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광복절 경축사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 사회' 주장은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소득 격차나 일자리 문제 등(으로 파생할 수 있는 사회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이 공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면서 "사회 지도자급 인사, 특히 기득권자들이 공정 사회의 기준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그 실천 지침까지 제시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식의 평소 행보와는 판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김황식 총리는 물론이고 한나라당도 공정 사회를 이명박 정부가 임기 말까지 지켜야할 핵심 과제로 강조하곤 했다. 이런 흐름에 발 맞춰 총리실은 공정 사회 달성을 위한 100대 과제까지 뽑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태호 총리 내정자 청문회,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딸 특채 문제, 편파적인 검찰 수사 등으로 공정 사회는 도리어 이명박 정부와 기득권층의 치부를 설명하는 핵심 단어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수하의 사람들이 공정 사회를 언급하는 일이 사라졌고, 일부 언론에서는 사실상 공정 사회에서 철수했다는 해석까지 내놓고 있다.
한마디로 '공정'이 공정치 못한 사회에 와서 고생만 한 일이 되고 말았다. 특히 진작부터 <공정 국가>(개마고원 펴냄)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던 '토지+자유 연구소'의 남기업 소장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뜬금없는 주장으로 선수를 뺏겼지만, 최근 그가 공정 사회, 공정 국가가 무엇이며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정본(正本)을 출간했다.
평등한 출발과 반칙 없는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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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 국가>(남기업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공정한 사회란 어떤 것일까? 이는 그 반대말인 불공정 사회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남들보다 특별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나 경쟁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대표적인 불공정 사회 현상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는 공정성을 '평등한 출발+반칙 없는 경쟁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사실 이 둘은 현실 세계에서는 모순적이다. 바로 (경쟁을 넘어선) '평등'과 (경쟁할) '자유'가 병행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평등과 자유는 배타적이고 갈등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정치인들은 이 둘을 모두 추구하며, 또한 조화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현실은 다른 한 쪽을 폄하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남기업 소장은 이 둘의 조화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공정한 사회란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고 알려진 자유와 평등을 양립하려는 멈출 수 없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이다. 아울러 이렇게 달성되는 공정성은 안정과 역동, 효율과 형평과 같이 서로 상충하는 가치들을 양립 내지는 조화시켜준다. 요컨대 공정성은 진보와 보수가 원하는 가치를 조화시키고 통합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불공정 박물관, 대한민국
그럼 한국은 공정한가? 남기업 소장은 단호히 아니라고 본다.
무엇보다 엄청난 토지 불로 소득이 문제다. 예컨대 상위 1%의 자산 점유율이 1999년 9.6%에서 2006년에는 16.7%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이는 부동산 소유 편중과 가격 상승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 이런 식의 토지 불로 소득은 후진국적인 '토건형 산업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부정부패를 양산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출생이나 소속이 일생을 좌우하는 사회이다. 사교육비 지출은 고소득층일수록 더욱 가파르게 늘어나서, 가장 잘 사는 계층과 못 사는 계층 사이에는 8배 이상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연고주의, 학벌주의와 결합하면서 다시 소득 격차를 확대하여 사회 계층을 대대로 고착화시킨다.
이와 함께 남기업 소장은 반칙이 구조화된 부자유한 시장을 지적한다. 기업과 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이와 함께 고용과 소득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대기업 중심, 기득권 중심의 구조화된 반칙이 만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공정 국가의 3원칙
그럼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어떤 곳인가? 여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작동한다.
우선 기회 균등의 원칙이다. 어느 시점, 어느 곳,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든, 출발선은 맞춰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완전히 평등할 수는 없으나 기본적인 수준은 보장해야 하며, 패자 부활도 가능해야 한다. 교육과 의료의 기회, 직장을 다시 얻을 기회를 충분하고도 고르게 제공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곧 국가의 수준 높은 복지 제도, 사회 제도를 뜻한다.
두 번째 원칙은 자유 경쟁이다. 경쟁은 약탈적인 약육강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정한 룰을 갖춘 경쟁이 필요한 것이다. 소수만 이익을 보는 독점은 규제해야 하며. 시장 진입과 퇴출의 장벽을 낮춰야 하고, 상품 정보와 시장 지식이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관계에서 반칙을 막아야 한다.
세 번째 원칙은 앞의 두 가지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현실 정책에서는 매우 중요한 불로 소득 환수의 원칙이다. 각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종류의 불로 소득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환수할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 불로 소득의 악성 정도에 따라 차등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토지 불로 소득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토지는 인간이 만들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필요로 하는 필수재이며 필요하다고 외국에서 사올 수도 없다. 자본이 없으면 불편하지만 토지가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권한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그 독점적 사용에서 나오는 특별 이익, 즉 불로 소득인 지대는 사회가 환수해야 한다. 아울러 이는 진정한 보수라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원칙이기도 하다.
토지 불로 소득 환수
이와 같은 원칙 하에서, 남기업 소장은 우선 토지와 주식 불로 소득을 환수하되 근로소득세와 같이 '노력'에 부과하는 세금은 경감하자는 '패키지 형 세제 개편'을 주장한다. 한편에서는 증세하되 다른 한편에서는 감세하자는 얘기다.
이런 식의 패키지 형 세제 개편은 경제도 활성화시켜서 복지의 필요성을 줄여주는 동시에 복지 비용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일거삼득의 방안이다. 이를 통해 빈부 격차가 완화되고 생산 부문으로 더 많은 투자가 이뤄지며, 근로 의욕도 높아질 수 있다. 이는 보수가 원하는 '더 많은 성장, 더 많은 일자리, 더 빠른 생산성 증가'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는 또 이렇게 환수된 불로 소득을 재원으로 '생산적인' 복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사회 안전망은 물론이고, 다양한 인적 자원 서비스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나아가 반칙 중의 반칙인 불로 소득이 조세 제도에 의해 제거된다면, 건전한 재벌 개혁과 건강한 기업 생태계, 고용 생태계 형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불로 소득 환수를 넘어선 국가 설계도
이 책의 초반에서 남기업 소장은 요즘 각축하는 진보-보수의 다양한 미래 국가 비전들을 검토하고 있다. 공동체 자유주의, 사회투자국가, 신진보주의국가, 복지국가, 사회국가 등을 간략하지만 단정적인 언어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어느 하나 남 소장이 주장하는 평등과 자유의 조화 혹은 창조적 긴장을 부정하고 있지 않다.
다만, 남기업 소장은 이들의 행태와 강조점을 염두에 두고 비판한다. 더구나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토지 불로 소득 환수를 제대로 언급하는 비전들이 없으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위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보인다. 물론 그 스스로 앞의 3원칙 중 자유 경쟁 원칙과 기회 균등 원칙을 심도 있게 다루지 못했다는 점을 한계로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마찬가지로 남기업 소장이 이 책에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북한이 가야할 공정 국가의 길'도 토지 불로 소득 환수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그야말로 세계의 거악들이 만들어내고 지탱시키는 북한의 미래를 불로 소득 환수 중심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이와 함께 이 책은 통합된 세계 경제와 그에 따른 영향을 간과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고용불안과 양극화 문제의 상당한 정도는 내부 요인에서 기인하지만, 더 크게는 국제 분업과 패권 구조 속에서 정당화되고 온존되고 있다. 일국을 넘어서는 구조 문제를 일국의 불로 소득 문제로만 풀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이 책은 더 나은 사회와 그에 이르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토지) 불로 소득 환수라는 디딤돌을 놓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 돌들을 다리로 연결하는 일은 진보의 미래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