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있는 물리학자 가운데 최고로 추앙받는 미국 텍사스 대학의 스티븐 와인버그의 교양 과학책을 몇 년 전에 번역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과학 이야기로 가득한 그의 저작을 읽으며, 프런티어 과학자로서의 그가 정말로 지금의 현대 문명을 이끌고 있는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구나(어쨌든 지금 우리는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만들어 온 문명을 아끼면서 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점을 암암리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 번역본 출간에 때맞춰 진행했던 인터뷰에서 문명에 대한 질문들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내 주변의 동료 과학자들은 대개 "뜬금없이 웬 문명?"이라는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은 나이, 지위, 성별, 혹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언제인가 인문학자들과 함께하는 어떤 모임에서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많은 사람들은 물리학자가 '감히' '문명'을 생각하다니 기특하다는 듯한 격려의 말을 내게 던졌다.

비슷한 일들을 몇 번 겪으면서 나는 한국이 문명국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의 지상과제는 선진국 진입이 돼 버렸지만, 나는 한국이 진정한 문명국가가 되는 것이 거시경제 지표상의 몇몇 기준을 만족하는 선진국에 진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문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보다 나은 삶의 양태"이나 나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독자적인 통찰이 가능한 사회를 문명사회라고 생각한다.)


▲ <지금, 경계선에서>(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쌤앤파커스
나처럼 '불경'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에서>(장세현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가 일종의 21세기형 비급(秘笈)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원제 'Watchman's Rattle'에서 알 수 있듯이 현대 인간 문명의 최전선에서 파수꾼이 보내는 경고음이다.

이 경고음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흥미롭다. 파수꾼 코스타가 보내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류 문명의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정도가 인간 두뇌의 인식이 진화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인식의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는 사회적 복잡성에 맞설 수 있는 '통찰'이라고 하는 진화의 선물이 있어서 기존의 게임 법칙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잠재력이 있다. 통찰은 말하자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순간의 깨달음과 비슷하다. 통찰에 이른다는 것은 "이전까지 간파하지 못했던 여러 요소 사이의 연결고리를 포착할 수 있는 상태"로 갑작스럽게 도약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사회 복잡성과 두뇌 진화의 불균등한 발전이 야기하는 문명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길을 가로막는 데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슈퍼밈(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널리 만연하여 다른 모든 믿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억압을 가하는 모든 종류의 믿음, 생각,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불합리한 반대, 책임의 개인화, 거짓 상관관계, 소통 없는 사고, 극단의 경제학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슈퍼밈을 극복하고 단기적 완화책과 함께 근본적인 치유책을 함께 준비할 것을 주장한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인간 두뇌가 현대 문명의 복잡성을 모두 따라 잡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코스타가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도 <블랙 스완>에서 현대 문명의 복잡성과 이에 뒤처지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고 그로부터 경험주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탈레브나 코스타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인간의 다른 신체적인 한계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물속에서는 몇 분을 버티지 못한다. 세상이 아무리 눈 튀어나오게 빨리 돌아가도 인간의 걸음걸이와 달리기 속도는 그만큼 획기적으로 향상되지 않았다.

인간 두뇌가 현대 문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과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촉발된 두 번째 과학혁명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두 개의 기둥으로 삼고 있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중요해지는 물리적 영역은 인간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거시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상대론적인 효과를 보려면 물체의 속도가 광속(초속 30만km)에 근접해야만 한다. 양자역학의 효과를 확인하려면 원자 수준으로 내려가서 세상을 들여다봐야 한다. 두뇌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신체 기관은 이런 물리적인 영역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인간은 냉정한 자연선택의 결과 도태되고 말았을 것이다.

특히나 양자역학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양자역학이 태동했던 초기에는 양자역학의 출현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던 플랑크나 슈뢰딩거, 심지어 아인슈타인조차도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에 격렬히 반대했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물론 철학자들조차도 왜 인간의 언어는 원자 이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하며 한탄을 했다고 한다.

저명한 물리학자인 레너드 서스킨트는 그의 최신작 <블랙홀 전쟁>에서 양자역학을 이해하려면 아예 자신의 두뇌 신경회로를 완전히 재배선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이는 물리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물리학에 대해 강연을 하거나 글을 쓰면 나는 항상 내용이 어려우니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자들조차도 자신의 뇌신경을 재배선 해야만 한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감각과 인지 능력은 대체로 자신의 신체 크기와 엇비슷한 척도의 자연환경에 최적화되도록 진화해왔다. 따라서 미시 세계를 인간이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양자역학처럼 시간을 많이 들여도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꼭 들려준다.)

비슷한 논리를 약간만 확장해 보면 현대 문명의 복잡다기한 상황을 인간이 단번에 이해하고 통제하는 데에는 진화생물학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코스타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코스타는 이 한계를 극복할 진화의 선물로 '통찰'을 지목했다. 생물학이나 뇌 과학에 대해 문외한인 나로서는 코스타가 현대 문명의 돌파구로 제시한 이 통찰이 얼마나 학문적으로 강건한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다섯 가지 슈퍼밈을 피해가며 진화의 선물인 통찰을 얻는다면, 지금 인류가 이상 기후, 자원 고갈, 테러, 경제 위기 등 현대 문명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지금 우리가 문명사적인 위기들, 자원 고갈이나 이상 기후나 테러리즘 등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그 문제의 해결책을 '통찰'해 내지 못하기 때문일까? 어쨌든 복잡성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서브 프라임 모기지가 여러 단계의 파생 상품을 거치면서 누구의 위험성이 누구에게 얼마만큼 전가되는지를 일일이 추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용에 위기가 생겼을 때 그 모든 체계가 무너질 것이라는 점은 구석기 시대의 두뇌로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중동 문제가 부족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던 시절의 문제와 비교했을 때 그 본질에 있어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는 정도의 통찰을 더 필요로 하는 것일까?

우리가 아직 우리 두뇌의 통찰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없기 때문에, 문명사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통찰을 기다리는 것이 (아무리 갖가지 두뇌 훈련을 한다 하더라도) 과연 좋은 해결책인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그 통찰이라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궁극적인 해결책"의 다른 말이어서, 결국에는 인간이 문명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인식할 수 있는 진화의 선물이 있으므로 문명을 구할 수 있다는 동어반복적 논리에 빠질 수도 있다. (어떤 문제든 궁극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내서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둘째, 설령 우리가 문명사적인 문제들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코스타가 두 번째 슈퍼밈으로 책임의 개인화를 지목하면서 설명했듯이, 대부분의 문제는 시스템적으로 발생한다. 시스템적으로 생긴 문제를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마찬가지로, 문명사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두뇌 개발을 열심히 하고 통찰에 이르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문에서 지적했듯이 미국 에너지부 장관인 스티븐 추의 제안대로 모든 지붕과 도로를 흰색으로 칠한다면 지구 온난화에 획기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말하자면 노벨상 수상자인 추의 통찰이다. 그런데 왜 모든 나라에서는 지붕과 도로를 흰색으로 칠하지 않을까? 시스템적인 문제에 대한 시스템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구조적인 해결책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제아무리 천지를 뒤엎는 통찰이라도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중소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획기적인 기술을 가진다고 해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한국적인 풍토에서는 중소기업의 기술이 대기업의 갖은 압박을 물리치고 온전히 생산력으로 전환되어 안정적인 수익을 내려면 제도와 체제가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코스타가 제시한 다섯 가지 슈퍼밈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이들은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의 전진을 가로막는 오래된 믿음들이다.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슈퍼밈을 제대로 피하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좀 더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태의 명확한 인식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오래된,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타파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에서도 이런 수준의 고민을 요구한다면 또 다시 뜬금없는 욕심으로 치부되는 것일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고 일부 분야에서 세계 1등을 선점한다고 늘 스스로를 자부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문명사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단지 지구 반대편까지 혹은 수백만 년 전까지 관심사를 확대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스스로를 잘 알기 위해서조차도 우리가 인류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라는 굵직한 정치 일정이 한국 사회를 지배할 예정이다. 그래서 예컨대 <진보 집권 플랜> 같은 고민들이 하나씩 세상에 고개를 내밀기 시작할 것이다. <진보 집권 플랜>을 읽으면서 나는 줄곧 간이 되지 않은 곰탕을 먹는 느낌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이 문명사적인 고민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인 것 같다.

앞으로 <진보 집권 플랜 2>가 나오든 혹은 <보수 집권 플랜>이 나오든, 그렇게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은 <지금, 경계선에서>를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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