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 그러니까 앨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를 읽을 필요가 없다. 당신이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분노하는 한 말이다.

왜 분노하는지 알 만하다. 이념이 다르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다르더라도 대화와 토론 그리고 논쟁을 통해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책에 그리 나왔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살면서 토론은 고사하고 대화가 되는 보수를 만나보지 못했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몽니 부릴 줄은 알아도, 보수라는 간판을 내걸고 저질렀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논리적 근거를 들어 반대파를 설득하려는 관용을 확인해본 적도 없다. 도대체 이 나라에 보수가 어디 있느냐, 수구라는 말도 반드시 꼴통이라는 말고 합쳐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보수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한데, 그 지배의 논리를 확인하려는 책을 읽어 필요가 무에 있겠는고. 아니, 그들에게 논리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분명히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는 당신은 이 책, 안 읽어도 된다.


▲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앨버트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웅진 지식하우스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 나라의 보수에서 무슨 독창성과 자율성을 엿볼 수 있는가. 자유주의를 주창하시고, 한동안 수세에 몰리다 신자유주의를 창안하시사 세상을 다시 멋지게 지배하는 논리를 만들어낸 집단이 있지 않은가. 미국산이면 어떻고 일본산이면 어떻던가. 마구 들여야 이리저리 짜깁기하고, 침소봉대하고, 왜곡 확산하여 지금껏 지켜온 것을 한 톨도 손아귀에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면 된다고 여겨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아류를 보고 한탄하지 말고 본류의 논리를 알아두는 것은 여러모로 좋은 법. 보수의 논리적 토대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를 격파할 날카로운 저항의 논리를 벼리고 싶은 당신은, 그러니, 그 보수의 수사를 명쾌하게 파헤친 이 책, 읽을 필요가 있다.

머리 아프게 논리 싸움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여기는 당신은, 반성해야 한다. 흔히 이념이라 말하는 것이 먼저 사람들의 정신을 장악해야 비로소 현실을 지배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라고?

막스 베버부터 읽어보라. 늘 현실에서는 판판이 지면서 도덕적으로 보수를 무시만 해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침투하라, 그리고 그들이 구축한 논리의 구조를 정확히 인지하라. 그러고 나서 내파하라.

이 책이 바로 그 길로 이끄는 훌륭한 안내서다. 그러니, 이 책이 올해의 책이 될 만하지만,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올해의 책이 되지 못한 책이라 칭찬받을 만하지 않은가.

당신에게 해주는 귓속말 한마디. 적어도 이 책의 분량은 독서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만하니, 지금 읽는다면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안에 다 읽을 수 있을 터다. 그러니, 올해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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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 토요일, 또 한명의 젊고 의욕 넘치는 여성이 결혼을 하고야 말았다. 석사 학위 논문을 쓸 때 필자가 지도했던 학생이었다. 지금은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미리 만나서 축하는 해주었지만 그 학생이나 필자나 마음 한구석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학생으로서 학자로서 사회인으로서 그녀가 앞으로 감당해야할 짐의 중력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에서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기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새삼 말을 꺼내기조차 어색하다. 우리들은 결국 결혼 후 그녀의 생활에 대한 염려어린 이야기들로 그 귀중한 짧은 만남을 소비해버리고야 말았다.

책 한권을 결혼 선물로 주기로 진작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다만, 결혼식은 대전에서, 신혼여행은 호주로, 신혼집은 대전과 위스콘신에 각각 따로 마련하는 사정을 감안해서 그 책은 미국 집으로 직접 보내기로 했다. 필자가 고른 책은 세라 블래퍼 하디의 <어머니의 탄생>(황희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이다.


▲ <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세라 블래퍼 하디 지음, 황희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선물로 이 책을 떠나보내기 전에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몇 달 전 처음 이 책을 펼쳐봤을 때, <어머니의 탄생> 속에는 그야말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더구나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여성의 본성을 재확립하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특히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에 대해서 방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3부는 '일하는 어머니'를 둔 필자가 때로는 공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신반의하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과학자로서 한 세대를 앞서 살았던 하디의 치열하지만 고달팠고 갈등 속에서 타협해 갔던 그녀의 긴 인생 여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정해진 직업은 없었지만 늘 여러 직함을 갖고 사회 활동을 하셨던 할머니, 그리고 네 아이의 어머니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인으로 학자로 며느리로 아내로 좌충우돌 세상과 갈등하고 타협하며 모순 속에서 평생을 사셨던 어머니가 겹쳐 읽혔다.

이 책을 이들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다. 잠시 동안의 각성을 금방 망각하곤 하는 필자 때문에 (여기엔 필자 몸속의 유인원적 본성도 한 몫하고 있다.) 일하는 엄마로서의 고단한 삶이 더욱 고달파지곤 하는 아내에게 이 책을 꼭 읽어주고 싶다. 아니 이들의 남편, 남자 친구, 동료에게 이 책을 먼저 권하고 싶다. 출산, 육아부터 교육까지 어머니의 개인 '역할' 몫으로 떠넘기곤 하는 여전히 야만인 이 시대에, 만들어진 본성에 대해서 자각하고 만들어지고 역할 지워진 죄의식에서 벗어나는데 약간이나마 위안이 될까 하는 이유에서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책이 꼭꼭 숨어있는 것 같아 늘 안타까웠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더욱 아쉬웠다. 문득, 이번 연말연시 선물은 이 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올해가 가기 전에 새 신부에게 필자가 다시 읽은 <어머니의 탄생>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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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는 <김예슬 선언문>을 보고 "이렇게 글을 잘 쓰니 자기 소개서도 잘 쓰겠다"라고 부러워했다지만 나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김예슬은 무슨, 지들이 훨씬 잘 쓰는구먼. 어떻게 대학생들이 이렇게 글을 잘 쓰지" 싶었다. '진심'.

여기서 '그들'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에서 저자 엄기호의 수업을 듣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리포트로 써 낸 덕성여대·연세대 원주 캠퍼스 학생들이다.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그들의 글을 읽었을 때 치밀어 오른 저 한 줄에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하는 이유가 담겨있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하나는 고백하기 부끄럽고도 매끄럽게 설명되지 않는 이유다. 지금 내가 글 써서 밥 벌어 먹는 입장인 까닭이다. 가진 거라곤 이 재주뿐이니 내게만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으면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좋은 글을 쓰는 또래들을 볼 때마다 치졸하니 초라한 감정이 솟구친다.

이 지질한 감정은, 단순히 기자를 진로로 선택한 사람으로서의 알량한 자의식 말고도, 무엇이 됐든 비교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위태로워진다는 생존의 불안감과도 연결돼 있다. 당연히 대학 때는 더 심했다. 비영어권으로 유학을 간다든지 다른 애들 취업스터디 할 때 영화 동아리나 시민단체에서 시간을 보낸다든지, 짐짓 남달라 보였던 행동은 한 꺼풀 벗기면 비교우위를 하나라도 더 가지려는 몸부림이었다.

연애 경험도 '잉여' 짓도 특이한 취향도 어떻게든 '스팩(Specification)'에 포함시켜야만 마음이 편했던 시절, 고만고만한 범인(凡人)들끼리 서로의 불안을 눈치 채면서도 솔직한 얘기를 꺼내놓지 못했다. 누굴 탓하거나 구조에 대들거나, 그도 아님 혼자 '대학은 기업의 하청 업체'라며 피켓을 들 자신도 없이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이 얘기를 한다. 별것도 아닌 기득권을 버리지 못하고 "너희들은 속물"이라는 기성세대의 비난을 감수했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짱돌을 들라"는 외침에 뒷머리를 긁거나 'SKY' 출신 20대 저자들의 고백조차 '남다른 스펙'이라며 부러워했던 이유, 김예슬의 선언 내용이 아니라 그의 학벌과 글 솜씨를 쳐다보고 있었던 이유와 맞닿는다. 그 기록이 나의 치졸한 욕망을 상기시킬 정도로 훌륭한 글이었으니, 참으로 묘한 경험이었다. 질투는 '너희들도 이런 발가벗겨진 느낌에서 이런 고백을 했겠구나' 하는 공감으로 귀결됐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글을 잘 썼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학생들의 과제물을 취합한 저자나 책으로 엮어낸 편집자가 손을 댔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그 글을 보고 탄복한 것은 문장 구조가 탄탄했단 사실과는 무관하다. 설사 원본은 맞춤법이 다 틀려 있었더라도 중요치 않다. 글이 좋았던 이유는 그들의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많은 이들이 20대들이 유아 상태에 머문 채로 성장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언어가 없고, 언어가 없으므로 세상을 읽지도 세상에 개입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 속에서 이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언어로 사고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글이나 속에 담겨 있는 통찰에 빛이 났으며) 그 언어는 엄기호가 다음 질문을 던지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만일 이 책이 '아, 이 친구들도 자신의 언어로 사유하는구나' 하고 그들의 말을 발견하는 데 그쳤더라면, 그래서 확성기를 들이대고 말았더라면 '이것도 청춘이다' 정도의 박력밖에 갖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제목은 '저자의 언어'로 되묻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엄기호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나는 어떤 언어로 그들과 만나려 했는가', '또 나의 언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인식하게 했는가'를 사유함으로써 자신 역시 성장했다고 밝힌다. "영어로 말한다면 이 책이 20대들과 연결되는 전치사는 'with'이고", "그들은 나의 지적 파트너였으며 도반(道伴)이었다"고 고백하는 대목에서 이 책은 확실히 '엄기호의 성장기(記)'로 읽힌다. 이들의 수업은 가르침을 주는 쪽과 받는 쪽 모두에게 "남의 언어로 떠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언어로 말하는 힘, 그리고 그에 대해 팽팽하게 긴장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했다.

기업의 하청 업체가 되어버린 대학, 그 안에서도 취직과 상관없는 교양 수업에서 이런 만남과 기록이 가능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그 대화를 놓치지 않고 책으로 묶어낸 부지런함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대학생들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교실 안팎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래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한 사유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믿음에도 기대를 걸게 한다.

그럼 언어의 무게를 깨달은 이들의 다음 과제는 무엇일까. 저자 엄기호와 덕성여대 학생 윤희정의 대담으로 진행된 이 책 관련 기사 (☞'프레시안 books' 13호 : '20대는 '찌질이'? '486'한테 보고 배운 것뿐인데')에서 찾을 수 있다. 소통이며 관계 맺기다. 그리고 이제는 20대를 비난했던 기성세대가 답할 차례다.

"사람은 약하다. 한 사람이 '정치화'하려면 수많은 장치가 필요하다. 486세대는 한 번 자신의 20대의 경험을 돌이켜보라. 학회, 동아리, 교지, 신문, 유인물, 현수막 등…. 이 모든 정치화의 장치의 수혜를 486세대는 듬뿍 받았다. 그리고 이런 장치를 계기로 수많은 관계가 만들어졌고.

그런데 이런 장치의 절대 숫자가 줄었는데 20대 보고 "너희는 왜?" 하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질타다. 나는 20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교수, 강사, 시민운동가,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는가?'"

'올해의 책'은 역설적이게도 '굳이 올해가 아니어도 괜찮은 책'들이다. 그리고 시대를 잘 읽은 책들은 꼭 시대를 뛰어 넘는다. 그러니 이 책을 집어 드는 건 굳이 올해가 가기 전이 아니어도 좋고, '이 시대의 20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 진지한 고백은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며, 자신을 성장하게 한 사람의 이야기는 구구절절 사려 깊을 수밖에 없다.

약간은 감동적이기까지 한 '수업 이야기'는 사례(Example) 연구에 게으른 학자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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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근대 학문이 서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학술 용어도 대부분 서양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학술 용어는 대부분 동아시아 삼국 중 근대화가 앞장섰던 일본 '난가쿠(蘭學)'의 성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국의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환영을 받았다. 아마도 한자는 새롭게 헤쳐모이기가 쉽고 한 두 단어로 의미를 전달하기 있기 때문을 주목을 받았으리라.

오늘날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서양의 학술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까를 두고 두 가지 풍경이 있다. 하나는 용어의 기원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실제로 쓰이는 용례를 주목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전자의 목소리가 후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개념 하나를 두고서도 무식하다니 뭘 제대로 모른다는 소리가 쉽게 나온다.

예컨대 신(god)을 말하면 동아시아에는 유일신 개념이 없으므로 신 앞에 자연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거나 신적 존재와 같은 식으로 쓰여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 실체(reality)를 말하면 동아시아에는 자기 원인을 가진 자족적 존재가 없으므로 실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아예 본체(本體)라는 말을 만들어서 쓰기도 한다. 아니면 '시뮬라크르'처럼 역어 없이 원어를 발언대로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개념이 발원지에서 쓰이는 대로 똑같이 쓰여야 한다"는 규범적인 목소리가 유독 강하다. 이런 관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념을 자유롭게 쓰기보다 뭔가 눈치 보게 만들고 주눅 들게 만든다. 그래선지 지난 날 '막 돼 먹었다'는 말을 제치고 요즘 '개념이 없다'는 말이 최상의 욕설(비난)이 되었다.

한국에서 학문과 일상을 넘나들면서 개념의 오남용으로 단골 시빗거리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선뜻 대답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빨갱이'와 '좌파'·'우파'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1980년대 분석철학이 나름대로 맹위를 떨칠 때 왜 '빨갱이'를 언어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느냐고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정작 따지고 들어가면 뭔가 특별한 기원도 없고 신묘한 의미도 없는 것이 학문만이 아니라 사회·정치 분야에서 얼마나 싸늘한 칼바람을 일으켰던가?

우리는 붉은 악마 덕분에 '레드'에 좀 느긋해졌지만 아직도 빨갱이라는 말에 정색을 하게 만든다. 지난해 김득중의 <'빨갱이'의 탄생 : 여순 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선인 펴냄)이 나왔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환호작약했다. 그렇게 말로만 떠들던 빨갱이가 어떻게 생겨나서 사람을 때려잡게 되었는지 촘촘한 글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가 정확하게 쓰였는지 규범적으로 따지기보다 실제로 어떻게 활용되고 거래되었는지 내막을 알 수 있었다.


▲ <좌우파 사전 :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구갑우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이번에 나온 구갑우 등이 쓴 <좌우파 사전>도 <'빨갱이'의 탄생>에서 느꼈던 기쁨을 또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 말을 들은 지 10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이들을 '낙인'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수구 꼴통, 급진, 중도, 보수, 통합 등 숱한 유사 짝퉁 용어를 만들어 한편으로 불도장의 세례를 피하려고 했고 다른 한편으로 상대를 불도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정작 좌파와 우파의 프리즘으로 한국의 현실을 촘촘하게 들여다보는 데에 게을렀다.

하지만 너도나도 붉은 악마의 티셔츠를 입었듯이 <좌우파 사전>도 무거운 좌파와 우파를 사용하면서 국민주권과 대의제를 포함해서 22가지 의제를 설정해서 아주 경쾌하게 한국 현실을 세로로 끊어보고 가로로 끊어본다. 좌우를 종횡으로 엮다보니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들추어보게 하고 나아가 미래를 상상해보게 만든다.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이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의 성과에 대해 놀라기도 하고 반기기도 한다. 정작 빨갱이와 좌파·우파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만들어낸 전통'과 '상상해낸 공동체'에 대해 관심이 약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에서 서양의 학술 용어(개념)의 옷을 매끈하게 잘 차려입은 '모던 보이'나 '포스트모든 걸'이 나올지언정 홉스봄과 앤더슨이 나오기가 어렵다.

두 사람이 한국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면 서양에 기원을 둔 여러 가지 학술 용어를 규범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두 눈을 부릅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주목하고 그런 성과에 눈과 귀를 열어야겠다. <좌우파 사전>은 600쪽이 넘는 꽤 두툼하지만 눈을 비벼가면서 읽을 만하다. 이로써 한국의 현실을 이론으로 재구성하고 다시 이론으로 현실의 인식과 변화를 인도하여 '만들어진 한국 근대'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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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빗나갔다. '프레시안 books'가 책 좋아하기로 소문난 서른세 명의 서평위원에게 '올해의 책' 추천을 의뢰할 때만 해도 올해의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란 무엇인가> 대신에 다른 책 두 권을 선택했다.

'프레시안 books'가 뽑은 2010년 '올해의 책'은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다. 시장 권력을 대표하는 삼성을 정면 비판하는 책과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이다.

이 책들은 각각 1월 말과 10월 말에 출간돼 2010년을 열고 닫으며, 시장이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는 한국 사회에 성찰을 촉구했다. 지금 이 책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2008년, 세상이 변했다!

시작은 2008년이었다.

한 100년이 지나고 나서, 많은 역사학자는 2008년을 '역사의 갈림길'로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 해를 기점으로 세상이 또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8년 2월 25일 대기업 CEO 출신의 대통령이 취임했다. 전직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자조적으로 토로하고 나서, 실제로 정치권력을 자유 시장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전직 CEO가 가져간 것이다. 대통령 선거 내내 지도자의 자격과 자질을 의심케 하는 의혹이 숱하게 제기되었으나 시민들은 그에게 표를 던졌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모두 시장이 가져갔다. 자유 시장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채 100일도 안 되어 사람들은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머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죽는다는 전염병을 무서워한" 몇몇 10대를 따라서 연인원 수십 만 명의 시민이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촛불을 들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제기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질문이었다.

"한국 경제를 미국 경제에 통합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검역 주권 같은 것은 포기해도 되는가?"(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국민의 생명을 기업에 맡기는 의료 보험 민영화를 받아들여야 하는가?"(의료 보험 민영화 반대!)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산과 강을 마음대로 파헤쳐도 무방한가?"(한반도 대운하 반대!)

이렇게 한국에서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자유 시장의 천국 미국에서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 해 가을,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월스트리트의 내로라하는 투자 은행들이 줄줄이 쓰러진 것이다. 부동산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을 금융 상품으로 만들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월스트리트가 사실은 서서히 늪으로 빠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혹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 있는)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다. '자유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재앙이 씨앗일 수도 있구나!' 이제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맞은편에 바로 <삼성을 생각한다>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이 두 권의 책이 놓였다.

<삼성을 생각한다>


▲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사회평론
2008년 4월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별다른 성과 없이 삼성 비자금 수사를 종결지었다. 변호사 김용철이 2007년 10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서 삼성 비자금 조성 사실을 폭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삼성으로 상징되는 시장 권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김용철의 폭로가 이렇게 성과 없이 끝나면서, 삼성 비자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 역시 잊혔다. 그는 의뢰인 하나 없는 변호사 사무실을 4개월 만에 접고서, 2008년 말 경기도 부천에서 빵집을 열었다. 삼성은 이기고 그는 패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삼성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는데 평생을 바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을 한 터였다.

김용철은 2008년 12월 삼성과 인연을 맺고 나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좀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후배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한 초고의 일부를 평소 신뢰하던 <프레시안>의 기자 성현석에게 검토를 의뢰했다. 2009년 2월의 일이었다.

그 때부터 김용철은 성현석과 매일 만나며 최종 원고를 완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초고를 읽은 성현석이 질문하고 김용철이 답하면서, 글을 더하고 더는 작업이 두 달간 계속되었다. 이런 토론 과정을 통해서 <삼성을 생각한다>는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라, 시장 권력을 상징하는 삼성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진단하는 책으로 탄생했다.

이렇게 최종 원고가 마련이 되었으나 책의 출간은 간단치 않았다. 2009년 6월부터 크고 작은 출판사에 책의 출간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번번이 부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원고의 완성도를 문제 삼는 출판사도 있었고, 삼성을 비판하는 책을 내는 것이 부담스럽다 솔직히 거절하는 출판사도 있었다.

거의 출판을 포기할 즈음에 출판사가 나타났다. 그 해 10월, 김용철은 성현석의 지인을 통해 소개 받은 사회평론과 접촉한다. 그리고 2010년 1월 사회평론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간한다. 애초 김용철은 책의 기획 단계부터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전종훈이 권한 제목 "삼성은 무죄다"를 염두에 뒀으나, 출판사 측에서 출간 직전에 "삼성을 생각한다"를 제안했다.

출간 이후의 상황은 잘 알려진 대로다. 대부분의 언론이 기사로 책을 언급하는 것뿐만 아니라 광고조차 꺼렸다. 심지어 <국민일보>(2010년 3월 5일자)는 <삼성을 생각한다>를 다룬 기사("홍보도 못했는데 베스트셀러, 누구냐 넌?")에서 책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아서 화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삼성을 생각한다>는 12월 20일 현재 총 약 15만6000부(18쇄)가 출고되었다. 초기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일부 누리꾼이 '트위터' 등을 통해서 이 책의 출간 사실을 홍보하면서 5주 만에 7만5000부가 나갔다.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한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집필, 출판, 독서가 하나의 '사건'이자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책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부키
다시 2008년으로 돌아가자. 앞서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 : The Myth of Free Trade and the Secret History of Capitalism)>을 출간한 장하준은 한 편집자(아이반 멀케히)로부터 새로운 제안을 받았다. "세계 금융 위기를 놓고 새로운 책을 써 볼 생각은 없는가?" 이런 제안에 그는 다른 책을 떠올렸다.

'현재의 금융 위기를 분석하는 책이 아니라, 이런 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보는 책을 한 번 써보면 어떨까?'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앞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미국 출간을 담당했던 편집자(피터 기네이)는 아예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라는 제목도 제시했다. '23'은 장하준과 편집자가 상의하는 과정에서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숫자를 고르다 선택한 것이다.

나중에 기네이는 스물세 장의 맨 앞마다 핵심 주장을 요약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를 넣자는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장하준은 기네이의 제안에 따라서 세계 금융 위기를 낳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열거하고, 그 중 스물세 가지를 꼽아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했다.

이렇게 준비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지난 8월 영국에서 나오자마자 현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영국의 <가디언>이 지난 9월 29일 사설에서 이 책을 거론하며 영국 노동당 대표 에드 밀리밴드에게 장하준과 점심을 함께하라고 권한 사실은 유명하다. (밀리밴드는 장하준에게 아직까지 점심 요청을 하지 않았다.)

다른 언론도 호평 일색이다. 진보 성향의 <가디언>("자본주의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의 가치는 따질 수 없을 만큼 귀하다")은 물론이고 보수 성향의 <더 타임스>("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조차도 일독을 권했다. 가장 눈에 띄는 서평은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뉴스테이츠먼> 서평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케인스 전기(<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작가로 유명한 역사학자 스키델스키는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 나온 세 권의 경제학 책을 평가하는 서평('For a new world, new economics')에서 "장하준의 책이 가장 성공적이다(Of the three books, Chang's is the most successful")고 평가했다.

(<동아일보>의 김순덕은 지난 13일 한 칼럼('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들')에서 이 책에 대한 스키델스키의 서평을 비롯한 영국 언론의 서평을 언급하면서 '현지 언론 서평 대부분이 (장하준의 책을) 혹평했다'고 썼다. 진지한 서평이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책의 한계를 언급한 부분을 침소봉대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왜곡에 가까운 터라 이렇게 따로 언급한다.)

영국에서 나온 지 3개월 만에 국내에서 출간된 이 책은 12월 23일 현재 약 22만4000부가 출고되었다. 이런 판매 속도는 지난 5월에 출간돼 65만 부가 넘게 팔린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빠르다. 특히 3~40대 독자(386 세대?)의 반응이 뜨겁다. 지난 2005년 <쾌도난마 한국 경제>(부키 펴냄)에서 장하준과 대담한 정승일은 이 책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민주주의를 꿈꾸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던 이 나라 386 세대의 필독서다. 더 정의롭고 더 공정한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 역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다른 시선, 한 목소리

<삼성을 생각한다>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비롯 시선의 초점은 다르지만 똑같이 시장 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때문에 겹치는 목소리도 많다. 예를 들자면, 두 책은 2011년 임시국회에서 비준을 앞둔 한미 FTA를 놓고 한목소리로 반대한다. 김용철과 장하준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집권했지만, 실제로는 재벌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삼성과 아주 가까웠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의 발언은 사실상 삼성에 대한 굴복 선언이었다. (…) 그의 이런 태도가 정점에 다다른 것은 재벌과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고 서민에게 불리한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였다. (<삼성을 생각한다>, 399쪽)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은 제대로 작동한 적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은 자신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때에는 그런 정책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난 30년 동안 이 정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성장률 둔화와 수입 불균형 등의 부작용을 떠안아야 했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해서 부자가 된 나라는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107쪽)

두 책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시장 권력, 즉 재벌과 같은 기업의 권력을 통제하는 데도 한목소리를 낸다. 흔히 장하준이 '재벌에 관대하다'는 비판이 있으나, 이 책에서 그는 외국 자본 통제만큼이나 기업을 길들이는 일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역시 김용철과 장하준의 목소리가 겹치는 부분을 직접 읽어 보자.

삼성은 자칭 '글로벌 기업'을 내세우지만, 철저히 국내 기득권에 안주했다. 내가 삼성 비리를 공개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건희가 삼성 본사를 해외로 옮기면 어떡하느냐"며 불안해했다. (…) 터무니없는 불안감이다. 삼성은 본사를 해외로 옮길 수 없다. 철저히 내수 위주인 금융 및 소비재 사업, 중소기업에 비용을 떠넘기는 거래 관행, 정부의 다양한 지원 등 국내에서 누리는 이점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삼성을 생각한다>, 436쪽)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 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52쪽)

이밖에도 두 책에서 겹치는 목소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흔히 두 책을 놓고 쏟아지는 비판("대안이 이상적이다 혹은 비현실적이다!")은 이런 한 목소리를 일별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이 채워 넣어야 할 몫이리라. 2010년, 이 책들은 우리에게 시장 권력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자,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후기 : '올해의 책'을 뽑고 나서…

수많은 책 중에서 몇 권을 추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저자, 역자, 편집자, 제작자, 디자이너 등 한 권, 한 권마다 많은 이들이 손이 가는 책의 경중을 따져서 몇 권만 추천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2010년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올해의 책' 선정 과정에서 <삼성을 생각한다>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두 권과 함께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책은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은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푸른숲 펴냄)이었다. 빼기가 아까워 두 권에다 이 책을 더 해서 '올해의 책'을 세 권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정도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이 책은 20대가 한국 사회와 기성세대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귀를 기울임으로써, 역으로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2007년 <88만 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가 나오고 나서, 등장한 20대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에 정작 20대의 목소리가 빠져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책의 의미는 각별하다.

개인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이 책은 2010년 '프레시안 books'에서 다뤘던 책 중에서도 각별하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나서 엄기호의 말대로 "20대와 함께 우리 시대에 대해서 어떤 새로운 언어와 삶, 그리고 기획을 생산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장 권력과의 싸움에 20대가 동참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겠는가?

(☞'프레시안 books' 13호 : 20대는 '찌질이'? '486'한테 보고 배운 것뿐이데…)


▲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더글러스 러미스·쓰지 신이치 지음, 김경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프레시안 books'에서 "생태·환경 책을 다루는데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종종 받는다. 새해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당 분야의 책을 주목해볼 생각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올해 눈에 띄는 생태·환경 책이 유난히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중에서 돋보이는 책은 더글러스 러미스와 쓰지 신이치의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김경인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이었다.

<경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이반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로 이미 성장에 관한 묵직한 고민을 던졌던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을 경청하다 보면, <삼성을 생각한다>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따져볼 수 있다. '생태'와 '평화'의 조건을 묻는 러미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세상은 지속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books' 16호 : 70만 개 마을이 자급자족! 군대도 없다! 이 나라는?)

<에코로지와 평화의 교차점> 외에도 외국 저자의 책 중에서 11월에 출간돼 주목을 받았던 앨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도 많은 추천을 받았다. 이 책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어떤 논리를 동원하는지 간파하고 싶은 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프레시안 books' 18호 : 세상을 지배하는 세 가지 논리, 예외는 없다!)

이밖에도 조지 오웰의 책(<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왜 쓰는가>), 앨리 러셀 훅실드의 <감정 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이가람 옮김, 이매진 펴냄) 등도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혔다. 또 <하우스 푸어>(김재영 지음, 더팩트 펴냄), <천안함을 묻는다>(창비 펴냄) 등의 시사 쟁점을 다룬 책도 주목을 받았다.

(☞'프레시안 books' 1호 : '강남 거지'의 등장? 악마의 초청장을 찢어라!)

(☞'프레시안 books' 2호 : 천안함과 사람들…"필요한 데에 필요한 물건 나와!")


'올해의 책' 어떻게 선정했나?

서른세 명 서평위원으로부터 권 수 제한 없이 자유롭게 추천을 받았다. 12월 14일 많이 추천된 책을 놓고 기획위원, 기자들이 토론을 통해서 두 권을 선정했다. 사실 <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추천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2010년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데 큰 논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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