려 한다. 그래서 성형과 미용과 다이어트의 열풍이 분다. 이것은 "무의식이 감정의 고통을 당대에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시도"의 결과다. 이렇게 문화적 기대와 개인적 경험이 상호작용하고, 우리의 생물학적인 몸은 문화적 경험과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몸과 문화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물-문화적(Bio-Cultural) 현실이다.

21세기의 문화적 권위인 자본은 바로 그 생물-문화적 현실을 파고들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자율적인 문제 해결 노력이 아닌 약품의 소비가 규범인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확대되면 모든 사람이 그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의 구성요소가 된다. 책 속에 인용된 애플바움의 말처럼 "완벽한 건강이라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중에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우리가 가진 자유의 도구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고삐를 넘겨주고 말았다. 과학의 객관성, 의료의 윤리와 공정성,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지키는 한에서 의학에 자율성을 부여할 특권은 이제 그들 손에 있다."

의료인이 전문가로서의 자율성과 대중의 의료인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환자가 의약품의 소비자가 아닌 자기 건강의 주체로 바로 설 수 있을지의 여부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바꿀 수 있을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 책이 의료와 관련된 모든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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