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헤집어 실패로 끝났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실험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추적자 자신이 직접적인 '연루자'였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그 역사적 실험이 삶의 모든 것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꿈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뼈저린 고통'마저 따를 것이다.

객관적이고 균형감있는 접근의 시도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생성과 성장 그리고 붕괴(혹은 변질)를 다룬 제임스 밀러의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는 바로 그러한 아픔을 동반했음직한 책이다.

이는 저자 스스로 그 운동의 참여자였으면서도 "겉보기에는 굉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실패"했다는 평가와 "내 젊은 날의 순진함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책을 시작하는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을 '누추한 것' 혹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운동이 "정치적 자유의 한계를 시험"했다면서, "환상적인 것"이긴 했으나 "진정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적극적 '의미 짓기'는 비판적 평가에 더불어 책의 매 장에 걸쳐 반복된다. 나름 객관적이고 균형감있게 접근코자 했던 것이다.

주체 요인에 대한 과도한 강조


▲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미국 신좌파 운동과 참여민주주의>(제임스 밀러 지음, 김만권 옮김,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하지만 이 운동의 실패 요인 분석과 긍정적 유산에 대한 조망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운동 실패의 요인이-젊었고, 어렸고, 미숙했고 등으로 표현되는-주체 위상의 허약함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 환경의 제약에 대한 분석의 미미함 속에 너무나 쉽게 주체 역량의-가령 운동의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이라는-한계에서 찾아지고 있다.

'두 케네디'로 상징되는 자유주의 개혁 세력마저 '손쉽게' 제거되었던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급진적 학생운동의 성패가 이념과 전략의 명확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을까? 긍정적 유산에 대한 언급은 매우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이 운동이 실제 1970년대 이후의 미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표의 제시를 찾아보기 힘들다.

밀러는 운동이 끼친 영향의 '역설적 징표'로서 뉴라이트 세력의 등장과 그것에 바탕을 둔 레이건 행정부의 출범이라는 우파의 '대항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긍정적 유산이라고 보기도 어려운데다가 그것이 어떠한 동학 속에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인물, 이념, 전략으로 이루어진 역사극

이 책은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을 '민주사회학생연맹'이라는 조직과 1962년 포트휴런 선언에서 1968년 민주당 시카고 전당 대회 때까지의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있다. 이때 이 책은 알란 하버, 톰 헤이든, 리처드 플랙스, 샤론 제프리, 폴 부스 등과 같은 운동 지도자와 주요 활동가에 대한 전기(biographical) 형태의 서술 방식을 띠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의 전개가 마치 '역사극'을 보는 듯한 흥미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말과 글에 대한 풍부한 인용은 이 운동에 대한 보다 생생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

특히 밀러는 운동의 이념과 전략 그리고 조직 구조, 운동 방식의 문제 등에 주목한다. 운동의 실패 요인을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 등에서 찾게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즉 포트휴런 선언을 통해 그들의 이념으로 표방된 참여민주주의는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이로부터 전략의 설정과 조직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는 행동(톰 헤이든) 혹은 의사 결정에의 관여(샤론 제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사회주의의 다른 이름(리처드 플랙스)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그냥 '듣기 좋은 말'(스티브 맥스)로만 수용되기도 했다. 전략의 경우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봉기의 정치'(톰 헤이든)와 기존 정치 질서의 변화-특히 민주당 내부의 개혁-를 중시하는 '재편성 전략'(스티브 맥스), 그리고 '대안적 공동체 형성'(스워스모어 지부) 등으로 갈렸다.

조직 운영 방식은 위임 체계를 구조화할 것이냐 등과 같은 내부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신구 회원의 갈등으로 외화되었다. 신진 회원들은 고참 회원들을 '늙은 수호자'라고 하면서, 조직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위임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폴 부스)는 입장에 강하게 반대했다(제프리 셰로).

한편, 운동의 실패를 가져온 또 다른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폭력화'인데, 이 역시 이념과 전략의 모호함 속에 운동 주체들이 "자신들을 대표하지도 않고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일부분이 되어" "자신들이 변혁시키고자 했던 '대중사회'의 일부분이 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구체적 실천 양식으로 제시되었던 직접 행동의 의미가 파괴적인 폭력의 행사로 이해되어버렸던 것이다.

마치 저자의 '핵심 주장'처럼 보이는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바로 그러한 폭력의 길로 운동이 빠져 들어가던 시기, 톰 헤이든이 민주당 시카고 전당대회를 앞두고 제출했던 강령의 소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시기 즈음 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에서 영감을 받아 '강경 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저자가 헤이든의 그러한 노선에 동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의 제목을 그렇게 땄던 것은 그들의 운동이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기치 하에 '제도 밖의 정치'를 중시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게다가 그들의 정체(성)가 대중들에게 극적으로 인지되었던 것은 '거리에서' 반전 운동을 격렬히 전개해나갔던 1960년대 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 관점의 부재

그런데 이념과 전략 등을 둘러싼 문제가 비단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에만 국한된 것이었까? 즉, 비슷한 시기 급진적 학생운동이 발흥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와 일본 등에서도 나타난 문제 아니었을까? 밀러는 이에 대해 별다른 물음과 답변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런 가운데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특화'가 비교적 관점의 확보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화의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등과 같은 구좌파 이념과의 '단절', 미국의 '토착 이론가'인 밀스에의 의존, 반공주의의 전략적 수용과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관계 설정,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높은 비판 의식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 자체로 특수한 것은 아니다. 구좌파와 (제도화된) 노동운동 세력 그리고 자유주의 혹은 기존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태도는 이 시기 급진적 학생운동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구체적 상황과 맥락의 차이'인데, 비교 연구가 아니긴 하지만, 그것들 간의 대비가 어떤 형태로든 간에 제시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 겹쳐 보기

이 책을 읽으면서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이 겹쳐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시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변혁 지향적이고 급진적 학생운동의 생성과 성장, 소멸이라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고 규명되어야할 물음들이 있다.

왜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하필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과 같은 '구좌파' 이념의 수용을 통해 급진화되었던 것일까? 단지 억압적 국가 권력의 작동과 제도화된 노동운동의 부재, 분단과 북한의 존재와 같은 요인으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2010년 지금까지도, 왜 신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이념과 전략을 내세우는 급진적 학생운동은 등장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1960년대는 한국에선 결코 오지 않는 미래인가? 아니면 1980년대의 그것으로 이미 끝나버린 과거인 것인가? 이제 더 이상 한국의 대학에서 변혁 지향적인 집합적 주체의 형성은 불가능한 것인가?

결국 제임스 밀러의 이 책은 1980년대 한국의 급진적 학생운동에 대한, 그리고 2010년 지금의 한국 대학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깊고 풍부한지 다시금 돌아보게끔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경험하는 것이 있다. 대중 강연을 가서 질의·응답 시간이 되면 꼭 몇몇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대안이 무엇인가요?' 아니면 '역시 이 강의에서도 결론은 없군요.' 나는 무엇이 대안이냐는 질문을 오래전부터 의심해왔다.

저 말은 정말 대안을 찾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지금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말인지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더하여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그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수동적인 말이다. 대안이 자기 손에 구체적으로 주어질 경우에만 자신은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자기가 나서서 대안을 생산하고 실천해보겠다는 의지는 이 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요즘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심을 품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서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꼼꼼하게 자기 감정을 이입하며 알아보고 살펴보려는 태도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이들의 태도는 이렇다. '당신이 말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런 사례들이나 분석 같은 것은 이만 되었고, 그래서 대안이 뭐야?'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인민들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이 모든 것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말한다. '됐고, 그래서 결론은? 대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들에 필요한 것은 사유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아니라 기획하는 인문·사회공학자들이다.

그런데 정말 이들이 잘 알고 있는가? 대학교 강의실에서부터 대중 강연장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그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물어보면 의외로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이야기가 '다 안다는' 그들의 앎에는 빠져있다. 대신 그 허점투성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파시즘 따위의 헐렁헐렁한 개념들이다.

이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그 '단어'들이지 사람들의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리처드 세넷이라는 한 사회학자의 말을 응용해서 말한다면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태의 '이름'에 불과하지 '사태'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데치다'라는 말은 야채를 끓는 물에 살짝 삶는 것에 대한 이름이지 삶는 행위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알고 있다는 그것에는 세상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앎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없다. 대신 요즘 세상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고발 르포'인 것처럼 보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PD수첩>이 대표적일 것이다. 정권이 이 프로그램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고발 르포의 힘은 대단하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원인이 어떻고, 대책이 어떻고 하면서 '공학형' 고준담론을 펼치는 사이에 PD, 기자들이 발로 뛰면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폭로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다. <PD수첩>뿐만 아니라 <한겨레21>에서도 '노동OTL'과 같은 현장 르포를 기획하여 보도하였는데 그 호응이 어떤 기사들보다도 좋았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던져야하는 질문이 '왜'나 '어떻게'가 아니라 바로 '무엇'이라는 방증인 셈이다.


▲ <암행 기자 권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황현숙 옮김, 프로네시스 펴냄). ⓒ프로네시스
권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황현숙 옮김, 프로네시스 펴냄)는 바로 이런 현장 르포이다. 그는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서 실제 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자기 몸을 통해서 중계한다. 영하 15도가 넘는 강추위에서 자기가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 떨면서 노숙자를 취재하고, 화상을 입으면서 대형 할인점에 납품을 하는 빵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만난다. 법망을 피해서, 혹은 노골적으로 법을 무시하면서 노동자들과 소비자를 동시에 후려치는 텔레마케팅의 노동자로 취직하여 그 사기술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러나 그가 폭로하는 것은 단지 개별 현장들 하나하나가 아니다. 이 현장들 하나하나를 읽다보면 '보편타당한' 독일 사람은 이렇게 외칠 것이 틀림없다. '오 마이 갓. 이것이 정말 독일이란 말인가?' 발라프가 폭로하는 것은 독일이라는 사회 자체, 혹은 독일이라는 사회에 대해 '보편타당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정 혹은 환상이다.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독일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읽으면서 독자는 아마 '오 마이 갓! 이게 '복지 사회' 독일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일부로 성희롱 사건을 조작해내고 노동조합 간부들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서 승리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변호사와 사측의 음모를 보면서 '오 마이 갓, 이게 노동조합이 힘이 세다고 하는 독일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외롭게 사는 노인네들과 독일어를 잘 하지 못하여 언제나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터키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협박하여 물건을 강매하는 텔레마케팅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오 마이 갓! 이게 소비자들의 권리가 잘 보장되고 사람들이 법과 규칙을 잘 따르는 독일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이다. 마치 우리가 <PD수첩>을 보면서 그래도 아시아에서 좀 산다고 자부하고, 그래도 아시아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한국이라는 사회의 허상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인뿐만이 아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뭐야, 독일 이야기잖아' 하고 시작하지만 곧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이야기라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가톨릭계 사회복지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들의 쉼터가 정부 지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좋을 젊은이조차 붙들어두고 있다는 고발에서는 한국의 많은 장애인 시설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에게 노숙자와 장애인은 정부 보조금을 위한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사장을 하다 노숙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잘 나가는 직장인 혹은 사업가에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은 1997년 이후 한국의 노숙자들이 생각날 것이다.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생각 외로 이 길은 빠르고 쉬우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빵 공장에서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한명씩 불러서 노동조합의 권리 보호보다 보험 증권이 더 범위가 넓다'며 노조원을 회유하는 장면은 초국적기업 삼성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텔레마케팅 회사에 사원들 간에 묘한 경쟁 의식을 부추기고 알량한 몇몇 떡고물을 던지면서 실적 경쟁을 압박하는 장면에서는 수많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허울밖에 없는 직위 상승을 미끼로 대학생들의 노동력을 갈취하고 있는 한국의 '알바' 노동이 생각난다. 결정적으로 실적이 나쁜 직원을 의자에 앉히지 않고 서서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벌칙은 대형 할인점에서 계산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자는 것이 '투쟁'을 해야하는 '사업'이 되어야했던 것이 생각날 것이다.

자,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세계화를 예찬했던 토머스 프리드먼의 <지구는 평평하다>가 맞았다는 것이다. 단, 그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다. 지구촌 어디에 있건 간에 노동하고 돈 벌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지구가 평평해진 것이 아니다. 잘 나가는 '선진' 국가의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든 '권리 없음'의 벌거벗은 생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계를 넘어 모두의 삶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어떤 담론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안인가? 정책인가? 맞다. 그러나 그 대안과 정책으로 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래서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환상을 더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그런 르포가 필요하다. 1980년대 지배자들이 빼앗으려고 했던 것은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이었다. 그 개념들이 인민에게 사회를 읽는 힘을 주었고, 우리 사회의 실체를 폭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대학가나 공단에 있던 사회과학 서점을 털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은 어떤 언어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바로 바로 <PD수첩>과 같은 '현장 르포'이다. 사회과학의 언어를 대체하여 그것이 우리 사회의 실체를 폭로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자나 연구자와 같은 언어를 생산하는 사람들,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이 움직여야하는 곳이 어딘지는 빤하게 보이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은 '르포'가 필요하고 르포를 읽는 더 많은 독자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신경숙 작품을 말하기 전에 이 작품을 왜 읽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먼저 몇 마디.

한때 한국 문학에 관심을 갖고 어쭙잖은 평론 비슷한 것을 몇 편 쓴 적도 있지만, 최근 몇 년간 나는 한국 문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문학 비평 이론을 가르치는 영문과의 대학 선생이 되었고 내게 주어진 선생으로서의 여러 일들을 감당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내 나름의 판단으로 한국 문학의 활기가 사라졌다고 느꼈던 것도 곁들인 이유였다.

한국 문학은 그렇게 내게는 '너무 멀어진 당신'이 되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문학 연구 모임 비슷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한국 문학을 좀 더 가까이 하게 되었다. 한국 문학 전공자들과 나 같은 외국 문학 전공자들이 섞여 있는 모임의 성격상 한국 문학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그야말로 중구난방 격으로 쏟아져 나오는 모임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중구난방 속에서 한국 문학 전공자들이나 비평가들은 언급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한국 문학의 징후들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여러 얘기가 가능하겠지만 그동안 많이 언급되어온 '주례사 비평' 혹은 '정실 비평'의 폐해를 실감하게 된 게 그 중 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주례사 비평'의 이론적 의미 따위를 논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한국 문학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따져야 할 몫이리라. 다만, 외국 문학이긴 하지만 어쨌든 문학 작품과 비평 이론을 가르치는 문학 선생인 내가 보기에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작품들이 평론가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예만 먼저 들고 싶다. 현기영의 장편소설 <누란>(창비 펴냄)이다. 나는 어지간하면 읽기 시작한 작품은 끝까지 읽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까지 읽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만큼 엉망이었다. 현기영이 중견 작가이기에 그만큼 더 환멸감이 컸다. 여러 말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읽은 소감 몇 마디만 적자.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해주는 '인형'들이다. 살아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니 사건도 필요 없다. 사건이 있어 보이지만 있으나 마나한 사건들이다. 사건의 필연성이나 서사의 필연성도 없다. 그리고 작품의 주제 의식에서 뭔가 새로운 걸 배우지도 못한다. 작가가 각 등장인물들, 특히 주인공 허무성을 통해 하는 얘기들이 독자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것도 아니다. 꼼꼼하게 읽지 않더라도 대충 아는 얘기들이다. 어떤 부분은 읽기가 민망할 정도로 상투적이다. 인물들이 하는 말들이 내용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굳이 작가가 할 말을 그런 인물을 통해 얘기해야 하는 서사적 논거가 작품에 전혀 없으며, 그 말들이 새로운 인식이나 깨달음을 주지도 않는다.

혹시 작가는 1970년대, 80년대를 경험했던 나 같은 중년층이 아니라 그 시절을 모르는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훈계'의 말씀을 전해 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품에는 허무성과 학생들이 나누는 지루한 대화 혹은 논쟁이 길게 실려 있다. 역시 재미없다. 각 시대는 각 시대 나름의 시대 경험의 양상이 있다. 그걸 무시하고, '너희는 왜 그렇게 사는가'라고 떠들어봐야 작품에 나온 표현대로 "꼰대" 짓에 불과하다. 작가가 "꼰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며, 하물며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더욱 곤란하다. 오히려 작가는 "꼰대"질의 냉철한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절망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철저하게 절망하여 그 밑바닥에 닿으면 거기에서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고 그때 우리는 바닥을 걷어차고 힘차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누란>, 300쪽)

멋진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절망"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절망을 통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아가 탄생"할 걸로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나는 이런 수준의 작품을 출판한 것은 작가의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품의 뒤에 붙인 추천의 말씀들은 듣기 민망할 정도이다. 이 소설이 "오래 아픈 사람들에게 깊은 안식을 줌은 물론 좋은 약이 될 것이 틀림없"단다. 나로서는 작품을 읽고서나 쓴 추천사인지 의심스럽다. 조심스러운 짐작이지만, 이런 질 낮은 작품을 나름의 명망을 지닌 출판사에서 낸 것은 작품의 '질'에 대한 엄격한 판단이 아니라 그동안 출판사와 작가가 쌓아온 '정실'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정실주의'가 문학 판에도 자리 잡은 게 아닐까. 나는 환멸감을 느꼈다.

2


▲ 소설가 신경숙. ⓒ백다흠
물론 이런 나의 독서 실감이 틀릴 수도 있다. 전문적으로 한국 문학을 읽고 분석하는 현장 비평가들은 다른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누란>이 훌륭한 작품일 수도 있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평가하는 근거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한편의 작품만을 갖고 한국 문학계의 '정실주의' 운운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런 식의 단정을 내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엄밀히 말해 비평의 객관성은 없다. 모든 읽기와 비평은 주관적이다. 비평의 객관성은 독자와 비평가들이 표현하는 다양한 주관적 견해들 사이의 대화와 논의를 통해 서서히 형성될 뿐이다. 영문학 연구자로서 내가 신뢰하는 비평가 중 한 명인 리비스(F. R. Leavis)가 비평의 키워드로 내세운 '공동의 모색(the common pursuit)' 개념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비평의 객관성은 시민적 양식을 지니고 독서의 훈련을 거친(그래서 인문 교육이 중요하다) 독자 대중과 비평가들의 주관성들이 만나 어떤 객관성, 그러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화하고 새롭게 형성되는 객관성을 형성하는 '공동의 모색'이다.

그러나 이런 공동의 모색에는 전제가 있다. 비평가가 비평가다워야 한다. 이 말은 분명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나의 독서 실감과 너무나 판이한 판단을 내리는 적지 않은 작품 평을 읽으면서 든 생각. 한국 비평이 비평의 본령인 비판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평소에 신뢰해 온 예민한 비평가조차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문학에 나름의 관심과 애정을 지닌 독자이자 외국 문학 연구자로서 나는 그 점이 궁금하다.

3

신경숙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두가 길었다. 우선 내가 읽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전화벨>,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몇 가지 단평을 적겠다. 그리고 내가 앞서 언급한 비평가들의 '정실주의'와 '주례사 비평'의 몇 가지 사례를 다뤄보겠다. 그리고 왜 그런 '정실주의'가 작동하는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해보겠다.

나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이하 <엄마>, 창비 펴냄)와 <전화벨>을 앞서 언급한, 내가 참여하는 어느 문학 연구 모임에서 읽었다. 이 작품들이 모임에서 추천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 이유가 무엇이든 대중들의 관심을 모으는 베스트셀러라는 것. 둘째, 작가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신경숙이라는 것. 내 소감을 당겨 말하자. 두 작품 모두 나는 실망스럽다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두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좋게 평가해온 작가가 '성숙'의 길이 아니라 '퇴락'의 길을 걷는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두 편의 작품을 그가 쓴 다른 장편인 <외딴 방>(창비 펴냄)이나 <깊은 슬픔>(문학동네 펴냄)과 비교해도 그렇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몇 편의 관련 평론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그런 평론들은 내 궁금증을 해명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실 비평'의 문제와 관련하여 뒤에 다시 논의하겠다.)

내가 보기에 신경숙은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그 경계의 근거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에서 이제 대중 문학으로 완연하게 넘어갔다. 이것은 가치 판단이 아니라 사실 판단이다. 다시 말해 나는 대중 문학을 폄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대중 문학의 가치를 십분 인정하며 실제로 대중 문학의 다양한 장르 문학들을 즐겨 읽는다. 다만, 각자의 소임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작가가 실제로는 대중 문학을 하면서 자신이 본격 문학을 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그 점에서 일본 문학계에 던졌던 가라타니 고진의 아래와 같은 조언은 지금의 한국 소설계에도 유효하다. 그렇게 한국은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나는 작가에게 '문학'을 되찾으라고 말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또 작가가 오락 작품을 쓰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 열심히 잘 써서 세계적인 상품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만화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 그것이 가능한 작가는 미스터리계 등에 상당히 있습니다. 한편, 순수 문학이라고 칭하고 일본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비, 65~66쪽)

나는 가라타니의 지적을 이렇게 읽고 싶다. "순수 문학이라고 칭하고 한국에서만 읽히는 통속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잘난 척을 해서는 안"된다. 신경숙의 많은 애독자들은, 신경숙 문학을 내가 자의적으로 대중 문학으로 폄하하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엄마>나 <전화벨>은 분명 본격 문학보다는 대중 문학에 가깝다. 대중 문학과 본격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놓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그 중 하나. 대중 문학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감수성에 호소하고 영합한다. 그러나 본격 문학은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불편하게 만든다.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대중의 감수성에 영합할 때, 그래서 얄팍한 인기를 얻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에 만족할 때 작가는 통속 작가가 된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이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작가가 항상 긴장을 잃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내가 보기에 신경숙은 그런 긴장을 잃고 있다. 이게 단지 까칠한 독자의 투정일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려 한국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에게 던지는 나의 까칠한 투정의 변명을 삼고 싶다.

"<노르웨이의 숲>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는, 이것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상상을 넘어선 판매고에 나름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1Q84>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작업이고, 내용에 보람도 있었습니다. (…) 소설에게 가장 중요한 점은 시간에 의해 검증받는 것입니다. 시간의 혹독한 세례를 받는 것." ( '인터뷰 : 하루키를 말하다,' <문학동네> 64호(2010년 가을), 533쪽)

간단히 말해 제대로 된 본격 문학 작가라면 자신의 작품이 많이 팔린다면 마냥 기뻐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혹시 자신의 작품이 대중의 감수성에 충격을 주기는커녕 영합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작가의 길이 갈린다.

4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경계를 나누는 근거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근거 중 하나는, 역시 애매한 말이지만, 현실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냉정함, 무자비함, 냉철함이다. 내가 이해하는 글쓰기의 '유물론'이다.

작가가 견지하는 시선의 냉철함은 <엄마>나 <전화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신경숙 소설의 전매특허인 아름답게 포장된 미문의 '감상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체는 곧 사유의 표현이다. 신경숙 문체에서 때때로 느낄 수 있는 느끼할 정도의 아름다움은 그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표현이다.

신경숙 소설은 기본적으로 '천사표'이다. 생활인으로서 작가가 '천사'인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정신'이 천사의 시각에 머문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작가들은 적어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인간의 삶은 천사가 아니라 악마에 가깝다. 삶은 때로 아름답지만, 훨씬 더 자주 추하고, 혐오스럽고, 잔인하고, 역겹고, 위선적이고, 동물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의 그런 악마적 심성, 마성에 친숙해야 한다. 그걸 모르고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다. 되풀이 말하지만, 이런 판단은 생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작품에 드러난 작가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나는 작가 개인의 성품이 천사표인지 악마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비평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숙 소설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악한'이 없다. 모두가 선하다. 이것은 비단 신경숙 소설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나는 제대로 된 악한을 만난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한국 영화에서 그나마 '악한'들을 만난다.)

나는 이 점이 한국 소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라고 판단한다. 되풀이 말하지만 인간은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깝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균열적이고, 위선적이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아무리 악해 보이는 인간도 그 내면에는 한줌의 선함이 존재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애초에 '선'과 '악'의 구분조차 그렇게 손쉽게 나뉘지 않는다. 일급의 작가들은 주어진 '선'의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선'이라고 주어진 것들이 과연 선한 것인지를 좋은 작가들은 따지고 묻는다.

5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신경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전화벨>은 후일담 소설이다. 작품의 시간은 1980년대이고, 공간은 대학과 그 언저리이다. 이 작품의 공간과 시간은 나에게 낯익다.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윤이와 단이와 미루와 명서, 미래 등에 다른 누구보다 나는 공감을 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에 대해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궁금하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의 동세대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

작가는 이 작품을 후일담 문학이 아니라 일종의 성장 소설, 혹은 "청춘 소설"로 썼다지만, 후일담 문학이든 청춘 소설이든 핵심은 그들이 겪는 고통, 방황, 죽음, 성장의 깊이이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는 아름답게 찍은 예술 사진이 연상되었다.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찍어 멋진 사진틀에 넣어서 우아한 공간에서 전시되는 예술 사진. 대개 그런 예술 사진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반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어떤 관객은 그런 예술 사진을 볼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런 사진들이 보여주는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에서는 재현(representation)의 윤리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진작가가 아름답게 '재현'하는 것은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 더 강하게 표현하면, 그런 재현 행위는 어느 선까지 '예술'의 이름으로 용서될 수 있는가? 나는 여기서 재현의 불가능성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신경숙이든 누구든 그만의 방식으로 그들이 겪은, 불같은 '청춘 시절'을 회고하고 재현할 수 있다. 다양한 현대 비평 이론이 밝혔듯이, 모든 예술적 재현 행위는(그것이 문학이든, 사진이든, 그림이든) 그 본성상 불가능한 시도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 실제 현실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가?

하지만 훌륭한 예술 작품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한다. 그래서 냉철해진다. 자신이 묘사하고 서술하는, 고통 받는 대상에 대해서나 그런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대해서나 한 치의 감상도 없이 무자비할 정도로 냉정하다. 그런 냉철함에 감상성이나 센티멘털리즘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어떤 훌륭한 예술 혹은 문학 작품치고 감상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다. 나는 소위 '리얼리즘'의 정신을 무자비한 냉철함으로 우선 이해한다.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무자비한 냉철함의 리얼리즘을 표현한다. 그것이 '양식'적으로 사실주의이든, 모더니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냉철한 리얼리즘, 혹은 유물론의 '정신'이다. 신경숙의 <엄마>나 <전화벨>은 그런 작품인가?

6

<전화벨>은 신경숙 소설의 미덕으로 흔히 꼽혀온 요소들이 냉철한 '악마'적 현실 감각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어떻게 작품을 해칠 수 있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신경숙은 그만의 고유한 문체를 가진 드문 작가이다. 그런 문체의 가치를 나는 십분 인정한다. 문학은 무엇보다 글의 예술이다. 그의 문체는 서정적이고 섬세하다. 그래서 때로는 감상성의 위험에 빠진다. 감상적 문체가 그가 그리는 대상에 대해 냉정하고 냉철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할 때, 현실을 관념으로, 관념을 전달하는 유려한 문체로 덮어버리게 된다. 아름답고 감상적인 문체가 효과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이 작품에 많은 고통이 그려지지만 많은 묘사들이,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실감나는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신경숙은 고통을 고통스럽지 않게, 아름답게만 그린다.

나는 하나의 예로 언니 미래의 '투신'을 길게 묘사하는 미루의 설명을 들겠다. (<전화벨> 227~229쪽을 보라!)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점이 가장 불편했다.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이렇게 아름답게, 똑같은 서정적 톤으로 묘사하는 게 온당한가? 한마디로 신경숙은 '천사'의 눈으로만 현실을 본다. 그러니 그가 그리는 네 명의 주인공들의 삶과 고통, 방황 속으로 작가의 시선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표피만을 그린다. 그러니 작중 화자는 다양해보이지만 사실은 모두 작가의 목소리만을 전한다.

독자들도 쉽게 작품을 읽으면서 실험해볼 수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 이름을 가리고 그가 하는 말이 누가 하는 말인지를 맞혀보시라. 쉽지 않을 것이다. 인물은 각기 달라 보이지만 모두 작가의 '스피커'에 불과하다. 각 등장인물은 그들의 고유한 면모를 지니지 못하고, 작가의 '감상'과 '회고'를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하게 된다. 그 매개체들을 통해 표피적으로 전달되는 고통에 대한 연민, 동정, 눈물의 정서. 그런 감상성이 대중 소설의 미덕이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7

신경숙은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적는다.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뭔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 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374쪽)

신경숙 본인이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 소설"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그들의 자유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판단은 제대로 된 "품격 있는 청춘 소설"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아름다움은 미려한 문체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고통을 그릴 때는 거기에 걸 맞는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고 냉철한 문체를, 아름다운 대상을 그릴 때는 거기에 걸 맞는 고양된 문체를 적절하게 선별하여 부릴 줄 아는 작가가 좋은 작가이다. 그렇게 내용과 형식은 분리될 수 없다. 아무 대상에 대해서나 '미문'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숙은 아마도 그녀가 자부심을 지니고 있을 그녀의 유려하고 서정적인 문체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자기복제의 위험에 빠져 있다.

8

지금까지 나는 <엄마>와 <전화벨>이 내가 읽기에 훌륭한 소설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혹시 내 읽기와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려고 몇 편의 관련 평론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은 해소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을 다루는 평론들이 1990년대 이후 한국 비평계의 고질병으로 지칭되어온 '주례사 비평'과 '정실 비평'의 좋은 예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다시 들었다. 그와 관련된 기억 하나.

<엄마>가 출간되고 나서 베스트셀러가 될 기운이 보이자, 작품 판매를 독려하려는 듯이 이 소설을 낸 출판사에서 내는 계간지에는 이 작품을 한껏 띄워주는 평론이 실렸다. 나는 지금도 묻고 싶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설령 <엄마>가 그 평론의 상찬대로 뛰어난 작품일지라도 그런 식의 자화자찬형 호평은 면구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내가 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작품에 대한 호들갑은 아무리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자본주의 출판 시장이고 그 출판사에 종속된 비평가라지만 정도를 넘어선 일이다. 내가 읽은 두 편의 평론을 다시 살펴보면서 그런 '정실 비평'의 문제를 가늠해보겠다.

먼저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위원이었던 임규찬이 쓴 <전화벨> 론인 '청춘을 향한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창작과비평> 149호(2010년 가을))을 보자. 임규찬은 <전화벨>은 "<엄마를 부탁해>와 함께 작가가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차례로 탄생시킨 이란성쌍둥이 같았다. 무엇보다 '어머니'와 '청춘'이라는 식상하기 쉬운 소재에 남다른 소설적 육체와 창조적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야말로 신경숙의 능력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지"(449쪽)라고 고평한다.

<엄마>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할 신형철의 글에서 논의하겠다. 내 질문은 이렇다. 과연 <전화벨>이 "'청춘'이라는 식상하기 쉬운 소재에 남다른 소설적 육체와 창조적 생기를 불어넣은" 작품인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임규찬은 이야기의 구조와 예의 서정적 문체를 근거로 든다.

"이 책은 확실히 문학적 수완이 돋보이는 신경숙 미학의 한 성채다. 작품의 모든 언어는 그만의 문체로 직조되었고, 이야기는 미학적으로 구조화되었다. 정윤과 명서의 사랑을 축으로 하여 이들에게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 단과 미루의 이야기를 끌어안고 있는 단순한 구조지만, 구체적 전개과정은 복잡하다" (450쪽)

핵심은 마지막 문장에 있다. 소설의 전체 구조는 단순하다. 그 단순함은 앞서 내가 지적했듯이, 소설의 구조를 지탱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작가의 '감상'을 전달하는 도구에 머문다는 데 있다. 그런데 임규찬은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의 "구체적 전개 과정은 복잡하다"고 토를 단다. 묻는다. 무엇이 복잡한가?

내가 보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과 같은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내가 보기에는 진부하고 상투적이다. 임규찬도 이 소설이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그의 지적대로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이다.

"대개의 소설이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어떤 하모니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데 비해, 신경숙은 확실히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으로 하나의 멜로디를 지향하고 있음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452쪽)

임규찬은 이런 지적을 칭찬으로 하고 있지만 앞서 지적했듯이 이런 지적은 비판으로 읽혀야 한다. <전화벨>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어떤 하모니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공감과 연민의 인간학으로 하나의 멜로디를 지향하고 있"다. 이 소설이 에세이에 가까운 이유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소설로서 실패했다. 그런데 임규찬은 오히려 그런 실패를 성공의 이유로 든다. 이해하기 힘들다. 임규찬의 결론이다.

"어쨌든 낯익은 청춘 소설을 거부하며 이렇게 대중적인, 어떤 의미에서 통속적이기조차 한 요소에 품격을 부여해, 적극적으로 우리말의 무늬를 새기고자 하는 교양 소설의 면모에서, 그리고 그의 연이은 문학적 성취를 생각하면 바야흐로 신경숙의 진경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453쪽)

나는 임규찬이 안목이 있는 비평가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면서 실망했다. 정말 임규찬이 이렇게 생각하고 썼다면 그의 비평가적 안목이 의심스럽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쓴 것이라면 비평가적 정직성이 의심스럽다.

9


▲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지음, 창비 펴냄). ⓒ창비
두 번째 평론으로 신형철이 쓴 '누구도 너무 많이 애도할 수 없다 : 신경숙의 소설과 애도의 윤리학'(<문학동네> 64호(2010년 가을))을 살펴보자. 미리 말해두자. 나는 신형철 평론을 즐겨 읽는 애독자이다. 나는 그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펴냄)를 근년에 읽은 가장 인상적인 문학 평론집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작품의 결을 세심하게 살피고, 독자와 대화를 나눌 줄 아는 글을 쓰는 좋은 비평가이다.

그런 기대를 안고 신형철이 쓴 신경숙 론을 읽었다. 그런데 그가 쓴 신경숙 론은 실망스러웠다. 먼저 <엄마>에 대한 그의 분석을 보자. 신형철은 <엄마>를 비판하는 비평들을 언급하면서 "이들 비판적인 논평들은 이 소설이 모성을 신비화하면서 모성으로부터 위안을 얻으려는 퇴행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평들은 "교과서적이어서 따분한 논법"(86쪽)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신형철은 예의 "무수한 대중들의 소박한 항변"(86쪽)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도 잘 알겠지만, 대중들의 소박한 항변이 엄격한 분석과 판단을 해야 하는 비평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영화 <디 워>를 둘러싼 논쟁은 잘 보여준 바 있다.

그렇다면 신형철은 왜 <엄마>를 높이 평가하는 걸까? 신형철의 독서 실감은 이렇다. "한국 특유의 가부장제 가족 구조가 근대화, 산업화 과정과 만나면서 어머니라는 존재의 고유한 내면성을 말소해온 맥락과 그 결과를 냉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게 독서의 실감이다"(87쪽). 그런가? 이런 정도의 답변은 한국 문학의 어머니상을 재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에서 이미 제기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어머니들'도 그들만의 내밀한 삶이 있었다는 것. 그들도 남편이나 자식들과 같은 욕망을 지닌 인간이었다는 것. 이 작품이 이것과 다른 어떤 새로운 모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가? 이 질문의 답을 신형철은 이렇게 비껴 제시한다.

"어머니의 실종 앞에서 (가족들이 드러내는-인용자) 이 사소한 기억들은 거대한 죄의식으로 되돌아온다. 바로 여기가 핵심이다. 만약 이 소설을 읽고 모성에 대한 향수에 젖거나 모종의 위안을 얻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먼저 압도적인 죄의식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87쪽)

내가 보기에 신형철이 내세우는 "무수한 대중들의 소박한 항변"은 바로 이 모성과 관련된다. 신형철은 애써 부인하려 들지만 대중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소박한, 그러나 이제는 사라져가는 모성에 대한 향수가 있기에 역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거다. 신형철이 자주 기대는 정신분석학을 빌려서 말하자. 향수와 죄의식은 손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 점이 <엄마>와 영화 <워낭소리>가 대중에게 호소력을 지녔던 이유이다. 그러나 되풀이 말하자면 <엄마>는 모성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인식도 독자나 관객에게 주지 않는다.

여기서 상세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굳이 비교하면 봉준호의 영화 <마더>가 좀 더 충격적인 모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많은 평자들이 <엄마>에서 재현된 모성성이 '퇴행적'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전화벨>을 신형철은 '애도'의 시각에서 읽는다. 그답게 날카로운 분석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이 지닌 '회고'의 의미를 '애도'와 깊이 연결하지 않는다. 신형철은 애도의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예로 <전화벨>을 읽는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의 '애도'는 실패했다고 본다. 애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과거로의 퇴행, 과거의 신비화가 일어난다. 애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죽은 이들은 그들의 세계로, 산 사람은 삶의 세계로 각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도 행위의 목적은 언제나 살아야 하는 사람을 위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워도 현재의 삶을 살아남은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 과거를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문제도 여기 있다. 회고되는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회고하는 현재가 문제이다. 현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과거가 신비화될 때 애도는 실패한다. 과거를 '과거'로 떠나보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 많은 후일담 문학이 비판받는 이유이다.

<전화벨>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을 "애도의 서사"로 규정한 신형철도 이 점을 의식한다. 신형철의 지적대로 이 작품은 "애도의 서사"에 머물고, "애도의 윤리학"(95면)에 이르지 못한다. 굳이 지나간 1980년대의 "청춘"을 회고하는 작업이 지금, 이곳의 작가나 독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작품은 깊이 반추하지 못한다. 신형철도 그 점을 비판한다.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더 질기게 물어야만 애도의 서사가 애도의 윤리학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애도 작업은 주체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둘째, 그 주체를 위해 공동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화벨>은 뭔가를 더 물어야 하는 그 순간 멈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96쪽)

날카로운 분석이다. 그런데 신형철은 더 "질기게" 묻지 않고 중단한다. 아쉽다. 그러나 이미 신형철은 그가 쓴 김훈 론에서 이 두 가지 질문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인간적인 것의 한 가운데에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과 고통스럽게 대면하지 않는 모든 윤리학은 허위다, 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윤리의 공리다. 이런 논점들은 김훈의 반인간주의도 얼마간 공유하는 것들이다. 그는 '한국 문학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바탕 위에서 놓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연민의 문학을 거절하는 까닭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명철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통념들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인간을 믿지 않고 연민하지 않을 때 역설적이게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진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인간주의는 역설적인 인간주의가 된다." (신형철,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몰락의 에티카>, 52쪽)

"자기변명을 늘어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물론에 대한 유일한 정의"라는 알튀세르의 언명을 인용하며, 신형철은 이것이 "김훈의 유물론"(60면)라고 요약한다. 나도 공감한다. 그는 김훈 소설의 핵심을 잘 포착하고 있다.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신경숙 소설은 얼마나 "반인간주의"에 가까운가? 신경숙 소설은 김훈이 비판하는 "연민의 바탕 위에서 놓여진" 소설의 좋은 예가 아닌가? 신경숙 소설은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통념들을 과감히 포기"하기는커녕 그에 공모하고 있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신경숙 소설은 "인간적인 것의 한 가운데에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과 고통스럽게 대면하지 않는 모든 윤리학은 허위다, 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윤리의 공리"라는 것에 둔감하며, 그래서 "유물론"적 글쓰기에 매우 미달하는 작품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떻게 <엄마>와<전화벨>이 좋은 소설인가?

10

안목이 있는 비평가라고 항상 공감할 만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리고 임규찬이나 신형철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독할 대목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읽기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나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신뢰할 만한 비평가라고 여겨온 이들조차 납득할 만한 글을 못 쓰는 이유가 혹시 작품외적인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임규찬이 편집위원을 지냈던 출판사에서 베스트셀러 <엄마>를 냈고, 역시 신형철이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출판사에서 후속 베스트셀러 <전화벨>을 냈다는 사실은 그들의 납득할 수 없는 신경숙 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비평의 위기'를 느낀다. 한국 문학 비평에서 제대로 된 비판, 혹은 예리한 독설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말을 나도 종종 들었지만, 이번에 신경숙 소설을 나 나름대로 읽고 관련 비평을 읽으면서 그 점을 실감한다.

많은 비평가들이 '공감의 비평'을 말한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작가 로런스(D. H. Lawrence)의 충고. "비평은 흠잡기가 아니다. 균형 잡힌 의견이다." 로런스의 말은 이렇게도 읽어야 한다. "비평은 주례사가 아니다. 균형 잡힌 의견이다." 균형 잡힌 의견을 개진하려면 아무 작품에나 공감을 표명해서는 안 된다. 공감할 수 없는 태작에 대해서는 내장을 후벼 파는 독설도 때로는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독일과 미국의 비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와 미치코 가쿠타니는 공감과 독설 사이의 균형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날카로운 분석과 판단으로 잘 보여준다. 말이 좋아 '공감의 비평'이지 실상은 '정실 비평' 혹은 '주례사 비평'이 계속 생산된다면 앞으로 한국 문학 비평은 '위기'를 넘어서 예고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독자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비평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아무 작품이나 무조건 좋다고 하는 비평을 어떻게 믿어야 하나? 차라리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는 일반 독자들의 인터넷 독서 후기가 더 신뢰할 법하다. 이 눈치 저 눈치봐가면서 쓰는 비평은 이미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것이다.

되풀이 말하지만 비평(criticism)은 곧 비판(critique)이다. 공감과 비판 사이의 균형을 잃은 비평은 쓸 이유도, 읽을 이유도 없다. 이쯤 되면 이제 한국 문학 비평계에서도 알맹이 없는 고담준론이 아니라 자신의 감식력을 걸고, 툭 까놓고 작품에 대한 평가의 별표 매기기부터 해야 되는 게 아닌지. 그 정도의 서비스는 독자들에게 해줘야 최소한 비평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허튼소리 그만두고 이런 기본적인 서비스부터 비평가들은 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우리시대의 비평가들, 당신들은 누구인가? 세간에 떠도는 말대로 출판 자본에 종속되어 수준도 안 되는 작품을 예쁘게 포장해주는 '문학 코디네이터'인가? 아니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비평가인가? 신경숙 소설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드는, 한 까칠한 독자의 질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화적 대국주의 비판

위치우위의 <중화를 찾아서>(심규호·유소영 옮김, 미래인 펴냄)를 읽는 내내 정수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실크로드라는 거대한 역사의 길 위에서 우리의 문명사적 자화상을 발견하고 재구성하려는 그의 노력과 헌신이 다시금 뜨겁게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정수일의 일생에 걸친 여정은 "세계사"라는 인류의 무대 위에 선 우리에 대한 발견을 향해있다. 위치우위의 중국 문명 내면 탐사기라고 할 이 책 역시 중국이라는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와 용광로에서 인류의 역사와 만나려는 한 지식인의 무게 있는 성찰과 성실함이 돋보인다.

그런 까닭에 위치우위의 글은 중화적 자존심에 대한 교묘한 포장이거나 다른 문명권에 대한 비교우위를 내세우는 식의 중국 선전이 아니다. 도리어 그는 중국 문명의 뿌리에 기존의 상식이 지배해온 중국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철학적 경계선을 넘는 힘들이 함께 할 때 역동적인 힘을 발휘했음을 주시한다. 이것은 "중화적 대국주의"라는 국민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자칫 사로잡힐 수 있는 오늘의 중국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기도 하고 중국이 인류 사회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인지를 끊임없이 묻게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위치우위의 <세계 문명 기행>을 읽어보았다면 그가 다른 고대 문명의 개성과 특징을 어떤 식으로 포착해내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대 문명의 유적에 대한 현상적 기록자가 아니라 그 유적 내면에 담겨 있는 의식, 정신의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중화를 찾아서>도 다름 아닌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중국 문명의 기원과 그 변모의 과정을 추적해내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문명사 인식은 과거 역사와의 파괴적 단절을 강요했던 문화 대혁명의 굴곡을 통해 얻게 된 각성과 관련이 있다.

중국 고대사의 인식, 문화 대혁명의 소산


▲ <중화를 찾아서>(위치우위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미래인 펴냄). ⓒ미래인
다이허우잉의 <시인의 죽음>이라든가 바진의 <가(家)>나 <매의 노래>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듯이 문화 대혁명이 중국의 역사 문화 의식을 마비시키고 문명사적 자기 발견의 의지를 질식시킨 것에는, "거대한 국가의 문화 영혼이 오랜 기간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결과이자 세계를 향한 창문을 닫아버린 탓이 크다. 물론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 대한 오늘날의 비판 일변도의 분위기는 하방을 통한 지식인의 변화, 관료화된 권력의 민중성 회복, 그리고 자본의 일방적 지배에 대한 비판의식이라는 차원에 눈감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대혁명이 중국 사회에 가한 정신적 외상은 중국 역사에서 상실의 무게가 더 무겁다.

위치우위가 중국 고대사로부터 시작해서 중국 정신의 기원과 그 축적의 과정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도 바로 이 문화 대혁명 기간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장개석이 남겨 놓은 장서루로 일명 중정도서관(中正圖書館)에 쌓인 장서를 꺼내 읽으면서 중국 고대 역사와 만났다는 점이다. 모택동이나 장개석 모두 중국 고전에 능했던 이들인데 사상적으로나 역사의 현장에서나 서로 가장 매섭게 격돌했던 이 두 사람의 삶과 죽음 그 중간에 한 젊은 지식인은 고대로 돌아가 다시 현대라는 현실에 복귀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중국 고적(古籍) 속에 담겨 있는 일련의 생각들을 새롭게 평가하고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명해보는 실험을 추구해나간다. 그런 시선이 있기에 그는 중국의 역사에는 야만의 무리에 속한다고 여긴 선비족 탁발 씨가 이루어낸 문명의 호방한 기질의 등장을 주목한다. 이러한 토대가 없이 국제적 개방성을 가진 당의 문화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대당 제국은 결코 중원만으로 탄생시킬 수 있는 제국이 아니다."

중원 중심주의 탈피

그는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의 생모가 선비족이며 이세민의 황후 역시 선비족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선비족과 한족 혼혈의 결정체가 이루어낸 성과가 당의 문명사적 포괄성이라는 것이다.

또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불교를 비롯해서 무수한 국제적 인재와 문명의 교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만심으로 성령이 막혀 있는 이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일깨우는" 사태라고 말하고 있다. 당의 수도 장안이 당시 어떤 나라의 도시도 따를 수 없는 국제적 활력을 갖고 세계인의 모습을 한 것에 대해 주목하는 그의 글은 오늘날 중국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안의 묘사를 보자.

"장안 거리에는 외국인이 넘쳐흘렀다. 유학생만 해도 3만 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일본 유학생이 1만 명이나 되었다. 당시에는 유학생도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당대 말기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급제한 신라의 선비가 50여 명이었다.

과거 제도는 문관 선발 제도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중국에서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장안은 단순히 자신이 다른 문명에 대해 `관용"을 베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자신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다른 문명을 떠나면 장안 자체가 무미건조하고 경색되어 크게 위축될 것임을 알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위치우위는 문명의 도시에 대한 그의 철학을 이렇게 밝히고 있기도 하다.

"도시의 진정한 기백과 도량은 얼마나 많은 대국의 고관대작을 접대하였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지자들, 특히 쓸쓸히 떠도는 이들을 받아들였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도시의 진정한 고귀함은 생사를 겨루는 맞수들이 얼마나 많이 운집해 있는가에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맞수들이 투쟁을 그치고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이만한 정도의 생각과 시선 그리고 마음의 크기를 일구어낼 수 있는 도시라면 세계적 수준의 그릇이 될 만하리라. 그러나 위치우위는 지금의 중국이 바로 이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한다. 오늘날 중국의 젊은 세대가 다양한 문명의 융합이 아니라 이른바 중국적인 것만 내세우는 폐쇄적 열광을 지탄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난세 철학에 주입당하여 가는 곳마다 구분을 짓고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민감하게 경계 태세를 갖춘다. 그들은 권모술수를 지혜라고 여기고 스스로 모든 것을 막는 자폐 상태를 문화인 양 오인하며 자신이 사는 곳을 천하라고 믿는다. 또한 이렇게 해야만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나약하고 불안한 열등 심리는 순식간에 포악하고 사나운 영웅주의, 비정주의로 가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위치우위는 흔히 생각하는 "중화적 자존심"을 강화하기 위한 인문학적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설과 신화의 시대 속에 파묻혀 있는 문화 의식을 발굴하고 20세기 초 갑골문 해독을 통해 고대와의 새로운 대화가 가능해진 의미를 정리한다.

"이처럼 아득한 옛 조대(朝代)가 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하고 금방이라도 망국으로 치달을 것만 같던 20세기 초엽에 돌연 아주 분명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 수많은 고대 그리스 조각품이 발견되면서 열린 것은 고대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였다."

위치우위는 공자와 노자, 묵자를 현대의 좌표에 올려놓고 재해석하고 있으며 이백과 두보, 굴원과 도연명의 시가 만든 세계 속에 드러난 새로운 자아의 가치도 주시하며 조조의 문학적 역량도 눈여겨보게 한다.

사마천은 문화의 군주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기>의 사마천에 이르면 그의 붓끝은 엄청나게 뜨거워진다. 문화 대혁명의 정신적 상처를 이겨내면서 중국 문명사의 내면을 깊이 응시했던 그로서는 당연할 것이다. 사마천에 대한 그의 감동은 이렇게 적혀 있다.

"그는 어떠한 굴욕이라도 감나하고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스스로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세월을 견디며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역사를 연마하고, 자신의 남은 시간으로 중국의 천추만대를 정리하였으며 자신의 참혹한 굴욕을 바탕으로 민족이 마땅히 지켜야 할 존엄을 맞바꾸었으며, 남성을 잃어버린 자신의 몸으로 대지의 강건한 웅풍(雄風)을 소려쳐 불렀다. (…) 사마천은 감히 필적할 자가 없는 '문화의 군주'라고 말할 수 있다."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하고 살아남아 역사의 붓을 든 사마천에게 바치는 위치우위의 헌사다. 위치우위는 사마천이 "인물 전기 위주로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중국사'를 개창"했다고 평가한다.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사관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문명의 영혼으로 해서 우리는 굴욕과 참극의 경험이 도리어 역사의 가치에 인간의 눈으로 새로운 빛을 비추는 것을 보게 된다. 위치우위는 아마도 자신이 겪었던 문화 대혁명의 질곡과 고난이 사마천의 정신과 만나게 하는 길이 되었던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어떤 중국이 될 것이며 어떤 중국 문화의 힘을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그는 오늘날 중국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에는 명산대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꾸역꾸역 쌓아올린 거짓 풍경을 감상하기보다는 차라리 초라하지만 아늑한 집에 들러 서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 문화를 환희와 경축의 장식품, 선전의 도구, 정치적 메가폰으로 삼아 연희와 시상식, 명품, 브랜드로 구성된 허황된 겉치레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문화의 함정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나는 단지 중화 문화가 전 세계 문명과 어우러져 가끔씩 수천 년 쌓아온 고귀한 빛을 선사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이러한 생각이다. 전체 인류를 감동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과 우호. 이렇게 해서 중화 문화도 인류의 시정 넘치는 생존, 조화로운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변경에 서 있는 우리?

위치우위의 이러한 면모와 성찰의 힘이 대국이 되어 가는 중국의 문명적 자화상을 규정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런 지식인의 인문학적 문명사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중국 읽기의 새로운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그와 함께 또다시 우리의 문명사적 자화상은 어떻게 구축해나갈 것인가라는 숙제와 피할 수 없이 만난다. 역사에 대한 인문적 독법에 대한 논의와 대화가 부족하기만 한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세계사적 안목으로 역사와 문명의 내면을 꾸준히 짚어내고 새로운 각성을 이루어내려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정수일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목 문명을 비롯해서 중앙 아시아, 내륙 아시아의 역사적 지평에 대해 지치지 않는 학문적 의지를 발휘해온 김호동 같은 이가 있어 마음 뿌듯하다. 그가 최근에 내놓은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돌베개 펴냄)은 우리의 역사적 시야가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를 신선하게 깨우쳐 준다.

김호동도 중요시 한 것처럼, 중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적, 문명사적 자화상도 <중국의 내륙 아시아(Inner Asia of China)>를 쓴 오웬 라티모어의 지적대로 내륙 아시아와의 쟁투 속에서 이루어진 점을 주목해본다면 우리의 모습도 새로 바라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변경이라고 여긴 지점이 사실은 소용돌이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윤영익 옮김, 동북아시아역사재단 펴냄)에서 "변경"이라고 부른 역사적 공간이 사실은 역사의 새로운 추진력이 등장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명문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진 한 가수에 대한 학력 위조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급기야 공영 방송과 경찰이 검증에 나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방송 후 사실관계를 확인하고서도 개운치 않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사건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객관적 사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구성된 사실이 일단 우리의 의식에 자리 잡은 다음에는 그 근거를 흔드는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난 2006년 이른바 '황우석 사태'에서 체세포 핵 이식이라는 원천 기술과 황 박사의 능력을 믿었던 많은 사람은 그 실험이 조작된 것임이, 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난자를 채취 당했음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와 그의 기술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미지가 상품인 연예인에게 그것을 손상시킬 수 있는 주장이 유통된다는 건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건전한 회의주의에 바탕을 둔 검증이 생명인 과학에서 실험 결과를 조작한다는 건 과학자 사회 전체에 대한 모독이며 파문의 정당한 사유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학력이든 과학적 검증이든 일단 믿기로 작정한 사실을 폐기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유리한 것들만 취사선택해 주요 증거로 삼아 축적하고 광범위하게 유통시키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사실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문제는 사실 여부보다 담론의 유통 구조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학 관계 또는 문화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회 구성주의가 유행하기도 한다. 1998년 물리학자인 오세정 교수와 과학사회학자인 김환석 교수가 <교수신문> 지면을 통해 벌인 지상 논쟁의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2001년에는 이 논쟁에 자극받은 과학계의 원로 송상용 교수가 1박2일간의 토론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 진영이 한 자리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반복할 기회를 가졌던 것 말고는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통의 논점을 중심으로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옹호하는 논쟁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을 늘어놓는 병렬식 발표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과학 담론은 과학적 사실의 가치중립과 자연이라는 최종 심판자의 권위를 믿는 현장 과학자, 그리고 과학을 대상화하고 사회문화적 가치로 평가하는 과학사회학자의 입장으로 양분되고 그 논쟁은 과학 '전쟁'이라 불린다.

이처럼 과학과 인문학 또는 사회과학이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동안 둘 사이를 연결시킬 통섭이란 화두가 떠올라 크게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차례 지적되었듯이 최재천 교수의 통섭은 '사물에 널리 통함' 또는 '서로 내왕함'(通涉)이 아닌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統攝)이다. 도정일 교수의 지적처럼 그의 통섭은 생물학을 모든 학문의 주인으로 삼는 생물학 제국주의 또는 모든 사회 현상을 생물학적 원리를 적용해 설명하는 생물학적 환원론의 혐의가 짙다. 그런데도 대중은 그가 유행시킨 통섭이 과학과 인문학이 소통할 진정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발음이 같은 두 단어를 교묘히 섞어 유통에서는 소통의 뜻을 활용하고 내용에서는 다스림의 담론을 확산시킨 것이다.

200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200주년을 맞아 벌어진 사회생물학 논쟁에서도 이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생물학이 사회 현상을 설명할 자격이 있는지, 있다면 그 한계는 없는지 조목조목 따지기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또는 비전문가의 직관적 인식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친 느낌이다. 역설적이게도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입장의 차이를 확인하고 가능한 공약수를 찾는 통섭(統攝)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학자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서로 내왕하는 통섭(通涉)에 그쳤기 때문이다.


▲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2010년에는 과학철학자 최종덕, 생물학자 전방욱, 동양철학자 김시천,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와 인문의학자인 필자가 참여하여 진행한 대담집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가 출간되었는데 진화생물학이 전문인 과학철학자 장대익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쓰고 최종덕 교수가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작은 논쟁이 있었다. 서평은 몇몇 사실관계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과 비판 그리고 편향을 문제 삼는다. 사회생물학과 가까운 도킨스와 윌슨을 한편에 몰아세워놓고 거기에 비판적인 르원틴과 굴드의 편에 서서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는데 그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국내의 진화 관련 논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불만도 덧붙인다.

여기서 장대익 교수의 지적에 변명을 늘어놓거나 반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의 비판에는 수용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충분히 논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만 이 책이 진화 이론에 대한 전문서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그의 지적처럼 진화와 관련된 논쟁은 흔히 이념 논쟁으로 번지곤 하는데 그는 이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문제는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은연중에 특정 이념을 고취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대익 교수의 지적처럼 사회생물학은 인간 사회가 침팬지 사회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모든 것이 적응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사회생물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역시 인간이 유전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의 뇌리에 강력한 이념적 상흔을 남겨 극단적 찬성과 반대의 주장을 일삼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이 바로 <통섭>과 <이기적 유전자>의 성공 뒤에 감춰진 숨은 그림이다. 여기서는 과학적 정확성보다는 담론의 유통 과정이 더 큰 문제고 그 책임은 '한국에서 진화론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사회생물학의 반대자들과 달리 최재천 교수, 장대익 교수와 같은 옹호자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편향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반대자들을 이념적으로 비판하는 데 있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은 가치중립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의사이고 면역학자이며 철학자인 알프레드 토버의 말처럼 과학은 '사실과 가치의 관계가 진화하는 양상'이다. 실제로 과학은 우리의 일상을 크게 좌우하며 부지불식간에 특정 가치를 주입한다. 사실 속에 특정 가치가 숨어들어가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객관적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는 은근히 경쟁을 부추기는 논리가 숨어있다. 일단 공론화에 성공하면 반대자들의 비판 속에서도 그 논리는 점점 더 확대 재생산된다. 대중의 인지 구조 중 특정 회로를 활성화시켜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정치인이 이슈를 선점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최근 광고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도 소비자의 뇌 속 특정 회로를 활성화시켜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구조다. 타블로의 학력이나 황 박사의 원천 기술에 대한 맹목적 믿음도 그렇게 활성화된 인지 구조 때문일 수 있다.

이처럼 최근 새로운 통섭(痛涉)의 장(場)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지과학은 사회생물학이 숨겨둔 그림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주고 있다. 사회생물학의 화두가 생존과 생식이라면 인지과학의 화두는 소통과 공감(empathy) 그리고 창발(emergence)이다. 물론 여기도 환원적이고 물리적인 설명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보다 포괄적인 구조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분야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위계적 구조의 통섭(統攝)이 아닌 수평적 구조의 신경계와 유사한 통섭(通涉)의 논리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진화에 비추어보지 않는다면 생물학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도브잔스키의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그 생물학의 대상이 공감과 소통의 능력을 진화시켜 왔고 그 속에서 이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속성을 창발해온 인간이라면, 그래서 사실과 가치의 새로운 관계를 진화시키고 있는 중이라면, 사회생물학이 아닌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선 숨은 그림 찾기에 능한 인지과학이 가장 강력한 후보다.


이 글은 지난 8월 27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5호에 실린 장대익 서울대학교 교수(자유전공학부)의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서평에 대한 논평이다. (☞관련 기사 : 진화론 '제자백가'…다윈의 선택은?)

앞서 지난 9월 3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6호에는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의 반론이 실렸다. (☞관련 기사 : 장대익의 서평에 답한다…다윈이 지식 권력의 수단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