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밑으로 내려가면 안 된다. 여기서 더 이상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까지라도 지켜야 한다. 더 이상 가면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이미 사람 사는 공장이 아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아, 하지만 나는 두렵다."
2003년 1월 9일. 한 사내가 목숨을 끊었다. 제 손으로 제 몸에 휘발유를 부었다. 모든 결심을 한 마지막 순간에도 "누군가 자신을 세상에 묶어 주기 바랐던" 노동자였다. 그러나 그는 "출퇴근 시간에 오가며 회사에 다니는 모든 동료들이 자신을 밟고 가기를, 그렇게 자신을 딛고 다시 살아주기를" 바라며 스스로 세상과의 인연의 끈을 잘랐다.
김추자의 '커피 한잔'을 멋들어지게 부르던 사나이, 두산중공업(옛 한국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였다. 다음날 그의 월급 통장에는 2만5000원이 찍혀 있었다.
두산중공업과 한진중공업
"2003년에도 사측이 노사 합의를 어기는 바람에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여기 또 한 마리의 파리 목숨이 불나방처럼 크레인 위로 기어오릅니다."
배달호가 가고 나선 8년. 지난 2011년 2월 6일, 한 노동자가 35m 크레인에 올랐다. "우리 조합원들이 잘리는 걸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어서 크레인에 오른 그는 한진중공업 해고자 김진숙이었다. 8년 전에도 한진중공업의 노동자 둘이 목숨을 끊었다. 김주익, 곽재규였다. 배달호가 목숨을 던진, 그해의 일이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은 11일로 37일째를 맞았다. 지난해부터 해를 넘겨 계속되는 한진중공업의 정리 해고 계획을 막으려는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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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꿈>(김순천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배달호 평전 <인간의 꿈>(김순천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을 펼치면서 동시에 85호 크레인과 한진중공업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한진중공업과 한 글자만 다른 이름, 공기업 한국중공업이 사기업 두산중공업이 되고 나서 시작된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분신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한숨. 세상은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한국중공업은 10년째 흑자였는데도, 1998년의 흑자 규모는 무려 768억 원이었다! 민영화를 추진했다. 자산 5조 원 규모의 한국중공업을 단돈 3057억 원에 인수한 두산은 인수 자금 중 계약금 300억 원을 내놓고 정리 해고를 시작했다. 결국 이 정리 해고는 배달호를 죽음으로 몰았다. 한진중공업도 좋은 실적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리 해고를 추진 중이다.
한진중공업은 1월 25일 정리 해고를 반대하는 노동조합 간부 11명에게 51억8000만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김진숙에게도 지난달 19일부터 농성을 중단할 때까지 하루에 100만 원의 벌금을 배상하라고 법원은 명령했다. 이런 모습도 8년 전과 꼭 닮았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정리 해고에 맞서던 노동자 42명에 대해 65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었다.
손배 가압류의 고통
배달호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세상을 떠날 당시 그는 8개월 이상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가압류 때문이었다. 심지어 어떤 달은 월급이랍시고 고작 5만8000원이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 학원을 끊고, 먹을 것을 줄였다. 쌀이 떨어지면 라면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결국 허름하기 이를 데가 없는 집까지 차압당했다.
노동자의 권리인 파업에 대해 민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그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배달호뿐만 아니라 두산중공업 노동자와 가족은 지금도 그 끔찍했던 날들을 잊지 못한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전대동의 부인 한해영은 당시 남편에게 했던 모진 말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내가 남편에게 그랬어요. '내가 한 인간으로서 당신을 존경한다. 하지만 당신이 내 남편이라서 참 나쁘다.'"
회사는 한 술 더 떠 파업 참여 노동자를 이른바 '무계결근' 처리해 월급을 주지 않았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진학용은 47일 파업 기간 월급을 고작 7000원 받았다. 그 기억은 지금도 가족의 큰 상처로 남았다. 그는 "큰놈이 기억을 하고는 지금도 파업한다고 하면, '7000원' 그런다"고 말했다.
"무계결근 처리는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 그 수는 1300여 명에 이르고, 피해액도 1인당 적게는 10만 원에서 1300만 원까지 되었다. 회사는 이를 통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혀 참여하지 않는 노동자들과 분리하고, 파업에 참여하면 피해를 당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숨 막히는 곳이 된 현장
회사의 간계는 효과적이었다. "배달호가 문병도 가고, 집에 동생이라도 결혼하면 축하해 주러 찾아갔던" 동료들은 빈 월급봉투의 위협을 못 이기고 노동조합을 멀리했고, 급기야 "배달호가 다가오는 것도 꺼렸다." 이런 분위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고통보다도 배달호를 더 힘들게 했다. 그는 당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도 안 본다."
그들에게 회사는 "고향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배달호의 한 동료는 "그것은 내 몸의 일부였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가슴"이라고 말했다. 그 가슴이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는 "같이 일하면서도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점심 식사도 따로 하고, 심지어 부모상을 당해도 서로 문상을 가지 않을 만큼 인간관계는 파탄 난, 그야말로 숨 막히는 곳"이 되어 버렸다.
"하늘과 땅 차이였어요. 그전에는 출근하면 웃고 재미가 있었어요. 근데 이제 내 회사가 아니게 된 거예요. 감시하고 추적하고……. 지옥으로 변한 거야. 웃음을 잃어 가는 거야. 박용성 회장 말처럼, '이 회사의 주인은 주주다, 주주를 위해 열심히 일해라.' 우리는 그런 존재밖에 안 되는 거였어요.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일해서도 안 되고, 이제 회사는 우리들의 의사를 나누고 함께하는 민주적인 공간이 되어서도 안 되는 거였어요." (두산중공업 강웅표)
당시 사람들은 잔인하고 몰상식적인 손해 배상, 가압류가 배달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와 평생을 함께 해 온 유형오는 알았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진짜 이유를. 1985년 한국중공업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처음으로 '인간'임을 서로 확인했던 이들에게 두산은 다시 개, 돼지가 되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기력했다.
"가압류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현장이 죽었다고,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거예요.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뭔가…….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죽음의 행렬은 멈추지 않는다
"배달호의 죽음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마지막 죽음이어야 합니다."
배달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65일 동안 벌어졌던 긴 싸움을 끝내며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째 민주 정부, 인권 변호사 출신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몰렸다. 죽음의 행렬도 끊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2년차였던 2004년 분신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박일수의 유서에는 "체불 임금을 달라"는 1970년대에나 있었던 것 같은 요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죽음. 지은이 김순천이 한창 배달호의 평전을 쓰고 있었던 2009년 11월 4일 또 한 사람이 자살했다. 두산그룹 박용오 전 회장이었다. 김순천은 "곧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고 토로했다. "박용오 회장이라면 한국중공업을 공격적으로 인수해 배달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나쁜 경영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자신이 선택한 나쁜 경영 방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전혀 다르고 또 너무도 닮은 두 죽음"을 놓고 김순천은 이렇게 묻는다.
"기업을 인수 합병해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가난에 쪼들려 죽게 하는 그대들은 행복한가.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치고,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하고, 가장 낮은 임금 주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이익을 남기는 삶이 행복한가. 그 돈을 정치 자금으로, 불법 비자금으로 빼돌리면서 살아야 되는 당신들의 삶이 행복한가.
진정 행복한가. 어느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을 공동체의 일원이고 '집단 지성'이라 부르며 존중한다는데, 그런 그들을 단지 돈벌이로 여기는 그대들 진정으로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