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 이주 여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추석을 쇠고 이주 여성의 집에 가 보니, 연휴 사이에 초급반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

"어휴, 속 터져, 속 터져.", "아무 날도 아니고 추석인데 왜 이러니?", "아이고, 답답해." 같은 생활 한국어를 가슴을 두드리거나 손가락질하는 몸동작까지 곁들여 완벽하게들 익혀 오셨다. 초급반이다 보니 평소 한글을 읽을 때는 모어 억양인데, 어째 새로 배운 말들만은 억양과 음조까지 아주 고급이다. 나는 웃었다.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아시아권 국제결혼 이주의 유입국이다. 2009년 한 해만도 2만5000여 명의 한국인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매년 수만 명의 중국,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여성들이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간택' 과정을 거쳐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입국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외국인 여성들이 송편을 빚고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외친다.


▲ <우편 주문 신부>(마크 칼레스니코 지음, 문형란 옮김,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이런 현실이 당연해진 2010년 한국에서, 한국이 유입국이 아니라 송출국 입장인 상황을 다룬 마크 칼레스니코의 그래픽 노블 <우편 주문 신부>(문형란 옮김, 씨네21북스 펴냄)가 출간되었다. 제련소 하나 있는 캐나다 소도시, 허름한 가게에서 만화책이며 장난감을 파는 몬티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사진을 보고 고른 한국인 아내 경을 맞이했다.

'결혼 시장'에서 경쟁력 없는 남성의 환상과 욕구, 패배감이 깔린 도피가 뒤섞인 선택. 그 맞은편에는 '뭔가 변화를 원했다'고 말하는 부모 없이 자란 여성이 있다. 순종적이고 근면한 아내에게 대접 받고 살고 싶었던 소심한 남자와 모국을 떠난다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여자가 섹스를 하고 노동을 분담한다고 해서 동반자 관계가 형성될 리 없다.

몬티와 경은 서로를 마주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때에야 상대를 파악한다. 몬티는 자의로 누드모델을 하는 경,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 앞에서 고함을 치는 경을 보고서야 자신의 아내가 마냥 조용한 동양 인형이 아님을 깨닫지만, 아내의 욕구를 무시하려고 애를 쓰고 또 쓴다. 그래야 동양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 잡지를 보면서 달래 온 자신의 욕망을 결혼으로 마침내 충족했다는 환상 속에 살 수 있으니까. 소통 없는 거래에서 출발한 관계는 자신에 대한 좌절과 서로에 대한 폭력으로 나아간다.

한국에서 한국에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을, 말하자면 경과 같은 처지일 법한 이주민들을 대하는 나에게 이 책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멀리 있다. 경이 경험하는 소소한 차별과 무지는 한국인 독자가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모른다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분노하는가. 신비로운 동양이니 순종적인 아내니 하는 말은 얼마나 불쾌한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책이 다루는 갈등은 한국 사회가 경험하는 갈등에 비해 온건하다. 몬티는 최소한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기초해 자기 아내를 골랐고, 둘의 갈등은 둘 사이의 갈등일 뿐이다. 허나 한국의 중개 결혼은 아내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체적인 결정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한국으로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은 한국인 남편의 아내이기 이전에 중개 결혼을 주도한 한국인 시부모의 며느리이고, 그 뒤에는 한국인의 엄마로 이 밀착된 '단'문화 사회의 다인종 구성원이 된다.

경은 영어도 할 줄 안다. 제 손으로 운전도 한다. 한국으로 오는 결혼 이주 여성 중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경이 영어를 할 줄 알아 남편과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는 도입부부터 이건 어느 별나라 얘긴가 싶었고 남편의 차를 몰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운전을 하네! 이만하면 자유롭게 사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2009년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국제결혼 가정의 60%가 200만 원 이하의 월 가구 소득으로 살고 있다. 한국어도 모르고 대체로 운전면허도 없는 여성들이 저소득 남성에게 시집을 오는 한국 현실에서는 경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설명하거나 제 힘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상황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초급반 학생 중에는 한국에 온 지 4년이 넘었고 아이도 둘이나 낳은 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나라에서 4년을 살고도 올해 초까지 한글도 읽을 줄 몰랐다. 남편이 집에서 내보내주지 않은 탓이다. 전화를 빼앗겨 한국어 수업에 오지 못했다거나, 친정에 인터넷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집 컴퓨터에 기본으로 달려 있던 웹캠을 시아버지가 떼어 냈다거나 하는 얘기는 명절을 지나면 늘어 있는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만큼이나 흔한 얘기다.

그나마도 한국어를 좀 하거나 영어를 사용하는 필리핀 출신인 이주 여성들의 얘기밖에 우리는 듣지 못한다. 필리핀에서 온 어느 이주 여성은 영어 자기 소개서에 좋아하는 과목을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이라 썼다.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존경하는 그는 이제 한국어로 쓰인 초등학교 2학년 수학 교과서를 공부한다.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할 그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수학에 자신이 있고 모국에서는 기술자가 되기를 꿈꾸었음을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우편 주문 신부>에는 한국에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이 직면하는 가장 높고 두터운 장벽, 언어의 벽이 없다.

또한 우리 사회는 폭력에 훨씬 더 너그럽다. 이 책에서 갈등이 절정에 이르는 장면의 폭력은 너무나 안온하고 비교적 동등해서, 관계의 폭력적인 단절과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견딜 만했다.'

경과 몬티의 결혼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부부라는 가장 내밀하고 가까울 수 있는 관계가 거래에서 출발해 관계맺음 없는 체념과 포기에 그치는 과정을 선명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우편 주문 신부>는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지금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은 곳에, 훨씬 더 깊은 진창에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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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인의 고난을 그린 수많은 작품 중 <아돌프에게 고한다>(전5권, 데즈카 오사무 지음, 장성주 옮김, 세미콜론 펴냄)가 주는 여운은 남다르다.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 일본 고베에 사는 일본인-독일인 혼혈 소년 아돌프 카우프먼, 그 친구인 유대인 아돌프 카밀 등 세 명의 아돌프가 세계 대전의 비극 속에서 얽히고설키는 내용이다.

카우프먼과 카밀은 친구였지만, 전쟁 중에 각각 히틀러 유겐트의 우수 생도와 유대인 청년조직 일원으로 성장하며 서로를 증오한다. 이들의 비극은 또 다른 아돌프인 히틀러가 사망하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다. 1970년대 중동 전쟁으로 배경을 옮긴 만화의 마지막 장에서 누구보다 전쟁을 싫어했던 카밀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학살자로, 카우프먼은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의 일원으로 재등장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두 아돌프의 말로에서 오늘날 중동을 둘러싼 모순이 읽힌다. 전쟁으로 그토록 모진 수모를 겪은 유대인이 지금 팔레스타인을 강제 점령하고, 그곳에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회색 장벽을 둘러치고 있으니 말이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은 유대인에게 반전 ·평화주의의 씨앗이 되기는커녕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저지르는 짓에 대한 면죄부가 되고 만 것일까?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으로 팔레스타인 민중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어느 누가 '홀로코스트는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모른다

방금 던진 질문은 수정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썼지만, 실제로 그러한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소리는 청자에 닿았을 때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 과연 팔레스타인으로부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돼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서점에 나가보자. 매주 수십 권 씩 쏟아져 나오는 책 가운데 중동을 다룬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가운데서도 팔레스타인은 작가들의 발걸음이 가장 뜸한 곳이다. 관심 부족은 무지, 편견, 오해로 이어진다. 오로지 미국 언론을 젖줄로 삼는 한국 국제 뉴스의 현실, 성경은 익숙하게 느껴도 코란엔 고개를 갸우뚱하는 현실 속에서 아랍 세계는 종종 '테러'와 동의어다.

그래서일까,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김재명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오수연·키파 판니 등 26명 지음, 열린길 펴냄, <대화>),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안영민 지음, 책으로여는세상 펴냄, 이하 <물들다>), 이 세 권의 책을 단순히 '팔레스타인 관련 서적'으로만 묶어 소개하기엔 모자란다.

세 권의 책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운 담론의 현실을 교정하려는 노력이다. 한 독자는 <눈물의 땅>을 일컬어 중동 문제를 보는 시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켰다고 표현했다. 그동안 한국 언론과 지식인이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갈등을 문자 그대로 '장님 코끼리 만지듯' 문서나 자료로만 봐왔던 게으름을 지적한 것이다.

이 세 권의 책의 저자들은 팔레스타인 곳곳을 여러 차례 취재하고(김재명, <눈물의 땅>), 현지 문인들과 마음을 터고 편지를 교환하며(오수연 등, <대화>),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 직접 들어가 살면서(안영민, <물들다>) 그곳의 현실을 직접 기록했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이 세 권의 책에 담았다.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김재명 지음, 프로네시스 펴냄). ⓒ프로네시스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 국내 기사에서 분리 장벽, 강제 점령 등과 함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테러리스트'다. 물론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을 가리킨다. 하마스(1987년 창립된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팔레스타인을 지키는 이슬람 운동'의 아랍어 머리글자를 합성한 이름)를 대표로 하는 그들의 저항이 테러의 형식을 띠었기 때문이다.

<눈물의 땅>의 저자 김재명은 이 표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입장이 실려 있다며 '아랍 저항 세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객관적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테러라 낙인찍고, 미국 언론이 이 입장을 대변하며, 한국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는 현실을 비판하며 "테러라 하더라도 그 배경과 동기를 함께 보도해야 옳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눈물의 땅>은 그 '배경'과 '동기'에 대한 설명서다. 저자는 이 지역에 기습 공격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역사와 현재 상황, 두 나라가 입장차를 보이는 쟁점과 협상의 우여곡절, 팔레스타인 사람의 항쟁과 그들이 느끼는 분노를 모두 입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좌절과 분노의 현장에서'(1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나 르포를 썼고, 그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2부)를 톺았으며, '중동, 미국, 그리고 평화의 전망'(3부)을 통해서 현실의 국제 관계 속에서 팔레스타인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에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에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이후 현재까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불법 점령하는 현실이 있다. 또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중동 평화 협상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좌절이 있고, 이스라엘 정부의 정착촌 건설로 농지와 집터를 빼앗긴 그들의 분노가 있다.

저자는 그런 현실에 맞서기 위해 조직된 하마스가 엄청난 군사력에 기반을 둔 이스라엘에 저항하려면 자살 폭탄 공격과 같은 테러리스트의 전술을 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하마스는 자살 폭탄 공격을 통해 세계의 눈길을 중동에 쏠리도록 만들고, 이스라엘 점령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높이고자 한다.

하마스를 창설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에 따르면 테러라 불리는 하마스의 전략은 "이스라엘의 국가 테러에 맞선 균형"이며 "이스라엘 무단 통치를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이요, "자유를 위한 투쟁"이다. 야신은 2004년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이 지시한 공격으로 표적 살해됐는데, 팔레스타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것이 '국가 테러'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사람의 저항을 이해하는 코드는 좌절과 분노"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에 죽임을 당하는 모습, 또 그들이 살던 집과 농토가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허물어지는 과정을 보거나 겪었다. 이런 좌절의 고통 속에서 분노가 폭발하는 과정을 놓친다면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없다면 중동 평화는 물론 지구촌 평화도 없다"며 '나와 내 이웃의 문제'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고민할 것을 호소한다. 한반도에서는 1945년 8월로 식민지배의 시계가 멈췄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이 독일 나치 정권의 최대 피해자인 이스라엘에 의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억압과 피억압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다시 등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눈물의 땅>을 읽는 일은 그 깨달음의 첫걸음이자 수전 손택이 인류가 잃었다고 지적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키는 계기이다.

"한반도가 곧 팔레스타인이다"


▲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오수연·키파 판니 등 26명 지음, 열린길 펴냄). ⓒ열린길
나깁 마흐푸즈. 198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집트 소설가다.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가산 카나파니. <불볕 속의 사람들>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작가. 하지만 다른 작품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이맘 이사이, 파이루즈, 마흐무드 다르위시, 지아드 라하파니…. 생소한 이 이름은 20세기 아랍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예술가들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생소한 것일까? 소설가 김남일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편견으로 내면화한 그들은 "검은 두건 속에 자신의 얼굴을 숨긴 비겁한 테러리스트"이거나 "날아온 총탄에 맥없이 쓰러져 아무렇게나 널부러지는 시체"일 뿐이다.

역시 이 책에 참여한 팔레스타인 시인 키파 판니는 아랍 예술가들에 대해 "서구 식민화에 저항하여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 했다는 이유로 악마의 화신처럼 매도당한"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아랍을 묘사하는 뉴스 문법과 서구 문화 위주의 편식 습관이 안 그래도 소원했던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를 더 어렵게 만들던 것이다.

예술은 피아(彼我)를 이어주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다. <대화>는 서로 다른 현실이지만 '저항'이라는 행위로 연대할 수 있었던 한국과 팔레스타인 예술인이 교환한 서신집이다. 2006년 7월 말부터 이듬해 5월 말까지 <프레시안>에 연재된 원고를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문화 교류 모임인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가 엮었다.

책 속에는 오수연, 신경림, 황인숙, 전성태 등 22명의 한국 문인과 자카리아 무함마드, 키파 판니, 아다니아 쉬블리, 바쉬르 샬라시 등 4명의 팔레스타인 문인의 글이 한 편씩 오간다. 판이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두 나라의 작가들이 어떤 고리로 교감할 수 있을까. 의외로 현실은 다른 듯 비슷했다.

팔레스타인엔 회색빛 분리 장벽이 이 마을과 저 마을을 막는다면 한반도에는 서슬 퍼런 철조망이 남북을 가른다. 바쉬르 샬라쉬는 한국의 이산가족 상봉 장면에서 "국외로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국경에서 울타리를 가운데 두고 가족을 만나는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만 빼면 두 장면은 너무나 똑같아서 서로 뒤바뀔 수도 있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는 두 나라에서 "국제 도박사들이 지도를 갈라 친구와 적을 만들어 놓았으며,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과 소망을 희생하여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땅과 농장에서 내쫓기는 풍경은 이 책이 쓰인 2007년 당시 평택 대추리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겹쳐진다. 작가 김순천은 대추리에서 아다니아 쉬블리에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8미터 장벽을 세워 아름다운 노을을 빼앗고 장벽 건너편 오렌지 밭에 농사짓지 못하게 했다지요? 이스라엘이 야금야금 당신의 땅을 먹어치우듯 정부는 철조망을 쳐서 농민들의 땅에서 그들을 분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건넨다.

작가들이 고발하는 현실은 비단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들은 "옥수수 공장에서 쫓겨난 멕시코 농민들, 전쟁 한가운데 있는 이라크인들"(김순천, '사회적 고통으로 섬세하게 떨리는 것들') 역시 같은 현실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겪는 부조리와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마주 비추고, 또 다른 고통과 이어지는 <대화>를 읽다보면 앞서 <눈물의 땅>이 던져준 '나와 내 이웃의 문제'라는 감각이 한층 실감나게 다가온다.

작가들이 아랍어와 한국어를 각각 영어로 번역한 다음, 그것을 다시 번역하고 나서야 서로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는 지난한 <대화>를 이어간 이유는, 현실에 저항하는 최고의 방법이 연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가 오수연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키파 판니에게 건넨 작별 인사처럼, "독재와 불의는 세상 어디에서나 얼굴이 똑같으며 인간은 어디서나 자유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는 한 우리는 결국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팔레스타인은 지금도 살고 있다"


▲ <지도 위에서 지워진 이름, 팔레스타인에 물들다>(안영민 지음, 책으로여는세상 펴냄). ⓒ책으로여는세상
앞서 소개한 두 권이 각각 취재, 연구, 서신 교환을 통한 연대라는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이해했다면 <물들다>는 좀 더 직접적인 수단을 통한다. <물들다>는 저자가 직접 팔레스타인 시골 마을에서 그들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기록한 수기다.

'팔레스타인 평화 연대', '경계를 넘어' 등 평화운동 활동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려온 저자 안영민이 지난해 현지에서 90일간 머무르며 경험하고 느낀 일들을 사진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민단체를 통해 소개 받은 40대 노총각 '와엘'의 집에서 지내면서 소소한 일상과 분쟁 지역의 위험을 동시에 마주한다.

팔레스타인은 비록 지도 위에선 사라졌지만 저자의 글 속에선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낮에는 칠면조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한 뒤 밤에는 마을 친구와 알콜 0%의 이슬람 맥주를 나눠 마시고, 쉬는 날이면 TV 드라마를 보는 생활은 다른 나라의 여느 시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이스라엘이 전기를 끊어버려 촛불 아래서 저녁을 먹고, 길을 다닐 때마다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몸 검사를 받으며, 이스라엘 군에게 갑자기 욕을 먹거나 걷어차이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이다.

이 모든 일을 저자는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그 뿌리에는 거대한 억압이 존재함을 함께 고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일상과 그 일상을 뿌리째 흔드는 억압을 온 몸으로 기록하면서, 한국의 독자가 그 문제를 직시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점령의 역사와 현주소를 곁들인다. 관찰과 성찰이 교차하고 웃음과 분노가 뒤섞이는 글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팔레스타인은 '우리의 문제'로 다가온다.

<물들다>가 그리는 세계는 "나도 예루살렘에 가봤는데 아무 일 없던데요"라고 말하는 이스라엘 '관광객'이 놓치는 현실이다. 또 팔레스타인을 말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보지 않고, 은연중에 미국이 취하는 친(親) 이스라엘 시각을 따라가는 국내 언론 기사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입체적인 풍경이다.

저자는 "지구촌이라는 말이 이 나라 핸드폰을 저 나라에 팔 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서로의 아픔을 알고 나누는 것에도 해당되는 말이 되었으면"이라고 희망하며,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과 맺는 이해와 평등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그렇게 90일 동안 저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연대를 실천하는 동안, 그들이 내비친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목소리 속에서 경제적 풍요에 대한 열망이나 이스라엘의 패망에 대한 바람은 찾을 수 없다.

"우리 마을에 와서 살아봤으니,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꼭 이야기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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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꾸는 자가 있는가? 인간 이성을 신뢰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라. 그 기치 하에 일어난 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를. 혁명에 침을 뱉을 자가 있는가? 인간 이성을 조소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라. 당신이 조소하는 인간 이성과 혁명이 치열하게 이루려 한 것을. 그 위대한 문제의식을.

혁명! 러시아 혁명! 그것은 애굽(이집트)의 종살이를 걷어치우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감을 보장하는 인간 이성의 약속이었다. 미륵 세상이자 천년 왕국의 약속이었다. 장자(莊子)가 소요유로,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으로, 각종의 민란과 농민 전쟁으로 꿈꾸었던 그것이었다. 엥겔스가 독일 농민 전쟁을 분석한 후 그것이 실패한 이유를 혁명의 물적 토대의 부재에서 찾고 이제 근대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생산력)에서 비로소 인류의 오랜 꿈, 모든 사상과 모든 종교가 이루고자 한 그것, 평등 세상의 실현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신이 약속한 가나안 땅은 40년 광야 생활의 고통을 통해서야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지 않았다. 인간이 약속한 가나안에 다다르는 데에는, 비록 수많은 이의 피가 필요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917년 혁명 발발 후 불과 5년 만에 20세기의 가나안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20세기의 가나안'에도 젖과 꿀이 흐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광야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약속은 70년도 채우지 못하고 파기되었다.


▲ <한낮의 어둠>(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그 7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한낮의 어둠>(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은 이 70년 초반의 10여 년간 벌어진 일을 소련 공산당 최고의 이론가 부하린을 모델로 했다는 주인공 '루바쇼프'의 최후를 통해 보여준다. '젖과 꿀이 흐르게' 하고자(?) 먼저 동지들의 '피를 흐르게' 했던 일련의 사건을 그 동지들의 대표 단수 '루바쇼프'를 통해 전한다.

그 10여 년간 허다한 혁명의 주역들이 죽었다. 그것도 혁명 과정이 아니라 혁명을 이룬 소련에서, 적이 아닌 동지의 손에 죽어갔다. 레닌이 병석에 있던 1923년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트로이카 체계를 형성, 반 트로츠키 노선을 편다. 1924년 트로츠키와 그 파는 힘을 잃는다.

공동의 적 트로츠키가 힘을 잃자 1925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의 부인인 크루프스카야 등과 손을 잡고 스탈린과 대적한다. 스탈린은 부하린 등과 연합한다. 지노비예프 등은 세를 불리기 위해 이번엔 반대로 트로츠키 등과 이른바 '통합반대파'를 결성한다. 1926~27년이다.

그렇지만 1928년 이후 트로츠키는 당에서 제명되고 유배, 국외 추방의 길을 걷다가 1940년 망명지 멕시코에서 자객에게 피살된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도 부침을 거듭하다가 1936년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처형된다. 이들(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의 처형을 계기로 1937~38년 고참 볼셰비키들에 대한 처형 광풍이 몰아친다. 부하린도 이 광풍을 피하지 못한다. 그는 스탈린 진영에 가담했으나 한때 지노비예프 등을 끌어들여 스탈린과 대적하려 했던 적이 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38년에 처형된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갔다. 이중(二重)의 데자뷔(旣視感)를 경험했다. 이 책을 처음 읽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 책 안의 상황을 이미 겪었다는 느낌.

내가 무슨 대단한 투사였다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주인공 '루바쇼프'와 같은 경험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철이 바뀌어 새로 꺼내 입은 옷에 들어 있던 꼬깃꼬깃한 지폐처럼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온갖 악다구니를 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군홧발의 아득한, 아련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더불어 'SKRM(남한 혁명 운동)'이라는, 지금 생각하니 무모하고 모호해서 오히려 가상하고 기특하기도 한, 그를 둘러싼 소위 '사투(사상 투쟁)'의 기억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의 가슴에 남은 깊은 상처들까지···.

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만약에 우리가 성공했더라면? 우리 역시 수많은 생쥐스트와 로베스피에르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와 부하린과 또 다른 박헌영과 임화를 낳지 않았을까? <한낮의 어둠>을 읽으면서 느낀 데자뷔는 우리가 겪은 1980년대의 혁명도 무엇도 아닌 상황에서조차 예상할 수 있었던 어둠, 한낮이 도래하기도 전에 느꼈던 어둠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였나? 나는 <한낮의 어둠>의 한 장 한 장을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인생의 "한낮"이던 푸르던 날의 푸르른 기상은 기억에 없고 "한낮"을 옥죄던 구속과 폭력의 두려움, 조직과 인간에 대한 실망,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부재, 나 자신에 대한 역겨움과 좌절 등의 "어둠"만 되살아났다. 이제 초연할 만도 한데 그렇게 되질 않았다. 모든 평론이 그렇듯 서평도 그 대상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1980년대와 오버랩(overlap)되면서 다소간의 객관성도 유지하지 못할 지경으로 나를 끌고 갔다.

루바쇼프는 '우리' 볼셰비키들의 정치적 입장을 이렇게 말한다.

"위태로운 전환기에는 오래된 법칙(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법칙) 외에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 우린 이번 세기에 신마키아벨리즘을 도입했다. (··) 우리는 보편적 이성의 이름을 내건 신마키아벨리주의자였고 그것이 우리의 위대성이었다." (138쪽)

저자 아서 쾨슬러는 '그들' 볼셰비키에 대해 덧붙인다.

"그들은 권력 철폐를 지향하는 권력을 꿈꾸었고, 사람들의 지배받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지배하는 일을 꿈꾸었다." (87쪽)

루바쇼프는 이런 신념 하에 자기 자신이 훗날 똑같은 논리로 제거당할 논리를 내세워 하부 당원(리하르트)을 제거한다.

"역사는 망설임과 주저를 모른다네. 완만하지만 과오 없이 자기 목표를 향해 흘러갈 뿐이지. 역사는 지나는 경로의 모든 굴곡에 그것이 실어 나르는 진흙과 익사자의 시체를 남기네. 역사는 자기 길을 알고 있고, 결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아. 역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당원이 아니야." (67쪽)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망설임과 주저'에 봉착한다.

"미래에 무엇이 진리로 판단될 것인지 현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타고난 예지적 능력도 없이 예언자의 일을 하고 있다. 우리는 비전을 논리적 추론으로 대치시켰다." (142쪽)

결국 그는 자신이 패배하였음을 자인한다.

"사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무오류성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패한 이유이다." (142쪽)

그럼에도 루바쇼프는 '품위'를 버리고 '이성'을 택한다. 즉 역사를 위해, 당을 위해, 인민을 위해 최후의 봉사를 한다. 당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함에도 당의 지시를 이행한다. 자신이 반동이자 배신자라고 공개 재판을 통해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인민의 공분이 자기에게 쏠리도록 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도 그는 의문의 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 의문을 자신의 가슴에 묻어야만 했다.

"그러나 약속된 땅은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이 방황하는 인류를 위한 그런 목표가 정말로 있었는가?" (351쪽)

혹자는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이 옳았다고. 근대적 생산력이 뒷받침되어야, 즉 '젖과 꿀'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어야 혁명이 일어난다고.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필연적·법칙적 도래를 기다리자고 하지 않았다. 결국 혁명은 오히려 '약한 고리(?)'인 러시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까지 '의지'가 개입하지 않은 '필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혁명을 성취한 볼셰비키들이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젖과 꿀'의 문제를 놓고, 그 문제를 실현할 권력의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스탈린이 승리했다. 그 결과 '소련'은 정확히는 69년 만에 간판을 내린다. 혹자는 스탈린이 사회주의를 말아먹었다고 한다. 혹자는 스탈린의 중공업 정책이 있었기에 그나마 소련이 69년이라도 지속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 옳든 가정은 가정일 뿐이고 가치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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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주류 사회학에 의하면 '근대화'란 또는 '현대 사회'란 규범, 기능, 합리성이라는 문명화된 지휘자의 카리스마 아래 조화로운 선율을 연주하는 앙상블이다. 그렇게 연주되는 아름다운 음악의 장르는 '사회적 합의' 또는 '사회 통합'이었고 그 앙상블의 이름은 '국민 국가'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런 앙상블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 사이로 귀청을 긁어대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불협화음이 불쑥불쑥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앙상블 연주마다 그림자가 되어 아름다운 화음을 압도해버리는 유령의 오케스트라로 불쑥 커버리지 않았나? 앙상블 연주에서 제외된 불쾌하고 귀찮은 소음들이 지휘자도 없이 자기들끼리 얽혀서 불안과 공포와 동정심, 분노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유령의 오케스트라를 결성한 것 같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유령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그것은 현실이 되었고, 그것의 존재를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유령 오케스트라를 볼 수 없고, 그것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 없다. 단지 재능 있고 열의 있는 작곡가와 지휘자들이 힘을 합쳐 불협화음의 세계를 체계화하고 그것을 다른 장르의 음악으로 '연출'하여 그것의 존재를 대략 형상화할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불협화음의 연출이 수지가 맞는 것이어서 앙상블 지휘자가 불협화음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자처하기도 한다. 불협화음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음악의 장르는 '위험(리스크) 갈등' 또는 '하위 정치'이고 연출된 그 오케스트라의 이름은 '글로벌 위험 사회'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울리히 벡 지음, 박미애·이진우 옮김, 길 펴냄). ⓒ길
최근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2007년 저서 <Weltrisikogesellschaft>가 <글로벌 위험사회>(박미애·이진우 옮김, 길 펴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벡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난 1986년 <Risikogesellschaftf>(<위험사회>)를 발표했고 이 책은 그 후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는 반향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사회학자로는 드물게 세계적 스타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에 독일 사회학자들 사이에서는 <위험사회>가 신문 문예란에나 어울리는 에세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도 있었다. 그러나 <위험사회>를 통해 발표된 그의 '개인화 테제'가 루만, 하버마스 등의 무게 있는 사회이론가들에게 수용되면서 벡의 영향력은 확고해졌다.

(벡의 '개인화 테제'는 위험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에서 그 위험을 개별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불안한 개인이 출현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편집자>)

<위험사회>가 한국어로 번역될 무렵인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갑자기 다리가 붕괴되고 백화점이 내려앉는 등 언제 어디에서 또 무슨 대형 사고가 터질지 모르던 시점이었다. 이런 사고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였고, 단순한 부패나 합리성의 결여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부패와 비합리성이 내재화되어 있는 '압축적/돌진적 근대화'의 한국형 합리성에 기초한 시스템적 결과라는 결론이 났다. <위험사회>는 당시에 재해와 위험, 안전이 담론화되고 이론화되는 데에 크게 기여했고, 그렇게 해서 한국 사회도 (압축적) 근대화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인 (한국형) 위험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벡의 개념에 한층 더 맞아떨어지는 방향으로 위험사회가 되기에는 한국 사회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광우병 파동,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독감, 최근의 이상 기후 등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가 '한국형' 위험사회일 뿐 아니라 그냥 위험사회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형' 위험사회의 예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4대강 문제, 천안함 사건, 바로 며칠 전의 부산 해운대 초고층 빌딩 화재 사건 등은 '한국형' 위험사회의 최근 사례들이다.

<위험사회> 이후 20여 년이 지난 후 출판된 <글로벌 위험사회>에서는 저자인 벡의 개념 변화를 볼 수 있다. 1997년에 '세계화(지구화)'에 관한 첫 단행본 <Was ist Globalisierung?>(<지구화의 길>)을 출판한 이래 벡의 관심은 독일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로 확장되었다.

2007년 3월 28일 독일의 보수 언론인 <벨트 온라인(Welt Online)>과의 인터뷰에서 벡은 <위험사회> 당시에도 이미 위험의 세계적 성격을 주장했지만 당시에 자신은 놀랄 만큼 일국적이고 목가적으로 논의를 전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위험사회>와 <글로벌 위험사회>의 차이는 "단지 재난만이 지구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는 그러한 재난에 대한 일반적 예상 역시 지구 차원에서 안정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구 사회는 위험사회에 대한 '계몽'을 자임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글로벌 위험이 글로벌 차원에서 예상되고 인지되고 논의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일국적 세계 체제, 또는 국제 관계라는 기능주의적 세계 체제를 넘어서 이제 <글로벌 위험사회>의 발현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이 정치적 이슈가 되는 위험사회가 지구적 수준으로 확대 또는 연결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위험사회>의 문제의식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글로벌 위험' 자체도 기존의 환경 위험 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 위험, 테러 위험으로 분화된다. 환경 위험은 주로 기후 변화의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금융 위험 및 테러 위험과의 공통성과 차별성이 논의되고 있다.

기후 변화로 대표되는 글로벌 환경 위험과 금융 위험, 테러 위험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테러 위험이다. 다른 위험들이 가해자와 책임자를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비고의적'인데 비해 테러 위험은 가해자와 가해가 일치하는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로벌 테러 위험도 다른 글로벌 위험들과 마찬가지로 예측 불가능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일으킬지를 알 수 없는('무지') 불확실성에 기초한다. 또 다른 글로벌 위험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적 제도 실패에서 기인하는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다.

글로벌 환경 위험과 금융 위험 역시 구별되는데, 그것은 단지 다른 유형이라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벡의 개인화 테제의 일관되는 흐름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경제적 작용에 근거하는 금융 위험은 지구적 연대보다는 분열을 가져오는 것으로 이해된다. 금융 위험과 테러 위험은 환경 위험 못지않게 글로벌 수준의 현실 구성, 즉 세계(시민)주의의 현실성을 강요하는 글로벌 위험으로 작용하지만 세계(시민)주의의 규범적 성격까지 갖추지는 못한다. 반면에 환경 위험은 글로벌 위험을 생산하는 리스크 권력(개념 규정 권력, 체제 권력)에 맞서는 글로벌 대항 권력을 추동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글로벌 금융 위험과 글로벌 테러 위험은 세계(시민)주의의 불가피성을 논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여기서 세계(시민)주의는 규범적 차원과는 무관하다. 즉 '세계(시민)주의 이상'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오히려 세계(시민)주의는 글로벌 위험에 의해 강요되는 현실적 변화이고 글로벌 차원으로의 사회 변동(거시 사회학의 범위를 뛰어넘는 메타 변동)을 의미한다. 반면에 글로벌 환경 위험, 특히 기후 변화는 이러한 사회 변동에 도덕적 가능성을 부여한다. 금융 위험에 의한 개별적 '손해'와는 다른 '공감(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위험의 '연출'이 메타 권력 게임의 도구로 이용될 뿐 아니라 동시에 인류의 생존과 미래에 대한 성찰을 여는 열쇠로도 작용할 수 있다.

최근 글로벌 테러 위험의 상징인 오사마 빈 라덴이 파키스탄의 수해 피해 주민들을 돕도록 촉구하며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했다. 재화는 만인을 분열시키지만 위험은 만인을 평등하게 한다는 <위험사회>의 테제를 확인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벡은 위험의 평등화 테제를 상대화한다. 위험사회의 역동성이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전개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옳지만 너무 불분명하다"(51쪽)는 것이 그 이유이다. 대신에 그는 '글로벌 리스크의 불평등 동학'을 개진하고자 하는데, 그 핵심에는 '리스크(위험)를 정의하는 권력을 누가 행사하는가?'라는 지배 관계의 문제가 놓여 있다. 벡은 개념 정의의 문제, 즉 위험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규범 및 제도와 관련된 담론 권력의 문제를 현대 사회 지배의 중심 문제로 제기한다.

재화와 관련된 생산과 분배의 문제보다는 규범과 제도, 국민 국가를 사회와 사회 갈등의 중심에 둔다는 측면에서, 벡은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전통에 충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류 사회학을 넘어서려는 비판이론의 전통에도 맞닿아 있다. 후기 산업사회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벡은 좌우를 초월하는 광범위한 소비자들을 시민 세력으로 본다. 또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능과 규범, 현대적 합리성에 의해 조율되는 '사회 통합'(국민 국가 정체성)의 제도 형이상학과 그 형이상학이 수반하는 위험과 권력, 지배 관계에 천착함으로써 그는 시민 세력이 체제 순응적이고 상호무관심한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시민 세력은 오히려 불확실한 미래에 의해 위협받고 불안하며 동정심을 통해 타자와 공감하거나 공포심에 기초한 분노를 폭발시켜 정치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개인이기를 강요당한 사람들이다.

2007년 <글로벌 위험사회>가 독일어로 출판되었을 때, 독일 언론의 평은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합리적 보수 언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너 차이퉁>은 벡이 고급 일간지에 쓰는 칼럼은 훌륭하지만 이 책에서는 자기주장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썼고, 자유주의 좌파 성향의 <쥐드도이체 차이퉁>은 이 책을 읽는 것이 리스크라고 했다.

올해 4월에 필자가 뮌헨에서 벡을 만났을 때, 벡은 독일에서 세계(시민)주의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비판받는 이유가 국민 국가 체제, 또는 국민 국가 사회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독일의 방어적인 국민 문화에 비교할 때 그의 세계(시민)주의 주장이 너무 앞서간 것은 사실이다.

벡을 스타 사회학자로 만들어준 <위험사회>에 비해 <글로벌 위험사회>는 확실히 읽는 맛은 덜하다. 그러나 글로벌 위험 불평등에서 약자 입장에 있는 지역 출신인 필자가 읽기에 <글로벌 위험사회>에는 읽는 맛에 비교할 수 없는 도덕적 깊이가 한층 깊어져 있다. 위의 <벨트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벡이 말했던 것처럼 <위험사회>에서 벡은 '일국적이고 목가적'이었다. 필자가 독일어로 처음 <위험사회>를 읽었을 때, 필자는 벡이 매우 날카롭고 비판적이지만 여전히 진화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벡이 비판이론 방향으로 점점 더 가까이 올수록 그는 세계(시민)주의자가 되어갔고, 그의 글은 더 난해해지고 복잡해졌지만 그 만큼 더 사회 이론적으로는 성숙해졌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위험사회>에서 벡은 테제 형식으로 이론적 논의를 개진했다. 그만큼 조심스러웠고 논리가 탄탄했으며 경험 사실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 전개 방식은 비실증주의적이었고, 실증적으로 자료를 다루는 사회학자들의 눈에는 '과장된 해석'으로 보였다. 필자가 뮌헨 대학교에서 말하자면 학부 졸업 시험에 해당되는 중간 자격 시험을 보았는데, 그때 벡의 위험사회를 주제로 구술 시험을 본 적이 있다. 시험을 맡은 교수는 현재 베를린 사회조사연구소 수장인 알멘딩어(Jutta Allmendinger) 교수였는데, 그는 벡이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사실'이 아니라 무엇이냐는 것이 구술 시험의 질문 중 하나였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는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설명되어 있다. 벡이 말하는 '사실'이 무엇이며 '현실'이 무엇인지, 사실주의와 구성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극복하고자 하는지가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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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빠'와 '까'가 넘치는 나라다. 어떤 화제가 떠오르면, '~빠'라고 불리는 극성 지지자와 '~까'라고 불리는 극성 반대자가 한순간에 갈린다. 애매한 입장은 설 자리가 없다.

온라인 곳곳에서 벌어지는 '빠'와 '까'의 다툼을 지켜보다, 문득 '숫자 빠'와 '숫자 까'라는 표현을 고안해 봤다. 어떤 이들은 숫자의 힘을 너무 믿는다. 수리적 모델, 통계로 뒷받침할 수 없는 메시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숫자 빠'다.

다른 어떤 이들은 반대다. 구체적 현실을 추상화하는 숫자의 힘을 지나치게 무시한다. 이래서는, 아무래도 좁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마디로 '숫자 까'다. '빠'와 '까'가 갈리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숫자의 힘'에 대해서도 균형 감각이 필요할 게다. 통계 등 계량적 방법을 맹신해도 안 되지만, 무시해서도 안 된다.

"법은 필요한 때만 지킨다"


▲ <이코노믹 갱스터>(레이먼드 피스먼·에드워드 미구엘 지음, 이순희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 ⓒ비즈니스맵
<이코노믹 갱스터>(레이먼드 피스먼·에드워드 미구엘 지음, 이순희 옮김, 비즈니스맵 펴냄)는 '숫자의 힘'을 굳게 믿는, 동시에 선한 의지를 지닌 이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가 잘 드러난 책이다. 미국 유명 대학교 경영대학원과 경제학과에 몸담은 저자들의 관심사는 '아프리카의 케냐처럼 국민 대부분이 빈곤과 폭력에 시달리는 나라를, 한국처럼 국민 대부분이 빈곤에서 해방된 삶을 누리는 나라로 바꿔내는 일'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과거 식민 본국이었던 일본이나 유럽 국가들의 생활 수준을 거의 따라잡은 상태"라는 저자들의 칭찬이 오히려 거북하기만 하다. 마치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한국 교육에 대한 찬사가 영 뜬금없게 들리듯 말이다.

오바마의 찬사와 실제 한국 학교에서의 경험 사이, 저자들의 주장을 따라가노라면 딱 그만큼의 거리가 느껴진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풀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이코노믹 갱스터(Economic Gangster)'란, 원래 부동산 개발 사업에 진출한 일본 야쿠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정치인에게 뇌물을 뿌리고 공무원과 결탁한 야쿠자들은 일본 부동산 시장 거품을 만들어 낸 조연쯤 된다. 법은 필요할 때만 지키면 된다고 믿는 그들은, '경제의 깡패'인 동시에, 효율적으로 돈을 버는 깡패이기도 하다. 사전을 찾아보면, 영어 단어 '이코노믹(economic)'은 '경제의'라는 뜻뿐 아니라 '이익을 잘 내는'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다고 하니, '이코노믹 갱스터'라는 표현이 야쿠자에게는 딱 들어맞는다.

외교관부터 밀수꾼까지…"통계와 경제학으로 그들을 잡는다"

이 책의 저자들이 다루는 이코노믹 갱스터는 이런 야쿠자의 다양한 변종이다. 면책 특권에 기대 주차 위반을 일삼는 외교관부터 관세 부담을 피하려는 밀수꾼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코노믹 갱스터'가 가난한 나라를 계속 가난하게끔 하는 원흉이라는 저자들의 진단을 부정할 사람은 흔치 않다. 어느 사회에서나 '부패'는 약자의 적인 동시에 성장의 걸림돌이다. 다만 좀 공허하게 여겨지는 대목은 이런 진단에 이어지는 처방이다.

예컨대 정부의 관세 수입을 떨어뜨려 재정을 망치는 이코노믹 갱스터인 '밀수꾼'에 대해서는 어떤 처방이 가능할까.

저자들은 자신만만하다. '숫자의 힘'을 잘 활용하면 된다는 게다. 'A' 나라에서 'B' 나라로 상품을 밀수입하려는 업자가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 수출에 관세를 물리지 않는 'A' 나라 세관은 합법적으로 통과하고 수입에 관세를 물리지 않는 'B' 나라 세관은 피하려는 게 밀수꾼의 생리다. 그렇다면, 'A' 나라 수출 통계와 'B' 나라 수입 통계를 잘 비교하면 전체 밀수 규모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중국을 예로 든다. 교역국 사이에서 수출입 통계가 서로 맞지 않는 나라라는 것.

닭고기가 칠면조 고기로 둔갑하는 이유

다른 처방도 있다. 밀수꾼은 이코노믹 갱스터이므로 법을 어기는데 거리낌이 없다. 법을 어겼을 때 생기는 비용과 이익을 고려해서 이익이 더 많다고 여겨지면 법을 어긴다.

예컨대 닭고기에는 30% 관세율이 적용되고 칠면조 고기에는 10% 관세율이 적용된다면, 밀수꾼은 닭고기를 칠면조 고기라고 속여서 수입할 게다. 저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로 중국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역 통계에 잡힌 닭고기 수입량이 실제 시중에서 유통되는 수입 닭고기의 양보다 적다는 것.

이 경우, 닭고기 관세율과 칠면조 고기 관세율을 똑같게 하는 게 저자들의 처방이다. 그럼, 닭고기와 칠면조 고기 사이의 관세 차익에 해당하는 이익이 사라지므로 밀수꾼들은 '합리적 계산'에 따라 다른 일거리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중국 관료들은 '바보'라서 이런 간단한 해법을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저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특정 산업을 보호하거나 육성하기 위한 정부의 전략적 판단, 관련 업계의 로비 등 관세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하다는 게다. 예컨대 중국이라면, 닭을 키우는 농가가 칠면조를 키우는 농가보다 많을 것이므로 닭을 키우는 농가의 입김이 닭고기 관세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닭고기 관세율이 칠면조 고기 관세율보다 높아지는데, 이는 결국 닭고기를 칠면조 고기로 속여서 들여오는 경우만 늘릴 뿐이다. 닭을 키우는 농가를 보호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자들의 주장은 대략 이런 맥락으로 전개된다.

또 하나의 이코노미 갱스터, 다국적 기업

그런데 이런 논리는 영 허전하다. 예컨대 수출 국가의 통계와 수입 국가의 통계를 서로 비교하는 것처럼 간단한 해법이 현실에서는 왜 잘 통하지 않을까. 밀수를 부추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상품에 따라 다른 관세율을 적용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걸 꼭 관련 업계의 로비 때문이라고만 봐야 할까. 이런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문다.

여기서 잠시 한국 이야기로 돌아오자. 저자들이 과거 식민 본국을 거의 따라잡은 모범 사례로 소개한, 그 한국말이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기 전인 1990년, 한국 관세청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규정에 따라 수출 업체가 수출 신고서에 운임과 보험료를 정확하게 적도록 하는 예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최근까지도 무시돼 왔다. 수출 통계 자체가 정확하게 작성될 수 없다. '숫자의 힘'에 기댄 저자들의 해법이 무색해질 밖에.

설령 통계가 정확하다고 해도, 세계 각국이 무역 통계를 공유하면서 서로 비교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법은 필요한 때만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따라야 할 법의 종류가 다양한 경우라면 특히 그렇다. 세계 곳곳에서 법인을 운영하는 다국적 기업 이야기다. 가장 세율이 낮은 나라로 이익을 몰아주는 게 이들에게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러자면, 해당 국가 법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범위 내에서 회계 자료를 손질해야 한다. 국경이 무의미한 이들이 정부 재정 따위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다. 사실,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이코노믹 갱스터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각국 정부 역시 이런 다국적 기업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 무역 통계를 비교하면, 다국적 기업이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법인 사이의 거래에서 어떻게 이익률을 조절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이는 정부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나온 처방은 아무래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적 처방과 현실 사이

닭고기와 칠면조 고기의 관세율을 똑같이 맞추자는 제안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분명히 밀수꾼들은 옛 방식을 버릴 게다. 그러나 이 점만을 노리고, 관세율을 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국 정부가 높은 관세율로 닭을 키우는 농가를 보호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식량 안보부터 일자리 챙기기까지 다양한 정치·사회적 고려가 녹아있기 마련이다.

밀수꾼의 이익 동기를 고려한 저자들의 경제학적 처방은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현실에선 역시 공허하다. 세관 관리의 기강을 세우는, 뻔한 처방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이제 글을 마칠 때가 됐다. 이윤 동기와 숫자로 세상을 설명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를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면, 이 책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가 계속 가난한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또 다른 '이코노믹 갱스터'인 다국적 기업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뿌리를 둔 다국적 기업이 '더 나은 삶'을 향한 주변부 국가 국민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은 예는 흔하다. 민주적으로 집권한 칠레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배경에 다국적 기업과 미국 정보기관의 공모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숫자의 힘', 강력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한국의 성공'에 대해 무비판적인 찬사를 하는 대목 역시 이 책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짧은 기간에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성취한 우리 현대사를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다른 신흥 독립국보다 상대적으로 덜했을 수는 있지만, 한국 역시 이코노믹 갱스터들이 판치는 나라였다. 그런데도 고도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쇼윈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한몫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케냐의 실패와 한국의 성공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좀 허술해 보인다.

이 책을 덮으며, 미국 드라마 <넘버스>를 떠올렸다. '숫자의 힘'을 잘 활용해 눈앞의 현실에 가려진 진실을 캐내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주류 경제학이 기대는 '숫자의 힘'의 힘은 분명 위대하지만, 그걸로 모든 세상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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