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이윤석이 과학책을?

명문대 졸업에 신문방송학 박사, '교수님' 소리까지 듣는 긴 '가방 끈'을 자랑하는 그이지만 연예인, 그것도 개그맨이라는 본업 때문인지 세간의 첫 반응은 '피식'에 가까웠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출판계를 몰래 떠돈 이 책, <웃음의 과학>(사이언스북스 펴냄)에 대한 반응이 심상찮다. 필자의 의외성에 기댄 가벼운 기획이란 편견은 싹 접어도 좋다는 거다. 출판사, 미리 읽어본 독자들 모두 '활짝'이다.

'피식'부터 '활짝'까지, '호호호'부터 '푸하하'까지 인간은 매일 수십여 종의 웃음과 상대한다. 웃고 웃기는 게 업인 개그맨은 오죽할까. 매일이 관객의 안면 근육과의 씨름일 것이다. 때론 허리케인 블루로, 때론 '국민 약골'로 17년간 그 씨름을 업으로 삼아 온 이윤석이었기에, 웃음에 대한 궁금증과 학구열을 어떤 학자보다 제대로 숙성시킬 수 있었다.


▲ <웃음의 과학>(이윤석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그렇게 웃음의 '과학'적 가설과 연구 결과를 성실히 살피느라, 이 책은 TV 속 그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빵~' 터질 만한 틈은 주지 않는다. 다만 진지한 해설, 현장에서 건저 올린 생생한 예들이 독자들의 안면 곳곳 편안한 주름을 지어 낸다. 그런 그답게 집필 의도에 대해 "빵빵 터지는 개그는 못 해 드리지 않나. 웃음에 대해 설명해드리는 개그맨, 그게 내 역할 아닐까" 이렇게 자학 개그를 섞어 대답한다.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저자' 이윤석을 만났다. 매고 온 화려한 나비넥타이를 제외하면 연예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수더분한 모습이었지만, 다른 저자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그만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활짝, 더 크게, 더 자주 움직이는 그의 얼굴 근육들이었다. 국민 약골이라지만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활기찼다.

신인 과학책 저술가의 탄생을 기념하며 이번 인터뷰는 천문학자로서 과학 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는 이명현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진행했다. 그 역시 이윤석처럼 본업에 만족하지 않는(?) 멀티플레이어로 과학자이지만 과학소설(SF), 영화, 만화 등 다방면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저술가이자, '프레시안 books' 기획위원이다.


▲ 개그맨 이윤석. ⓒ프레시안(손문상)

과학계의 '먼지 성운' 나오다

이명현 : 개그맨이 책을 썼다고 하니 대중은 '웃기는 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개그 실용서를 기대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제목 그대로 웃음의 '과학'을 다룬 책이다. 왜 이런 책을 쓰게 됐나?

이윤석 : 처음부터 특별히 웃음이란 주제에 관해 써야지, 하고 책을 찾아본 건 아니다. 평소 이런저런 과학책들을 읽다 보니 저마다 웃음에 대해 다룬 부분이 있더라. 호기심이 생겨 자료를 모으다 보니 '내가 명색이 개그맨인데, 사람이 왜 웃는 건지는 알고 웃겨야 하지 않나' 싶었다. 마치 나에게 맡겨진 숙제 같았다. 빵빵 터지는 웃음은 못 드리는 개그맨이지만, 웃음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정리해서 제공하는 개그맨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감이랄까?

이명현 : <오래된 연장통>(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 전중환 경희대학교 교수가 쓴 추천사를 보니 의외로 기존에 웃음에 대한 대중 과학서가 없다는 얘기가 있더라.

이윤석 : 코미디 프로그램이 방송국에서 효자 노릇을 하는데도 좋은 대우를 못 받는 것처럼 웃음에 대한 담론 역시 그런 것 같다. 한 권으로 묶여서 나온 것이 거의 없고 죄다 흩어져 있다. 그래서 나라도 웃음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현 :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먼지 성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지 성운은 우주의 모든 것을 흡수한 후 다시 방출하는 성운이다. 이 책도 여러 연구 결과, 책들을 흡수했다가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잘 뿜어내 정리한 것 같다.

이윤석 : 영광이다. 먼지 성운에 대해서 꼭 찾아봐야겠다. '먼지'라고 해서 움찔했는데 좋은 뜻인 것 같다. (웃음) 실제로 정말 여러 책을 참고해서 썼다. 내가 썼다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선배 저자들의 힘을 빌렸다. 집필하는데 있어 결정적으로 희망을 줬던 책은 <괴짜 심리학>(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엮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다. 인간의 두뇌 분야와 관련해서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책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명현 : 저자로서,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봐 주었으면 하나.

이윤석 : 유시민 전 의원이 자신에 대해 '지식 소매상'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는데, 나 역시 지식 소매상이 되고 싶다. 이 책에 나온 웃음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은, 몰라도 살아가는데 상관없지만 알아서 해 될 것도 없다. 인류 발전에 크게 득이 되진 않겠지만, '아니, 이런 정보도 있었네' 하는 걸 새록새록 깨닫게 하는 책이 됐으면 좋겠다.

과학은 인류에 이런저런 혜택을 준 의의도 크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는 행위이다. 과학책을 읽다보면 너무 재미있어서 '나만 재밌는 게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서 책을 통해, 방송에서 개그로 주는 웃음과는 또 다른 은은한 웃음을 주고 싶었다. <웃음의 과학>이 TV나 개그는 좋아해도 과학이나 책에 별로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을 초대하는 초대장 같은 책이길 바란다.

개그맨, 속은 울어도 '행복한 감정 노동'

이명현 : 책에서 웃음의 정체에 대해 진화심리학적 접근으로 밝혀나가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웃음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웃음, 정체가 대체 뭘까?

이윤석 : 나도 아직 모르겠다. 웃음이란 게 마치 100% 좋은 점만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시초를 보면 원래 공격성을 드러내는 기제였다고 하지 않나. 우리가 구라 형(방송인 김구라), 명수 형(방송인 박명수)의 공격적 개그를 원초적으로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에도 그런 진화적인 측면이 있지 않을까. 또 웃음 중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이는 비웃음, 쓴웃음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런 면이 섞여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갖고 있는 표현 중에 가장 좋은 걸 꼽자면 역시 웃음 아닐까.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왜 사냐건 웃지요'에 나오는 그 웃음이 웃음의 본질인 것 같다. 책을 쓰면서 그 시구가 계속 떠올랐다. 내가 웃음에 대한 과학책을 쓰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다. 어떤 웃음이건 많이, 크게 웃는 게 좋은 삶 아닐까.

이명현 : 가짜 웃음은 어떤가. 책에도 썼듯 '뒤센 미소'와 '팬 아메리카나 미소'가 있다. (뒤센 미소는 18~19세기 프랑스의 심리학자이자 신경생리학자인 기욤 뒤센이 마비된 실험 참가자의 얼굴에다 전기적 자극을 가했을 때 만들어지는 얼굴 표정을 자연스러운 웃음과 비교한 결과로 발견한 '진짜 웃음'이다. 팬 아메리카나 미소는 항공기 승무원이 짓는 웃음이 가짜 미소의 대표 격이라고 생각한 과학자들이 붙인 일부러 꾸며내는 웃음의 다른 이름이다.)

이윤석 : 가짜 웃음이라도 마냥 욕할 수만은 없다. 책에서도 억지 미소라도 짓고 있다 보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는 내용도 나오지 않나. 친구라서 웃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기 위해 웃고,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거다. '진짜/가짜'와 웃음 중 한 군데 방점을 찍자면 웃음에 찍을 것 같다. 국진 형(방송인 김국진)을 보면 늘 미소를 띠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나까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누구나 그 같을 순 없지만 의식적으로라도 웃음을 짓고 있다 보면 주변 사람을 절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명현 : '팬 아메리카나 미소'가 미국의 항공사 이름에서 왔듯 승무원들은 극단적으로 늘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한다. 그런 직업적 의무들이 일종의 '감정 노동'인데, 개그맨들이야말로 극단적인 감정 노동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도 슬픈 일, 화나는 일이 있을 텐데 직업상 늘 웃음을 줘야 하니까.


ⓒ프레시안(손문상)
이윤석 : 사실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수술을 받고 계실 때도 병원에 못 가고 개그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것도 밀가루 터뜨리고 풍선으로 가슴 만들고 하는, 강도가 센 '몸 개그'였었다. 가만히 웃고 있는 일도 벅찬데 그런 연기를 할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개그맨이 대중들에게 일일이 내 감정을 알아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슬픔을 들키지 않는 게 이 직업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명현 : 그런 일들이 겹치면 스트레스가 클 것 같은데, 해소 방법은 있나.

이윤석 : 사실 별다른 취미가 없다. 술 마실 때 빼고는 늘 집에만 있다. 하지만 공 찰 힘은 없어도 책장 넘길 힘은 있어서 그런지 책은 많이 읽는다. (웃음) 어떤 고민이 있었더라도 책을 펼쳐 놓고 몰입하다 보면 다 잊어버리게 된다.

이명현 : 최근에 와서 '남자의 자격'(한국방송(KBS) <해피 선데이>) 같은 감동적인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웃음보다는 울음, 눈물이 더 어울리는 개그맨이 됐다.

이윤석 : 그렇지만 늘 눈물의 마무리는 미소였다. 방송에서도 그렇고, 모니터하면서도 화면 속 우는 모습을 보며 우리끼리는 오히려 또 웃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울음과 웃음은 최상의 감정 표현인 만큼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는 걸지도 모른다.

개그의 다양성이 민주화의 척도다?

이명현 : 개그맨이란 위치 때문에 책, 그것도 과학 교양서를 쓴다는데 대한 편견이나 질투의 시선은 없었는가.

이윤석 : 빵빵 터트리는 개그를 하는 이가 아니다 보니, 그런 편견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연예인이 시청자들의 무난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기대를 벗어나는 일탈도 필요하다. 개그우먼 곽현화 씨가 수학책을 낸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고 한다. 과학에 웃음을 접목한 방송 프로그램도 해보고 싶다. 정체성의 뿌리는 개그맨에 두되,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들로 가지를 뻗어 나가고 싶다.

이명현 :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코미디에 대한 탄압이 컸다. 코미디에도 등급을 매기고 어떤 것은 저질이라고 얕잡곤 했다. 거기에 따라 코미디계 전체가 흔들리기도 했다. 이런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이윤석 : 그래도 요즘은 상대적으로 많이 덜해졌다. 과거엔 개그에 대해 보수 언론에서는 주로 '질 낮다'고, 진보 언론에서는 '정치의식이 없다'고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은 양쪽 다 웃기는 건 웃기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인 것 같다. 웃음의 다양성은 정치적 민주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웃음이 민주화의 바로미터랄까? 웃음이 대우받는 사회일수록, 다양한 개그가 받아들여지는 사회일수록 민주화가 진전된 사회가 아닐까.

덧붙이자면 책에 쓴 것처럼 여성 코미디언들의 직업적인 성공과 가정에서의 행복이 우리 사회의 진보성을 시험하는 잣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개그우먼이 할 수 있는 역할이 과거보다 무대 위에서나 사적으로나 늘어났다. 그게 우리 사회가 진보했단 증거가 아닐까. 이 책이 그녀들의 자리를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수는 없겠지만 '코미디언 중에서도 여성은 더 약자구나'하는 사실이라도 알게 됐으면 좋겠다. 기 세 보인다고 욕먹는 개그우먼들, 사실 방송계에서는 약자인 경우가 많다.


ⓒ프레시안(손문상)

이명현 : <웃음의 사회학>이나 <웃음과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후속작을 기대해도 되나.

이윤석 : 또 낸다면 '웃음'이 아니라 '과학' 시리즈로 하겠다. <행복의 과학>이라든가 <모순의 과학>이라든가…. 행복에 대한 책은 많아도 과학적 대중서는 없는 것 같고, 모순 역시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해서 관심 가는 주제다. 내가 과학책에 '꽂힌' 이유가 있는데, 설명이 명료해서다. 마치 손에 돌멩이를 쥐어주듯 개념을 와 닿게 하는 면이 있다. 물론 그 돌멩이들이 진실의 극히 일부분이 아닌가, 좀 더 큰 진리를 못 보는 게 아닌가라는 고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과학과 과학적 설명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이명현 : 혹시 주변 개그맨 선후배 중에 집필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 또 없나.

이윤석 : 이경규 선배(방송인 이경규)가 언젠가 '취중어록'을 낸다고, 술 마실 때 하는 말들을 후배 개그맨이 받아 적고 있다. 나는 옆에서 "이건 넣고, 이건 쓰지 마" 라고 훈수 및 편집을 담당한다. (웃음)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책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아주 좋은 자료들이 될 것 같다.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의 인생사를 쓰는 식으로, 각자의 현장에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내게 리영희는 존경의 대상이기에 앞서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그랬다. 대체 왜 '이영희'가 아닌 '리영희'인가?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한다고 말하는데, 왜 정작 대학생들 중에는 리영희의 책이나 글을 읽는 사람이 없을까? 수많은 이들이 리영희를 존경한다고 말했지만, 대체 어떤 부분을 어떻게 존경하는지 말해주는 이는 또 없어서, 나의 궁금증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리영희는 지난해 12월 5일 지병 악화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저작을 주로 내왔던 출판사 한길사에서 <희망>이라는 제목 하에 한 권의 책을 선보였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 따르면 "<희망>은 다시 읽어도 번득이는 리영희 사상의 정수와 빼어난 문장력과 문학성을 담지한 대표적인 명편들을 '산문선'이라는 이름 아래 <리영희 저작집>(전12권)에서 가려 뽑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사후의 평가와 연구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먼저 선생의 생각과 사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글과 책을 제대로 읽어보는 데서 시작해야 함은 분명"하다는 출판사 책 소개의 말에 공감하며,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사상의 은사'를 뒤늦게 만나고자 하는 행렬에 나 역시 동참하였던 것이다.


▲ <희망>(리영희 지음, 임헌영 엮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데 일단 <희망>을 펼쳐들면 그 어떤 감정보다 먼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리영희의 산문을 묶어낸 편집자가 쓴 서문 때문이다. "선생의 글은 이런 인문학적 사상성 때문에 시사 칼럼의 차원을 넘어 고전적인 영원한 생명력을 담보해내는 셸리의 '사슬 끊는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7쪽)거나, (리영희 선생은) "민족 지성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아마 단재 신채호 이후 처음 맞는 총체적인 사상가로서의 실천적인 지성"(8쪽)이라거나, 심지어 "그의 칼럼은 정지용의 어휘력과 피천득의 서정성, 법정 스님의 안정감, 고은의 기지에다 진중권의 예리성을 두루 담아내고 있는 듯"(8쪽)하다는 식의,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표현들이 갑작스레 독자에게 달려든다. 순간 나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광고 탓에 제품을 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소비자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책장을 덮고 생각해보았다. 다소 부적절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진중권의 예리성'마저 리영희가 갖추었다니!)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요란스러운 수식어들은 오히려 그만큼 리영희라는 한 지식인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리영희의 책을 편집하고 그의 생전 대담을 나누어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본인의 자전적 기록을 완수하게끔 한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노고를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서문이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나 역시 막연하게 '참 좋은 분이었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적 스승이었지'라는 상투적 표현 속에 함몰되고 말 것이라는 그런 예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희망>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편자가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총 5장과 한 편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5장은 개인적인 체험, 독서 후기, 내면적 갈등 등을 담고 있고, 2~4장은 문화적, 정치철학적, 종교적 주제에 대한 리영희의 산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 부록은 그 유명한 '상고 이유서'로, 리영희가 1977년 구속되어 있을 때 어떠한 참고 문헌도 없이 자신의 책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에 대한 반공법 기소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논한 한 편의 논문이다. 한 지식인, 특히 냉전 논리가 지배하던 1960~70년대 당시 한국인이 알지 못했던 소련과 중국 등의 실상을 보도함으로써 이른바 '사고의 균형'을 찾아준 저널리스트 겸 학자의 깊은 세계를 들여다보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기대는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다. 오히려 '대체 리영희는 누구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갔는가?'와 같은 질문이 더욱 증폭될 뿐이다. 그의 사회 참여적 글쓰기의 이면에 있는 사상들, 그것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 산문들을 한데 모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더 큰 혼란을 느꼈다. 이 책 <희망>에 등장하는 '사상의 은사' 리영희의 사상은 동어 반복적이거나 '상식'적이며, 때로는 한 권의 책 안에서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종교에 대한 리영희의 생각을 담고 있는 "종교와 신앙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219~224쪽)을 살펴보자. 저자는 예수님 부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한국의 종교인들은 그와 정반대로 '겉치레'에만 치중하여 큰 교회와 절과 성당을 짓는 일에만 매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에 딱지가 앉힐 정도로 많이 들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바로 그 점이 내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제도화된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대심문관의 우화를 통해 바로 이 난제를 향해 전력 질주하여 부딪친다. 형식화된 교회와 제도는 신자들의 정신적 자유를 예속한다고 비판받지만, 바로 그 예속으로 인해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으며 그것이 더욱 올바른 일은 아닌가? "종교와 신앙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의 이면에는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상의 은사'의 사유가 바로 저 지점까지, 혹은 저것보다 더 깊은 심연까지 다가가 지금껏 내가 알지 못한 세계의 눈을 뜨게 해주는 그런 것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리영희는 그러한 '상식적'인 결론에 대하여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다만 지학순이나 장일순과 같은 모범적인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례를 거론할 뿐이다. 리영희가 저널리스트로서 지식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실사구시형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상식적이고 상식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식의 토대는, 마치 리영희가 평생을 싸워왔던 군사 독재 시절의 '상식'과 마찬가지로, 그리 단단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20년, 30년 장기 복역한 미전향 공산주의자들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신을 버리지 않는 신자, 십자가에 침 뱉기를 거부하는 신자만이 감히 '신자'니 '교도'라고 '종교인'을 자칭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직도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 238쪽)

물론 그렇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굳건한 신앙심은 리영희가 말하는 '이성' 혹은 '합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라고 써 있기 때문에 전쟁에 참전하여 총을 들고 싸울 수 없다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사람들이, 역시 그 성경에 '피를 흘리지 마라'고 써 있다는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여 자신 혹은 자녀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리영희 혹은 그와 한국 사회가 공유하는 '상식'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서평은 리영희의 종교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적어도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상식이나 이성이 올바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상식' 혹은 '이성'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들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한국의 현대사에는 길고 어두운 시기가 있었고, 그동안에는 '공산주의자도 사람이다'와 같은 진정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런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바로 그 시기에 리영희는 모든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은사'였지만, 그것은 그가 남다른 용기와 현실감각을 지녔기 때문이었지,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깊거나 높은 사유의 궤적을 그려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좀 더 꼼꼼하게 읽는 독자들은 심지어 한 권의 책 안에서도 서로 상충되는 서술을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다. 가령 그의 명성을 드높인 칼럼 중 하나인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311~327쪽)를 펼쳐보자. 여기서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와 그 잔재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어 온 한국의 현대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한 후, 그와 같은 세력들은 어설픈 '관용론'과 '보복 불가론'을 타고 다시 세력을 잡으려 들 것이므로, 독일이나 일본의 파시스트들을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페어플레이 정신을 접어두고 "민주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칼럼은 이후 386 세대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나라당을 '파쇼'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며, 그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대화의 여지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을 패퇴시키기 위해 이른바 '야권 대연합'을 포함한 모든 방책을 동원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바로 이 칼럼의 메아리 속에 울리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잠시 미뤄두자. 중요한 건 바로 뒤이어지는 칼럼인 '광주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329~336쪽)를 보면 정 반대의 입장이 결론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惡)을 악으로 갚고 싶은 당연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자만이 상호간의 부정적 관계를 변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적'과의 부정적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활짝 열어젖히는 '자유'(自由)를 '적'과 '나'에게 동시에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336쪽)

물론 전자는 1988년에, 후자는 1993년에 쓰인 것이며, 김영삼의 3당 합당과 뒤이은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하나회는 해산되었고 군부 독재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완전히 청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루쉰의 그 유명한 어구인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까지 인용하며 '파시스트'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강조하던 목소리와, "악을 악으로 갚고 싶은 당연한 유혹"을 물리치자는 주장은, 적어도 사상·담론의 측면에서는 양립하기 어렵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떨까? 리영희는 "우리는 일본의 문화·사상·관습·제도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410쪽, '해방 40년의 반성과 민족의 내일')라는 상식적인, 하지만 1984년이라는 발표 연도를 놓고 볼 때에는 혁신적인 주장을 한다. 그런데 불과 한 쪽 앞에서 "우리 유행가 가수가 '히트'해서 유행시키고 있다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도 퍽 석연치 않은 인상을 준다. 침략의 출입구였던 부산으로 일본인을 다시 불러들이는 발상 같아서 말이다"(409쪽, 같은 칼럼)라는 문구를 읽었던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문물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리영희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고 석연치 않은 인상을 받는 리영희는 과연 동일 인물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호 모순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모두를 '자신의 글'로 써내려가는 리영희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그렇다면 그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로서 활동했고 활동해야만 했던 해방 이후 현대사는 대체 무엇인가?

<희망>은 리영희를 곧바로 알게 해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리영희라는 한 자연인과, 그가 태어나고 자라났으며 살아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이다. '상식'으로 '몰상식'에 맞섰던 그의 인생은 어떤 사상적 통일성이나 완결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다면적·다층적인 형태를 띠고 있고, 바로 그래서 그의 칼럼 하나하나는 쉽고 재미있지만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독자는 (적어도 나는) 어떤 후련함과 상쾌함 대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지적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독서의 경험이야말로 2011년의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영희를 '(정지용+피천득)×(법정+고은)×진중권' 같은 '먼치킨 캐릭터', 즉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이성'으로 지난 시대의 이성적 비판적 지식인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것 말이다.

한 사람의 원로에 대해 알고 싶고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직접적으로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화>나 <역정>을 읽는 편이 낫다. 하지만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지성을 살펴보고 싶다면 <희망>을 집어 드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적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희망이 자라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실 '프레시안 books' 편집 회의 때 역사학자 김기협의 시병 일기 <아흔 개의 봄>(서해문집 펴냄)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얼마 후 우연히 김기협의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앗! 이남덕 할머니'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내 기억 속에 '멋쟁이 할머니'로 자리 잡고 있던 분이 바로 김기협의 어머니이자 <아흔 개의 봄>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한번 읽어볼 생각으로 담당 기자에게 트위터를 날렸다. 다음 날 책을 받으려고 갔다가 덜컥 서평을 맡아버렸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이 모두 이남덕과 같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적으로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복을 즐겨 입으셨고 가끔은 봇짐 배낭을 들고 나타나셨고 작은 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서 들려주셨고 자신을 '혼자 영화도 보러 다니는 씩씩한 늙은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내겐 멋지고 약간은 까칠하지만 당찬 '멋쟁이 할머니'였다. 내가 문학과 우리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고는 당신이 지은 <한국어 어원 연구 I>(이남덕 지음,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펴냄)이 나오자마자 건네주셨던 자상한 할머니기이도 했다. 김기협도 인정했듯이 '정열'이 넘치는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아흔 개의 봄>(김기협 지음,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그런데 자식들 눈에는 어머니가 좀 다르게 보였던 것 같다. 김기협은 <아흔 개의 봄>에서 "수십 년 동안 그 분의 훌륭한 점보다 그 분의 모순과 위선을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마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가족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기협이 태어날 때까지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아버지와 전처와의 이혼 수속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아내였던 것이다. 그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오랫동안 진심으로 어머니를 미워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2007년 6월 김기협의 어머니 이남덕이 쓰러져서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어머니를 한 요양 병원에 모셔놓고 매일 어머니를 찾아뵈며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는 여전히 "자식으로서의 도리 때문에 살펴드리는 것이지,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던 그가 이제는 "나는 지금 어머니를 몹시 좋아하고 아낀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어머니, 이마에다가 뽀뽀 좀 해드려도 될까요?" 하면서 능청스럽게 "엄마" 이마에 뽀뽀를 하는 효자 아들이 되었다.

어머니도 김기협이 병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기~협~아~ 네가 가면 난 어떡하니?" 하면서 행복한 칭얼 모드에 들어가곤 한다. 김기협은 2009년 7월 6일 시병 일기에 "이렇게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고 저절로 쌓이게 되다니, 이러다가 내가 정말 효자가 돼버리는 거 아닐까?"라고 적고 있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어머니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효자가 되어 있었다.

<아흔 개의 봄>은 겉으로 보면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며 그날그날의 일들을 적어놓은 일종의 시병 일기이다. 하지만 그 내막은 결국 김기협의 반세기에 걸친 절박한 '엄마 찾기'의 순례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자기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과거의 그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분을 편안한 눈길로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오려니 나 자신을 좋게 볼 수도 없고, 세상을 좋게 볼 수도 없었다"면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면서 "엄마"를 찾은 현재의 그는 "그분과의 화해가 세상과의 화해, 나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면서 '엄마 찾기'는 '화해'의 과정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아흔 개의 봄>을 읽기 시작하면서 사실 상투적인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우선 더 일찍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런데 금방 이렇게라도 화해하고 효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반문해보게 되었다. 우리들 중 몇 명이나 이런 화해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흔 개의 봄>을 읽는 내내 솔직히 그가 부러웠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 책의 미덕은 정작 다른 곳에 좀 비껴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아흔 개의 봄>이 효자송이나 열녀문 시리즈가 아니어서 좋았다. 이런 종류의 글을 쓰면서 과장하지 않고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냈다는 것은 큰 미덕일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미래에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실제 상황'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주는 실용적인 매뉴얼인 것 같다.

치매에 걸린 노모에 대처하는 상식적인 마음뿐 아니라 요양원을 선택하는 현실적인 방법과 같은 실제적인 여러 방안들이 기술되어있다. 호들갑스러운 어머니와 아들의 극적인 화해가 아니라 차츰 잔잔하게 물들어 가는 화해와 사랑이 있어서 더 실감이 났고 더 큰 동감이 갔다.

무엇보다도 치매에 걸려서 꺼져가는 한 인간의 '의식'에 대한 김기협의 연민과 존중이 <아흔 개의 봄>을 읽고 난 후 내 마음속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누구나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다른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도 피할 도리도 없다. 이 책은 왜 꺼져가는 생명 앞에서 연민으로 당당하게 마주 서야하는지 우리들에게 되묻는다. 결국 김기협의 '엄마 찾기'는 삶에 대한 연민이자 '의미 찾기'인 것이었다.

김기협의 마지막 '엄마 찾기' 작업이 진행 중이다. 법적으로 '계모'로 되어 있는 어머니를 '생모'로 돌려달라는 '친생자관계존부속확인의 소'를 법원에 제출한 것이다.

"어머니에 관한 글을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또 쓰게 될 거다. 그러나 지난 2년간 쓰던 것과는 다른 자세로 쓰게 될 것이다. 2년간 적은 글은 어머니의 '인생 강의'를 받아쓴 노트인 셈이다. 이제 노트 필기는 접어놓고, 어머니 얼굴만 기분 좋게 쳐다보며 지내겠다. 언젠가 다음 과목 노트 필기를 시작하게 되겠지만, 서두르지는 않겠다."

이렇게 끝을 맺은 시병 일기의 속편이 나온다면 '생모 찾기' 소송의 결과부터 이야기 하면서 시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남덕 할머니는 이미 그 아들에게 스스로의 방식으로 판결을 내렸다. 2010년 9월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에게 친필로 이렇게 판결문을 적어 주었다.

"아아 나는 너에게 글을 써 주겠다. 너는 내 아들이다.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한 번도 가까운 데서는 글을 안 써주는구나. 본래 가까운 사람은 항상 먼 데서 멀리 있는 것이로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 여기서 더 이상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까지라도 지켜야 한다. 더 이상 가면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이미 사람 사는 공장이 아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아, 하지만 나는 두렵다."

2003년 1월 9일. 한 사내가 목숨을 끊었다. 제 손으로 제 몸에 휘발유를 부었다. 모든 결심을 한 마지막 순간에도 "누군가 자신을 세상에 묶어 주기 바랐던"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는 "출퇴근 시간에 오가며 회사에 다니는 모든 동료들이 자신을 밟고 가기를, 그렇게 자신을 딛고 다시 살아주기를" 바라며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의 끈을 잘랐다.

김추자의 '커피 한잔'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사나이,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였다. 다음날 그의 월급 통장에는 2만5000원이 찍혀 있었다.

두산중공업과 한진중공업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 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 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배달호가 가고 나선 8년. 지난 2011년 2월 6일, 한 노동자가 35m 크레인에 올랐다. "우리 조합원들이 잘리는 걸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어서 크레인에 오른 그는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이었다. 8년 전에도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둘이 목숨을 끊었다. 김주익, 곽재규였다. 배달호가 목숨을 던진, 그해의 일이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은 11일로 37일째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해를 넘겨 계속되는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 계획을 막으려는 몸부림이다.


▲ <인간의 꿈>(김순천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배달호 평전 <인간의 꿈>(김순천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을 펼치면서 동시에 85호 크레인과 한진중공업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한진중공업과 한 글자만 다른 이름, 공기업 한국중공업이 사기업 두산중공업이 되고 나서 시작된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분신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한숨. 세상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한국중공업은 10년째 흑자였는데도, 1998년의 흑자 규모는 무려 768억 원이었다! 민영화를 추진했다. 자산 5조 원 규모의 한국중공업을 단돈 3057억 원에 인수한 두산은 인수 자금 중 계약금 300억 원을 내놓고 정리 해고를 시작했다. 결국 이 정리 해고는 배달호를 죽음으로 몰았다. 한진중공업도 좋은 실적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리 해고를 추진 중이다.

한진중공업은 1월 25일 정리 해고를 반대하는 노동조합 간부 11명에게 51억8000만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김진숙에게도 지난달 19일부터 농성을 중단할 때까지 하루에 100만 원의 벌금을 배상하라고 법원은 명령했다. 이런 모습도 8년 전과 꼭 닮았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정리 해고에 맞서던 노동자 42명에 대해 65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었다.

손배 가압류의 고통

배달호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세상을 떠날 당시 그는 8개월 이상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압류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떤 달은 월급이랍시고 고작 5만8000원이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 학원을 끊고, 먹을 것을 줄였다. 쌀이 떨어지면 라면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결국 허름하기 이를 데가 없는 집까지 차압당했다.

노동자의 권리인 파업에 대해 민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그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배달호뿐만 아니라 두산중공업 노동자와 가족은 지금도 그 끔찍했던 날들을 잊지 못한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전대동의 부인 한해영은 당시 남편에게 했던 모진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내가 남편에게 그랬어요. '내가 한 인간으로서 당신을 존경한다. 하지만 당신이 내 남편이라서 참 나쁘다.'"

회사는 한 술 더 떠 파업 참여 노동자를 이른바 '무계결근' 처리해 월급을 주지 않았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진학용은 47일 파업 기간 월급을 고작 7000원 받았다. 그 기억은 지금도 가족의 큰 상처로 남았다. 그는 "큰놈이 기억을 하고는 지금도 파업한다고 하면, '7000원' 그런다"고 말했다.

"무계결근 처리는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 그 수는 1300여 명에 이르고, 피해액도 1인당 적게는 10만 원에서 1300만 원까지 되었다. 회사는 이를 통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혀 참여하지 않는 노동자들과 분리하고, 파업에 참여하면 피해를 당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숨 막히는 곳이 된 현장

회사의 간계는 효과적이었다. "배달호가 문병도 가고, 집에 동생이라도 결혼하면 축하해 주러 찾아갔던" 동료들은 빈 월급봉투의 위협을 못 이기고 노동조합을 멀리했고, 급기야 "배달호가 다가오는 것도 꺼렸다." 이런 분위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고통보다도 배달호를 더 힘들게 했다. 그는 당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도 안 본다."

그들에게 회사는 "고향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배달호의 한 동료는 "그것은 내 몸의 일부였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가슴"이라고 말했다. 그 가슴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는 "같이 일하면서도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점심 식사도 따로 하고, 심지어 부모상을 당해도 서로 문상을 가지 않을 만큼 인간관계는 파탄 난, 그야말로 숨 막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그전에는 출근하면 웃고 재미가 있었어요. 근데 이제 내 회사가 아니게 된 거예요. 감시하고 추적하고……. 지옥으로 변한 거야. 웃음을 잃어 가는 거야. 박용성 회장 말처럼, '이 회사의 주인은 주주다, 주주를 위해 열심히 일해라.' 우리는 그런 존재밖에 안 되는 거였어요.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일해서도 안 되고, 이제 회사는 우리들의 의사를 나누고 함께하는 민주적인 공간이 되어서도 안 되는 거였어요." (두산중공업 강웅표)

당시 사람들은 잔인하고 몰상식적인 손해 배상, 가압류가 배달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와 평생을 함께 해 온 유형오는 알았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진짜 이유를. 1985년 한국중공업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처음으로 '인간'임을 서로 확인했던 이들에게 두산은 다시 개, 돼지가 되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기력했다.

"가압류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현장이 죽었다고,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거예요.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배달호의 죽음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마지막 죽음이어야 합니다."

배달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65일 동안 벌어졌던 긴 싸움을 끝내며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째 민주 정부, 인권 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렸다. 죽음의 행렬도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2년차였던 2004년 분신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의 유서에는 "체불 임금을 달라"는 1970년대에나 있었던 것 같은 요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죽음. 지은이 김순천이 한창 배달호의 평전을 쓰고 있었던 2009년 11월 4일 또 한 사람이 자살했다. 두산그룹 박용오 전 회장이었다. 김순천은 "곧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고 토로했다. "박용오 회장이라면 한국중공업을 공격적으로 인수해 배달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나쁜 경영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자신이 선택한 나쁜 경영 방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전혀 다르고 또 너무도 닮은 두 죽음"을 놓고 김순천은 이렇게 묻는다.

"기업을 인수 합병해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가난에 쪼들려 죽게 하는 그대들은 행복한가.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치고,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하고, 가장 낮은 임금 주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이익을 남기는 삶이 행복한가. 그 돈을 정치 자금으로, 불법 비자금으로 빼돌리면서 살아야 되는 당신들의 삶이 행복한가.

진정 행복한가. 어느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을 공동체의 일원이고 '집단 지성'이라 부르며 존중한다는데, 그런 그들을 단지 돈벌이로 여기는 그대들 진정으로 행복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되기 전, 지리산 노고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아직 개발이 덜 됐어."

그리고 얼마 전 여성계 신년 인사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보육은 이미 사실 무상 보육에 가까이 왔다"는 충격적인 발언에 이어 무상 급식과 관련해 "대기업 그룹의 손자, 손녀는 자기 돈 내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 손자 손녀는 용돈 줘도 10만 원, 20만 원 줄 텐데 5만 원 내고 식비 공짜로 해준다면 오히려 그들이 화가 날 것"이라 말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도 화가 났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이렇다. 그들은 이 세계에 어떤 생명, 사람이 사는지를 모른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다면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진심'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그가 지닌 강한 힘을 의식하고 우리 사회의 정의를 의심하게 된다. 내게는 참으로 불편한 '복불복의 공정 사회'가 그에게는 기회의 땅이다.

가장 춥고 눈이 많이 왔다는 이번 겨울에 어떤 이는 얄팍한 비닐 천막에 의지해 농성장을 지키고 어떤 이는 35m 높이의 고공 크레인에 올라 있지만, 힘을 가진 사람들의 눈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치열한 몸부림이 힘 있는 자들의 눈에는 돌파해야 할 장애물이나 발전에 뒤따르는 부수적인 피해로 비친다. 그래서 힘 있는 자들은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철거와 벌금으로 맞선다.


▲ <국가처럼 보기>(제임스 스콧 지음, 전상인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까? 왜 우리와 비슷하게 보이던 사람도 힘을 가지는 순간 전혀 다른 인물로 변신할까? 제임스 스콧의 <국가처럼 보기>(전상인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는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준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스콧의 얘기를 정리하면, 그들의 눈은 숲이 아니라 팔 수 있는 나무만 보도록 맞춰져 있다.

그들의 눈에 "가치 있는 식물은 '농작물'이 되고, 그 농작물과 경쟁하는 종은 '잡초'로 낙인 찍힌다. 그리고 농작물에 기생하는 벌레는 '해충'으로 낙인 찍힌다. 또 가치 있는 나무는 '목재'가 되는 반면, 이와 경쟁하는 종은 '잡목'이 되거나 '덤불' 쯤으로 여겨진다. 이와 동일한 논리는 동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높은 가격이 매겨진 동물은 '사냥감'이나 '가축'이 되지만 그것과 경쟁하는, 혹은 그것들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약탈자'나 '야생동물' 쯤으로 간주된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진보적으로 믿는 "시민권, 공공 위생 프로그램, 사회 안전, 교통, 커뮤니케이션, 보편적인 공교육 그리고 법 앞의 평등 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국가 중심적, 하이 모더니즘적 단순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런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니라 근대국가와 자본주의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순해진 지도와 세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아직도 애써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미 피부로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한 지구 세계의 파멸이다. 이 비극적인 상황을 감추기 위해 힘을 가진 자들은 '복원'과 '살리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스콧은 그런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상적' 생태를 만들기 위한 '삼림 복원'이 시도되어 뒤섞인 결과를 드러냈지만, 숲을 지탱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을 여전히 부정하고 있었다.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조건인데, 획일적인 사회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다양성은 여전히 어려운 선택이다. 그렇다면 눈앞으로 다가온 파멸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스콧은 국가처럼 보지 않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고, 우리 눈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인정하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힘을 가진 자들의 '하이 모더니즘'을 견제할 강한 시민사회이다. 그런 점에서 스콧은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그 민주주의란 토착적이고 경험적인 지혜를 뜻하는 "시민의 메티스가 조정이라는 방식으로 그 나라의 법과 정책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조금 식상할 수 있지만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되듯이 우리가 기댈 곳은 역시 민주주의뿐이다.

'또 다른 경제가 가능하다'가 아니라 '또 다른 경제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던 스콧의 <농민의 도덕 경제>처럼, <국가처럼 보기>는 '또 다른 삶의 질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고 스콧이 지금껏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세계를 통제해서 생산을 확대하고 사회 질서를 합리적으로 바로 잡으며 이 세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욕망이, 스콧의 표현을 빌면 "행정적 질서화에 대한 열망"이 '아방가르드'나 '전위',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온 바이다.

그럼에도 스콧의 얘기가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보는 법(seeing)'으로 설명하고, 국가가 파괴하고 무시해온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가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단지 바라보는 사고틀(프레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이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이 다양성을 파괴하고 지역적 지식의 중요성을 무시하면서 사람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개인의 자율적인 역량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다시금 과거의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목소리를, 농민과 "전통적인 사람들", TV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에 나올 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를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이 열정적인 책이 한국에서 차갑게 '소비'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언론의 서평을 보면 그들의 '책을 보는 법'이 드러난다. <조선일보>의 서평은 이 책을 두 번이나 다루지만 소련의 집단 농장 실험에 대한 비판, 외국의 국가 공공 사업에 대한 비판으로 다룰 뿐 지금 우리의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 반면에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서평은 박정희와 4대강 사업을 비판하지만 정작 스콧에 강조했던 농민과 공동체, 전통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이념의 틀을 뛰어넘어 삶과 그 터전을 지키려는 열정이 우리 사회에서는 기존의 앎을 확인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 넘어가면 안타까움이 궁금증으로 바뀐다. 책을 번역한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전상인 교수는 소위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여기서 이념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왕 시작된 4대강 사업이 100년 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르는 성과를 낳겠다는 꿈과 각오를 함께 다지면서 말이다. 문제는 시간도 아니고 예산도 아니다. 정답은 정성이다.", "지역 주민 대부분이 원하는데다가 사법부도 적법하다고 판단한 4대강 사업, 그리고 당사자인 자동차 업계가 환영한다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민주당이 '절대 반대'로 임하는 자세는 공당(公黨)의 몫이 아니다"라고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는 분이 스콧의 책을 번역했다는 사실은 좀 생뚱맞다. 이런 관점이 바로 스콧이 비판하는 관점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이 책을 번역했을까? 자신이 동의하지 않지만 중요한 얘기니 알려야 한다는 지식인의 사명이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책의 본문과 각주 뒤의 '옮긴이의 글'을 읽어봐야 한다.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 뒤에 이런 문장이 있다. "박사 과정에 속한 김동완(현재는 박사다), 김민희, 김성연, 김예성, 여희경, 장지인, 정유진, 최민정은 이 책의 번역 과정에 참여했다." "생애 최초의 번역 작업이 정말로 지긋지긋하고 힘들었"을 수 있지만 많은 대학원생들과 함께 했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듯싶다. <우리 시대 지식인을 말한다>(에코리브르 펴냄)라는 책에서 권력과 지식의 유착을 비판하며 지식인이 연구라는 자신의 본령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분이, 사회 정의나 이념과 무관한 진리 추구를 부르짖는 분이 학생들과 함께 번역한 책에 자기 이름만 덜컥 올린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렇게 국가처럼 보는 분이 이로써 공직을 맡기 어려운 근거 하나를 만들었다는 점, 메마른 현실에 단비가 될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