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여름휴가 떠날 때 평소 못 읽었던 책을 한보따리 싸서 시내 호텔방에 틀어박힌다는 소설가 김훈의 휴가 법을 듣고, '이거다' 싶어 지난 연말 따라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의례적이고 떠들썩한 세밑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해서였지만, 어차피 시내 호텔방은 다 찼을 거라고 핑계를 댔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김영은(27·가명) 씨는 이번 설 연휴에 기자가 포기한 '김훈 식 휴가 법'을 즐길 예정이다. 공식 연휴 전후까지 포함해 '토일월화수목금토일' 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장소는 집. 부모님이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에 자연스레 집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됐다.


▲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지난해 타계한 리영희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전환시대의 논리>(한길사 펴냄)와 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박완서 전집을 쟁여 뒀다. 김 씨는 "원래 설 연휴는 가족과 함께 보내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며 "'교양'과 '요양'을 겸한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설 연휴는 최소 5일, 최대 9일이다. 모처럼 긴 휴가를 얻은 직장인은 저마다 연휴 계획을 짜느라 분주하다. 휴가가 이렇게 길 줄 몰랐다며 미리 해외여행을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이부터, 어차피 "가족에게 반납"이라며 푸념하는 이들까지 어두운 반응도 만만찮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 특별하진 않아도 알찬 연휴를 보낼 수 있는 방법으로 책이 있다.

물론 김 씨와 같은 휴가 계획은 드물다. 북 칼럼니스트 김성희 씨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연휴 때는 잠시 손에서 책을 놓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가족들 얼굴만 보고 있자니 지루하고, 나가 놀자니 날씨 걱정부터 앞서는 이들에게 좀 더 현실적인 연휴 맞춤형 독서 방법을 제안한다.

연휴의 시작은 책 쇼핑으로

책을 고르는 게 먼저다. 책벌레로 유명한 철학 교사 안광복 씨는 "연휴 첫날 무조건 북 쇼핑을 간다"고 말했다. 먼저 보고 싶은 책을 잔뜩 쌓아두면 저절로 그때그때 손이 간다는 것이다. 보통 연휴를 3~7일로 잡고 묵직한 인문 책 2권, 소설 책 1권, 역사 책 1권 정도를 준비한다.

본격적인 연휴보다 조금 앞선 26일 시내의 한 대형 서점을 찾은 안광복 씨는 <야성적 충동>(로버트 쉴러·조지 애커로프 지음, 김태훈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과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사 펴냄) 그리고 소설 몇 권을 연휴에 읽을 책 목록에 올렸다.

지방 연구소에 있는 최준일(28) 씨도 최근 구입한 신간을 읽을 예정이다. 연휴 일정은 "반은 고향(전주)에 내려가고, 반은 서울에서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간단하다. 대신 일정 내내 한윤형의 <안티조선운동사>(텍스트 펴냄),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그린비 펴냄),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 펴냄) 세 권을 대동한다. 고향에서 지루할 때나 서울에 와 친구들과 약속이 어긋날 때 펴들어 완독할 계획이다.

관심 가는 책을 정해두지 못했다면 인터넷 서점 교보문고의 설맞이 특선 세일을 둘러봐도 좋겠다. 지갑 여는 것을 주춤하게 했던 전집류를 30%쯤 할인된 가격으로 내놓았다. 박경리의 <토지>(전 21권, 나남 펴냄), 풀빛에서 나온 '청소년 철학 창고'(전 25권) 등을 30~40% 할인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다.

'얇은 책, 다용도 책, 이미 읽은 책'

고향 내려가는 길이 멀다면, 특히 돌아오는 길 부모님이 챙겨주는 반찬으로 짐이 늘어날 것 같다면 출발할 때 욕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책의 부피가 작다고 그 울림마저 적은 것은 아니다. 책세상 문고, 민음 지식의 정원 시리즈, 한겨레 지식문고 등 손 안에 쏙 들어가는 문고는 무게 걱정과 부담 없이 가져갈 만하다.

문고의 장점은 크기와 부피, 싼 가격뿐만이 아니다. 소설가 장정일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마티 펴냄)에서 "본문이 끝나고 판권란 뒤에 붙어 있는 장대하고 찬란한 도서 목록은 그야말로 포만감과 도전욕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며 문고의 장점을 추가했다. 연휴에 틈틈이 문고를 읽고, 돌아와서 책 뒤 도서 목록을 깊게 파 보는 것도 좋겠다.


▲ <심야 식당>(아베 야로 지음, 미우 펴냄). ⓒ미우
다독가로 유명한 탤런트 권해효 씨도 두고두고 참고가 될 만한 책을 추천했다. 음악 관련 서적이나 음악가의 전기를 즐겨 본다는 그는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박준흠 지음, 선 펴냄)에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얇고 무난히 읽을 수 있다며 만화가 아베 야로의 <심야 식당>(전6권, 미우 펴냄)도 추가했다. 그는 책에 나온 메뉴를 직접 만들어 먹어 봐도 좋겠다고 덧붙였다.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는 '메인' 계획 외에 중간 중간 틈날 때마다 책을 펼치겠다는 '서브' 계획을 갖고 있는 교사 김승희 씨는 과거에 한 번 읽은 책을 집어 들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동렬 옮김, 민음사 펴냄)이다. 김 씨는 "중학교 때 읽었지만 주인공 이름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며 "동료 선생님들과 청소년 추천 고전 도서를 우리도 좀 읽어보자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자투리 시간 확보하기

이번 연휴는 길어서 대부분 김 씨처럼 가족 방문(여행)과 혼자 있는 시간을 적절히 배분한다. 하지만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다. 많은 이들이 평소에도 출퇴근 길, 업무 휴식 시간을 쪼개 독서하듯 귀성길이나 친척 집에서도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이번 설 연휴 가장 유용한 기기로 스마트폰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만큼, 무료함의 대명사 귀성길에도 스마트폰과 트위터가 '심심풀이 땅콩'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책 역시 무료함을 달래기에 적절하다. 자가용·버스 이동 시 흔들림과 어둠이 걱정된다면 휴대용 책 받침대와 북 라이트가 도움이 된다. 휴대용 받침대와 LED 북 라이트는 5000원 대부터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가족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도 틈틈이 독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5일 연휴에 멀진 않지만 친가와 처가를 모두 방문해야 한다는 금융 계열 연구원 박진성 씨는 "가족들 모이기 전 오전 시간, 잠들기 전 시간, 사람들이 음식 준비하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에도 출퇴근 길, 회사 점심시간을 활용하는 자투리 시간 마니아다.

최준일 씨는 "아무래도 사람들과의 시간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면 우월감에 독서가 더 잘 된다든지 하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명절에 다들 잠을 많이 주무셔서 자연스레 독서 시간이 확보된다"고 덧붙였다.

세뱃돈·선물 대신 책

여럿이 모여 있을 때 혼자 책 싸들고 있기 민망하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된다. 명절 선물로 한우나 과일 세트가 아니라 책 한보따리를 싸 가면 어떨까. 얼마 전 국회에서는 한나라당 정두언 최고위원이 책세상에서 나온 문고판 <복지국가>(정원오 지음), <권리를 상실한 노동자 비정규직>(장귀연 지음)을 지인들에게 설 선물로 배송해 눈길을 끌었다.

한나라당 의원이 신자유주의 노동 정책을 비판한 책을 선택했다는 데에서 '정치적인 화제'가 됐지만, 책 선물 그 자체엔 굳이 물음표를 갖다 댈 필요 없이 독려할 만하다. 그에 앞서 3년 전부터 명절이면 반드시 책 선물을 해 왔다는 정치인이 있다. 도서관발전재단 이사장이기도 한 신기남 전 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 많으면 3~40명에게까지 책을 선물해 왔으며 '책으로 선물 보내기 모임'(가칭) 회원까지 모집 중이다.


▲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 ⓒ살림
신 전 의원의 '책 선물' 원칙에는 나름 거창한(?) 이유가 있다. 그는 "그 나라의 지성을 좌우하는 것은 출판 문화"라면서 "책 선물은 출판 문화를 부흥시키는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명절 선물이 소고기, 백화점 상품권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다"며 "책을 선물하면 신선해서 그런지 고맙다는 문자도 많이 온다"고 말했다. 참고로 이번 설을 위해 사둔 책은 <콜디스트 윈터 :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다.

조카들에게 세뱃돈 대신 책을 주는 이모, 고모, 삼촌도 늘고 있다. 블로그 '책으로 훅가기'를 운영하고 있는 직장인 계소영 씨는 2명의 조카에게 지난해 세뱃돈 대신 <틀려도 괜찮아>(마키타 신지 지음, 유문조 옮김, 토토북 펴냄)와 <100층짜리 집>(이와이 도시오 지음, 김숙 옮김, 북뱅크 펴냄)을 선물해 줬다.

계 씨는 "1년에 두세 번 밖에 조카를 만나지 못하는데, 아이들을 옆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면 함께 이야기할 시간도 생기고 더 친해진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아이들도 좋아하니 올 설에는 2권씩 선물할 예정이다. 목록은 <100원이 작다고?>와 <나, 오늘 일기 뭐 써!>, <책 먹는 여우>와 <쳇! 어떻게 알았지?> 등이다.

밥 한 술, 책 한 술

떡국, 한과, 부침 등 명절 음식은 고단백, 고지방, 고칼로리식이라 다이어트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골칫거리다. 평소보다 소화하기 어려운 음식이 잔뜩 나오는데다가 권유하면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배탈, 소화불량도 잘 생긴다. 추운 날씨에 야외 활동도 줄어드니 까딱하단 연휴가 그저 '먹고, 자고, 찌기'가 되어버릴 가능성도 높다.

식탁 앞 시간을 10분 줄이고 '맛있는 책'으로 포만감을 채워 보자. 술자리가 몰아쳐 다이어트에 적신호가 켜지는 연말마다 많은 언론에서 '수다'를 최고 해결책으로 제시하듯, 설음식 먹고 '썰'을 풀어 본다면 어떨까. 취직은 언제, 결혼은 언제 하느냐는 불편한 대화 대신 설상에 오르는 음식들에 대해 몇 마디 곁들인다면 소화가 더 잘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박진성 씨가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레디앙 펴냄), 경영서인 <스마트 워킹>(마르쿠스 알베르스 지음, 김영민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과 함께 <텃밭 속에 숨은 약초>(김형찬 지음, 그물코 펴냄)를 설에 읽을 책으로 정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이 책은 젊은 한의사인 저자가 고향집 텃밭에서 기르는 양파, 두릅, 당근 등 일상적인 채소들의 질병 치료 능력을 다룬 생활 한의학서다. 박 씨는 "설 차례 상에 올라오는 나물이나 야채의 효능이 궁금했는데, 그래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식전>(장인용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한국인의 5000년 밥상 문화를 다룬 장인용의 <식전>(뿌리와이파리 펴냄)도 '맛있는' 책으로 유명하다. 배추김치와 된장찌개 등 매일의 식탁에 오르는 '한국 음식'들의 역사와 의미, 그 속의 사회상을 감칠맛 나게 버무렸다. 저자는 "밥이 생명이고 인생이며 즐거움"인 것은 자명하지만 "이제 밥상머리에서 밥과 반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보자고 제안한다.

먹거리를 묘사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시인 백석도 빼놓을 수 없다. 명절 풍경을 묘사한 시 '여우난 곬족'은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를 거쳐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로 우리를 안내한다. 소래섭의 <백석의 맛>(프로네시스 펴냄)은 백석 시에 등장하는 토속적 음식들의 의미와 미각의 경험을 톺아보는 책이다.

책도 레저다?

아무리 그래도 '연휴 때 웬 독서인가' 싶다면 책을 대체할 만한 TV 시청, 책을 만날 수 있는 나들이는 어떨까. 먼저 '방구석 족'에겐 책 읽어주는 영상을 권한다. 지난해 베스트셀러에서 올해 1월 교육방송(EBS)의 <정의>로 열풍을 이어갔던 마이클 샌델의 강연이 이달 말 DVD로 출시된다. 강연은 첫 방송부터 EBS 심야 프로로는 이례적인 시청률(0.90%)을 보이며 인기를 끌었고 책보다 생생하고 좋다는 호평이 많았다.

주말을 고비로 한파가 누그러져 설 연휴엔 외출하기 한결 나아질 전망이다. 설 연휴 뒤 보너스처럼 붙은 주말(5, 6일)엔 교외로 나가보자. 책을 테마로 한 장소로 '북하우스'(☞바로 가기)가 적합할 듯하다.

파주 출판단지에서 차로 10분 걸리는 문화예술 마을 헤이리에 위치한 북하우스는 출판사 한길사(대표 김언호)가 운영하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아름다운 건물에 서점은 물론 레스토랑('포레스타'), 갤러리, 공연장, 북 카페('윌리엄 모리스') 등을 갖추고 있다. 갤러리에서는 지난해 말 출간된 <박원규, 서예를 말하다>를 기념하는 기획전이 2월 28일까지 열리고 있으니 놓치지 말자. 설 휴무일은 2일과 3일이다.


▲ 북하우스 책방 전경 ⓒ북하우스

말 그대로 책과 '노는' 독특한 행사도 있다. 책이 글자투성이의 지루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 주는 '책과 놀이하다-Playing Book'전(展)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환기미술관의 공동 프로젝트로, 지난해 10월부터 진행돼 온 'BOOKBOOK-책과의 소통에 관한 4가지 제안'의 세 번째에 해당한다.

소설가 이상의 글 속에 잠재된 디지털적 요소를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설치한 '익명의 서사시_이상'(정영훈 작), 가상 인물인 '김 서방'과 함께 도서관 자리 맡기 기술 등을 배워보는 퍼포먼스·영상설치 '도서관에서 김 서방 찾기'(이재환 작) 등 책을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체험적 전시로 채워져 있다.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전시실에서 2월 24일까지 볼 수 있다. 월요일·설 연휴(2~4일)엔 열지 않으니 5, 6일에 찾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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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준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마이클 샌델은 복잡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식이 이론적 입장에 따라 매우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의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질문에 <무엇이 정의인가?>(마티 펴냄)라는 제목으로 맞받아치고 있는 11명의 한국인 필자들은 샌델이라는 한 사람의 정의론조차 도덕적 딜레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필자들은 샌델과 샌델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을 극대극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저자들의 직업이나 전공도 소설가부터 법학자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저자들에게서는 우선 샌델이 공동체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가 논란거리이고, 공화주의자라면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아니면 한국사회 정의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입장인지가 또 논란거리이다. 한 가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데, 그것은 샌델이 공동체주의자라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 <무엇이 정의인가?>(이택광·장정일·이현우·최원·박가분·김도균·박홍규·노정태·서동진·이권우 지음, 마티 펴냄) ⓒ마티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학계에서 정의론이 활발하게 논의되던 시절이 있는데, 소련과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직후인 1990년대였다. 당시에는 '역사의 종말'이 회자되면서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또는 공동체주의라는 서구의 정치이론과 도덕이론이 마르크스주의를 완벽하게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논의의 시작은 20년이나 이전에 출판된 롤스의 <정의론>이었고, 논의의 내용은 대체로 롤스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다양한 방향의 지적들로 채워졌다. 롤스에 대한 비판은 주로 두 가지 방향에서 왔는데, 하나는 공동체주의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다양한 이론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체성의 정치'를 표방한 페미니즘 윤리학이었다.

당시에는 대체로 공동체주의와 페미니즘 윤리학의 판정승으로 논의가 매듭지어진 듯이 보였다. 롤스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책으로 자신의 입장을 재차 확인하였으나 대세는 이미 공동체주의와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기운 듯했다. 여기에서 롤스와 공동체주의/페미니즘 윤리학의 입장이 갈리는데 가장 중요하게 기여했던 사람 중의 하나가 하버마스이다. 하버마스는 담화윤리이론을 통해 정의가 개인들의 결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문제이며 대화와 발언, 상호이해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리하여 '개인'과 '중립성', '무관심', '권리', '옳음', '규칙'이라는 자유주의적 키워드 대신에 '의사소통'과 '공감', '배려', '인정', '좋음', '참여' 등의 상호주의적 키워드가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와 페미니즘 윤리학이 대세인 듯이 보였던 당시에 한국에서는 정의에 대한 논의가 학계나 정치권 일부에만 한정되어 있었고, 그 역시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동시에 유효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부정의한' '공정사회'에 이르러서 샌델의 정의론 강의가 독서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화두로 재등장하게 된 것이다.

샌델의 책이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에 대해 <무엇이 정의인가?>의 논자들은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부정의한 공정사회'라는 현재 한국정치의 역설이 정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샌델의 강의기법이나 글쓰기 재능 등도 마땅히 이유로 거론되고 있으나 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정의가 갈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이 책의 저자들은 대체로 정의의 문제를 크게 분배와 정치의 두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들과 달리 샌델은 정의를 개인의 도덕적 판단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분배와 정치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정확히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대체로 샌델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저자들 중 몇몇이 지적하고 있듯이 샌델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도덕적 딜레마라는 개인적 판단문제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접근방식이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몇몇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샌델이 제시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매우 비극적인 것들이고 결국은 자명하게 해결될 수 없는 논쟁적인 성질을 가진 것들이다. 최선의 선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동시에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정당화가 필요한 선택들이고, 정확히 이런 이유에서 정의론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존재한다. 개인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라는 절박한 기대에서 출발해서 샌델은 정의에 대한 이론들을 도덕적 정당화에 대한 이론적 유형들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에 걸맞게 딜레마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다양한 정당화 방식 간의 대화와 참여를 주문하고 있다.

물론 다양성이 지배하는 복잡한 사회, 그래서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하는 개인화된 사회에서 점점 절박해지는 도덕적 정당화의 문제만이 샌델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국사회에 잠재해 있는, 혹은 민주화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정의에 대한 욕구가 반영되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샌델의 책과 함께 신자유주의 비판서인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는 사실이 그것을 확인시켜준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정의에 대한 욕구가 대체로 분배정의(계급정의를 포함하여)에 대한 요구, 올바른 정치에 대한 요구라고 보고 있다. 샌델의 이론적 입장이 그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지, 또 '정의'라는 단어가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극단적 평가가 공존한다. 예컨대 이택광과 장정일은 '정의'라는 기표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반면 이현우 등의 몇몇 저자들은 샌델의 책이 몰고 온 '정의열풍'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서동진은 '정의'가 신자유주의 레퍼토리에 불과하다고 보고, 박가분은 '정의론'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라며 근본적인 회의를 표현한다.

저자들이 '정의' 또는 '정의론'이라는 표현에 공감을 하든 안 하든 현재 시점에서 정의에 대한 한국사회의 욕구는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보다는 '복지'라는 분배의 문제로 표출되고 있다. 지방선거 '무상급식' 논쟁에서 박근혜의 '생애 맞춤형 복지' 구상과 민주당의 '무상복지 시리즈',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의 '무상보육논쟁'까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복지'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의가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무엇이 정의인가?>의 저자들 중에서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경우로는 김도균과 최원을 들 수 있다. 김도균은 공공선을 중시하는 샌델의 이론이 한국사회에 적용가능하다고 보면서도 샌델이 복지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정의관의 핵심을 분배정의의 문제로 보는 최원은 샌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도균은 특히 분배의 문제를 정의론과 공공성의 주제로 다루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입장이 롤스의 후예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이미 90년대에 이론적으로 극복되었다고 생각되던 자유주의자 롤스의 정의론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이 책에서 최원과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의 본질을 정반대의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다. 최원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론에서 분배정의가 핵심이며 분배정의는 명시적으로 계급문제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계급투쟁 문제를 풀 수 있는 더욱 더 복잡한 정의의 기하학적 비례식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이것이 바로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과제"(220쪽)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박홍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이 "정의는 돈이다"라는 말로 요약된다고 본다.

과거에 좌우이념이 대립하던 시절에 분배의 원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능력'과 '필요'였다. 그리하여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필요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를 정당한 것으로 표방했고,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거꾸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사회를 목표삼아 자신들의 시점에서는 그 중간단계로서 '필요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필요' 위주의 사회원리를 표방했다.

민주주의 헌정체제를 표방하는 사민주의 국가들이나 사회국가들(복지국가들)에서는 '필요에 따라 일하고 능력+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혼합적 원리가 복지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앞의 '필요'가 가장 남성 개인의 필요를 말하는 젠더차별적인 것인지 여부에 따라, 또 뒤의 '필요'가 잔여적이고 시혜적인 성격을 갖는지의 여부에 따라 복지체제에 대한 다양한 유형화가 시도되었고 또 비판되었다.

현재 사회주의 진영은 몰락했고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면서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받는' 능력 위주의 원리가 젠더나 출신 등의 장벽을 어느 정도 허물면서 관철되고 있다. 이와 함께 사민주의나 보수적 사회국가들에서도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구조로 능력주의가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필요에 따라 일하는' 필요 위주의 노동은 점차 사라진다고 볼 수 있다. 노동의 기회는 수입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직무에 합당한 사람에게 샌델이 말하는 '텔로스'에 따라 분배되는 방식으로 재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로써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 원리가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돌격 아래 이미 그 절반은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몰락을 경험한 직후인 1990년대에 들어서 이미 20년 전에 발표된 바 있는 롤스의 <정의론>이 먼지를 털고 활개 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샌델이 민주정치의 정의를 주로 '공동선과 정치적 참여'의 문제로 보고 있다면 그가 발을 딛고 있으면서 동시에 뛰어넘고자 하는 롤스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사회정의에서 찾으며, 사회정의를 '만인에게 공평한 자유'와 '만인에게 공평한 기회', 즉 인권과 사회경제적 평등의 문제로 본다.

롤스가 사회경제적 평등을 '평등'이 아닌 '정의'의 각도에서 보는 이유는 그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입헌주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자'로 불리지만, 사실 자유주의자보다는 입헌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가 말하는 절차는 단순한 절차나 기존에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라 이상적이고 (칸트의 의미에서) '이성적'인 헌법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중립'은 샌델이나 이 책에서 김도균이 말하는 것처럼 상대주의적 관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전제로 하며 '해방'의 가치를 표방한다.

예컨대 이 책에서 김도균은 동성애 혼인을 롤스의 '중립성' 개념에 기초해서 정당화할 경우 일부다처제까지도 정당화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샌델의 '텔로스' 개념이 더 합당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① 여성에게는 남성과 동등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또 만일 그 사회에서 남녀 간에 자유의 불평등이 불가피한 경우라 할지라도 ② 자유의 최소 수혜자인 여성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한다는 조건을 위반하기 때문에 롤스의 관점에서 중립적일 수 없는 제도이다. '최소 수혜자의 최대 수혜를 전제로 한 불평등 허용'이라는 '차등의 원칙'은 '최대 수혜자의 최소 수혜'를 주장하는 신고전주의 도덕인 '겸양의 원리'와는 반대로 자유의 하한선과 평등의 하한선을 제도적으로 명백하게 규정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롤스의 원칙을 염두에 둘 때, '필요에 따른 분배'가 공정하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히 규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필요'는 신자유주의 소비사회나 독재정치, 또는 신분제사회가 생산하는 과잉의 필요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과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를 의미한다. 즉 보편적 자유, 그리고 보편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사회경제적 재화(소득, 지위, 자존감, 능력개발을 위한 재화 등)의 보장을 의미한다. 또한 롤스의 '무관심' 개념 역시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 알거나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족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치관과 기회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시민적 배려와 익명성 존중을 의미한다. 즉 18세기의 해방적 가치를 '공동선'으로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롤스의 논의에는 몇 가지의 갱신이 필요하다. 보편적 인간이나 시민 개념 역시 시대적 사실인식과 관련하여 ―예컨대 시민이란 자국인에, 남성에, 가장에, 이성애자에 제한되는가? 등의 문제에서― 그 내용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체주의자들과 페미니즘 윤리학자들이 사실인식과 관련된 '대화'와 '참여'의 방법론을 제안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샌델의 '텔로스'나 '미덕', '열정', '참여' 등의 개념 역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 해방의 가치보다 문화적 정체성을 옹호하는 데서 그친다면 낸시 프레이저가 최근 '정체성의 윤리'를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한 바와 동일하게 그것들 역시 신자유주의의 대세 속에서 오히려 악용될 여지가 더욱 크다. 샌델의 '텔로스' 개념은 기본적으로 전형적 근대 사회학자인 파슨스의 '기능'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가치관이 파슨스의 가치관보다 좀 더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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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츠 성(Burg Elz)은 내가 독일 본(Bonn)에 살던 시절, 유럽에 출장 왔다가 우리 집에서 하루 이틀 묵었다 가는 객들에게 안내하던 관광지다. 협곡 사이에 솟은 좁은 외톨이 봉우리에 우뚝 선 이 성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모든 방과 복도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방에 대한 안내가 끝날 무렵 관광안내인은 이렇게 묻는다.

"여기에 있는 왼쪽 문은 2층으로 통하는 입구입니다. 그렇다면 이 오른쪽 문은 어디로 연결될까요?"

상품으로 걸린 기념엽서가 탐나거나 안내원의 흥을 돋우려는 관광객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하지만 정답은 허탈하게도 "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는다."이다. 문은 열리지만 그 뒤에는 벽이 가로막혀 있다. 오른쪽 문은 방의 구조를 대칭으로 만들기 위한 장식일 뿐이다. (장식에는 비용이 든다.)

대칭(symmetry)은 변환(transformation)이다. 어떤 대상을 반사하거나 회전 또는 이동시켜서 원래와 똑같이 보인다면, 그 변환은 대칭이다. 물리법칙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언제나 성립하여야 한다. 즉 장소의 이동과 시간의 흐름에 대칭이어야 한다. 대칭은 현대물리학의 양대 분야, 즉 미시 세계를 다루는 양자 세계와 거시 세계를 다루는 상대론 세계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대칭성은 물리학의 강력한 도구다.


▲ 회전대칭과 거울대칭의 예 ⓒ이정모

생명체에게 대칭은 하나의 언어다. 벌과 같은 곤충에게 대칭은 필수적인 생존조건이다. 벌은 색맹이다. 정원의 초록색은 회색으로 보이고, 붉은 꽃은 검은색으로 보인다. 또 벌은 사물과의 거리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사물과 충돌한다. 하지만 벌은 대칭을 강하게 인지한다. 인동덩굴의 오각형 대칭, 클레머티스의 육각형 대칭, 해바라기의 방사형 대칭, 난초, 완두콩, 디기탈리스의 거울 대칭을 좋아한다. 대칭을 인식해야 먹이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식물 역시 대칭성을 확보해야 더 많은 곤충을 유인하여 진화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대칭은 식물과 곤충이 소통하는 중요한 언어다. ('냄새' 또한 중요한 수단이다.)

대칭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형질이 아니다. 환경에 가장 적합한 식물만이 균형 잡힌 모양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여분'의 에너지를 얻는다. 이것은 대칭적인 아름다운 꽃이 생산하는 꿀이 더 달고 양도 많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동물도 마찬가지로 얼굴의 좌우가 완벽한 거울대칭인 상대를 짝으로 고른다. 대칭은 가장 효율적으로 운동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이것은 먹이를 잘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대칭 모양의 배우자는 더 좋은 DNA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더 대칭적인 사람일수록 어린 나이에 첫 번째 성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겨울 방학이면 수능을 끝낸 수많은 젊은이들이 성형수술을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내 유전자는 우수하다."라는 거짓 정보를 이성에게 흘리기 위한 비용 부담이다. (이에 비해 화장은 성형보다는 (경제적·사회적) 비용이 덜 드는 수단이다.)

대칭을 유전적으로 얻는 것은 어렵지만 많은 자연 현상들은 대칭으로 이끌린다. 대칭이 가장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빗방울을 눈물 모양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진짜 모양은 완전한 구체다. 구는 가장 작은 표면적으로 주어진 같은 부피의 공기를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적은 에너지를 쓴다. 구는 3차원에서 가장 대칭인 형태다.


▲ 보통 그림에서 빗방울은 눈물 모양으로 표현되지만 실제는 완전한 구에 가깝다. ⓒ이정모

같은 원리로 메탄(CH4)은 탄소 원자를 중심으로 네 개의 수소 원자들이 정사면체의 각 꼭짓점에 있는 구조가 된다. 이래야 각각의 수소 원자는 다른 수소 원자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위치하여 에너지가 가장 낮은 배열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 메탄(CH4)의 구조(정사면체) ⓒ이정모

거울 대칭 물질 가운데는 같은 물질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물질이 있다. 아무리 회전시켜 봐야 한 분자가 다른 분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왼손과 오른손이 대칭으로 똑같이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왼손을 오른손 위에 정확히 포개놓을 방법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런 분자를 키랄성(chirality) 또는 손대칭성이라고 한다. 우리 몸에 있는 분자들은 손대칭성인 경우가 많다. 아미노산이 대표적이다. 생명체에서는 언제나 L-아미노산만 관찰되고 그 거울상인 D-아미노산은 보이지 않는다. 아미노산을 다루는 단백질의 배열 때문인데, 단백질의 구조가 그렇게 된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 왼쪽의 L-아미노산은 효소 단백질 구조에 적합하지만 거울대칭인 D-아미노산은 효소 단백질과 반응할 수 없다. ⓒ이정모

생명체와 달리 화학공장은 대부분 손대칭성을 구분하지 못한다. 1957년 독일의 제약회사 그뤼넨탈은 새로운 진정제를 개발했다. 당시에는 약효를 인정하는 논문이 학술지에 실리면 곧바로 시판할 수 있었다. 임신 초기에 나타나는 입덧을 막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이 약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문제는 곧바로 나타났다. 이 약을 복용하면 태아에 혈액 공급이 심각하게 제한된다. 혈액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태아의 팔과 다리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그 결과 사지에 심각한 기형이 있는 아기의 출산이 급격히 증가했다. 탈리도마이드로 인한 기형아가 전 세계적으로 1만 2000~2만 명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R형 탈리도마이드는 임신안정제로 작용하지만 그 거울대칭형인 S형 탈리도마이드는 기형아를 유발했다. ⓒ이정모

우리는 생각도 대칭으로 한다. 여기서 책 354쪽에 나오는 퀴즈 하나를 인용해 보자. 아래 그림과 같은 네 장의 카드와 함께 '한쪽에 모음(母音)이 있는 카드의 반대쪽 면에는 짝수가 있다.'는 정보가 있을 때, 이 정보가 참(true)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카드 두 장을 뒤집어 봐야 할까?


▲ 카드 ⓒ이정모

당신이 A와 C를 골랐다면 당신은 96%의 다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기본적이고 원시적이며 동물적인 뇌에 대응하여, 모든 곳에서 대칭을 찾아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칭에 혈안이 된 나머지 짝수가 있는 카드의 뒷면에서 모음을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나 카드 C 뒤에 자음이 있어도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카드를 고른 다수의 사람들은 'A면 B다'가 참이면 그것의 거울상인 'B면 A다'도 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논리적인 추론은 보통 매우 비대칭적이다. 소수에 속하는 4%만 A와 D를 고른다고 한다.

이렇듯 대칭은 화학, 생물학, 물리학, 심리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대칭의 개념은 수학에서 시작되었으며, 도서출판 승산은 수학의 관점에서 대칭의 문제를 다룬 책을 꾸준히 내는 출판사다. 지금까지 <무한 공간의 왕>(시오반 로버츠 지음, 안재권 옮김), <미지수, 상상의 역사>(존 더비셔 지음, 고중숙 옮김),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이언 스튜어트 지음, 안재권 옮김)를 내었으며, 올해에는 <대칭>(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이 나왔고, 앞으로 <대칭과 아름다운 우주>(리언 레더먼 등 지음)가 나올 예정이다.


▲ 승산의 대칭 시리즈 ⓒ승산

<대칭>(원제 'SYMMETRY: A Journey into the Patterns of Nature')의 저자인 마커스 드 사토이는 옥스퍼드대학교 수학과 교수다. 그는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필즈상의 수상자 대상에서 제외되는 나이인) 40세가 되던 2005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한 해 동안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 독일 본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런던의 대영박물관, 일본의 오키나와 등을 여행하면서 생긴 일화와 대칭의 주기율표를 편찬하는 수학의 역사를 맛있게 버무렸다.


▲ <대칭>(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승산 펴냄) ⓒ승산
세계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100여 개의 원소로 구성되고, 모든 수가 소수(prime number,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뉘는 수)의 곱으로 이루어졌듯이 모든 대칭도 분류하다 보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불가분군(indivisible group)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수학자들의 고민이었다. 수학자들은 대칭의 목록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모험을 시작한다. 그 여정에는 1832년 21살의 나이로 죽은 에바리스트 갈루아를 비롯하여, 콘웨이, 얀코, 헬드, 볼처스 등 유수의 수학자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결국 19만 6883차원에 존재하는 '몬스터군(Monster Group)'을 발견하였고, 마침내 1986년 대칭의 주기율표라고 할 수 있는 <유한군의 아틀라스(Atlas of Finite Groups)>를 편찬하였다. (☞PDF 다운로드 바로 가기)

책을 다 읽은 다음에도 도대체 19만 6883차원의 정체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사실 나는 4차원의 세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19만 6883이라는 숫자는 내가 아는 가장 커다란 세 개의 소수인 71, 59, 47을 곱해서 나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는 5차 방정식을 위한 근의 공식이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며, 대칭에 관한 다른 책을 더 읽고 싶어졌다. 그것을 보면 이 책은 수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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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하여 매주 연재해온 서평코너 '철학자의 서재'가 한권의 책으로 묶였다. 무려 '100명의 철학자'가 쓴 '107편의 서평'이다. '무려'라는 말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규모의 기획이 진행된 전례가 또 있을까 궁금할 정도니까. 혹자는 "'100명의 철학자'라니? 한국의 철학자는 다 동원된 거 아니냐?"란 생각도 들지 않을까?

한국철학계의 동향에 과문한지라 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말 그대로 '한국철학사상'을 연구하는 단체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철연은 시대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진보적 소장 철학연구자들이 모여 1989년에 창립한 학술공동체"다. 1989년에 '소장'이었다면 21년이 지난 지금은 대개 '중견'이거나 '노장' 철학자들이 다수일 법한데 책의 표지에는 '한국의 젊은 지성 100명'이라고 돼 있다. 지난 21년간 함께 연구하며 키워온 '연대의식'이 연재를 이끌어온 밑바탕이었다고 서문에는 적혀 있는데, 어쩌면 그 연대의식이 이 지성들의 '젊음'을 유지시켜온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연대할 때 늙지 않는다?! 아니면 설마 '철학'이 비결일까?

개인적으로 <프레시안>에 자주 드나드는 편은 아니어서 '철학자의 서재' 코너를 꼬박꼬박 챙겨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억에는 <지중해 철학기행>(클라우스 헬트 지음, 이강서 옮김, 효형출판 펴냄)에 대한 서평인가를 통해서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됐고 막연하지만 나중에 책으로 묶이겠거니 짐작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거지만, 그 '나중'은 언제나 '지금'이 된다! '찾아보기'까지 포함해 903쪽의 책이 그래서 내 책상에도 떡 하니 놓여 있다. 푸짐하고 번듯하다. 이 책 한권만으로 어느새 나의 서재 또한 '철학자의 서재'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존재감이 충만하다. 요즘 유행어로는 '미친 존재감'이지만, 손에 들어보니 '미친 무게감'이 마음에 더 와 닿는 표현이다.


▲ <철학자의 서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알렙 펴냄) ⓒ알렙
107편의 서평이 10개의 장으로 분류돼 있으니 비유컨대 아주 푸짐한 뷔페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라고 할까. 니체는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뇌는 우리의 위장을 닮았다고. 그래서인지 독서욕은 때로 식욕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무엇 먼저 읽을까?"는 그래서 "무얼 먼저 먹을까?"와 같은 질문이다. 물론 이런 '식당'에 들어설 때는 미리 소화제라도 챙겨두는 게 좋지만, 그렇더라도 어차피 다 읽을/먹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두고두고 곶감 빼먹듯이 읽어치우는 게 상수의 전략이다.

그건 서평자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미식가처럼 이 코너 저 코너에 들러 맛보기 식단을 음미해보지만, 한편으론 '과식'을 경계한다. 하긴 뇌를 위장에 비유한 니체의 경고도 그런 것이었다. 과식이 위에 해로운 것처럼 너무 많은 지식도 뇌에 해롭다는. 아닌가?

전체적으론 만만찮은 두께와 무게로 다가오지만, 개개의 서평들은 가볍고 경쾌하며 또 느긋하고 여유만만이다. 인터넷 공간을 염두에 둔 서평이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량에서도 비롯된 듯싶지만 그건 서평자들이 책에 대해 갖는 태도와도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경우 서평을 쓰면서 주로 책의 주장과 핵심적인 메시지를 간추리기에 바쁜 편이지만 우리의 철학자들은 그런 거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 "내 책꽂이 한 구석에는 두 권이 책이 나란히 몸을 맞대고 있다."고 시작하거나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여행을 하다가 큰 기대도 없이 들어간 허름한 밥집에서 그 지역의 깊이 곰삭은 맛을 맛보는 것은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는 말로 운을 뗀다. 책을 읽어나가면 이런 능수능란한 서평가들이 '100명'이란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동시에 '인터넷 서평꾼'으로선 긴장하게 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클라우스 헬트의 <지중해 철학 기행>은 내 경우 거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인데, 기억에는 이게 '철학자의 서재'의 서평을 읽고 구입한 책이다. 물론 "650쪽이 넘는, 참 두툼한 책"이어서 아직 완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평은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충분히, 여실히 전달해주었다. 가령 서평자는 헬라스에서 왜 학문이, 그리고 철학이 생겨났는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정관사 문제로 간추린다.

"왜 정관사는 철학이 태어나는 데 산파 역할을 했을까? 정관사는 어떤 말 앞에 붙어서 그 말을 명사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관사가 붙은 말은 실체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정관사가 붙은 말은 무엇이든 간에 그 무엇으로 불릴 수 있다. 자립적인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 관사가 붙는 말은 명사이다. 학문은 바로 이 명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36쪽)

예컨대,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붉다(red)'라는 형용사에도 관사가 붙으면 '붉음(the red)'이란 명사가 된다. 그리고 이 추상명사가 학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헬라스 사람들은 정관사를 갖고서 자유자재로 명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명사들이 개념적 사유의 도구가 됐다. 헬라스 학문과 철학의 탄생 조건이 된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런 정관사가 없었다면 '철학'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고, 철학자란 직업(?)도 등장하지 않았을 테니, '철학자의 서재'도 따로 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정관사인가!

흔히 형이상학의 고유한 물음 형식이 "X란 무엇인가?"(What is X?)라고 한다. 그런 물음에서 X의 자리에 놓이는 것이 명사다. 그런 물음과 궁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명사라는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명사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관사라면, 한국어에는 무엇이 있을까? 명사형 어미 정도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서평은 <지중해 철학 기행>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한국철학'에 대한 궁금증도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렇게 뭔가를 촉발하고 자극하는 것이 서평다운 서평의 몫일 것이다.

물론 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이 따로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철학자들까지?"란 의문을 혹 가지시는가? 철학자들 또한 나름대로 '내부 사정'이 있다는 걸 나는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다. 이런 자문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의 소재나 문제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 속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문제의식이 없었고, 그것들로부터 삶의 지혜를 걸러낼 수 있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러한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한 채 그저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에서만 철학을 찾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철학은 소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비밀스러운 코드로 인식되고 있지는 않은가?" (42쪽)

비록 <통합적으로 철학하기>(휴머니스트 펴냄)란 책의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낸 질문들이긴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반성적 질문이 <철학자의 서재>를 관통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책의 서평 목록에는 소위 '철학서'로 분류되는 책이 의외로 많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또한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시도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소수 전문가들'이 아닌 '우리'가 같이 읽고, 같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짚어보고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가 아닐까. 그럴 때 '철학자의 서재'는 옆집 아저씨의 서재만큼이나 가깝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서평집에 대한 서평은 잘해야 군말이기 십상이다. 무얼 더 보태겠는가. 음식의 맛을 아무리 말로 잘 표현한다고 해도 직접 맛보는 것만 못하다. 그저 일독해 보시길. 가볍지 않은 사유와 무겁지 않은 성찰이 잘 어우러져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고 인식을 확장하는 서평들이 발에 차이는 수준이다. 나도 나름으로는 서평집을 낼 만큼은 읽고 쓰고 했지만, 책에서 다루어진 책들의 목록을 보니 읽지 않은 책이 읽은 책보다 훨씬 더 많다(세어 보니 갖고 있는 책이 절반 조금 못 된다). 그러니 내게도 더없이 요긴한 책이다.

매주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책의 홍수 시대'라고도 하고 '책의 바다'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좌절할 건 아니고, 이런 '좋은 안내서'를 길잡이 삼아 자기만의 독서 여정을 꾸리는 것이 독서인의 보람이고 호사다. 우리는 어쩌면 제법 멀리 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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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말을 하는 직업을 계속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도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거나 이제 막 자신의 진로를 선택한 사람들과 주로 대면했다. 그들은 어떤 생각에서 자신의 일을 골랐을 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언제, 어떤 순간에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느끼는지도. 내가 직면한 고민들에 대한 답을 그들은 어떻게 해소하는지 알고 싶었다.

사회 초년병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똑같이 우연찮게 직업을 선택했고, 또 그 일을 계속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고민하는 시기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당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은 직후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취직 후 6개월 무렵부터다. 갓 입사해 부산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다. 이 무렵이면 다른 선택을 한 대학 동기들 얘기가 들려온다. 동시에 내 선택이 과연 옳았던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 내 경우도 그랬다. 어쭙잖게 언론사에 입사하고 나서 옳은 선택이었나에 대해 끝없이 되뇌곤 했다.

'언론사에 입사할 수밖에 없었던가? 그랬더라도 공채였다면 더 나은 조건으로 입사할 수 있었을 텐데. 기왕이면 더 나은 언론사로 입사할 수 있었을 텐데.'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회생활을 2년 정도 할 무렵에도 또 한 차례 진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시기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가 아니라 대학원으로 진학한 친구들 소식이 전해질 무렵이다. 동시에 입사 동기들 간에도 회사 내에서의 입지를 두고 격차가 벌어질 무렵이다. 대학원에 간 친구들이나, 동기 몇몇이 잘 나가기라도 한다면 고민은 더욱 커진다. 내가 잘 싸울 수 없는 링으로 뛰어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에서의 싸움에서 패해 내동댕이쳐졌을 때의 느낌이 그랬다. 적어도 그 곳은 내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곳은 못 됐다. 왜 진작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불운을 탓하기보다 내 오판을 자책하게 됐다.

반면 선배들은 격동의 2~3년차 직장 생활을 끝내고도, 또 다른 고뇌의 시기가 온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심지어 한 선배는 직장 생활 자체가 매일매일 고뇌의 연속이라는 주장도 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시기는 대개 5년차 무렵이었다. 이때는 입사 동기들끼리도 사내의 입지와 관련해 간극이 꽤 벌어져 있을 때다. 좀 억울한 생각이 들 무렵이다. 무엇보다도 이때를 넘기면 직장인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다른 선택을 할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그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직장에서 붙박이가 돼야 한다. 또 고민할 시기가 다가온다는 얘기는 내게 묘한 위안이 돼 주었다.

그렇게 붙박이 회사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생기는 고민이 바로 '사내정치(office politics)'다. 실제 기업 조직에서 이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은 못해도 관계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우리 기업 문화에서 회사인으로의 성공이 100% 실력과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인사와 같은, 그곳에서 내려지는 결정들 또한 합리적으로 이뤄지지만은 않는다. 그보다는 사내정치라고 일컬어지는, 권력 다툼과 권력자들 사이의 절충의 결과일 때가 많다. 그 결정은 개인의 진퇴를 포함해, 직장 구성원 모두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파괴적이다.

가끔 드라마나 책을 통해 사내정치를 간접 체험할 기회가 오곤 한다. 그럴 때면 직장인 누구라도 그 세계를 힐끔거릴 수 있다. 그러나 회사 상층부의 내밀한 세계 전부가 들여다보이지는 않는다. 하급자 신분에서 그럴 기회를 얻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 세계를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우리가 알거나 상상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경영학이나 경제학 교과서와도 딴판이다. 차라리 퀴퀴한 냄새가 나는 시궁창에 가까운 편이다.


▲ <김 과장&이 대리>(하영춘 외 7인 지음, 거름 펴냄) ⓒ거름
8명의 기자가 취재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이 책, <김 과장&이 대리>(거름 펴냄)는 그 시궁창과 같은 사내정치의 세계와 사람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회사생활과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같은 처지에 있는 직장인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듯하면서 결정적인 어두운 이야기는 쏙 뺐다. 나는 불운하게도, 그 세계를 일찍이 들여다보고만, 전직 직장인에 속한다. 어두운 세계를 들여다봤을 당시 나는 격분했다. 그 결과 그 세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후회는 없지만 다시 입사해 같은 상황을 맞는다고 해고, 마찬가지로 할 것이다. 그러나 훨씬 더 효과적으로 싸울 것이다.

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분들께 하고 싶은 충고 역시 마찬가지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난 언젠가 그만둘 거라고 사내정치를 완전히 외면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내정치를 포함해 조직의 어두운 면을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 점을 이용해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이나 출세를 하든, 아니면 그것과 싸우든 간에, 불의 속성을 잘 알아야 불을 활용할 수도, 제대로 끌 수도 있다.

<김 과장&이 대리>는 샐러리맨들의 이야기다. 상사와 하급자의 관계, 사내 연애, 성희롱, 땡땡이치는 기술, 회식과 출장, 승진과 이직 등 직장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가감 없이 담겨있다. 상황도 그대로 묘사돼 있고 표현도 현실의 언어 그대로다. 그래서 현장감과 공감대는 있으나 그 이상의 대안과 역동성이 없어 지루한 면도 있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참고 열심히 해야지'라는 결론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회사는 닫혀 있는 우리다. 우리는 매일 그 우리 속으로 들어가, 물어뜯고 물어뜯기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불행하게도 그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회사 생활을 하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우리는 우리의 편을 찾아 헤맨다. 지친 마음을 달래 줄 동기와 후배, 그리고 선배를 찾아 헤맨다. 그들 품에서 비로소 살벌한 회사 생활도 해 볼만 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1만 명의 김 과장과 이 대리가 그 품이 돼 준다.

직장 생활은 누구나 겪어 왔던 일이다. 어떻게 경험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비탄에 잠길 일도, 최고로 기쁜 일이라고 소리 높여 외칠 일도 아니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또 즐길 일이다. 김 과장과 이 대리에게 드리고 싶은 개인적인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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