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 2004년 여름. 김천에서 자두 농사를 짓던 농민이 피의자 신분으로 김천경찰서에 출석했다.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방송한 "자두가 피로 해소, 산성 체질 개선, 신장병·골다공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한 게 문제였다. 자두를 의약품으로 혼동할 우려가 있는 광고를 했다는 것이다.

#장면 2 : 2007년 가을. 수원의 어느 쌀가게 주인이 급하게 변호사를 찾았다. 평생 경찰서 한 번 드나든 적이 없었던 그는 검사에 의해 기소되어 형사 법정에 서야 할 형편이었다. 그가 이런 딱한 신세가 된 것은 농촌진흥청이 2002년 품종 개발한 쌀 '고아미' 탓이었다. 고아미는 일반 쌀에 비해서 섬유소 성분이 많이 든 기능성 쌀.

농촌진흥청은 임상 시험에서 이 쌀이 체중 감량, 심혈관 질환 등에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 쌀가게 주인은 이런 농촌진흥청의 발표를 근거로, 쌀을 판매하면서 "고아미가 체중 감량, 당뇨·변비·고혈압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고 광고했다. 바로 이것이 검사가 그를 형사 법정에 세운 이유였다. 쌀을 의약품으로 혼동할 우려가 있는 광고를 했다는 것.

#장면 3 : 이렇게 농민, 쌀가게 주인이 검찰, 경찰에 의해서 범죄자 취급을 받는 동안 주로 미국에서 생산한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 콩 등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런 유전자 조작 먹을거리의 수입을 놓고 정부가 마련한 한 고시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했다.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

"아직 그 안전성조차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해서는 국민의 건강을 보호·증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부러 규정해 주는 반면, 사람들이 오랫동안 안전하게 먹어온 일반 식품이 사람의 건강과 생명에 이바지하는 독자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정의롭지 않다." (72쪽)

지난 2008년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를 파헤쳤던 송기호 변호사가 돌아왔다. 2년 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한미 간의 협상 내용에 돋보기를 들이댔던 송 변호사는 <맛있는 식품법 혁명>(김영사 펴냄)에서 먹을거리를 지배하는 온갖 법령의 실체를 낱낱이 해부한다.

송기호 변호사는 이 책을 쓰고자 지난 5년간 총 124차례의 정보 공개 청구를 포함한 온갖 자료 수집에 몰두했다. 그렇게 탄생한 이 책을 한 쪽, 한 쪽 읽다 보면 쓴웃음,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송 변호사가 생소한 식품법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식품법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나?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서초동의 사무실에서 송기호 변호사를 만났다.


▲ 송기호 변호사. ⓒ프레시안(손문상)

유전자 조작 식품 vs 개고기

프레시안 : <맛있는 식품법 혁명> 곳곳에 논란이 될 법한 예가 많다. 유전자 조작 식품 허용과 개고기 금지를 대비시킨 부분과 같은….

송기호 : 통상법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농업과 식품이다. 그래서 국내 최초로 식품 법령을 해설하는 책을 계획했다. 그런데 먹을거리를 규제하는 온갖 법령을 살펴보니, 수많은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런 문제의 원인을 하나씩 추적하다 보니, 해설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고발'이 목적인 책이 나온 셈이 되어서 나로서도 당혹스럽다.

유전자 조작 식품과 개고기는 그 한 예이다. 동물 보호 단체 분들을 자주 뵙는 처지에서, 개고기를 말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한국의 먹을거리를 둘러싼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라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한 사회가 먹을거리를 어떻게 승인하는가?

오랜 섭취 경험을 근거로 먹을거리를 승인한다. 이게 가장 기본적인 답이다. 그런데 이런 통상적인 승인 규범을 깬 것이 바로 유전자 조작 식품이다. 이것이 인류 앞에 등장한 것은 채 20년이 안 된다. (1994년 유전자 조작 토마토가, 1996년 유전자 조작 콩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시판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밥상으로 검증된 원칙 없이 진입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식용유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전자 조작된 물질이 파괴된다는 핑계로) 유전자 조작 콩으로 만든 식용유가 유전자 조작 표시 없이 소리 소문 없이 밥상을 점령했고, 2008년부터는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먹는 과자, 빙과류, 음료수, 중국 요리 등에 사용될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채 10년도 안 되어서 최종 안전 검증이 끝나지 않은 유전자 조작 식품이 밥상을 점령하고, 우리 뱃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식품의약품안전청과 같은 기관에서 안전성 검증은 제대로 했을까? 아니다. 심지어 이 기관으로부터 2008년에 1억5000만 원을 지원 받은 한 연구 결과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아직까지는 유전자 재조합 식품에 대한 알레르기 위험성이 없다고 추정되지만, ① 알레르기 질환의 발생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 ② 제한된 수의 환자 혈청만으로 선별 검사를 시행한 점 등을 고려하면 유전자 재조합 식품의 알레르기 위험성에 대한 결론은 아직 이르다고 할 수 있다" (100쪽)

프레시안 : 개고기는 유전자 조작 식품과는 상황이 정반대다.

송기호 : 그렇다. 개고기는 그 찬반 양론을 떠나 적어도 식품법의 관점에서는, 이 땅에서 오랫동안 먹어온 안전한 먹을거리다. 또 의학에 밝았던 정약용이 귀양 간 형 정약전의 건강을 걱정해서 권했을 정도로 건강에 도움이 되는 먹을거리였다. 또 지금처럼 소, 닭,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옛사람들에게 개고기는 아주 유용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개고기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나? 1983년, 당시 서울시장 김성배가 서울시에서 개고기 판매를 금지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20년이 가까워오도록 사실상 전국에서 '금지 식품'이 되었다. 개고기 섭취를 불법으로 하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 개고기를 식용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해야 하는데, 서울시장이 엉뚱하게 효력도 없는 금지를 한 것이다.

이런 서울시장의 금지 탓에 개고기는 '유령 먹을거리'가 되었다. 개고기는 위생 검사를 제대로 받지 않은 채 도축되고, 유통된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개고기를 찾는데, 사실상 정부가 그것의 규제를 방치한 상태다.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면, 개고기를 이렇게 유령 먹을거리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프레시안 : 개고기를 '혐오 식품'으로 보는 사람들, 특히 동물 보호 단체는 이참에 개고기 불법을 주장할 것 같다.

송기호 : 먼저 동물 보호 단체가 잔혹한 개 도살을 반대하는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한다. 다만 개고기를 유전자 조작 식품과 비교해보자. 반려 동물인 개의 권리를 염두에 두고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의 99%는 개고기를 뜻대로 먹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안전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유전자 조작 식품은 어떤가?

먹기 싫어도 안 먹을 도리가 없다. 유전자 조작 옥수수, 콩이 들어간 먹을거리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 옥수수, 콩을 먹을거리를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상위 다섯 개에 드는 원재료가 아니면 표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유전자 조작 콩, 옥수수로 식용유를 만들어도, 굳이 소비자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두부가 유전자 조작 콩으로 만든 것인지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두부의 경우에는 운반용 위생 상자에만 유전자 조작 식품 표시를 하면, 개개의 두부에는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식당에서 먹는 두부의 상당수가 유전자 조작 두부일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나는 유전자 조작 식품이 제발 알레르기와 같은 해를 끼치지 않기를, 즉 안전한 것으로 최종 확인되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유전자 조작 식품을 이미 많이 섭취한 우리 가족, 우리 아이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테니까. 자, 이렇게 불안한 유전자 조작 식품을 허용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안전이 확인된 개고기를 먹겠다고 하는 분들의 권리를 억압할 수 있는가?

프레시안 : 책에서는 개고기 금지가 아니라 육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구조에 대한 성찰을 촉구했다.

송기호 : 그렇다. 가끔 개고기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굳이 개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소, 닭, 돼지고기 등으로 충분하다, 이런 얘기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소, 닭, 돼지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는 까닭은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수입해 사료로 먹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한반도의 생태계가 허용한 것 이상으로 소, 닭, 돼지고기를 과잉 섭취해온 육식 관행의 중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개고기 문제는 단순히 동물 보호를 둘러싼 논란을 넘어선다.

식품법을 지배하는 데라우치-박정희의 망령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유전자 조작 식품과 개고기는 우리 밥상의 권력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책에서는 그 기원을 19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기호 : 지금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 온갖 법령의 틀은 1911년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만든 것이다. 이 데라우치 식품법이 수십 년간을 지배하다 1962년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오늘날의 식품위생법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 박정희의 식품위생법 역시 1947년 제정된 일본의 식품위생법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프레시안 : 먹을거리를 지배하는 법령은 여전히 식민지 상태라는 얘기인가?

송기호 : 그렇다. 이렇게 식민지 상태의 식품법이 초래한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우리는 해방된 지 60년이 지나도록 이 땅의 자연과 문화에 근거를 둔 식품법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먹을거리의 안전과 관련된 기준도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한심한 상태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를 놓고서 광우병 검역 기준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당시 정부는 공무원, 전문가의 미국 현지 조사 결과를 토대로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만 수입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국 2008년 4월, 이를 포기했다. 정부가 정한 기준이 정당하다고 미국을 설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그 때 정부는 미국의 논리를 좇아서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되뇄다.

송기호 : 그것도 다 이 땅의 자연과 문화에 근거한 식품법 기준을 만들지 못한 탓이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이나 유전자 조작 식품의 위험 등은 '안전하다', '위험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불확실하다. 이렇게 먹을거리가 초래하는 불확실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09년 6월에 발암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물질이 나온 생수 제품을 이달 11일에서야 뒤늦게 공개했는데, 당시에 신속히 알렸다면 사람들은 그 제품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뒤늦게 공개하면 어떻게 되는가? (16~18쪽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송기호 변호사는 처음부터 생수 제품 공개를 요구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교의 캐롤라인 포스터는 "과학적 불확실성을 염두에 두고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은 자국민이 위험을 감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해서 검역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자의 과학과 소비자의 여론 사이에서 나라마다 고유한 검역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자국이 정한 검역 기준에 따라서 2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만 수입하는 일본의 모습은 한국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앞에서 언급한 유전자 조작 식품의 안전 기준도 사실상 미국의 논리를 그대로 추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 역시 식민지 상태의 식품법이 초래한 비극 중 하나다.


ⓒ프레시안(손문상)

희석식 소주가 만든 알코올 무한 공급 사회

프레시안 : 지금까지의 식품법이 소농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의 먹을거리를 죽이는 방향으로 기능했다는 지적도 의미심장했다.

송기호 : 중국 스촨성 이빈의 곡주 '우량예(五糧液)'는 수수, 멥쌀, 찹쌀, 밀, 옥수수 등 다섯 가지 곡식을 증류해 만든다. 이 술을 생산하는 이빈에 있는 술 공장의 노동자 수는 2만 명이 넘는다. 이빈의 시민 가운데 이 공장 직원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다. 서울 가락동의 한 중국 음식점 메뉴판에서 이 술 500㎖는 한 병 값이 28만 원이다.

동양 최고의 곡주로 칭송받는 일본 니가타 현의 '구보타(久保田)'는 서울의 유명 호텔에서 720㎖에 28만 원에 팔린다. 서초동의 한 평범한 일식집의 메뉴판에서 이 술 한 병의 가격이 22만 원이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의 곡식이 술로 바뀌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반면, 우리나라의 곡식은 자신을 대표할 술을 갖지 못했다.

1965년 2월 24일 박정희 정부는 소주 생산에서 곡류 사용을 금지하는 고시를 공고했다. 더 이상 이 땅의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술과 자연의 연계를 끊어버렸다. 이 단절은 무려 1991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수십 년 동안 한국 사람의 혀는 술 본래의 맛과 향을 잊어버렸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바로 알코올 주정에 첨가물을 섞은, 우리가 마시는 희석식 소주다. 이런 희석식 소주는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술을 공급할 수 있다. 지역 사회에서 생산되는 곡물로 제조하는 전통 소주가 자연과 지역이 허용한 공급 능력 안에서 제한된 알코올만 공급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 결과는 어떤가? 이 희석식 소주가 등장한 지 채 40년도 안 된 2008년 한 해에 사람들이 마신 소주를 모두 병에 담으려면 360㎖ 소주병이 34억5000만 개가 필요하다. 자연-술-사람의 연계가 끊어지자, 알코올 중독자가 넘쳐나는 알코올 무한 공급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지역 경제를 뒷받침하던 소농의 술 산업은 무너졌다.

프레시안 : 술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게랑드 천일염이 있지 않나? 천일염 생산 조건만 놓고 보면 그에 못지않은 우리의 소금을 둘러싼 상황도 소주와 다르지 않다.

송기호 : 나 역시 충격을 받았다. 먹을거리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소금이 2008년까지 '식품'이 아닌 '광물'이었다. 이렇게 소금이 광물로 규정되면서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어민이 염전에서 만든 천일염은 그 위생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먹을거리 체계 밖으로 내몰았다. 어떤 먹을거리보다도 그 안전을 검증받은 천일염을 식품법이 축출한 것이다.

어찌 술, 소금뿐이겠는가? 지역의 소농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한약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95년 정부와 이익 집단이 주도해서 더 많은 한약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틀을 짰다. 또 국산 한약재의 이력 추적제도 폐지했다. 그 결과 검증되지 않은 중국산 한약재가 대량으로 밀려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약재의 규격에 미달하는 중국산 한약재가 국내에 들어와 국산 한약재로 둔갑해 팔리는 구조를 제도적으로 조장한 것이다. 그 결과는 한약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불신은 한의학에 대한 불신을 낳고, 이런 한의학의 쇠퇴는 다시 국내 한약재 농가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밥상 혁명, '삼각 연대'에서 시작하자!


ⓒ프레시안(손문상)
프레시안 : 최근에는 소비 수준이 높아진 중국인의 한약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중국산 한약재의 가격도 폭등하는 추세다. 한약재의 원가가 치솟아서 한의사들이 울상인데, 지적한 대로 이러다가는 한의학의 몰락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재앙의 시작이 식품법에서 비롯되었다니….

송기호 : 식품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식품법이 소농만 무력화시킨 게 아니다. 1989년 정부는 단체 급식의 먹을거리 재료 검수를 영양사의 직무로 규정했다. 조리사(요리사)가 아닌 영양사로 하여금 먹을거리 재료를 선정하고, 검사하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한동안 영양사는 '조리 지도'까지 할 수 있었다.

프레시안 : 단체 급식에서 조리사의 역할이 억압받고 있다는 지적에 아리송할 독자가 많을 듯하다.

송기호 : 조리사는 먹을거리 원료의 신선도, 품질에 가장 민감한 전문가이다. 그들은 지역의 땅에서 생산하는 신선한 원료의 가치를 발견하고 활용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학교 급식에서 무엇을 조리할 것인지조차 결정할 권리가 없다. 먹을거리 재료를 검수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자연-소농-밥상의 연결고리를 지킬 주체가 사라진 것이다.

프레시안 : 이 책에서 식품법이 초래한 온갖 문제점을 해결할 주체로 시민, 소농, 조리사를 꼽은 것도 그런 고민에서 비롯된 것인가?

송기호 : 그렇다. 이 책을 쓰면서 많이 고민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러다 부당하게 밥상 권력을 빼앗긴 소비자(시민), 공급자(소농, 조리사)가 다시 밥상 권력을 되찾는 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민, 소농, 조리사가 연대해 새로운 식품법을 만들어야 한다.

프레시안 : 어떻게 그런 '밥상 혁명', '식품법 혁명'이 가능할까?

송기호 :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학교 급식을 예로 들어보자. 무상 급식을 놓고 논란이 있는데, 결국은 교육의 하나인 급식은 나라에서 책임지는 식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 밥상 권력을 놓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우선 무상 급식에 쓰이는 먹을거리를 어디서 가져올 것인가?

시민들은 학교가 자리를 잡은 지역의 소농이 생산한 먹을거리가 학교 급식에 공급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등을 이끌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리사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들은 해당 지역의 제철 먹을거리를 이용한 '표준 식단'을 마련할 수 있다. 이렇게 1년간의 표준 식단이 마련되면 지역의 소농은 수요를 예상해서 다양한 품목의 농사를 짓는 게 가능하다.

일단 이런 일이 시작되면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생긴다. 1년에 한 번씩 전국의 학교 식당의 주방장들이 모여서 각 지역에서 소농이 생산한 재료를 이용한 요리 경연 대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대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식단의 요리법을 공유해 표준 식단에 반영할 수도 있을 테고.

요즘 TV를 보면 7성급 호텔 식당의 주방장이 종종 광고 모델로 등장한다. 우리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학교 급식의 주방장과 호텔 식당의 주방장 중 누가 더 최고로 대접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학교 급식의 주방장 아닌가? 나는 학교 급식의 주방장이 광고 모델로 등장하는 세상을 꿈꾼다.

이렇게 학교 급식을 바꾸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다양한 실천이 더 힘을 받지 않을까? 이를테면 한 소농이 1년 농사를 짓고, 생활하며, 아이를 교육시키는데 필요한 돈이 3000만 원이라고 하자. 10명의 소비자가 각자 1년에 300만 원, 한 달에 25만 원을 소농에게 보내면, 소농은 열 명이 한 해에 먹을거리를 책임질 수 있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생활협동조합은 이렇게 해보려는 지역의 시민과 소농을 연결하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다보면, 결국 100년간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해온 낡은 하지만 힘센 식품법도 무너질 수 있다. 이런 일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프레시안(손문상)

2008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프레시안 : 2008년에 광우병 위험이 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촛불을 들었던 시민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얘기를 들어보니 바로 그 일이 이 책을 펴낸 계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송기호 : 그렇다. 이 책은 2008년에 광화문을 밝혔던 촛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책이다. 그 때 촛불이 무엇을 요구했었나? 먹을거리 주권과 먹을거리 안전을 요구했다. 또 그런 먹을거리 주권과 먹을거리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다른 틀을 요구했다. 근대적인 먹을거리 체계가 등장한 지 100년 만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지배의 틀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런 촛불의 요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 그 때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한 걸음 더 내딛어야 할 길이 어느 쪽인지 방향을 같이 토론하고 싶었다. 나는 2008년의 촛불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리라고 본다.


한 먹을거리 담당 기자의 개인적인 후기


▲ <맛있는 식품법 혁명>(송기호 지음, 김영사 펴냄). ⓒ김영사
기자는 지난 수년간 송기호 변호사의 글, 책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특히 <맛있는 식품법 혁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간 먹을거리를 둘러싼 적지 않은 기사를 써왔고, 심지어 졸저도 한 권 낸 처지임에도, 이 책에 실린 내용의 상당수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송기호 변호사가 통렬히 고발하는 식품법의 권력이 지속되는 데는 이런 언론계 종사자의 무관심과 게으름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이른바 '맛 집'을 쫓아다니며 어쭙잖은 평을 하는, 또 식품 업계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기자는 있었어도, 정작 먹을거리를 둘러싼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는 없었으니까.

이렇게 자학을 하는 이유는 공개 제안을 하기 위해서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수많은 부처, 법령으로 쪼개진 식품법 체계 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담당 공무원과 이해관계를 가진 업자가 똬리를 틀고 부당한 밥상 권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이런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송기호 변호사 혼자에게만 맡겨 놓는 것은 부당하다.

이 책에는 송기호 변호사의 정보 공개 청구 124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간 언론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특종거리가 수두룩하다. 더 늦기 전에, 각 언론의 기자들이 송 변호사의 이 책을 나침반 삼아서 먹을거리를 둘러싼 온갖 문제를 파헤치는 특종 경쟁에 나선다면, 이른바 '밥상 혁명', '식품법 혁명'의 순간은 훨씬 더 빨리 올 것이다.

지금 특종을 노리는 기자들에게 이 책을 먼저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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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 사회' 주장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소득 격차나 일자리 문제 등(으로 파생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이 공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면서 "사회 지도자급 인사, 특히 기득권자들이 공정 사회의 기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그 실천 지침까지 제시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평소 행보와는 판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김황식 총리는 물론이고 한나라당도 공정 사회를 이명박 정부가 임기 말까지 지켜야할 핵심 과제로 강조하곤 했다. 이런 흐름에 발 맞춰 총리실은 공정 사회 달성을 위한 100대 과제까지 뽑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태호 총리 내정자 청문회,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 특채 문제, 편파적인 검찰 수사 등으로 공정 사회는 도리어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의 치부를 설명하는 핵심 단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수하의 사람들이 공정 사회를 언급하는 일이 사라졌고, 일부 언론에서는 사실상 공정 사회에서 철수했다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한마디로 '공정'이 공정치 못한 사회에 와서 고생만 한 일이 되고 말았다. 특히 진작부터 <공정 국가>(개마고원 펴냄)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던 '토지+자유 연구소'의 남기업 소장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뜬금없는 주장으로 선수를 뺏겼지만, 최근 그가 공정 사회, 공정 국가가 무엇이며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정본(正本)을 출간했다.

평등한 출발과 반칙 없는 경쟁


▲ <공정 국가>(남기업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공정한 사회란 어떤 것일까? 이는 그 반대말인 불공정 사회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남들보다 특별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나 경쟁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대표적인 불공정 사회 현상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공정성을 '평등한 출발+반칙 없는 경쟁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적이다. 바로 (경쟁을 넘어선) '평등'과 (경쟁할) '자유'가 병행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평등과 자유는 배타적이고 갈등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정치인들은 이 둘을 모두 추구하며, 또한 조화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현실은 다른 한 쪽을 폄하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남기업 소장은 이 둘의 조화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공정한 사회란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고 알려진 자유와 평등을 양립하려는 멈출 수 없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달성되는 공정성은 안정과 역동, 효율과 형평과 같이 서로 상충하는 가치들을 양립 내지는 조화시켜준다. 요컨대 공정성은 진보와 보수가 원하는 가치를 조화시키고 통합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불공정 박물관, 대한민국

그럼 한국은 공정한가? 남기업 소장은 단호히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 엄청난 토지 불로 소득이 문제다. 예컨대 상위 1%의 자산 점유율이 1999년 9.6%에서 2006년에는 16.7%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이는 부동산 소유 편중과 가격 상승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 이런 식의 토지 불로 소득은 후진국적인 '토건형 산업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부정부패를 양산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출생이나 소속이 일생을 좌우하는 사회이다. 사교육비 지출은 고소득층일수록 더욱 가파르게 늘어나서, 가장 잘 사는 계층과 못 사는 계층 사이에는 8배 이상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연고주의, 학벌주의와 결합하면서 다시 소득 격차를 확대하여 사회 계층을 대대로 고착화시킨다.

이와 함께 남기업 소장은 반칙이 구조화된 부자유한 시장을 지적한다. 기업과 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이와 함께 고용과 소득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대기업 중심, 기득권 중심의 구조화된 반칙이 만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공정 국가의 3원칙

그럼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어떤 곳인가? 여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작동한다.

우선 기회 균등의 원칙이다. 어느 시점, 어느 곳,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든, 출발선은 맞춰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완전히 평등할 수는 없으나 기본적인 수준은 보장해야 하며, 패자 부활도 가능해야 한다. 교육과 의료의 기회, 직장을 다시 얻을 기회를 충분하고도 고르게 제공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곧 국가의 수준 높은 복지 제도, 사회 제도를 뜻한다.

두 번째 원칙은 자유 경쟁이다. 경쟁은 약탈적인 약육강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정한 룰을 갖춘 경쟁이 필요한 것이다. 소수만 이익을 보는 독점은 규제해야 하며. 시장 진입과 퇴출의 장벽을 낮춰야 하고, 상품 정보와 시장 지식이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 반칙을 막아야 한다.

세 번째 원칙은 앞의 두 가지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현실 정책에서는 매우 중요한 불로 소득 환수의 원칙이다. 각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불로 소득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환수할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불로 소득의 악성 정도에 따라 차등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토지 불로 소득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토지는 인간이 만들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필요로 하는 필수재이며 필요하다고 외국에서 사올 수도 없다. 자본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토지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한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그 독점적 사용에서 나오는 특별 이익, 즉 불로 소득인 지대는 사회가 환수해야 한다. 아울러 이는 진정한 보수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원칙이기도 하다.

토지 불로 소득 환수

이와 같은 원칙 하에서, 남기업 소장은 우선 토지와 주식 불로 소득을 환수하되 근로소득세와 같이 '노력'에 부과하는 세금은 경감하자는 '패키지 형 세제 개편'을 주장한다. 한편에서는 증세하되 다른 한편에서는 감세하자는 얘기다.

이런 식의 패키지 형 세제 개편은 경제도 활성화시켜서 복지의 필요성을 줄여주는 동시에 복지 비용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일거삼득의 방안이다. 이를 통해 빈부 격차가 완화되고 생산 부문으로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며, 근로 의욕도 높아질 수 있다. 이는 보수가 원하는 '더 많은 성장, 더 많은 일자리, 더 빠른 생산성 증가'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는 또 이렇게 환수된 불로 소득을 재원으로 '생산적인'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 안전망은 물론이고, 다양한 인적 자원 서비스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나아가 반칙 중의 반칙인 불로 소득이 조세 제도에 의해 제거된다면, 건전한 재벌 개혁과 건강한 기업 생태계, 고용 생태계 형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불로 소득 환수를 넘어선 국가 설계도

이 책의 초반에서 남기업 소장은 요즘 각축하는 진보-보수의 다양한 미래 국가 비전들을 검토하고 있다. 공동체 자유주의, 사회투자국가, 신진보주의국가, 복지국가, 사회국가 등을 간략하지만 단정적인 언어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어느 하나 남 소장이 주장하는 평등과 자유의 조화 혹은 창조적 긴장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남기업 소장은 이들의 행태와 강조점을 염두에 두고 비판한다. 더구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토지 불로 소득 환수를 제대로 언급하는 비전들이 없으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위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보인다. 물론 그 스스로 앞의 3원칙 중 자유 경쟁 원칙과 기회 균등 원칙을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마찬가지로 남기업 소장이 이 책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북한이 가야할 공정 국가의 길'도 토지 불로 소득 환수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그야말로 세계의 거악들이 만들어내고 지탱시키는 북한의 미래를 불로 소득 환수 중심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이와 함께 이 책은 통합된 세계 경제와 그에 따른 영향을 간과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고용불안과 양극화 문제의 상당한 정도는 내부 요인에서 기인하지만, 더 크게는 국제 분업과 패권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고 온존되고 있다. 일국을 넘어서는 구조 문제를 일국의 불로 소득 문제로만 풀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이 책은 더 나은 사회와 그에 이르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토지) 불로 소득 환수라는 디딤돌을 놓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 돌들을 다리로 연결하는 일은 진보의 미래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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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를 허용할 것인가? 이제 이 정도는 무슨 말인지 누구나 안다. '안락사'를 얼마 전 우리 법원의 판결로 떠들썩했던 '존엄사'로 바꾸어 놓으면? 사실 존엄하게 죽는 것보다 안락하게 사라지는 걸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김수현 극본의 텔레비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없애보고자 시도한 부분이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다. 성애의 대상이 이성이건 동성이건 모두 바른 성문화의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이 아직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유력한 언론 하단에 큼직한 광고가 실렸다. 그 드라마 보고 우리 아들이 게이가 되어 에이즈로 죽게 되면 방송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표 광고주는 '바성연'이었는데, 바른 성문화를 위한 전국 연합의 약칭이었다. 이런 견해의 차이는 성문화에 대한 것인가, 성도덕에 대한 것인가? 넓은 의미에서 도덕의 문제인가?

우리 주변에서 가끔 발견하는 구체적 일들을 거론하면, 가끔 진부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흥미롭다. 누구나 끼어들 수 있는 화제다. 그렇다면 물음을 이렇게 바꾸어 보자. 옳음과 좋음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꼬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무언가 한 차원 높아진 느낌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을 포괄하여 그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든 구체적이며 특별한 이야기가 사례에 해당한다면,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논리적 주장이 이론이다.

옳음은 정의라고 표현해도 좋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다. 부정의란 말은 있어도, 나쁜 정의란 표현을 보통 사용하지는 않으니까. 좋음은 선, 바른 것이라고 하자.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 허용되는 것이라 이해하면 되겠다.

서울의 25개 구는 재정 형편이 각양각색이어서, 빈부의 차이는 초가을의 일교차보다 더 심하다. 기초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극심한 재정 양극화를 해소하려고, 국회는 구청에서 징수한 지방세 일부를 다른 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자 강남구와 서초구가 나서 우리 세금을 왜 다른 구 살림에 보태느냐면서 헌법재판소에 문제를 제기했다. 부자 구민들이 재산권을 주장하는 일은 허용될 수 있는 '좋음'에는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면, '옳음'의 한계를 벗어난다.


▲ <왜 도덕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 ⓒ한국경제신문
이런 것이 도덕의 문제일까? 마이클 샌델의 <왜 도덕인가?>(안진환·이수경 옮김, 한국경제신문 펴냄)라는 번역서의 제목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요즘의 용어로 말하면 정치철학의 문제다. 도덕성은 정치철학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지식을 필요로 한다. 알아서 뭘 하려는 것일까? 실천, 다시 말하면 행동하기 위해서다. 정보를 포함한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선택하여 실천에 옮긴다. 판단의 기준은 무엇으로 하는가? 이런 것들이 바로 철학의 근본 문제다. 그 무엇이 국가 공동체의 정책 방향과 관련돼 있을 때에는, 개인의 판단이든 정부의 선택이든 정치철학이라 부른다. 좋은 정치철학은 흔히 정의 실현에 가까운 수단으로 간주한다.

미국의 기초가 된 정치철학은 공리주의였다. 그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이 등장한 이후 자유주의로 바뀌었다. 자유주의는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중심으로 삼는다. 그 중심을 두 기둥이 받치고 있다.

첫째, 개인의 특정한 권리는 공공의 선보다 중요하다. 모든 개인의 권리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개인의 권리는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단, 사회의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는 허용한다.

둘째, 개인의 권리로 나타나는 정의의 원칙은 좋은 삶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이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개인은 스스로 자기 목적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어떤 종류의 삶을 특정하여 권유해서는 안 되며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이런 상황을 전제한 다음, 샌델의 주장 혹은 이론이 뒤따른다. 자유주의 이론에서 중립성의 요구 때문에 결여된 것이 바로 도덕성이다.

"도덕성과 종교를 완전히 배제하는 정치학은 얼마 못 가 스스로 환멸에 빠진다." (295쪽)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적 삶에 도덕적 에너지를 포함하는 데 너무 인색하다." (296쪽)

그래서 샌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도덕성을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정부는 중립성을 포기하고 도덕도 법률화해야 시민 정체성을 키우고 연대감을 고취시킬 수 있으며, 마침내 진보적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300쪽).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왜 도덕인가?>이다. 사실 샌델의 주요 저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는 1982년에 펴냈다. 미국의 공공 정치철학에 관한 <민주주의의 불만>은 1996년 작이다. 샌델이 미국 자유주의 사상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롤스를 물고 늘어지기였다.

롤스는 샌델 스스로 신이라 표현했듯이 거장이었기 때문에, 신참 정치철학자 샌델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 사회에서 폭발한 이유 중의 하나는 샌델이 하버드대학교 교수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론에 관한 기존 이론과 샌델의 이론을 요약하여 흥미로운 몇 가지 사례에 적용한 강의록이다. <왜 도덕인가?>는 샌델 자신의 정치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한 칼럼 형식의 글과 부연 설명한 글의 모음집이다. 원제목이 <공공 정치철학 : 정치의 도덕성에 관한 에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샌델의 주요 저서를 일반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리는 없다. 그런 면에서 대중용으로 만든 책들이 시민의 정치철학 교과서로 적당하다. 이 책도 그렇게 활용하면 공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효용을 최대화할 수 있다. 도덕성의 필요는 독자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샌델의 이론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고 기발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시큰둥할 수 있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한때 미국의 공화당이 연속으로 집권하다 클린턴의 민주당이 탈환한 사실들의 원인을 도덕 캠페인에서 찾고 있는데, 쉽게 수긍하기도 힘들다. 샌델이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로 글을 쓰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기 때문에 유명해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건 사실이다.

어쨌든 샌델은 현역 정치철학자들 중에서는 항상 거론되는 주요 인물이 돼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도덕성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샌델을 보수주의자로 분류한다. 그러나 폴 슈메이커는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조효제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샌델을 급진 좌파에 앉혔다. 도덕성을 내세워 공공성을 중요시하므로 시민적 공동체주의에 속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념적 소속의 이름표 달기를 좋아하는 습관에서 나오는 이런 혼란을 방지하려면, 따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도덕적 동물인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이 도덕을 실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덕 때문이 아니라 도덕의 내용이 항상 인간을 고귀하게 또는 바보로 만든다. 실제로 인간은 도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관심을 두기보다, 도덕에 구애 받지 않고 싶어 한다.


'프레시안 books'가 본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책이 계속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샌델에 대한 대중의 열광과는 다르게 지식인 사이에서는 그의 주장을 놓고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다. '프레시안 books'는 샌델의 책에 대한 다양한 지식인의 시선을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강양구 : "천안함 희생자는 '용병'!"…이 말에 왜 '분노'하는가?
구형민 : '정의'을 외친 샌델, 이제 '윤리'를 논하다
강명신 : 우리 시대의 '도덕', 샌델에게 맡기자고?
하승수 :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김민웅, 정태욱, 김명준 대담 : MB부터 10대까지 '정의' 타령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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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역사>(찰스 밴 도렌 지음,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대단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란 부제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지식'은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다루는'역사'는 그 범위를 어디까지 정할 것인지. 막연하고도 만만치 않은 제목이다.

그러니 책 소개는 성격 규정으로 시작할 일이다. 한 마디로 책은 문명사를 다뤘다. 문화사는 많이 들어봤는데 문명사라니 하고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문화사에 과학기술사를 더한 것이다. 철학, 예술 등 인문 분야의 흐름을 훑으면서 파피루스의 발명에서 컴퓨터의 기반을 닦은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까지 발명, 발견과 과학자에도 내용의 상당 부분을 배려한 형식이다.

사실 이런 주제는 한 사람이 개관하기 쉽지 않다. 저자에게 일차 관심이 가는 이유다. 이 책의 경우, 저자는 이를 다룰 자격을 일단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밴 도렌 가문은 미국의 대표적이 문인들을 다수 배출한 지식인 가문이다. 시인, 작가, 문학평론가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퓰리처 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소설가로 활약했다. "유일하게 책을 쓰지 않은 밴 도렌"이라는 큰어머니마저 30년 넘게 일간지 서평 담당자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지은이는 타고난 저술가란 이야기다.


▲ <지식의 역사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지식을 찾아>(찰스 밴 도렌 지음,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갈라파고스
핏줄이 반드시 책의 수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란 지적이 나올 수 있겠다. 이런 염려는 지은이의 다채로운 이력이 덜어준다. 미국의 명문 대학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희한하게도 천체물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문학 강사를 거쳐 그 유명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자로 17년간 일했으니 말이다. 미국의 경우 전문가인 저자들과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전문성을 갖춘 편집자가 적지 않다니 이 정도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두루 논할 만한 지적 소양을 갖춘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이야기가 잠깐 옆길로 흐르지만 지은이는 화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찰스 밴 도렌은 1950년대 미국에서 붐을 이뤘던 TV 퀴즈쇼의 챔피언이었다. 두 명의 출연자가 21개의 문제를 놓고 겨루는 NBC의 <21>에서 우승하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한데 이것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각본에 따라 박진감 넘치는 대결을 연출한 결과로 드러났다. 그 후폭풍으로 퀴즈쇼는 사라지고, 본인은 의회 청문회에까지 서야 했다. 숱하게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된 그는 반 은둔 생활을 하다가 대학 강사에서 사전 편집자로 변신하게 되었다. 찰스 본인으로서야 호된 시련을 겪었지만 이런 인문 교양서를 쓸 바탕을 닦는 기회를 얻은 셈이어서 전화위복이 되었다 할까.

어쨌거나 저자의 내공과 인간적 깊이가 어우러진 책은 흥미롭다. 연대기처럼 사건이나 권력 지형 변화 위주로 서술하는 대신 흐름을 짚는 형식이어서 여느 역사책과는 다른 재미와 정보가 그득하다. 특히 고대사를 다룬 대목에서 지은이의 탁견이 드러난다.

약 3000년간 존속한 고대 이집트 문명을 4쪽 분량으로 압축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해 가능한 한 변화를 회피했다는 특징을 콕 집어낸다. 이집트 문명의 정체성을 지적하고서는 "변화만을 위한 변화라면 과연 무슨 장점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지금 그대로의 삶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면 굳이 무엇 때문에 그걸 변화시켜야 하겠는가? 전제군주의 관점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더 나쁠 수밖에 없다. 이집트인은 (…) 전제군주들에게 대단한 가치를 지닌 비밀을 발견한 셈이었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전제군주들 역시 그 비밀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꼬집는다. 인더스-갠지스 문명을 다루면서는 계급 차별 제도인 '카스트'가 오랫동안 존속한 이유는 무엇일까란 의문을 제기해 독자에게 생각거리를 던지는 것도 그런 예다.

이 책에서만 읽을 수 있는 귀띔도 있다.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바빌로니아 인의 중대 발명이 뭘까. 이는 숫자 표기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자릿값 기수법이다. 가령 '568'에서 5는 100자리, 6은 10자리라는 뜻이라는 약속이 없었다면 인류는 상당히 성가신 숫자 표기법을 사용해야 하고 이럴 경우 더하기 빼기부터 원리가 달라졌으리라. 결국 문명의 토대가 달라지거나 발전 속도가 더뎠을 것이란 추론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

과학적 방법론을 창안해 과학 발전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르네 데카르트의 한계를 거론한 대목도 신선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철저한 회의론이 어떤 경우엔 잘못 해석된 나머지 프랑스 과학 발전을 두 세기나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다고 봤으니 말이다. 영국이 미적분의 공동 발견자라 할 독일의 라이프니츠의 더 효율적인 용어법 대신 자국의 뉴턴 용어법을 고집하다가 한 세기 이상 수학 발전이 뒤처진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르네상스가 활짝 꽃 피우게 된 배경 설명도 돋보인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을 든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피난민들이 다양한 그리스-로마 고전을 가지고 와 탁월한 원고가 급증한 점과 함께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가량이 사망한 결과 그들의 재산이 남았고 그들의 옷이 더 많은 책을 저렴하게 인쇄할 '천 종이'의 공급원이 되었다는 풀이는 '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란 감탄이 나오게 한다.

책은 이처럼 유니크하고 흥미로운 대목이 많지만, 대부분의 책의 그렇듯 한계와 아쉬움이 있다. 우선 서양의 지식사란 한계가 있다. 중국 문명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룬다 해도 진시황의 통치 이념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법가'가 아니라 유교의 가르침이라 잘못 설명했다.

이는 저자가 미국인이란 점에서 비롯됐지만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넣을 만한데 놓친 대목도 더러 눈에 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을 유럽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풀어가면서 한스 콘처럼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충돌로 보는 시각은 비추지 않은 것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19세기 이후를 다룬 대목부터는 내용이 성글다. 사실 별도의 책으로 다뤄도 모자랄 주제니 그럴 만도 하지만, 주요 인물 약전 식으로 풀어간 체제를 읽다 보면 지은이가 버거워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한 1991년 현지 출간됐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래서 역사서로는 특이하게 다가올 100년을 예측한 마지막 장(章)의 내용은 이미 어긋난 부분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가 부정적으로 본 CD로 이뤄진 참고 자료 도서관, 3D 영화, 디지털 카메라가 상용화가 된 것이 그런 예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느끼니 책의 원제에 숨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The History of Knowledge'라 하는 대신 '어떤' 혹은 '하나의'란 뉘앙스를 담은 'A History~'라 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학기술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펴냄>나 <인간 등정의 발자취>(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바다출판사)를 함께 읽을 것을 강추한다.

참고로 이 책은 1995년 고려문화사에서 같은 제목의 두 권짜리 책으로 출간된 바 있음을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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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다식한 신학자이자 독서광인 한 선배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싸구려에 대한 비판치고는 넘치는군."

그리스도교를 필두로 하는 종교의 무례한 행태를 놓고 그 종교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도 불편해한다. 최근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극단주의 테러리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종교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며, 실제로 안팎에서 무수한 비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특정 종교가 사회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사회에서 그 특권에 대해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하다. 도킨스가 말하듯이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시행되는 종교세나, 그리스도교 학교나 교회에서 행해지는 분별없는 종교 교육 등에 대해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민사회는 그다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특히 그리스도교 계통 학교에서 수행되는 채플 의무화나 교직원 채용 시의 종교 강요 등에 대해 법은 대체로 종교재단의 편을 들고 있다. 또 대개의 시민사회는 이러한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상식만으로 종교 비판은 충분치 않다. 교육 전문가도 발언할 필요가 있고, 노동 전문가도 문제에 끼어들어야 한다. 또 법 전문가의 식견도 요청된다. 나아가 사회학적, 정치학적, 역사적, 신학적 분석을 요한다. 또 시민사회 일반이 상식만으로도 비판이 가능한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그런 무례함이 종교 제도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과 배후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 같은 과학자가 이러한 종교 비판에 전문가의 의견을 피력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면 분명 과학자의 비평은 중요하다. 한데 도킨스나 호킹의 비평은, 내가 보기엔, 과학이 끼어든 사례로는 그리 좋은 예가 못되었다.

그들이 비판한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 한정된다. 게다가 그 대상은 창조론에 국한되어 있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신은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 중력 법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호킹의 주장이나, 자연 선택의 과정에서 진화한 인간의 상상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상대가, 겨우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성서의 진술을 직설적 어법으로 이해하려는 대중의 잡설로서의 창조론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창조 과학의 주장이다.

위에서 인용한 '싸구려에 대한 비판치고는 넘친다'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처럼 최고의 명성을 가진 특급 과학자가 그토록 거창하게 최고급 정보를 동원해서 반박한 것이 겨우 이것이냐는 얘기다. 별의별 시답지 않은 신학이 난무한 그리스도교 학계의 사정에서, 그나마 그런 시답지 못한 신학 축에도 못 끼는 잡설에 지나지 않는 창조관이 그네들이 논박하고 있는 주요 대상이라니….

한데 그들은 이런 반론으로 그 이상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대중의 잡설로서의 창조론을 공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전체를 부수어버릴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종교는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 제도로서의 그리스도교나 신학 담론으로서의 그리스도교, 혹은 대중의 신앙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어느 것도 그런 잡설에 대한 비판 정도로 흔들릴 만큼 유약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런 질긴 생명력이 대체로 역사 속에서 바람직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서투른 비판이 좋은 비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신을 위한 변론>(카렌 암스트롱 지음, 오강남 감수, 정준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한글 번역본으로 550쪽을 넘는 방대한 분량의, 카렌 암스트롱의 책 <신을 위한 변론>(오강남 감수, 정준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비록 10여 쪽 분량만을 도킨스를 위시한 최근의(contemporary) 무신론에 할애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책 전체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그는 서양의 근대(modern)가 이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는 생각의 제도를 발전시킨 결과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과 그 밖의 몇몇 최근의 무신론자들의 빗나간 비평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종교에 대한 이성주의적 인식의 제도에 대해 그는 두 가지 형태의 빗나간 비판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근본주의적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의 무신론이다.

근본주의는 근대적 이성의 차가움에 대해 뜨거운 이성, 그의 표현으로는 "머리가 아닌 가슴의 종교"가 지향하는 이성을 신앙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이성의 종교는 대중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또 그런 지식인의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것은, 그에 의하면, 뮈토스(신화)를 세속적 로고스(합리성, 이성)로 환치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인 빌헬름 네슬레가 말했다는 저 유명한 명제, 서양의 지성사가 뮈토스가 로고스로 이행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의 근대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같은 시기에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성서 해석(근대적 이성의 요소)은 성서 속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불트만의 탈신화화 프로젝트는 뮈토스로 상징되는 전근대를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 근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내포한다. 근대는 뮈토스의 배제를 통해 구현되는 인식의 질서인 셈이다.

한데 카렌 암스트롱은 뮈토스가 로고스로 이행하면서 근대에 이르는 서양 지성사적 인식의 체계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에서 해석의 가능성이 아니라 '해석의 제약'을 본다. 그는 이러한 해석의 제약은 '진리의 확실함'에 관한 강박증과 관련이 있다. 직관과 상상의 세계가 풍부한 담론 형태인 뮈토스를 견디지 못해, 탈신화화 프로젝트라는 그것의 제거 작업을 하는 것, 그 속에는 저 모호함의 세계가 아니라 딱딱한 확고부동한 사실에 관한 세계만 남아 버렸다.

모호함은 경계가 분명치 않음을 의미한다. 해서 뮈토스가 담고 있는 생각의 세계는 이웃과 공존하는 데 있어 경계를 두고 상호불침범의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웃의 일부이기도 하고 이웃이 나의 일부이기도 하는 감정, 즉 공감의 감정을 통해 타자와 섞인 자아를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타자와 내면적으로 엮인다는 것은, 타자의 배제를 전제로 하는 근대적 주체성과는 다른 주체성을 내포한다.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주체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케노시스'(비움)를 그가 뮈토스의 세계관과 관련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다른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일찍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주 초기부터 예수는 하느님이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온 분이라는 해석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데 그리 하려면 신은 자기를 해체해야 한다. 즉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통해 주체화된 신성에 관한 믿음을 해체하지 않으면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경계의 해체를 지칭하는 용어를 그리스도교는 '케노시스'라고 표현했다. 번역하자면 '비움'이다.

그는 종교란 바로 이렇게 비움의 세계관, 자기 해체의 세계관을 수련을 통해 자기 몸에 새기는 담론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뮈토스적 요소를 더욱 발전시킨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데 근대주의, 뮈토스의 제거를 통한 로고센트리즘은 종교조차 그렇게 변질시켰다. 해서 불트만처럼 근대주의에 비판적인 실존주의적 성서학자조차 성서에서 뮈토스를 제거해야만 이해 가능한 성서, 이해 가능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의 제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한편, 근본주의는 이러한 근대의 산물이다. 앞서 말했듯이 차가운 이성 대신에 뜨거운 이성을 강조한 것이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이 둘은 진리관의 관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보다 덜 성찰적이고 보다 더 행동주의적인 것,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는 좀 더 통속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에 의하면 해석적 가능성으로서의 신앙을 경직된 확실함의 신념, 더 행동주의적이고 덜 성찰적인 확실성의 신념으로 전환시킨 신앙, 그것이 근대적 과학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근대주의가 바로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확실함에 대한 과도한 신념은 도킨스 유의 최근의 무신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적어도 종교를 비판하는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과학적 가설로 설명될 수 있고 증명 가능하다는 자세를 취한다. 잡설로서의 창조관이나 창조 과학을 비평하는 데는 그리 진지한 과학적 논평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반론이 도킨스처럼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직결되는 것은 독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 속의 창조 개념을 과학적으로 반증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충분히 해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서의 창조 개념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려 했던 창조 과학에 대한 반론일 뿐, 창조 개념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 창조는 뮈토스, 즉 신화적 언술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근대주의적 창조 과학과의 언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무수한 해석 가능성으로 이해되었고 신앙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다양성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결코 확실한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근대적 잡설로서의 창조관이나 창조 과학은 그것을 하나로 환원시켰고, 또 무신론은 그것을 허구로 환원시켰다.

이러한 확실성의 독단을 양자는 공유한다. 하여 카렌 암스트롱은 이 둘을 근대적 쌍생아로서의 근본주의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억견에 대한 반론으로 그는 이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분량만 방대한 것이 아니라 다루는 내용도 방대하다. 우선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 유대교 등 유일신 종교들만이 아니라 유교나 도교,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에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 이들 종교들은 '긍극적 실재'에 대한 다른 표상들을 발명하고, 거기에서 다른 신앙 제도들을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들 종교들은 분명 다른 양상이지만 서로 공통된 문제의식을 갖는다. 또한 그가 다루는 시간의 범위는 인간의 종교심이 최초로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1만7000년 전 프랑스 도르도뉴의 라스코 지하 동굴 벽화 속에 담긴 제의 흔적에서부터 성서 시대,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 초기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기간 동안의 종교적 현상과 운동, 그리고 그 이해들을 포괄한다.

그런데 이 모든 설명들은 하나의 수렴점을 갖는데, 그에 의하면 종교란 공히 수련(discipline)에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잡설에 불과하지만 창조론을 둘러싼 논쟁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논점의 축이 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데, 반면 뮈토스로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수련을 통해 이 이야기가 여러 방식으로 간직되어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수련으로서의 해석과 이해는 확실함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모호함을 견뎌내고 모호함과 이웃하며 살고 모호함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것과 관한 신념과 관련된다. 그런데 근대는 전근대성에서 뮈토스를 제거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수련이 사라진 종교, 이성으로서의 종교만을 보존해왔다는 것을 그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킨스 류의 최근의 무신론에서 생각이 시작된 것이겠지만 더 나아가 서양 근대주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데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혔다. 도킨스가 종교의 근본주의를 종교의 차원에 한정해서 보고, 심지어 종교 자체로 동일시해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종교의 근본주의를 서양 근대성이라는 문명론적 맥락에서 읽어내고, 나아가 도킨스 같은 주장도 그러한 문명론적 지평의 차원에서 해석해내는 혜안을 제공한다. 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도킨스가 종교 비판 논의에 끼어든 과학자의 사례로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경우라고 한다면,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학자로서 매우 훌륭한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글을 마감하면서 그의 논지에 대해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유감 또한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뮈토스와 로고스의 이분법적 틀에서 문명사를 읽어내고 종교의 가능성을 발견해내는 그의 논지는, 말한 것처럼, 종교란 본질적으로 뮈토스적이라고 보면서, 타자를 향한 자기 비움의 수련(discipline)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본 것에 대한 유감이다.

가령 예수를 보자. 알려진 일화 하나는 예수가 안식일에 손이 굽은 장애인을 고쳐주고 바리사인을 비난하며 말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진리의 확실성에 관한 신적 과시 행위라기보다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슬픔과 아픔에 다가가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는 뮈토스적 행위가 예수에게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예수는 그 사람의 경우에서 일반의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그이를 주목하면서 그이의 삶의 행복과 관계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가 그 사람을 많은 이들이 보는 자리, 곧 회당 가운데로 불러내고 그를 치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사람은 응급 환자가 아님에도 바로 그날,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었다. 이것은 예수가 공공연히 거대한 진리 체계에 대해 도전한 것이며, 그 체계의 전복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는 그 시대의 진리관과 불화한 존재였고, 그 시대의 정의를 둘러싼 투쟁의 장에서 하나의 관점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그이에게는 사람 하나하나의 아픔과 대면하는 친숙한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있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체계를 해석해내고 그것에 도전장을 던지는 합리적 해석가의 면모 또한 엿보인다. 또한 그는 일단의 저항 조직의 지도자로서 조직 운용에 관한 합리적 해석을 통해 행보를 조직해 갔음을 복음서에서 엿볼 수 있다.

뮈토스와 로고스를 나눈 것은 근대의 서양 지성사를 해석해 내기 위한 편의적 분류법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대표하지 않는다. 암스트롱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 둘이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다. 그럼에도 종종 그는 도처에서 그 이분법을 생각보다 명료한 것처럼 활용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종교를 합리적 계산과는 분리된 공감과 비움의 수련과 너무 과도하게 연계시킨다. 하지만 위의 예수에서 보았듯이, 종교는 뮈토스적인 동시에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이성적 방식이기도 했고, 그러한 해석의 틀에서 행동을 조직해내는 합리성의 원리이기도 했다. 해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합리성을 비판하고 대안을 향한 실천에서 하나의 영역을 담보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카렌 암스트롱은 그러한 정치·사회적인 신앙적 실천에 앞장서 있는 종교 운동보다 내면적 수련과 봉사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종교의 선각자들 가운데는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확실성에 대한 강박증보다는 자기 비움과 타자성의 신념이 넘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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