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Sex)은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고, 복잡하며, 불가사의하다. 지구상의 생명을 이토록 다양하고 풍성하게 이끈 장본인인 동시에 그 생명들이 편을 갈라 지난한 갈등과 반목을 일삼고 때로는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불행의 원천이기도 하다.

성이 지닌 다면적 모습에 매료된 수많은 생물학자, 의사, 심리학자, 인류학자 등이 성의 본질을 밝히고자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성과 관련한 많은 부분들은 비밀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 여성의 성은 때로는 지나치게 비하되고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며 왜곡된 진실 속에서 억압과 찬양의 부침을 거듭해서 겪어야 했다.

실제 여성들의 성 심리나 행동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채(어쩌면 일부러 애써 무시한 채) 오랫동안 (남성) 인간 사회는 그들이 만든 기준과 공식으로 여성들을 재단하고 그녀들에게 성녀와 창녀, 순종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모성과 적극적이고 이기적인 여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했다.

다행히도 20세기 들어 이러한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고 여성의 성을 바로 보려는 (페미니스트들을 포함한) 일군의 학자들의 노력으로 왜곡된 진실들은 차례로 수정되고 그 자리에는 새로이 밝혀진 진짜 진실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10년에 출간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온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나 페미니스트 진화생물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가 쓴 <어머니의 탄생>과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The Woman That Never Evolved)> 등은 과학계 내부에서 여성의 성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급격히 달라졌음을 보여 준 결과물들이었다.


▲ <욕망의 아내>(데이비드 레이 지음, 유자화 옮김, 황소걸음 펴냄). ⓒ황소걸음
여기 여성의 성에 새로운 장을 열어 줄 정도는 아니더라도 멍석 하나는 깔아 줄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미국에서 임상심리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데이비드 레이는 2005년 인터넷을 통해 '핫와이프(Hotwife)'라는 이름 아래 성적 교류를 일삼는 사람들을 접하게 되었다. 주로 동명의, 혹은 거기에서 약간의 변형을 거친 제목을 단 웹사이트들에서 서로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대상을 물색해 '아내 나누기(swinging, 말 그대로 아내를 다른 남자와 성적으로 나누는 행위이다)'에 이르는 이 해괴한 현상은 날로 증가하는 듯 보였으며, 도대체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을 즐겨 하고 있다는 사실에 레이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엄청나게 놀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성적 행동과 관련해서는 이미 너무도 다양한 사례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아내 나누기'에 나서는 사람들(그들은 스스로를 스윙어(swinger)라고 불렀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핫와이프'는 정확하게 어떤 성적 행동을 지칭하는가? 기존에 알려져 있던 '스와핑(swapping)'이나 '개방 결혼(open marriage)', '폴리아모리(polyamory)'와는 다른 것인가? 스윙어들은 성적으로, 정신 병리적으로 문제를 지닌 이들일까? 아니면 인간의 성적 본성 내에 '아내 나누기'는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얻고자 레이는 '아내 나누기'에 나서는 사람들로부터 실제 사례들을 수집하는 동시에 인류학과 진화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문학 작품 등 각종 문헌에서 관련성을 보이는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아 <욕망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레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내 나누기를 하는 사람들(스윙어)은 보통 성, 성 역할, 관계에 있어서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전문직과 경영직에 종사하는 등 소득과 교육 수준에서 모두 평균 이상을 보였다. 또 활기 넘치며 적극적인 성격들을 지녔으며 대개 나이가 많고 자녀를 둔 부부들로서 몇 년에서 몇 십 년의 결혼 생활 끝에 서로에 대한 견고한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성적 모험을 즐기기 위해 '핫와이프'의 세계에 들어선 경우가 많았다.

'욕망하는 아내', '뜨거운 아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듯 채털리 부부와 같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편과 그에 반해 젊고 욕정으로 가득한 아내가 등장하지도 않으며, 매혹적인 아내를 자랑하고자 시종에게 아내의 침실을 엿보게 하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리디아의 왕 칸다울레스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또(!) 생겼다며 젊고 혈기 넘치는 새 남편을 집으로 데려오는 <아내가 결혼했다>의 '인아(손예진)'와 같은 아내도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마약이나 알코올에 흠뻑 취해 즉흥적으로 몸을 섞거나 하늘 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모두가 뒹구는 난교 파티 따위를 상상했다면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실망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남편들은 책을 읽기도 전에 섣불리 아내의 욕망이 어느 날 갑자기 화산처럼 분출해 그녀가 침실 벽을 뚫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아내의 욕망을 지레짐작해 B급 영상물들을 통해 가끔 대리만족을 해 왔던 성적 판타지(스리섬이나 관음증 등등)를 드디어 실천해 볼 기회가 왔다고 만세 삼창을 불러서도 안 된다.

레이가 인터넷 게시판이나 광고 등을 통해 알게 된, 핫와이프를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비(非)일부일처 관계를 지향하는 부부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정적인 일부일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어떤 부부들보다도 서로의 삶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고, 서로가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기다리며, 진정한 합의에 이르렀을 때 정교한 계획 하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남편의 강제는 없었고 대개의 경우 아내가 먼저 제안했으며, 둘 다 흡족해 할 대상자, 특히 남편은 아내에게 위협적이지 않을 대상자를 고르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면담했다. 아내 나누기를 즐기는 사람들은 '스와핑(swapping, 교환하기)'의 경우 단어 자체에서 마치 아내를 다른 남자와 바꿔 쓸 수 있는 물건 취급하는 느낌이 드는 탓에 협조나 연합, 관계, 의사소통의 의미가 더 강하고 핵심적인 '스윙잉'을 사용한다고 대답했다. 레이는 스윙잉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지 않고 상대방의 욕망까지도 충족시키려는 이타적인 동기에서, 그리고 둘이 함께 행복한 삶을 위해 지루해져 가는 부부 생활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려는 노력에서 모험을 감행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모험에 나섰던 부부들 가운데는 기존의 일부일처 관계를 유지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파멸시키고 마는 비극에 이르는 사례들도 많았다. 아내를 나누는 일부 남자들은 아내를 성적 소유물, 자산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권력의 지배자라는 걸 과시하기 위해 마음대로 아내를 내어 준다거나 자신은 다른 남자의 아내를 탐하면서 자기 아내가 새로운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은 참지 못하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기도 했다.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레이는 '아내 나누기'가 모든 인간 남녀에게 보편적이라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또한 '핫와이프'가 부부 관계 개선을 위한 특효약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조사된 개인과 커플, 가족들에서 비일부일처 관계가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듯하게 보였지만, 이러한 비일부일처 관계를 몇 십 년에 걸쳐 추적 조사했거나, 자녀들과 가족 전반에 미치는 전체적인 영향을 탐구했거나, 기존의 일부일처 관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경우와 비교 연구한 사례는 거의 없다.

오히려 레이는 인터넷을 통해 점차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핫와이프'라는 현상을 중심에 놓고, 인간의 성, 그중에서도 특히 인류 역사를 통해 오해와 이해, 억압과 해방을 반복해 온 여성의 성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그리고 부부 관계를 비롯한 남녀 관계를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제대로 알고자 노력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자 한다.

레이가 직접 만나거나 아니면 이메일, 게시판 등을 통해 수집한 핫와이프 경험자들의 사례들이 책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장들의 마지막에 막간 이야기로 등장하거나 본문에 극히 일부 등장한다.). 이미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에서 많이 다룬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 사례들이 빈번히 등장해서 책의 신선도를 떨어뜨리며, 실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핫와이프' 현상을 본격적으로 다루기까지(200쪽 가까이 가서야 '핫와이프'가 드디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너무 많은 분량을 다른 책들에서 언급한 이야기를 재탕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는 점도 단점이다(평소 진화심리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이 책 전반부는 그냥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된다).

게다가 본인의 전공 분야가 아닌 영역들에서 관련 자료들을 그러모으다 보니 서로 배치되는 주장을 지지하거나 펼치고, 또 해석에 있어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자의 성적 질투가 부성 불확실성에 대한 안전장치로서, 즉 자신의 배우자가 낳은 아이가 틀림없이 자기 자식일 확률을 높이기 위해 진화했다는 이론을 지지하다가(81쪽), 뒤에 가서는 아내를 놓고 성적인 질투심을 느끼는 일은 산업화 이전 문화에서는 흔치 않았다며 질투가 진화된 심리 기제라는 앞에서의 얘기와 배치되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182쪽).

스윙어들이 대개 나이가 많고 현재 관계에서든, 아니면 이전의 부부 관계에서든 이미 자식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는 해석을 내린다. 레이는 남자는 생식을 이미 끝냈고,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더라도 남편에게 부양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남녀 모두 자식을 낳은 다음에 스윙잉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레이가 줄기차게 차용하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일단 남자의 생식은 거의 관이 덮일 때까지 계속되며(설 연휴에 한 방송사에서 주최한 '동안 선발 대회'에서는 11살의 아들을 둔 93살의 할아버지가 나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다른 남자의 아이가 확실한 데도 그 아이의 부양을 책임지는 아버지는 진화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굳이 진화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오히려 어느 정도 자식을 키워 놓아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이는 정말 엄청난 부담이다!)이 덜하고(즉, 혹여 상대가 배신할지언정 나의 번식 성공이 완전히 실패할 일은 없다), 게다가 여성은 번식 연령의 한계에 다가가고 있어 새로 아이를 가질 확률이 낮아지고 있는 상태인 탓에(즉, 남자로서는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올 확률이 낮아지는 지점에 이른 셈이다), 서로가 심적 부담 없이 스윙잉을 할 수 있게 된다라고 설명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물론 성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행동과 마음에 진화의 렌즈를 들이댈 수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모든 것이 적응적이다!"라고 외쳐 대는 진화 이론가도 없다. 페미니스트 진화생물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의 말처럼 인간의 성이야말로 "본래의 범위를 넘어 문화의 중심으로 옮겨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진화를 넘어서는 섹스의 심리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이 사실은 진화를 넘어서기는커녕 줄기차게 인간 남녀의 성을 진화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설명하려 한다는 것도 안타까운 점이다.

그래도 군데군데 등장하는 인류 역사나 문학 작품들에서 뽑은 '핫와이프' 사례들은 무척 흥미롭다. <스타십 트루퍼스>,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등으로 유명한 과학소설(SF)의 거장 로버트 하인라인가 두 번째 부인과 개방 결혼을 한 나체주의자이며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담은 <낯선 땅 이방인>이 이후의 폴리아모리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거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일부일처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부인들을 꼬드기는 재주가 뛰어나 그 남편들인 당대의 재력가나 정치가들 여럿을 오쟁이 진 사내로 만들었다는 등 책 속에 등장하는 바람 난 남녀 얘기만으로도 '침대 위의 역사'라는 책 한 권이 나올 법하다. 핫와이프나 쿠콜드, 폴리아모리, 트로일리즘뿐만 아니라 BBC(방송국 이름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BDSM, '불', '섭' 등 일반적으로는 접하기 힘든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행동 양식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성과 관련한 우리 사회 인식의 변화를 입증하듯 최근에는 <재미있는 섹스 사전>이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욕망의 아내>는 <재미있는 섹스 사전>보다는 풍부하지만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만큼 도발적이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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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우먼 김지선은 최근 넷째 아이를 출산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다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녀가 요즘 홈쇼핑 방송에 나와 팔고 있는 상품은 다름 아닌 '바르면 살이 빠지는 크림'이다. 몸매가 확 드러나는 쫙 달라붙는 핫팬츠와 민소매 티를 입고서 위풍당당하게 클로즈업 되는 그녀의 몸은 놀랍긴 했다. 잘 다듬어진 복근과 탄탄하게 다져진 허벅지, 적당히 살이 잡히지만 매끈해 보이는 데는 전혀 지장 없는 팔뚝까지, 출산한 지 서너 달밖에 되지 않았다는 그녀는 출산 전의 모습보다 더욱 건강하고 날씬해 보였다.

문제는 셀룰라이트라고 했다. 여자의 체내에 축적된 지방 덩어리가 여자의 바디 라인을 망가뜨리고 있으며, 울퉁불퉁해진 팔뚝과 허벅지, 뱃살을 '보정'하기 위해 그 크림을 바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쇼호스트는 쉴 새 없이 "귀찮은 마사지 없이 바르기만 하면 탱탱하고 탄력 있는 바디!" "바르면 후끈후끈한 이열치열 셀룰라이트 관리"를 강조하며 노벨 의학상 수상자도 울고 갈 멘트를 날려댔고, 김지선은 직접 바르는 시연까지 했다.

여자 연예인을 동원해 미용 용품을 파는 건 아주 흔한 일이라 이 경우가 그리 특별할 건 없다. 그러나 살 빠지는 크림을 팔고 있는 출산한 지 석 달된 다산왕, 그것도 이미 1978년 독일의 피부과 전문의가 여성들 체내에 축적된 지방질은 근본적으로 정상이라고 했던 그 셀룰라이트가 문제라며 잘 다듬어진 복근과 팔뚝을 팔고 있는 다산왕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이 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출산율 최저라는 한국 사회에서 넷째 아이까지 출산한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애를 낳자마자 군살이라고는 개나 줘버린 몸매로 나타나 살 빠지는 크림을 팔고 있는 그녀의 수고스러움을 어찌 해야 하나. 가정과 국가를 위해 애는 낳되, 애를 낳음과 동시에 출산의 그 어떤 흔적도 깡그리 없애 버려야 하는 이 잔인한 시스템! 몸짱 다산의 여왕과, 그녀가 파는 정체불명의 크림에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대박의 판매 행렬에 동참한 구매 여성들이나, 모두 여성에게 부과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응하느라 결코 만족스러움이란 없는 외모 가꾸기에 터무니없이 많은 돈과 시간과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출산 전의 몸매를 회복하려는 한 개그우먼의 노력과 그 '노하우'를 배워보겠다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외모 가꾸기에 정성을 들이는 여성들을 허상을 쫒는 이들로 비난하자고 치자면,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은 한국 사회에서 몇 안 될 것이다.

여자 연예인들은 출산하고 나면 자기의 몸매를 포착하는데 더욱 집요해진 카메라의 앵글을 피할 수 없고 혹독한 다이어트에 연예 활동의 생명을 건다.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뉴스 앵커나 정치인 등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여성들이 통과해야 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매우 가혹하다.

선거 때마다 언론은 예쁜 여자 정치인을 '정치 얼짱'이라 치켜세우며 정책이나 지향하는 가치보다 누가 누가 더 예쁜가를 논하기 바쁘다. 이들은 쉽게 타깃이 되는 여성성을 제거한 명예 남성이 되거나 남성 어른들의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고분고분한 여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다. 공인이 아니어서 TV에 얼굴 나올 일 없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직장이나 학교, 심지어 가정에서도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즈음에서 의문이 든다. 100년 전, 혹은 50년 전에 비해 여성들은 스스로의 열띤 노력으로 보다 많은 영역에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여성의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은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외모 지상주의는 성별과 연령에 상관없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고, '외모는 경쟁력'이라는 외모 지상주의는 잘 가꾸어진 외모가 개인의 돈벌이와 성공에 필수적이라 독려한다.

외모가 사람을 평가하는 명확한 기준이 되고 그 기준에 의해 명확한 차별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외면할 수 없는 지금, 왜 그에 대한 문제의식과 저항은 드문 것일까? 여성운동이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다른 불평등과 비교했을 때, 왜 외모에 관한 불공정은 거의 개선되지 못했을까?


▲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데버러 로우드 지음, 권기대 옮김, 베가북스 펴냄). ⓒ베가북스
최근 번역된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The Beauty Bias)>(권기대 옮김, 베가북스 펴냄)을 통해 데버러 로우드는 외모에 관한 관행들이 우리 삶을 끔찍하게 제한하고 있지만,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거나 그 차별의 정황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외모 차별이 시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법대 교수인 저자는 외모에 관한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방대한 양의 미국 법원 판결을 검토하면서 외모 차별을 개선할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한다.

로우드는 외모에 대한 편견이 사회·문화 전반에 확산되어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 여성의 90%는 외모를 자신의 이미지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젊은 여성의 절반 이상은 비만한 몸을 가지느니 차라리 트럭에 깔리는 편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한다. 생물학적 진화론은 건강과 다산의 징표로서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강화하고, 과학의 기술과 진보는 '자아의 개선'이라는 기회를 창조하며 '더 나은 자신'을 만들라고 부추긴다. 언론과 광고는 마르고 예쁜 여성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전파하면서 여성들의 불안감을 조장하고 자존심을 팔아먹는다.

로우드가 제시한 방대한 자료들은 외모가 잘 가꾸어진 여자는 취업과 승진 등 직장 생활에서 잘 나갈 확률이 더 높고, 결혼 시장에서 높은 경쟁력을 구가하며 경제력 있는 남편을 만날 가능성도 높아지며, 대인관계가 더욱 원만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일까? 사실이다.

왜 그럴까? 복잡할 것 없다. 사회가 그런 여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굳이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간단한 '팩트'를 환기하기만 하면 된다. 상류층 남성일수록 능력 있는 여자보다 외모가 잘 가꾸어진 여자를 선호한다. 잘 나가는 남편 옆에서 최고로 잘 꾸며진 외모로 대중 앞에 서는 '트로피 아내'들을 보라.

또 70%의 사람들은 뚱뚱한 여자들은 자기 통제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고 믿는다. 비만 여성은 게으르고 의지가 약하며 자기 삶을 즐길 줄 모르는 구닥다리로 취급받고 이는 자연스럽게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덕분에 "다이어트는 자신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니 "당신은 새로운 인생을 살 자격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광고하는 다이어트 산업은 한국에서만 1조5000억 원, 전 세계적으로 400억 달러의 거대 시장으로 발전했다.

외모와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어떤 신뢰할 만한 연구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여전히 외모가 잘 가꾸어진 사람을 채용하고 싶어 한다. 최근의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기업 인사 담당자 중 87%가 채용 시 지원자의 인상을 고려하고, 68%는 지원자의 외모 때문에 감점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지원자의 인상을 고려하고 사진이 부착된 이력서를 요구하는 기업의 태도로 인해 취업 지원자의 85%는 외모가 취업의 당락을 결정한다고 보고 있다.

외모로 인한 고용 차별을 받았다는 진정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취업 준비생은 적극적으로 외모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대신, 성형수술을 하거나 피부 관리를 받고 이미지메이킹 학원에 돈을 쓰면서 '자기 개선'에 힘쓴다. 취업 시 외모가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은 남성들도 예외가 아니지만, 여성은 훨씬 더 가혹한 외모의 기준을 요구받는 것이 사실이다.

외모가 가장 큰 자원이 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여자들은 뼛속까지 알고 있다. 여자에게 외모는 인격이고 피부는 계급이며, 하얀 치아는 자존감이라는 것을. 골이 패일 정도의 풍만한 가슴은 섹시함의 상징이고 털 한 올 없이 매끈한 다리는 젊음의 상징이며, 셀룰라이트 없는 팔뚝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표식이고, 가지런히 정리된 손톱은 세련되면서도 단아한 여성이라는 이미지이다.

현대 여성은 얼굴만 예뻐서도 안 되고 전체적인 몸매와 신체 구석구석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S라인, V라인, Y라인 등 신체 부위별로 가이드가 제시되고 가장 아름답다는 사이즈를 위해 가슴에 실리콘을 넣고 얼굴 턱뼈를 깎으며 복부의 지방을 흡입해낸다. 몸의 구석구석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더욱 디테일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조 속눈썹을 붙이는 시술을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받고, 도톰한 입술을 위해 보톡스를 맞으며 하얗고 정갈한 손톱을 위해 네일아트 숍을 찾는다. 여자들은 자기 몸을 관통하는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만족스럽지 않은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느라 뼛골이 쑤신다.

최근 들어서는 '젊음'의 코드가 아름다움의 기준과 확고히 결합하면서 여성들을 더욱 고단하게 한다. "20대여, 영원하라!" "너는 영원히 젊을 줄 아느냐"고 호통 치는 화장품 광고가 등장할 정도이다. 화장품 광고는 그 시대 여성들이 가장 갈망하는 욕구를 판다. 정확히 표현하면, 매력적인 여성이라면 특정 욕구를 죽도록 갈망해야 한다면서 새로운 욕망을 생산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욕망이 바로 '영원한 젊음'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젊음을 유지하는 여자라고, 젊은 피부는 뭇 여성들의 시샘을 받으며 모든 남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권력이 된다고 말한다. 도대체가, 나이 들수록 몸도 늙어가는 자연의 섭리가 여자의 삶에는 관철되지 않는다. 여자의 나이 듦이 여성성의 상실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여자들이 계속 '여자'로 남아 있기 위해서는 흐르는 세월과 싸워야 하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가담해야 한다. 여성들은 늙음에 대한 어떤 보호막도 없는 사회에서 생존하는 법을 나름대로 체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듯 미디어와 광고, 과학과 테크놀로지, 미용 산업의 이해관계와 뿌리 깊은 문화적 관행으로 인해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은 갈수록 강화되고 있고, 모든 편견이 그렇듯 이는 고스란히 차별로 이어진다. 로우드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의 12~15%는 외모로 인한 차별 대우를 경험했다고 대답했으며, 이런 비율은 남녀 차별(12~19%)이나 인종 차별(12%), 연령 차별(9~14%) 등 다른 형태의 차별을 경험했다는 사람들과 맞먹는 수치다.

외모 차별은 주로 회사의 이미지가 직원의 '잘 가꾸어지지 않은' 외모로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업주의 우려와 편견을 반영한다. 몸무게 109㎏의 에어로빅 강사 제니퍼 포트닉은 피트니스 회사로부터 프랜차이즈를 거부당했고, 간호학교에 다니던 새런 러슬이라는 학생은 비만으로 퇴학을 당했다.

보르가타 호텔의 칵테일바에서는 '보르가타 아가씨'라 불리는 웨이트리스들에게 체중의 상한선을 두고 정기적으로 몸무게를 체크하라고 요구한다. 이때의 관건은 과연 개인의 몸무게가 그에게 할당된 업무를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요건인가 하는 점이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고객의 요구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도 논란거리다.

2010년 한국에서도 인터넷 포털사이트 프리챌이 전략기획실 직원을 채용하면서 '경력직 승무원 모집' 채용 공고를 내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프리챌은 지원 가능 자격으로 '승무원과 미인 대회 출전자, 모델, 탤런트, 아나운서 경력' 등을 포함했다. 마케팅과 대외 협력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다분히 외모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음직한 사람을 채용한다는 공고에 많은 누리꾼이 분노했다. 이는 '남녀 고용 평등과 일 · 가정 양립 지원 법'에도 어긋나는 행태였지만 프리챌은 채용을 강행했다. "(미인대회 출전자나 모델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사회가 키운 인재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홍보와 대외 협력을 잘 수행할 것이라 여긴다."는 회사 방침을 '역발상'이라 선전까지 했다. 회사측은 애초 업무와 외모의 관련성을 파악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고, 외모가 잘 가꾸어진 여성이 일도 잘 할 것이라는 확고한 편견에 편승하면서 차별의 기수를 자처했다.

로우드는 이런 외모 차별을 적극적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외모 차별이 평등한 기회와 개인의 존엄이라는 원칙을 거스르며, 그러한 편견은 인종과 민족, 계급, 연령, 성 등 다른 불평등을 더욱 고집스럽게 만들고, 더 나아가 자기표현의 권리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녀는 앵글로-색슨 중심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에서 좀 더 다양하고 포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을 고취시켜야 하며, 외모로 인해 차별 대우를 하거나 낙인을 찍는 일을 줄이고, 그저 겉모습이 아니라 건강을 강조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북돋우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 법은 외모 차별 금지를 확대하고 사이비 과학을 동원해 여성을 현혹시키는 관련 산업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사회가 여자의 건강을 위협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건강하고도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갖기 위해, 그녀의 전략은 매우 절실하다.

로우드의 제안에 덧붙여, 여성 개인의 차원에서 일으키는 변화는 외모에 대한 관행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요건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따르지 않는 것은 많은 자원을 포기해야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요즘 미용용품 회사들이 여성 스스로의 자주적인 결정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 메시지를 마케팅에 끌어들이면서, 여성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외모가꾸기에 몰입한다는 '착시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끝없이 여자를 벼랑으로 내모는 아름다움의 욕망이 과연 충족될 수나 있을까? 다리털을 깎고 가슴 성형을 하는 것이 과연 '자기 몸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여자의 권리'를 표현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진실로 '해방된 여성의 독립적인 선택'으로서 여성들을 자존감 있는 삶으로 이끌 수 있는가?

여성을 오로지 몸과 외모로 판단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대안적 언술과, 그 사회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여성 개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사이에는 여전히 큰 괴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로우드가 지적하고 있듯이 "수많은 페미니스트들 또한 개인적인 이해와 정치적인 공약 사이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불편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 딜레마를 자기 삶에서 어떻게 극복하는가는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몫이다. 외모 가꾸기에 대한 여성의 행위를 오로지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으로 치부하는 지금의 시선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모를 가꿀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여성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개인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도 옳지 않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 안의 권력을 성찰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보다 다양한 관점을 만들자는 것이지, 특정한 아름다움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비난하거나 내몰자는 것은 아니다. 여성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대신, 외모 차별을 감행하는 기업을 고발하고 불매 운동을 벌이며,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는 다이어트 식품과 성형수술에 대한 위험성을 공유하는 전략이 훨씬 믿음직스럽다. 공중파에 생중계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자들을 줄 세우는 미인 대회 현장에 모여 애지중지하는 보정 속옷을 태워버리는 브라버너(braburner)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로우드의 지적대로 개인이 이 세상을 향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방식은 그의 핵심 가치와 문화적 정체성을 암시한다. 나의 외모는, 내가 어떤 가치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여자를 외모와 몸으로 환원시키는 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날마다의 외모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아무런 탈출구 없이 외모 지상주의에 포박되어 있는지, 아니면 사이즈나 몸무게 따위와는 상관없이 꿋꿋하게 건강을 추구하고 있는지, 우리의 외모는 매순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편견과 도전과 저항이 버무려져 있는 내 몸이 전쟁터이듯, 내 외모도 전쟁터이다.

개인이 시작한 싸움은 아니지만 개인을 모조리 동참시키고 있는 이 싸움에, 과연 나는 어떤 전략으로 승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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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를 뜨겁게 달구더니, 각종 포털사이트의 메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이내 9시 뉴스에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평생 숙원이던 '인기 가수'가 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

세상을 뜨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재능이 넘치지만 행운이 넘치지는 못했던 한 음악가가 남긴 책 <행운아>(북하우스 펴냄)의 제목을 두고 –자신의 노래 '나는 행운아'와 같은 제목이다-역설적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진원은 분명 행운아다.

공연장에서, 그보다 더 자주 술자리에서 얘기를 나눈 이진원은 그것이 말이건 음악이건 기타건 자신의 얘기를 하며 남루한 미사여구를 붙여본 적 없다. 그 자리가 어디건 상대가 누구건 하고 싶은 말을 아낀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과장하거나 꾸며서 한 적도 없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는 소위 '짭새' 사태, 그가 지난해 5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지나가는 경찰차를 보고 '짭새가 지나간다'고 말했다가 서교파출소에 연행됐던 사건에서도 마지막은 그날 한 번밖에 쓰지 못하고 잃어버린 LG트윈스의 새 모자를 찾아 달라 하지 않는가!

절제되어 있거나 과장되어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진원의 그런 화법은 때로 지나치게 낯선 것이어서 그를 가까이 하기 힘든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사실 그 배경에는 '술'이라는 촉매제가 자리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음악을 하면서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은 자신의 음악을 '멋지게' 들리도록 포장하거나 뭔가 있어보이도록 하는 현학적 방법들을 쓰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조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평소 사람들에게 얘기하듯, 인터넷에서 자신의 얘기를 글로 올리듯, 이진원의 음악은 그렇게 이진원스러웠다. 시원시원한 멜로디라인과 그만큼이나 호쾌한 목소리, 담백하고 간결한 편곡 위에 감출 것도 없이 솔직하게 풀어가는 노랫말. 달빛요정만루홈런의 음악이 주는 감동은 어쩌면 그의 음악적 재능이라기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음악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행운아>(달빛요정역전만루홈련 지음, 북하우스 펴냄). ⓒ북하우스
그리고 <행운아>라는 책이 남겨졌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눈물겹게 반갑기도 하고 참 불편하기도 했다. 이진원이 평소 하던 말투가 그대로 살아있다. 역시 책의 출간을 위해 글을 쓴 게 아니라 자신의 말투 그대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고 있었다. 지금 바로 옆에서 '빠르고 더듬는' 말투로 얘기하는 듯해서, 그리고 언제나 하던 그 얘깃거리들이라서 반가웠지만 그를 아직 완전히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나와 동료들에게는 더 이상 이 친구를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주었기 때문에 동시에 불편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책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프롤로그조차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실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퇴고를 거쳐 이진원이 처음 원했던 혹은 출판사가 원했던 방향으로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말투와 음악이 그랬듯 이 책도 어쩔 수 없이 '이진원스러운' 그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음악, 영화, 야구, 만화, 술, 음식 등 이진원이 항상 떠들어 대고 가사의 소재로 썼던 내용들이다. 단지 평소의 말 속에서 파편처럼 튀어 사라지거나 제한적인 양의 가사에서 잘려나갔던 부분이 고스란히 않고 담겨 있어서 마치 그의 사담을 녹음해서 재생하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음악 하는 사람끼리 사석에서도 쑥스러워서 잘 하지 못하는 사적인 감상들을 밝혀, 평소 친분이 있던 사람들조차 그의 음악에 대해 재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곡을 만들기 시작할 때의 느낌, 완성해 가는 과정,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뒷얘기들은 음악 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있을 때 이야기 소재가 되지는 못한다.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이의 음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 경우야 흔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방의, 혹은 자신의 음악을 소재로 삼는 것은 드물뿐더러 요리사들끼리 서로의 요리에 대해 평하거나 자신의 요리를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진원은 이런 일반적인 경우에서 예외에 가깝긴 했다.)

물론, "조금 더 밝은 음악을 하는 게 어때?"라거나 "라이브 공연 때는 이런 식의 편곡이 더 좋겠어" 따위의 가벼운 조언들은 언제나 할 수 있었지만. 이진원이 이 책에서 터놓고 밝힌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들이 만들어진 배경과 그것을 만들 때의 감정 등은 음악 하는 동료로서도 매우 반갑고 소중하다.

<행운아>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야구라는 소재는 이진원과 내가 가장 많이 얘기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야구팀을 응원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각별하다. 특히 그 둘이 야구에 완전히 미쳐있는 사람들일 때, 그것도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팀에 푹 빠져 있는 경우일 때, 게다가 그 응원팀의 성적이 몇 년간이나 좋지 못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LG트윈스에 대한 이진원의 절절한 사랑은 자칭 '사랑타령'이라 불렀던 그의 다른 사랑 노래 혹은 그 이상으로 깊다. 2011년 LG트윈스 4강 진출 기원 공연을 같이 해보자했던 만큼, 더 이상 그와 함께 LG트윈스의 성적을 두고 한탄하거나 유망주들을 분석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외롭다.

이 책에 담긴 이진원의 일상과 취향은 마치 영상을 보는 것만큼이나 생생하다.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노래가 그렇듯 거침없이 풀어나간 글귀들이 어느 용감한 투수의 직구를 닮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불쌍하게 보는 시선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조롱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생각은 책의 곳곳에서 아주 쉽고 솔직하게 발견된다. 혹여 이진원의 죽음을 '가난한 음악가의 비참한 죽음'이라는 포장하기 편리한 미디어의 뉴스로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편견과 선입견은 그의 직구 앞에 어이없는 헛스윙으로 무너질 것이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시간 예술이다. 시간이 한번 지나고 나면 그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이것이 아쉬워 사람들은 그 음악을 남겨놓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냈다. 하지만 그 어떤 첨단의 방법으로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라이브 공연을 다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진원은 자신의 앨범들과 함께 이 책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우리가 그를 만날 수 있는 길은 그 앨범 속에 담긴 노래들과 이 책에 남겨진 그의 얘기들뿐이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고 난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그의 글을 읽으며 그를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직구를 던지던 용맹하고 늠름한 마운드 위의 한 투수로. 단 한 번도 비겁한 변화구를 용납하지 않고 세상이 뭐라 떠들건 자신만의 직구를 던지던 투수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이진원은 행운아다. 그리고 그 행운은 오롯이 자신의 작품이다.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 보석처럼 빛나던 아름다웠던 그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절룩거리네' 중)

(☞라이브 영상 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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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기술사학회의 덱스터 상을 수상한, 미국 럿거스 대학 교수 마이클 에이더스의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 과학, 기술 그리고 서양 우위의 이데올로기(Machines as the Measure of Men : Science, Technology, and Ideologies of Western Dominance)>(김동광 옮김, 산처럼 펴냄)가 번역돼 나왔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유럽인들이 과학적 사고와 기술 혁신을 통해 성취한 자신의 물질문화가 세계를 바라보는 절대적 준거 틀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과학, 기술은 서양인의 '비서양'에 대한 인종 우월 의식과 식민지 정책을 뒷받침하는 자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계몽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 등의 지적 담론을 토대로 서양과 비서양을 구분하는 서양 우위의 지배 이데올로기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기존의 과학, 기술과 관련된 역사서 중에는 과학, 기술이 현대 사회에 끼친 악영향을 개괄하거나, 과학, 기술을 오용한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불러온 참사를 폭로하는 것들이 많았다. 또, 과학, 기술은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데에는 공통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사회, 제도, 문화 등과 분리된 학문적 이론이나 기계에 관한 유용한 지식으로서, 과학이나 기술은 더 거시적인 사회 제도나 정책에 관련된 행위자들이 필요에 따라 동원 혹은 거부할 수도 있는 도구적 수단으로 간주하곤 했다.


▲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마이클 에이더스 지음, 김동광 옮김, 산처럼 펴냄). ⓒ산처럼
반면, 에이더스는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에서 역사적으로 유럽인에게 과학,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기준 그 자체로서 이 세계를 서양과 비서양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이들 관계를 문명/야만, 문화/자연, 이성/감정, 고등/열등, 진보/정체 등으로 규정했고, 특히 16세기 서양의 근대 과학혁명 이후 유럽인의 위계적 서열 의식은 과학, 기술이 가져다 준 물적 풍요와 여유 속에서 고착화됐다고 주장한다. 또, 비서양의 과학적 사고와 기술에 대한 유럽인의 평가가 정확했는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비서양에 대한 유럽인의 평가 기준과 방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추적하고, 이것이 시대별 서양의 지배 이데올로기 형성이나 정책 수립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에이더스는 홀과 레이턴의 개념을 결합해, 과학은 지식 획득을 목표로 근본적인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으로, 기술은 좀 더 실제적이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환경에 실제적 통제를 가하려는 노력하는 것이라고 광의적으로 규정한 후, 근대 서양 과학, 기술이 시작된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중·상류층의 해외 탐험가, 선교사, 사회이론가, 식민지 관리들이 남긴 1차 문헌과 이와 관련된 각종 보고서와 기사,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와 중국, 인도의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과 태도를 중점적으로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저자는 유럽의 산업혁명 이전, 산업화 시대, 20세기, 이렇게 크게 세 시기로 유럽인의 비서양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변화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먼저, 산업혁명 이전, 아직 외국에 나간 유럽인 중 대다수가 자연계에 대한 서양인들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과학적 발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을 시절, 유럽인들은 우선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종교, 사회·정치 조직, 문화적 발달 수준으로 평가했고, 과학과 기술은 부차적인 수단 정도로만 이용했다고 한다.

이후, 17세기 후반 계몽주의 시대에 뉴턴 과학을 통한 광학, 역학, 수학 등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유럽의 귀족 출신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이 고취되면서, 유럽인들은 과학적 사고 능력으로 비서양보다 훨씬 우월한 문명을 공유하기 시작했다고 믿었다. 해외 식민지 정책에 대한 논의 역시 이런 믿음을 기반으로 진행되었다. 이 연장선 상에서, 18세기 유럽의 많은 지식인은 아프리카인의 과학적 사고 능력을 문제 삼으면서 노예 무역 폐지에 반대했다.

그러나 저자는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이 아무리 높은 수준의 과학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과학적 지식을 자유롭게 표현할 자유와 사회에 적용할 정치 제도와 사회 구조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면, 과학지식과 기술 발전과 무관하게 그 사회를 열등한 문명으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당시 유럽인들은 상급 관리가 부패, 무능력하고, 일반 국민들이 가난을 성토하던 중국을 계몽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19세기 초, 산업화가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점차 확산되고, 수많은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과학 탐구와 기계력을 적용하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관점이 팽배해지면서, 유럽인들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무자비한'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 존재를 그 외의 자연보다 우월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에 과학, 특히 기술이 주관적 편향에 가장 물들지 않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척도라는 인식이 강화되면서, 인간 문명은 금속 대 나무, 기계 대 인간이나 동물의 힘, 과학 대 미신과 신화, 합성 대 유기, 진보 대 정체, 산업 사회와 산업화 이전 사회로 이분화됐다. 이런 인식은 비서양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mission) 이데올로기에도 투영돼서, 유럽인들은 서양의 기계를 아시아의 쇠퇴한 문명을 소생시키고 아프리카의 미개한 민족들을 향상시킬 핵심 요소로 간주했고, 진화론적 관점이 확산되던 19세기 중·후반에는 역으로 인종주의 관점에서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입증해 줄 과학적 증거를 찾으려 했다.

마지막으로, 20세기와 관련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과학, 기술을 척도로 인간 가치를 판단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기계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과 과학 탐구와 기술 혁신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현실 앞에서, 유럽인들은 이성에 대한 통제와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 반드시 인류의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신념을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이와 관련해 에이더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례 없이 많은 과학, 기술이 동원되면서 생겨난 참호전에 대한 유럽인의 참혹한 경험에 주목했다.

그러나 에이더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이 과학과 기술을 토대로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형성했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유럽인의 문명화 이데올로기는 지배적 지위를 상실했지만, 그 속에 내재된 과학, 기술이 세계를 가늠하는 절대적 척도라는 서양인의 믿음 그 자체는 존속됐다고 말한다. 당시 미국은 합리적인 자원 관리, 과학과 기술을 적용한 대량 생산, 인간 행동 연구에 과학적 원리를 적용시켜서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이룩했었다. 더욱이 양차 세계 대전 사이, 근대화된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기술 혁신을 통한 기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형성되면서, 미국의 근대화론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양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에이더스는 이러한 시대별 과학, 기술과 서양 지배 이데올로기의 관계 분석을 토대로, 지금의 아프리카, 아시아의 과학기술 개발은 서유럽이 개척한 과학 산업 경로가 아닌, '적정 기술(appropriate technology)'과 같은 '또 다른' 제3의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비서양은 지난 500년간 서유럽에서 개발한 과학기술 방식으로는 서양 우위의 신식민 지배, 문화식민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할 수 없고, 막연한 반(anti) 과학기술주의 또한 적절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게 그 이유다. 그래서 에이더스는 선진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성취, 잠재력, 인간 가치에 대한 과학과 기술과 같은 척도를 일방적으로 이전하는 대신, 과학기술이 도입될 지역 공동체의 요구나 생태적 제약에 맞추어 기술의 규모나 성격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에이더스의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는 과학, 기술이 세계를 인식하는 절대 기준치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접한 유럽인들의 비서양인에 대한 인식과 문화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화했고, 과학, 기술이 서양 우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미친 영향을 시대별, 국가별로 잘 정리했다.

그러나 분석은 여기서 멈춘다. 유럽인들의 비서양인들에 대한 인식과 태도, 이들이 동원한 과학, 기술 척도가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았다. 물론 이 연구가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서 얻어진 결과이고, 저자 스스로도 이런 평가가 책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라고는 했지만, 만약 이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조사했다면 보다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 책에서 중요 자료로 삼고 있는 1, 2차 문헌 중에는, 문헌에 언급된 논의가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느 특정 개인의 생각만을 기술한 것인지 명확치 않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불문명한 자료 사용은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역사적 패턴의 현실성(reality)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물론 저자가 언급했던 것처럼,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유럽인 저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보다 세심한 자료 선별 작업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한다. 더불어, 당시 노예 무역을 했거나 실제로 비서양인을 억압하고 지배했던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들이 연구에 좀 더 포함됐더라면, 보다 현실이 잘 반영된 연구가 됐을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에이더스는 유럽인과 비서양인 사이에서 물질적 조건과 관찰에 영향을 준 문화적·이념적 환경이 복잡하게 교류하고 있고, 저자는 바로 이런 복잡한 교류 속에서 지난 500년간 유럽인의 비서양인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애초 의도와 달리 전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병렬적으로 배치해 묘사한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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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새벽같이 일어나 뇌졸중으로 누워있는 남편이 먹을 밥을 차려놓고 집을 나선다. 인근 대학에서 청소 일을 하는 김 씨에게 새벽 시간은 1분1초가 아쉽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마을버스를 흔히 이용하지만 새벽 시간엔 기다리느니 빠른 걸음으로 내려간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을버스 없이 오르막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캠퍼스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바닥을 꼼꼼히 쓸고 닦아야 하는 김 씨에게는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거대한 공간이다. 일을 마치고 시장을 들러 집으로 돌아오면 한 눈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집에서 피곤한 몸으로 다시 '집안' 일을 시작한다.

한편,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이 씨는 아침에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휘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한다. 같은 가격이면 넓고 여유 있는 집이 좋아 몇 년 전 신도시의 아파트 분양을 받아 살고 있다. 아파트 단지 안은 각종 편의 시설에 숲까지 우거진 거대한 세상이다. 직장까지의 거리가 멀어지긴 했지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니 출퇴근길 운전이 그리 피곤하지는 않다.

이 씨는 강의 준비에 여유가 생기면 종종 시간을 내 미술관에도 들른다. 아무래도 괜찮은 전시들은 서울에서 많이 열리니, 도심의 교통 체증이나 주차 문제가 불편하기는 하지만 서울에 나왔을 때 시간을 내는 편이 낫다.


▲ <도시에 대한 권리>(강현수 지음, 책세상 펴냄). ⓒ책세상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이 두 사람에게 도시는 어떤 곳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에게 도시는 무엇인가. 도시를 보라, 권리로 말하라. 강현수의 <도시에 대한 권리 : 도시의 주인은 누구인가>(책세상 펴냄)의 내용은 이렇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펼치기 전에 각자에게 도시는 무엇인지 묻는 것이 좋다. 저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가 주장한 '도시에 대한 권리'를 소개하며 당신의 도시를 한 번 더 살펴볼 것을 요청한다. 이것은 사상이나 이론이기보다는 호소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상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편이 낫다.

김 씨에게 도시는 어떤 곳인가. 걸어 오르기 힘든 구불구불한 골목의 달동네고 거대한 캠퍼스, 다닥다닥 노점이 붙어 앉은 재래시장, 몸 한 번 돌려 누우면 벽에 손이 닿는 방이 도시다. 반듯하게 각이 선 신도시와 단지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주상복합아파트,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는 도로와 구두 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리는 미술관을 도시로 만나는 이 씨의 도시와 김 씨의 도시는 다르다.

당연히 각자가 말해야 할 권리도 다르다. 김 씨에게는 남편이 다시 갑자기 쓰러지면 집 앞까지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는 골목이 필요하고 편리한 대중교통 시스템이 필요하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내지 못하니 기분 좋게 숨이라도 쉬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필요하고 가끔 뉴스에 나오는 청소 노동자들의 얘기를 조금 더 자세히 찾아볼 수 있는 인터넷 접근이 필요하다. 집 가까운 곳에 문화센터라도 있다면 김 씨는 가끔 영화를 보거나 몇 가지 전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씨에게 필요한 것은 더욱 넓은, 더욱 직선으로 뚫린 자동차 도로와 더욱 넉넉한 도심 내 주차 공간이다. 어쩌면 이 씨에게는 굳이 '권리'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쭉 뻗은 도로, 충분한 주차 공간 등은 이미 도시가 변화하고 있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도시는 계속 변한다. 다만 사람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변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김 씨의 바람은 재개발에 대한 바람으로 읽힐 수도 있다. 도시 계획의 결정권자들은 장기 전세 주택을 짓는다며 김 씨의 동네에 개발 사업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재개발이 되면 도로는 반듯하고 넓어질 것이고 문화센터 하나쯤은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김 씨가 개발이 되고 난 후 그 동네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방식의 개발이라면 말이다.

김 씨는 또다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올라야 하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거나 아예 도시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 도시는 김 씨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권리로 말하라는 것이다. 도시를 전유하고 도시 계획에 참여하며 도심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으면서도 차별화된 공간을 생산할 수 있는 권리의 언어가 김 씨에게 필요하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인권의 정치'와 '보편적 인권'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권리의 언어가 김 씨가 바라는 변화를 만들어낼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일상생활의 장소인 도시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면 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지방정부가 지는 것 역시 당연하다. 저자는 브라질의 도시법 제정이나 2010년 세계도시포럼에서 소개된 콜롬비아 보고타의 사례 등을 통해, 가깝게는 국내의 철거민 운동이나 장애인 이동권 운동 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 가능성을 우리 곁에 끌어다 놓는다.

물론 '도시에 대한 권리'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도시를 두고 벌어지는 권력과 권리의 충돌, 인권의 침해를 살펴본 후에도 어떤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는 열려 있다.

하나의 공간에 만들어지는 수천, 수만 개의 장소가 보편적 인권의 가치에 기반을 두면서도 수많은 차이들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 도시를 전유하고 창작하고 참여하는 것이 도시 계획의 문제로 쉽게 환원되어서도 안 된다. 김 씨가 도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부족한 임금과 소득, 가사 노동과 간병 노동의 부담 등 삶의 전 영역에 걸쳐져 있다.

'도시에 대한 권리'와 여러 권리들과의 연관성을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때 의무 주체를 지방정부로만 둘 필요는 없다. 국가를 통해 부여된 시민권에서 출발하는 근대 인권 담론의 한계는 단순히 의무 주체를 지방정부로 바꾼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인권의 힘은 자격을 부여하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을까 하는 김 씨의 걱정과 구급차가 들어올 수 있는 도로에 대한 요구 사이의 간극은 크다. 즉, '도시에 대한 권리'는 정답이기보다 질문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한편으로는 절박하고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질문을 내려놓는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 스스로 그러한 질문을 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누구나에게 기꺼이 권할 만한 질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도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인권의 실현을 가로막는 권력이 어떻게 공간을 장악하고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는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실천들이 도시를 채우며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다르게 보인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 다음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은 이 책이 선물하는 설렘이자 아쉬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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