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

그게 그러니까 벌써 23년 전 일이다. 1987년 4월 작가 최인훈의 희곡 작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가 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졌다. 그건 한국 작가의 창작 희곡이 미국에서 최초로 공연되는 사건이었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는 평안북도에서 내려오는 아기장수 이야기를 극화한 것으로, 무기력하게 지내던 산골 마을에 기운이 장사인 아기가 태어나지만 이 일이 반역의 기운이 일고 있다는 소문으로 번지면서 결국 아기를 희생시키고 마는 비극이다. 이 작품은 그의 전집(문학과지성사)에 들어 있는 희곡집의 제목이 되었고, 이 공연 이야기는 소설 형식을 띈 그의 회고록 <화두>에도 적혀 있다.

공연 준비에 한창이던 무대 위에는 아기장수가 타고 하늘에 오를 말이 설치되어 움직임을 시험하고 있었고, 최인훈은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인 장두이가 당시 뉴욕 유학 중 이 작품에 출연했고, 공연은 미국 관객의 뜨거운 반응 속에서 성공작으로 기록되었다. 몽환적이면서도 역사성을 지닌 이 작품의 분위기가 그들에게도 독특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1936년생이니 최인훈의 나이가 그때 막 쉰을 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다. 20대 나의 의식을 마술처럼 사로잡았던 작가를 서른 초의 청년이 되어 이국땅에서 처음 만난 설렘은 두고두고 기쁨으로 남았다.

그때 내가 그에게 던졌던 질문의 골자는 당시 격동하던 한국 정세에 대한 견해였다. 그가 "지금만 유독 특별하다고 여기지 말고 지난 시절엔 더 무서운 격랑이 있었던 것을 깊이 돌아보면서 지혜를 얻을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돌아본다."는 이 행위는 최인훈에게 있어서 사유의 원형이다.

<회색인>, <서유기>, <총독의 소리> 등 그의 일련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주인공을 계속해서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앞을 "내다보기" 전에 뒤를 "돌아보는" 존재, 그건 어쩌면 우리가 이 생애와 역사를 살아가면서 역시 끊임없이 마주해야 할 자화상일 수 있을 거다. 이걸 "망각의 지대"에서 놓치는 시대는 폭주하는 야만을 막을 수 없다.

고종석, "독고준"을 다시 불러내다


▲ <독고준>(고종석 지음, 새움 펴냄). ⓒ새움
고종석의 <독고준>(새움 펴냄)은 그 망각 지대에서 다시 <회색인>과 <서유기>의 주인공 독고준을 불러내어 그의 이후의 삶을 상상과 회고로 이어나갔다. 최인훈의 작품 3부작을 고종석이 마무리하고, 15편으로 마친 최인훈 전집에 하나를 더 추가해서 16편으로 만든 셈이다.

회의하는 지식인 독고준은 최인훈의 작품 속의 자아다. <광장>의 이명준이 다른 작품에서 독고준으로 환생한 격이다. 그 독고준이 고종석의 <독고준>에서는 70대가 되어 어느 날 투신자살한다. 그 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과 같은 날이다. 작품은 그의 장녀가 아버지의 유고집이 된 일기를 읽으면서 고인에 대한 단상을 적어가는 방식이다. <독고준>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대의 망명자 최인훈의 쓸쓸함을 목격하게 된다. 고종석의 <독고준>을 이해하려면 최인훈의 전작에 대한 나름의 풍경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것이다.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세대에게 최인훈의 <광장>은 분단 시대의 지식인이 겪는 고뇌를 그대로 투영해주었다. 1960년에 출간된 <광장>이 최인훈의 스물네 살 때의 작품이라는 것은 1964년에 나온 <무진기행>이 작가 김승옥이 스물 셋에 쓴 작품이라는 것과 함께 경이로움이었다.

뿐만 아니라 <광장>이 이념의 격돌 속에서 길을 찾는 이야기라면 <무진기행>은 자본의 지배에 빨려 들어가던 시대의 슬픔을 짚어 냈다는 점에서 모두 근현대의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던 한국 사회의 거울처럼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민중에 대한 신뢰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굳건히 무장한 민중 문학의 기세가 고개를 들고 청춘의 영혼을 매혹시키려는 즈음에 최인훈의 작품들은 고독한 이단자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그 이단성은 청춘의 뇌를 치열하게 훈련시켜주었다. 그 어떤 이념의 체계나 체제에 대해서도 쉽게 자신을 내주지 않고 회의하고 점검하고 질문을 던지고 선택을 주저하는 자세는 부르주아 지식인 특유의 버릇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는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제국의 야만에 대해서도 신랄한 역사적 비판의 칼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최인훈은 그 어떤 명분으로 포장했던 간에 기존 질서의 거짓과 모순에 대해 사태가 불리하면 얌전하게 긍정하는 무수한 이들의 습관을 뼛속에서부터 이미 추방해버린 지식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정으로 우리가 "비빌 언덕"이 어디에 있는지 탐색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회색인>은 원산에서 내려온 고향을 잃은 청춘의 지적 오디세이다. 그의 이름 독고준은 "홀로 외로운 사내 준"이다. 그 준도 <광장> 이명준의 "준"을 따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June", 1950년 저 6월의 전쟁으로 시작된 폭격의 기억과 관련된 작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중학생이던 그에게 그 여름의 폭격과 그걸 피해 방공호로 피신할 때 그의 손을 잡고 온 몸으로 껴안아 준 누나 또래의 여자의 살, 젖가슴의 느낌, 그 숨결에 대한 성충동의 원형이 반복적으로 회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회색인>에서 그는 식민지의 정신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자기 삶과 진정하게 밀착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고통스러워한다. "비빌 언덕"이 아닌 것을 비빌 언덕으로 착각하고 있는 지적 착란에 대해 그는 신랄하다.

<회색인>과 <서유기>의 기억

독고준은 이렇게 말한다.

"가로되 '니콜라이의 종소리' '성모 마리아' '슬픔의 장미' '낙타와 신기루' '아라비아' 같은 거. 이런 말은 그 쪽에서는 강렬한 점화력을 가진 말이야. 왜냐하면 그 말들 뒤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야. '니콜라이의 종' 하면 희랍 정교회의 역사와 비잔틴과 러시아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흥망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게 아니겠나?" "주민과 풍토에서 떨어진 신화는 다만 철학일 뿐 신화는 아니야.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낸 영혼의 성감대(性感帶)지. 거기를 건드리면 울고 웃고 발정하고 손톱을 박아오는 그러한 지역이거든. 이 성감대가 없고 보면 애무는 부자연한 장난이며 실례이며 변태에 지나지 않고 독자는 불감증의 게으른 잠에서 깨지 못해."

그래서 그는 역사의 성감대를 찾아 나선다. 자신이 울고 웃고 기뻐할 수 있는 성감대가 어디에 있는지 더듬어 나가는 것이다. 그 6월의 기억이 그의 뇌리에서 무수히 되풀이 되면서 이유정의 문으로 들어서는 장면이 <회색인>의 마지막 대목이라면, <서유기>가 그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몽환처럼 펼쳐지는 역사와 자기 기억의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얌전하고 독실한 김순임이 아니라, 남이 알지 못할 상처를 지니면서도 활력에 찬 보다 성적으로 매력적인 예술가 이유정을 택한다. 독고준의 성감대다.

망명자의 시간을 멈춰줄 정신의 원초적 떨림이 필요한 그에게 이 "성감대"는 실존의 토대가 된다. 그러나 이유정의 방에서 나온 후에도 그의 정신적 유랑은 그치지 않는다. <서유기>는 그런 유랑의 시간을 서역(西域)의 불경을 찾으러 가는 손오공과 삼장법사 일행의 모험처럼 적고 있다. 가는 길마다 요괴가 출몰하고 변신의 재주가 겨뤄지는 것처럼.

어찌 보면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다를 바 없는 이 과거의 재현은 그에게 자기 회복과 치유의 여정이다. 그러나 시대는 독고준을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다. 누구는 그를 반역자, 또는 스파이로 취급하고 또 누구는 환자로 몬다. 기억 속의 원산으로 돌아가는 경로는 그래서 위험하기조차 하다.

이 몽환의 드라마 속에서 논개와 이순신, 이광수, 조봉암 등을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는 그는 "당국"으로부터 추격 받고, "병원"에는 실종 신고의 대상이 된다. 그의 사상적 성찰과 정신사적 탐색은 기존질서에게 불온한 것이며, 세균과 같은 전염성이 있는 것이라고 판단된 것이다.

원산, 말하자면 독고준의 원초적 성감대의 근원이 있는 곳을 향해 가는 그는 확성기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된다.

"간첩 침투 사건의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간악한 적은 이미 깊숙이 이곳 우리 시에 잠입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이곳 서울 시 운동장에서 명상을 범하고 사라진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북쪽 스탠드 중간 지점에 앉아서 명상을 저질렀는데 이 명상으로 그는 공화국에 대한 적의(敵意)를 다시 한 번 확인하였으며 인민에 대한 모욕을 가했습니다.……스파이의 인상을 말씀드리면 그는 관념적이며, 명상적이며, 정신사적이며 목가적이며, 실존적이며……."

성감대 그리고 정신사

또 이런 소리도 듣게 된다.

"여기는 이성병원(理性病院)입니다. 환자 한 사람이 탈출했습니다. 환자는 정신사(精神史) 병잡니다. 잘 아시다시피 정신사병은 이 세기에 들어와 널리 퍼진 병으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균자로 병원체 발견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는 터입니다. 이것은 서구 사람들의 지리상 발견의 시대와 더불어 시작된 병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가치 체계의 다원화 현상이 빚어낸 판단 감각의 혼란이라고 하겠습니다……환자의 인상을 말씀드리면 정신적 무국적(無國籍)……방관벽 등입니다……."

때로 몰래 숨어 암약하는 일본 제국의 총독이 방송하는 소리도 듣고 임정 주석의 소리도 듣는다. (후에 이 목소리들은 작품 <총독의 소리>로 확대 심화된다.)

<회색인>과 <서유기>를 읽고 있노라면 최인훈의 역사에 대한 놀라운 통찰과 독창적인 해석에 기가 질리게 된다. 그것이 나이 20대와 서른의 작가가 쓴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더더욱 말이다. 1960년대에 그가 이미 루카치를 알고 작품에서 거론하고 있다는 것도 그의 지적 영토의 광활함을 느끼게 하며, 우리에게 깊은 열등감을 심어준 식민지 시대의 논리를 뒤집는 <태풍>같은 작품을 대하면 그 문학적 상상력의 경계선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특히 <태풍>에서 그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철자의 순서만 거꾸로 읽어 아니크(China), 애로크(Korea), 나파유(Japan)로 설정해서 아키레마(America)와 나파유의 태평양 전쟁을 드라마 화 한 것은 대단히 흥미롭다.

의식의 내면마저 국가의 관리 아래 두려했던 북쪽에서의 억압적인 경험과 식민지 시대의 청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서구의 논리에 역사의식 없이 포로가 된 남쪽의 삶은 그에게 오랜 세월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되어 그 어느 것도 쉽게 믿지 못하는 지적 의심을 길러냈으며, 그의 정신 내부에 새로운 망명지를 건설해서 이걸 작품화시킨 셈이다.

그랬기에 그는 "회색 의자"(<회색인>의 원제)에 앉아 서역으로 가는 길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그려야 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 희귀한 병에 걸린 "정신사를 앓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그를 관념에 기운 작가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진이다. 그는 철저하게 역사의 맥락을 들추어내어 언어와 사고의 사슬을 하나하나 찾아나서는 이이기 때문이다.

독고준의 현실과 그의 생애

그런 최인훈이 독고준이 되어 이유정의 방에서 나와 마침내 그 "여름"을 기억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이후 우리는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물론 실재의 최인훈은 <화두>를 통해 자신의 여정을 밝히기는 했지만, 독고준의 삶이 그 다음에 어떻게 펼쳐졌는지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것은 주목되는 작업이다. 고종석 역시 젊은 시절, 최인훈의 <회색인>과 <서유기>의 독자였다. 그것도 열렬한 독자였고, 최인훈은 그가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그는 "자서(自序)"라고 붙인 머리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최인훈 선생님의 <회색인>과 <서유기>를 젊은 시절 읽었을 때, 나는 독고준의 미래가 궁금했다. 이 소설은 독고준이 살 수도 있었을 한 삶의 스케치다. 선생님의 허락 없이 독고준을 데려온 것이 죄송스럽다. 이 텍스트가 소설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현실 속의 이름과 역할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인물일지라도, 그는 픽션 속의 인물이다. 그 인물들은 현실 속 인물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최인훈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제목 그대로 따서 자신의 새로운 소설을 창작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고종석은 이런 방식까지도 최인훈을 이어나간다. 그와 동시에, 고종석이 이 작품을 최인훈의 소설적 자서전처럼 읽히는 것을 경계한 까닭은 작품이 독고준의 자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독고준은 소설 <독고준>에서 이유정이 아니라 김순임을 택한다. 끊임없이 방랑하는 그에게 "정박(碇泊)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여성으로서 김순임은 제격이다. 그에게 있는 두 딸 가운데 독고준의 일기를 정리하는 화자로 등장하는 장녀는 문학 비평가인 동시에 동성애자다. 그리고 그녀는 독고준이 우리의 시대를 살아갔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사건 저런 충격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질문과 마주하는 주역이 되어준다. 독고준이 자신의 내면에 남은 상처를 보듬어 자기를 찾아나가려 했던 것처럼, 독자는 그의 가상의 일기를 통해 독고준의 내면과 새롭게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달리 말하자면 독고준의 "내면 일기 읽기"다.

독고준의 자살은 전 대통령 노무현의 죽음과 겹쳐 등장한다. 그것도 같은 방식의 투신이다. 그러고 나서 1년 뒤, 죽음의 충격에서 다소 벗어난 시점에 딸 원이는 아버지를 회상한다. 그에게 아버지 독고준은 "자기 마음속으로 망명해버린 한 남자"다. 그녀는 독고준이 "이념 작가였으되, 경색된 이념이 인간 내면의 악마적 부분과 결합할 때 역사에 어떤 상처를 내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의도되지 않은 상처'를 천천히 묘사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 속담의 무서운 진실을 서늘하게 드러낸 <알리바바의 아내>같은 작품이 그 예다"라고 말한다.

일기와 독고준의 내면

일기의 첫 시작은 4·19 혁명에 대한 독고준의 단상이다. 그건 딸 원이의 말대로 "이 역사적 사변에 호감을 보이면서도 반동의 가능성에 불안해하는" 기색이 숨겨지지 않았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가 세상의 상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못하는 회의주의자, 비관론자였던 것일까? 열다섯 해 전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갑자기 나라가 해방되어 있었듯, 이번에도 나는 이승만의 하야와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내다보지 못했다. 해방이야 어렸을 적 이야기니 그렇다 치자. 그러나 지금은? 열한 살의 나와 스물여섯 살의 나는 똑같이 정치적 백치다……아무튼 이제 독재자는 물러났고 두 번째 해방이 왔다. 그러나 내 비관주의는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이 새로운 체제가 대한민국 시민 모두에게 골고루 자유를 분배할 만큼 사려 깊고 너그럽다 해도, 아니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이 체제는 흔들리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된 제2공화국에 독고준은 "이 정권은 지금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정도의 권위도 손에 쥐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절망한다. 국제적으로도 독고준은 미국의 베트남 전 개입으로 제국주의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공산주의의 정치적 독선도 비판하지만 자본주의의 욕망과 제국주의의 범죄에 대해서도 독고준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우에서는 좌익이고, 좌에서는 우익이라고 보는 지점에 서 있다.

결국 <회색인>인 셈인데 그는 그걸 스스로에게는 칭찬처럼 여긴다. 그러나 딸 원이의 평가처럼 독고준은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 소설 <독고준>은 신동엽에 대한 독고준의 비판과 호감을 동시에 기록하고, 번역이나 언어라든가 하는 문제를 놓고 짧은 성찰도 에피소드처럼 끼워놓고 있다.

독고준의 일기에는 이밖에도 호치민이라든가 아옌데에 대한 느낌도 담겨 있고 레몽 아롱이나 카뮈 등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단상도 빠지지 않는다. 그와 함께 소설가 독고준의 시 읽기도 작품에서 한 몫을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고준이 그보다 젊은 세대 작가들의 글을 애정으로 읽고 평을 남긴다는 대목이다. 그건 아마도 최인훈에게 기대하는 고종석의 마음도 그 안에 담겨 있을 터였다.

북에 대한 독고준의 생각은 당연히 비판적이나 그렇다고 그걸 내걸고 달려드는 듯이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치 않아 한다. 독고준의 어떤 날 문학평론가 이동하에 대해 쓴 일기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이동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동하 씨 못지않게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지만, 남한 문인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작품화하는 것이 북한 사람들의 인권을 신장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과 역사

딸이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복거일과 독고준의 관계는 독고준의 지적 영토의 넓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독고준은 결코 정치의 현실에 깊이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망명자의 시선, 비판적 지식인의 회의정신에 충실한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의 격동적 변화에 무관심하거나 거기에 무반응한 것도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기록은 독고준의 자살과 같은 날 생애를 마감한 인물과 관련된 기록이었다.

"노무현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나라당은 미쳤다. 민주당은 더 미쳤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겹친 그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작가 고종석은 이렇게 해서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독고준은 영원한 망명자였으나 그래도 기대를 걸고 또 거는 희망의 반복 속에서 점점 지쳐갔던 것이다.

그 여름의 기억 속에서 헤매며 찾아 나선 길은 몽환 속에서나 가능했고 이상과 현실은 이유정의 방과 자신의 방 사이의 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종석에 의해 현실에 다시 불려나온 독고준은 <서유기>에서 그에게 불려나온 논개, 이순신, 이광수, 조봉암, 총독, 주석 등처럼 지난 세월의 역사를 일기체로 증언한다.

그 일기 내내 우리는 역사의 성감대가 아직도 우리의 삶에서는 실종 상태에 있다는 독고준의 일깨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 실종은 독고준의 자살로 만들어진 "현실에서의 실종"으로 이어진다. 노무현을 탄핵해버린 "미친 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그를 죽여 버리는 시대에 대한 저 깊고 깊은 절망이 독고준에게 죽음이라는 걸 선택하도록 만들었다는 이 소설적 설정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독재와 정신사적 유랑의 세월을 겪어온 우리가 만들어야 할 현실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더는 독고준의 죽음이 되풀이 되는 시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최인훈의 소설처럼 서사적 구조가 있다거나 역사와 철학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문학적 풍자가 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고종석의 소설은 이제껏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독고준의 내면세계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에 우선적인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일기란 그것을 쓴 필자의 공개되지 않은 의식이라는 점에서 그걸 읽는 것은 비밀을 엿보는 은밀한 긴장과 더군다나 필자가 고인(故人)일 경우 고인과의 대화가 가능하기에 흥미를 더한다. 그로써 우리는 최인훈이 남겨놓은 질문과 우리의 당대가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정신사적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인훈 선생님께

스물한 살 때 읽은 최인훈, 스물넷에 다시 읽은 최인훈, 그리고 사십대에 또 집어든 최인훈, 이제 50대 중반이 되어 다시 또박 또박 읽은 최인훈. 그는 역시 사상적 고뇌와 문학적 상상력을 탁월하게 버무릴 줄 아는 진귀한 작가다. 그런 그에게 고종석이라는 후생(後生)이 나와 독고준의 입을 열게 했으니 행복한 작가다.

젊은 시절, 나 또한 그에게 정신적 빚을 졌고 언젠가는 그에 대한 짧으나마 연구 논문을 쓰고 싶었던 차에 이 글로서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 독고준은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굳이 옛날 옛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유정의 방에서 나와 미래의 삶을 살아낸 독고준이 되었으니 말이다.

병석에 누워계신 최인훈 선생님의 쾌차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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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명이 함께, 차례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자살하는/타살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자의에 의한 타살일까, 타의에 의한 자살일까? 이 둘은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구별하는 것이 가능하거나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할까?

어쩌면 집단 자살/타살이란 자의와 타의, 주체와 타자의 욕망이 합일하는 비극적인 엑스터시의 순간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타자를 완전히 사로잡은 주체와 타자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주체, 이 두 주체가 손잡는 침묵의 순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현대 문명과 살아 있는 자들이 축출한 어떤 것이 집단 자살/타살이라는 실제 사건을 통해 현실의 한복판에 귀환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미제의 사건으로 서둘러 은폐하면서 이처럼 이성적이며(?) 현대적인 삶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결혼 제도의 보호막 없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어머니들로부터 태어난 아이들이 웃으며 손잡고 둘러서는 '사일로(silo)'를, 시멘트 저장 탱크와 자본의 동력 이상의 의미로 볼 수 없노라고 재차 확인하면서. 집단 자살/타살이란 어떤 형태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과 광기의 증거라고 완강히 결론지으면서.


▲ <A>(하성란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집단 자살/타살이 종교적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것은 현대 사회가 '사이비 종교' 외에 다른 언어로 그것을 호명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로 1987년 32명이 집단 사망한 (주)오대양 사건 역시 광적인 종교 집단의 만행으로 종결되었다. 하성란은 이 오대양 사건에 착상하여 쓴 장편소설 <A>(자음과모음 펴냄)에서 '사이비 종교'의 낙인에 새로운 기표를 부여한다.

그 기표 'A'는 소설 속에서 놀라울 정도의 역할과 효과를 발휘한다. 현대 문명과 살아 있는 자들로서는 요령부득인 대상을 오직 'A'로 칭함으로써 소설은 그 실체에 다가가는 모든 길을 열어 놓는다. 진상을 알 수 없는 일에 접근하는 모든 (현명한) 방법을 A라는 단 한 글자로 압축함으로써 문학적 상징이 실제 현실을 어떻게 끌어안고 그와 접속하는지를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하는 것이다. 소설이 A의 의미를 끝내, 해석하는 자의 자유로운 몫으로 남겨둔 것은 문학이 다시 현실 속으로 스며드는 다양한 길을 터놓는 것과 정확히 같은 맥락에 있다.

소설 속에 거론된 A들, 천사, 유능, 아마조네스, 간통 등은 'A'의 가능한 목록의 몇 가지 예시들이다. A는 해석하는 자에 따라 수많은 뜻을 파생시키고 수렴하면서, 의미와 욕망을 생성하는 텅 빈 구멍으로서 기능한다. 그리하여 A는 최종적으로, 어떤 아젠다(Agenda, 사안)에 접근하는 근본적인 태도와 관점의 문제를 겨냥한다.

하성란의 <A>가 집단 자살/타살을 추적하는 추리 소설의 외양으로 출발해, 여성(성)/남성(성), 자유, 억압, 권력, 폭력, 성애, 결혼, 모계 가족·노동 공동체, 제도, 자본, 삶과 죽음 등의 문제가 어우러진 총체적 양상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의 문제의식은 집단 자살/타살의 전모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갖가지 시스템과, 나아가 모종의 특이 사건(잉여)을 처리하는 사회적 합의 방식 자체를 겨냥한다.

이로써 <A>는 '신신양회'라는 모계 가족-공장 공동체의 흥망성쇠에 관한 이야기로 출발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A들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A를 통해 현대 사회가 처리하지 못한 '잉여'의 현장을 생생히 묘파한다. 그 현장이 분뇨와 오수, 부패한 짐승의 사체 냄새, 달콤한 과일향이 범벅된 야만과 원시의 풍경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신양회'가 현대의 남성 중심 가족 제도와 상반되는 모계 공동체, 그것도 혈연이 아닌 여성들의 연대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노동 공동체로 상정된 것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머니'로 불리는 여성을 중심으로, 가정 폭력과 성폭행, 살인 등의 어두운 과거를 지닌 여성들이 이룩한 공동체가 기존의 질서를 즐겁게 '위반'하는 것 역시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여성'은 '남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로 신비화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은 '인간'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사유되며, 따라서 많은 부분에서 닮은 대칭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자본과 권력, 성애에 대한 욕망에서 그러하다. 신신양회의 대표자인 '어머니'와 후일 신신양회를 재건하는 핵심 인물인 '기태영', 즉 '예외적인 개인'들 역시 '사회'의 악덕에 온전히 맞서는 존재로 신화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휘둘려 파멸을 맞이한다. 신신양회의 대표자인 '어머니'는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반면, 교활하고 탐욕스럽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권력자-남성들의 아이들을 몰래 낳게 해 권력과 유착하며,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다 비극적인 참사를 초래한다. 기태영 역시 자신의 숨겨진 아버지인 권력자를 이용하는 데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자족적인 소규모의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보다, 권력-남성에 기생해 '공장'을 무한히 확장하는 자본의 논리에 휩쓸린 것,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처 받은 존재들이 모여 행복한 삶을 꿈꾼 '신신양회'가 몰락한 중요한 이유인 것이다. 소설 속에는 이러한 아이러니의 지점들이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다. 어머니를 잃고 흩어졌다 다시 모인 신신양회의 아이들, 기자, 가수 등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한결같이 저마다의 삶과 욕망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A는 하나의 소설적 전략의 차원을 넘어, 이야기(문학)가 탄생하는 원리에 관한 상징이기도 하다. 집단 자살/타살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눈먼 주인공 '나'가 이해할 수 없는 그날의 일을 끊임없이 쓰고 또 쓰는 것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지점에 이르면, 'A'가 내포할 수 없는 의미는 별로 없어 보인다.

어쩌면 A는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실체를 비추는 거울인지도 모르겠다. A라고 발음하는 순간, 각자의 욕망과 내면을 고통스러울 만큼 생생히 비추어 보이는. 그렇다면, 우리의 A는, 지금 어디쯤에서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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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연세대학교 교수(정치외교학과)가 쓴 <중국의 내일을 묻다>(삼성경제연구소 펴냄)가 화제다. 중국에 관한 책들이 옥석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넘쳐나는 시절, 중국이 어떤 나라이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큰 그림을 '정확히' 그려주는 역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한 문정인 교수의 전략은 간단했다. 중국의 비전과 국가 정책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거나 혹은 그 비전을 만들어낸 최고 학자들을 찾아가 직접 얘기를 들어 보는 것이었다. 문 교수는 2009년 가을 학기 베이징 대학교 국제관계학원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이 작업을 진행했다. 대담 전에는 인터뷰이들의 책과 논문을 샅샅이 읽었고, 때론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며 발품을 팔았다.

그러나 <중국의 내일을 묻다>에 드러난 중국인의 속내는 결코 간단치 않다. 대국(大國) 중국이 걸어야할 길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만 보더라도 화평굴기론, 대국굴기론, 책임국가론 등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대립하기도 한다. 문 교수가 만난 이들은 속내를 너무나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동시에 공산당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런 그들의 태도 자체가 중국을 다시 보게 한다.

책을 구상하게 된 계기, 책의 내용과 못 다한 얘기를 듣기 위해 26일 문정인 교수를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찾아가 만났다. 치열하게 탐구하는 학자이자 전략가답게 문 교수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터뷰는 박인규 프레시안 대표가 진행했다.


▲ 문정인 연세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중국굴기에 대한 백가쟁명

프레시안 : 인터뷰에 응한 이들이 굉장히 솔직하다고 느꼈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문정인 : 나는 중국 전문가가 아니지만 중국인들이나 중국 전문가들도 내 책을 읽고 그들(인터뷰이들)의 속엣말이 많이 나왔다고 평가했다. 사전에 내가 그 사람들의 책과 논문을 다 읽고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서구의 문헌을 통해, 서양의 시각으로 중국을 봤다. 그러나 나는 '중국의 시각에서 중국을 본다'(以中國, 觀中國)는 입장에서, 내 얘기보다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자 했기 때문에 이른바 '잘 나가는 학자'들이 3시간 이상 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복거일 씨의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 펴냄)를 읽고 화가 났었다. 그 책은 중국의 힘이 커짐에 따라, 핀란드가 러시아에 굴종했던 것처럼 한반도도 '핀란드화'(finlandization)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라고 본다. 그 책의 참고 문헌을 보니 왜 얘기가 그렇게 흐를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단 한 권만 중국학자가 쓴 오래된 책이었고 대부분은 미국, 영국, 일본의 문헌이었다. 외국의 문헌으로 중국을 얘기하는 게 말이 되나.

한국에서는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을 기준으로 학자를 평가하는데 SSCI에 등재되려면 논문을 영어로 써야 한다. 그렇다 보니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의 명문대에서 수학한 한국의 인재들이 중국을 중국어로 연구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배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중국에 대한 공부를 미국에서 한다? 중국 공부를 영어로 한다? 아니라고 봤다. '이중국 관중국'하자는 생각, 중국을 제대로 알자는 생각이 이 책을 쓴 계기다.

프레시안 : 제목은 '중국의 내일을 묻다'이지만 내용은 '중국의 오늘을 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문정인 : 지적한 대로 제4부('거대 중국의 미래 구상과 안팎의 도전')를 제외하고 제1~3부는 중국 사람들이 현재의 중국을 어떻게 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을 알아야 내일을 알 수 있으니까.

내가 원래 제안했던 제목은 책 서문의 제목인 '중국굴기(中國屈起. '중국이 큰 나라로 우뚝 선다')와 백가쟁명(百家爭鳴)'이었다. 중국굴기에는 한 가지 시각이 아닌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음을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중국 당국과 공산당, 학자들이 저마다의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내부적 논쟁을 보여주고 싶었다.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의 왕지쓰(王緝思) 원장은 인터뷰에서 "사람도 겸손해야 하고, 국가 또한 겸손해야 하며, 공산당도 겸허해야 한다. 공산당이 계속 자신만이 최고라고 강조하면 발전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발언만 봐도 중국 사회가 놀라울 정도의 중용(中庸)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의 기본 노선은 있지만 거기에 모두 맹목적인 순응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학자들 간에는 엄청난 논쟁도 있다. 기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존중해주고 있다.

제1부('대국의 길')는 당의 기본노선인 '화평굴기'(和平屈起. 세계와 평화롭게 조화를 이뤄나가며 대국화한다)에 대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데, 정비젠(鄭必堅) 전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상무부교장의 인터뷰에 잘 나와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중국공산당의 가장 큰 목적은 인민들을 잘 먹여 살리고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외부 환경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국내 정치·경제적 목적 때문에 외국과 패권을 두고 다툴 겨를이 없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어둠속에서 사태를 관망하듯 실력이 있으되 드러내지 않는다)로 밀고 나가면서 '영원히 머리를 들지 말자'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주장을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1부에 나란히 인터뷰가 실린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국제문제연구소장의 생각은 다르다. 중국과 같은 대국이 굴기하는 것과 평화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능력과 지위가 높아지는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같은 1부에 인터뷰가 실린 왕이저우(王逸舟)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옌쉐퉁과도 대립한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하면 '자유주의적 책임대국론'이다.

프레시안 : 왕이저우는 구체적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가.

문정인 : '중국의 가장 중요한 국가 목표는 발전이지만 중국만 발전한다고 좋은 건 아니다'는 것이다. 중국이 경제적 대국인만큼 국제 사회에 책임을 져야한다면서 특히 유엔이나 개발도상국에 대한 공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국이 만드는 부(富)를 국제 사회와 공유하는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공헌을 해야만 중국이 국제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새로운 위상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대만이나 신장위구르 자치구 문제 등 중국 내정에 간섭을 하면 용납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이 부분은 현실주의적이다. 이런 입장이 중국 외교부의 기본 노선이라고 보면 된다.

프레시안 : 정비젠의 화평굴기를 기본 토대로, 한쪽으로는 왕이저우처럼 적극적인 책임을 강조하고 한쪽으로는 옌쉐퉁처럼 갈등과 충돌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두 갈래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정인 : 먼저 주변국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대내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데에선 화평굴기론과 줄기를 같이 하지만 거기서 그쳐선 안 된다는 것이 왕이저우의 주장(책임대국론)이라고 보면 된다. 중국이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소프트 파워론'과 연결된다. (소프트 파워 : 정보 과학, 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 군사력이나 경제 제재 등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힘인 하드 파워에 대응하는 개념)

옌쉐퉁이 화평굴기론을 계승하는 방식은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논쟁으로 보면 된다. 왕도는 성군(聖君)이 인과 덕을 바탕으로 통치하면 신민들이 따른다는 정치 사상으로 유가(儒家)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한 구도였다. 주(周) 시대가 그 예다. 옌쉐퉁은 이것을 이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 중국에선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이 춘추전국시대처럼 세력 균형의 길인 패도로 갈 수밖에 없고, 그에 앞서 (패권 다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현실로 보는 입장이다.

프레시안 :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옌쉐퉁의 시각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부 내에서도 그런 관점이 많이 느는 추세인가?

문정인 : 기본 노선인 도광양회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은) 억제되는 편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반대를 부르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한다. 옌쉐퉁같은 경우만 공개적으로 자기 입장을 밝히는 것이고.

프레시안 : 그래도 그런 얘기가 공개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중국의 자신감이 커지긴 했나보다.

문정인 : 그렇다. 하지만 나이 많은 학자들과 젊은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다. 1950~60년대 대약진이나 60~70년대에 문화혁명을 겪고 하방(下放, 지식 청년들이 문화혁명 시기 전국 농촌에 투입됐던 것)을 경험했던 윗세대는 겸손과 인내를 강조하고, 다시 어려운 시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위 개방·개혁 이후 세대들, 우리로 치면 81~82학번에 해당하는 비교적 젊은 학자들은 '거침없이 하이킥'하듯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지금 중국이 크고 있지 않느냐, 미국에 기죽을 것 없지 않느냐, 그러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호랑이 꼬리를 밟을 생각이 없다"

프레시안 : 톈안먼(天安門) 사태까지만 해도 중국은 국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그런데 이번 책을 보니 이제는 완벽히 인사이더가 됐다는 느낌이다. 중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인사이더의 입장, 즉 기존 체제를 바꾸기보다는 체제의 수혜자가 되려는 입장인가?

문정인 : 내가 인터뷰한 인물 거의 모두가, 현재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미국이 만든 자유주의나 자유무역 체제의 수혜자가 중국이라고 말한다.


▲ <중국의 내일을 묻다>(문정인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삼성경제연구소
프레시안 : 그러나 중국이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체제를 바꾸려 할지 모른다는 '중국 위협론'이 부상하고 있다.

문정인 : 국제정치학적으로 보면 중국 위협론은 세력 전이론에서 나온다. 국제 관계를 힘으로 이해하는 시각에는 세력 균형론과 세력 전이론 두 가지가 있다. 세력 균형론은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면 전쟁을 막을 수 있고 평화를 지속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세력 전이론은 강대국의 힘이 비슷해지면 전쟁이 온다고 본다. 패권국의 힘이 신장하는 속도는 둔화되고, 도전국의 힘이 신장하는 속도는 가속화해서 결국 도전국이 호랑이(패권국)의 꼬리를 밟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다. 세력 전이론자들은 중국의 부상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가 곧 힘의 신장이 둔화되고 있는 패권국 미국을 거센 속도로 따라잡을 것이며 물리적 충돌이 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런데 여기서 전쟁이 결국 일어나느냐 마느냐는 패권국이 만든 기존 질서에 도전국이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있다. 도전국으로선 자신들의 힘은 신장되는데 구조적 위상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물리적 도전을 할 수 있다. 중국학자들은 세력 전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는 기존 질서에 만족한다. 우리는 미국 질서의 수혜자다. 미국과 '맞장 뜰' 의도가 없다"고 하니까.

물론 그들도 미국적 질서 안에서 부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는 말한다. 또 중국이 사활을 거는 문제인 대만·위구르 문제에 미국이 간섭을 했을 때는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질서 자체, 기본 프레임을 바꾸려는 의도는 없다는 게 모든 인터뷰이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중국 위협론이 나오는 것은 위협이 객관적으로 존재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위협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국제관계학의 구성주의가 말하는 정체성의 문제, 역지사지의 문제다. 중국을 위협으로 규정하면 중국은 스스로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주로 미국이나 한·중·일의 보수 우파 세력들이 그 위협을 만들어낸다.

미국의 보수 세력은 중국 위협론을 기정사실화하고 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마찰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중국을 대한다. 그쪽에서 먼저 그렇게 나오면 중국도 맞대응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것이 해상 군비 경쟁의 발단이다.

우리와 북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세상의 어느 나라가 국방백서에서 주적((主敵)이란 표현을 쓰나. 내가 상대를 주적이라 규정하면 상대도 나를 주적으로 보는 게 당연지사다. 이스라엘조차 팔레스타인을 주적이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그냥 생존·안보에 대한 위협 세력이라고 하지.

중국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중국을 위협으로 생각하면 중국은 위협이 되는 것이고, 선린관계나 전략적 동반자라고 생각하면 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민대 국제관계학원의 진창룽(金燦榮) 부원장과의 인터뷰에서도 분명히 언급되지만 세계가 중국을 환대하면 중국도 거기에 화답하고, 반대로 세계가 중국을 위협으로 간주하면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그러나 실제로 중국이 항공모함 건조를 준비하는 등 대양해군화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돼 왔다. 미국과 일본 입장에선 위협으로 느낄 만한데.

문정인 : 그 문제도 (해상 마찰이 아니라) 해상 공동 협력으로 이해하고 풀어나가면 된다. 사실 중국이나 미국, 한국, 일본 모두 제일 관심 갖는 문제는 해상 통로의 안전성 확보 문제다. 해적 문제 심각하지 않나. 미국을 배척하거나 맞서서 대결하자는 게 아니라 해상 통로의 안전을 구축하기 위해 안보 공공재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해상 군비 경쟁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안 되는 것은 미·중 양쪽 모두 관료정치 때문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자기들대로 예산을 늘려야 하고, 미군 태평양사령부도 예산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무기 구입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거다. 여기에 바로 정치와 외교 간 조율의 중요성이 있다. 대외적으로 다자안보체제를 구축하면 해상 군비 경쟁을 예방할 수 있는데, (국내 정치 때문에) 그쪽으로 못 나가는 경향이 있다.

프레시안 :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 만족하지만 부분적으로 개선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무엇을 바꾸자는 것인가?

문정인 : 도하개발어젠다(DDA)에서 드러났던 (선진국들에 유리한) 무역 구조에 대한 불만도 다소 있지만 중국은 기본적으로 세계 통화 체제의 문제를 제기해 왔다. 미국과 달러화에 대해 신뢰감을 잃은 것이 사실이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제 역할을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이 지난해 SDR(Special Drawing Rights, IMF의 특별인출권)을 새로운 기축통화로 하자고 주장한 것이 통화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예다. 중국은 IMF 체제 그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지배 구조를 개선하고 브레튼우즈 통화 체제를 그대로 두되 부분적으로는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맥락에서 달러화가 기축통화 역할을 못한다면서 안정된 기축통화의 필요성을 제기했던 것이다.

미국은 SDR이 기축통화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축통화가 되려면 측정 수단, 교환 수단, 국제준비자산(International reserve asset)으로서의 역할을 충족해야 하는데 SDR이 측정·교환 수단은 될 순 있어도 준비자산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쨌든 요즘은 기축통화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잦아들었지만, 전반적으로 중국은 여전히 통화 체제에 부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경제 말고 안보 질서의 경우는 6자회담을 살리자는 입장이다. 6자회담 채널로 북핵 문제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를 구축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등 6자회담의 결과물을 보면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를 만들자는 언급이 있지 않나. 중국은 통화든 무역이든 안보든 어떤 분야에서도 '다자협력체제'를 강조하고 있다. 그게 기본적 구상인 듯하다. G2에도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 않나.


ⓒ프레시안(최형락)

중국 지도부의 관심?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프레시안 : 중국 경제가 과연 언제까지 성장할 수 있겠느냐는 비관론도 있다.

문정인 : 중국 사회과학원 아시아태평양지역 연구소의 장위옌(張宇燕) 소장은 그런 관점에 이렇게 응수한다. 지금까지 중국은 연안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해 왔는데 아직 미개척지가 많고, 특히 서북쪽과 동북쪽을 활성화시키면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터뷰이들은 중국 경제의 과열화 문제를 알고 있다. 부동산 문제, 부실 채권 문제 등의 과열 양상을 인식하면서 국가의 경제 개입이나 관리, 규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또 다른 국가들의 실패에서도 많이 배우려고 한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요즘 미국이 리밸런스(공정 경쟁의 추진) 얘기를 많이 하지 않나. '중국도 이제 경제 대국이니 미국산 물건 많이 사야 한다. 그래야 공정 경쟁이다'라고. 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내수를 진작시킬 수 있냐는 데에 있다. 그건 양극화와 소득·분배의 불평등 구조 문제와 연관된다.

또 관리들의 불출사(不出事, 일을 벌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나 부정부패 등 다른 문제도 산적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 경제를 앞으로도 잘 이끌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낙관이다, 비관이다를 규정하긴 어렵다. 둘 다 아닌 '신중론'이 중국의 입장인 듯하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중국은 역시 내부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정인 :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작년 7월 우루무치 시위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이탈리아에서 열린 G8(주요 8개국) 확대정상회담을 박차고 바로 귀국했다. 내정 문제의 우위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중국 외교 정책 전문가들이 불만이 많다. 당 지도부가 외교보다는 내치에 역점을 두니까 외교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내가 봐도 당 지도부에겐 그들의 생존보다 더 큰 목적은 없다. 주펑(朱鋒)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중국의 생존은 중국 공산당의 안전"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에 문제가 생기면 나라 전체에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생겨서 안정이 깨지고, 그러면 중국 자체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라는 거다. 인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런 혼란을 원치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당의 안전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프레시안 : 공산당 일당독재에 반대하는 지식인도 있지 않나.

문정인 : 진창룽, 왕지쓰 등 인터뷰이들도 공산당 비판할 거 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국 사람들은 아편전쟁 이후 150년 이상 '중국에 내부적 혼란이 있으면 외교적으로 나쁜 일을 겪는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공유해 왔다. 대내적 내실이 없었기 때문에 대외적 굴욕의 역사가 생겼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내실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고, 그래야만 외교적으로도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재 당 지도부의 기본 입장이며, 과거 덩샤오핑의 생각과도 같다. 많은 지식인들이 여기에 따른다. 이렇듯 중국인들은 중국 내부가 분열되고 혼란이 오는데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공산당 독재에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점이) '중국적 실용주의'라고 볼 수 있겠다.

프레시안 : 대내 문제 가운데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인가?

문정인 : 당연히 경제다. 처음도 끝도 경제다. 경제 발전의 모멘텀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양극화나 소득·세대 간 불평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그래서 당이 인민의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핵심적인 문제다.

프레시안 : 중국은 2008년 국제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함께 G2로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문정인 : 책에서도 장위옌과 정비젠이 지적했듯, 솔직히 중국이 G2로 묶여서 무슨 득을 보겠냐는 입장이다. 그러나 손해 볼 건 많다. 국제 사회의 모든 책임을 미국과 함께 져야지, 러시아나 일본, 한국 등 주변국들은 불만이지….

G7, G8, G20, 유엔과 같은 다양한 채널로 여럿이 국제 문제를 풀면 되지 굳이 G2만 부각할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도 있다. 인터뷰한 학자들도 베이징 컨센서스나 G2 같은 말은 서구에서 만든 것에 불과하다며, 중국은 어떤 제안도 한 적 없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 : 진찬룽(金燦榮) 중국인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은 '당분간 중국 지도부는 기술 관료가 지배할 텐데 그들은 큰 구상을 못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 혹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문정인 : 리빈(李彬) 칭화대 국제문제연구소 부소장이나 진찬룽 같은 사람들은 중국의 역할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특히 핵물리학자인 리빈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국제적인 책임과 지도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고 본다. 지도자들이 정치적 비전이 없고 국내 경제 발전에만 관심 있다고 비판한다.

진찬룽 부원장은 '49년 혁명 이후 중국의 진정한 지도자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 밖에 없다'고 대놓고 말한다. 두 사람만 비전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였고, 나머지는 전부,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 역시 관리형 테크노크라트였다는 것이다. 관리형의 특징은 사고 안 치고, 현상 유지하고, 국내 문제에만 매진하지 큰 메시지를 던져서 중국 인민에게 비전과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다음 지도부도 그렇게 될 것인가?

문정인 : 차기 대권 주자인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도 마찬가지이다. 등소평이 만들어 놓은 노선에 따라 안정적으로 관리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찬룽이 시사하는 것은, 과거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지 않았을 때는 그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세계의 운명이 미국과 중국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중국 지도부도 세계적인 안목과 비전을 가져서 중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도 엄청난 논쟁이 있을 것 같다.

프레시안 : 국제 사회에서도 미국에 도전할 정도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문정인 : 과거 일국사회주의란 개념을 상기해 볼 때 중국이 이제는 일국이기주의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지식인들의 자기반성 같은 의미이다.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다. 국제적인 공헌도 하고 리더십도 발휘하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열망이 그런 표현으로 나왔다고 보는 게 맞다. 나로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들었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 문제로 넘어가서, 인터뷰한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안 쓰고 정치 발전이란 표현을 쓰면서 당·정·군 분리, 전인대 권한 강화 같은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아직도 중국을 공산당 일당독재로 보고 있고, 인터뷰한 사람 중 하나는 '민주주의 측면에서 중국은 북한보다 조금 나은 체제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했다.

문정인 : 모든 국가의 제도에는 관성이 있다. 1949년 혁명 이후 중국공산당이 영도를 해왔다. 지금은 중국공산당이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에 있는 이 제도를 서구 민주주의와 접목시키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왕이저우 부원장은 '우리도 민주주의 있다. 광저우(廣州) 같이 남부 지역에 가면 지방선거를 하고 있고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열기가 일어나고 있고 점차 제도화되고 있다. 당 안에서, 그리고 당·정·군 사이에서도 엄청난 논쟁이 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또, 언론을 통제한다고 하지만 <환구시보(環球時報)>를 봐라. 그런 식으로 삼권분립도 형성되어 가고 있고, 특히 사법부의 힘이 상당히 강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시민 참여, 삼권분립이 점차 이뤄지고 있다.

특히 가장 큰 변수는 세대 교체다. 지금 공산당이나 국무원은 물론 거의 모든 분야의 핵심 자리에는 학번으로 치면 80~82학번들이 지도적인 그룹으로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텐안먼 사태 때 학교에 다니면서 시위를 했던 사람들이다.

프레시안 : 그렇지만 공산당의 영도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문정인 : 그렇다. 공산당원이 되어야 핵심적인 자리에 갈 수 있는 건 물론이다. 그게 중국식 삶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중국도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도 중국공산당의 부조리나 모순이 상당히 많은데, 지금 그걸 하나씩 발견하면서 고쳐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솔직한 말을 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단시간에 이뤄지겠느냐, 시간이 걸린다, 그걸 봐줘야 한다, 그렇게 말했다. 우선 서구식 민주주의가 중국 토양에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옳다 해도 제도를 변화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당장 바꿀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 사람들의 생각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MB 외교의 거대한 착각

프레시안 : 한반도 문제로 넘어가자. 책을 보면 북핵 문제에 대해 중국 내 의견도 일치되지 않고 있고,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정인 : 기본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6자회담이 잘 되길 바란다. 후진타오 외교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 6자회담이고, 중국이 의장국이기기 때문에 뭔가 성과를 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상당히 강하다. 그들도 북한이 핵을 가지는 걸 원치 않고, 2005년 6자회담에서 나온 9·19 공동성명에 대해서는 냉전 후 나온 가장 성공적인 문서라고 생각한다. 이게 기본 전제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중국의 속내가 있다. 북한 문제가 이렇게 나락으로 빠져들고 어렵게 된 것은 한·미·일 3국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앞으로도 한·미·일이 협조를 잘 안 해서 북핵 문제가 안 풀린다고 해도 중국이 북한하고 못 지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북한이 결국 핵을 가지더라도 중국과 선린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는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도 있다.

그런 소리를 듣고 내가 '그럼 북한이 핵 갖는 거 동의한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일본이나 한국도 가지려고 할 것 아니냐?'고 따지는 식으로 물었더니 '과연 미국이 그런 상황을 허용하겠나? 우리한테는 그런 식으로 허풍 치지 마라'고 답하더라.

그러면서 중국 사람들은 '6자회담을 만든 이유가 뭐냐. 북·미 양자대화 시키려고 만든 건데 왜 그 판을 깨느냐'는 것이다. 한때는 미국이 판을 깨다가 조금 유연하게 나오면 일본이 깨고, 한국도 깨고, 이렇게 3국이 돌아가면서 판을 깬다는 인식이 강하다. '한·미·일은 북핵 해결에 관심 없지 않느냐. 김정일 체제가 붕괴한 후에 핵 문제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 중국이 보기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미국이 얼마 전 북한 급변 사태에 관해 논의해 보자고 중국 쪽에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붕괴되지 않을 것이고, 그걸 원치도 않는다는 입장이다. '협상을 통해 풀어야 하는데 협상판을 다 깨고 있다. 그러니 알아서 하라'는 일종의 체념도 보인다. 특히 한국을 많이 비판한다.

프레시안 : 중국은 할 만큼 했는데 한·미·일 때문에 안 된다면 교착 해소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문정인 : 결국 미국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우리가 틀면 미국도 안 나올 거라고 자신하는 것 같다. 그게 오바마 정부의 한계인데,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프레시안 : 중국 사람들은 한미동맹에서 '가치동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한국이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MD) 체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한중관계의 마지노선이라고 말했다.

문정인 : 중국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한미 동맹을 잘 하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반대하지 않았다. 다 인정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와서 한중 관계는 왜 이렇게 됐나? 지금 정부는 한미 동맹에 가치동맹이라는 표현을 쓰기 때문에 한미 동맹 강화라는 구호가 결국은 중국 견제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 왔다.'

프레시안 : 천안함 사고 이후 한중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말들을 하나.

문정인 : 주펑(朱鋒)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의 케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주펑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그나마 많이 이해해 주고 북한에 대해서는 비판도 많이 하면서 대표적인 전략파로 분류되어 왔다. 그런데 천안함 사건이 나고 나서 완전히 반(反)MB로 돌아섰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에 이명박 정부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전략파라고 불렀는데, 물론 그 분류에도 무리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천안함 이후 없어져 버렸다.

나는 CCTV의 영어 채널 '채널9'에서 정기적으로 코멘테이터를 한다. 천안함 사건이 한창 고조됐을 때 나한테 보낸 질문을 보니까 걱정이 많이 됐다. '왜 한국 사람들은 중국을 위협으로 인식하느냐?' '중국은 서해에서 항공모함이 동원되는 한미 해상 군사 훈련을 했을 때 미국과 한국 물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티즌 의견을 반영해서 나온 질문인데 그만큼 중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대통령이 왜 상황을 이렇게 방치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중국을 너무 우습게 봤고 가볍게 봤다.

프레시안 :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을 주중 대사로 보내면서 중국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나?

문정인 : 누군가 역대 주중 대사 중에서 황병태 대사가 가장 일을 잘했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환경적인 이유도 있었다. 텐안먼 사태 이후 중국이 고립됐을 때 한국이 수교를 통해 손을 잡았으니까 중국도 한국한테 잘 해준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중국이 아쉬울 게 없는 상황에서는 대통령 측근을 보낸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중국이 우리한테 아쉬울 때면 센 사람을 보내는 게 좋지만, 우리가 중국한테 얻을 게 많을 때는 오히려 노련한 전문 외교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외교관을 대사로 보내야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정부는 자신들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미국의 도움 때문에.

프레시안 : 자칭궈(賈慶國) 베이징대 국제관계학과 교수가 '한국이 소외될까 두렵다'고 했던 말이 인상에 남았다. 한국은 중국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문정인 : 책을 보면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온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네 말만 하고, 중국을 자꾸 바꾸려고 한다는 말을 한다. 한국이 바꾸라고 해서 중국이 바꿀 나라냐. 중국 입장도 들어 달라'는 것이다. 중국 전문가들이 내 인터뷰에 호의적으로 응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과거에 장관급 자리까지 있었던 학자가 중국에 와서 발로 뛰어다니면서 자신들의 말을 듣겠다고 하니까 고마워한 것이다.

결국 역지사지의 태도를 가지고 중국을 이해하려고 하고, 어떻게 하면 양국의 최대공약적인 이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잘못은, 워싱턴을 통하면 중국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완전히 깨져 버렸다. 중국 사람들이 그런다. '동북아에 큰 문제가 생기면 미국이 누구랑 얘기할까? 한국인가? 아니다 중국이다.' 한국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센 나라인 줄은 알아도 중국이 센 줄은 모른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인터뷰한 전문가들이 중국의 정책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나.

문정인 :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우선 현대국제관계연구중심이라는 건 중국 안전부 산하에 있는 연구기관이다. 왕지쓰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장은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국제전략연구소장을 한 사람으로 중국 지도부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미국의 제프 베이더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은 중국에 오면 제일 먼저 왕지쓰의 연구실을 찾는다.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움직이는 것이다.

친야칭(秦亞靑) 외교학원 상무부원장은 외교관을 양성하는 기관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영향력이 상당하다. 장윈링(張蘊嶺) 중국사회과학원 국제학부 주임은 정책에 직접 관여한다. 옌쉐퉁(閻學通) 칭화대 국제문제연구소장은 인민해방군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왕이저우(王逸舟)와 친야칭은 외교부의 핵심 중 핵심이다. 장위옌(張宇燕)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 및 정치연구소장은 동아시아 정책에 상당히 관여를 많이 한다. 일반적인 동아시아 정책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론, 동북아 자유무역협정(FTA) 등은 그 사람이 다 주도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리빈은 핵 군축 쪽 핵심 브레인이다. 이런 식으로 거의 다 연계되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중국의 내일을 묻다>에 이은 문정인 교수의 다음 프로젝트는 일본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본에 미래는 있는가'라는 주제로 일본 내 전략가들을 만나 또 하나의 대담집을 만든다는 것이다.

문정인 교수는 이러한 작업들을 종합해 "동아시아의 대전략(Grand Strategy)"라는 제목의 영어판 책을 쓸 계획이라고 한다. '국제적인 마당발' 문정인 교수의 다음 책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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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집이라는 장르 혹은 형태는 독특한 독서를 요한다. 독자가 어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 영화에 대해 쓴 평론 파트는 읽지 않고 그저 건너뛸지도 모른다. 혹은 거꾸로 그 평론을 읽기 위해서 그 영화를 기어이 찾아볼지도 모른다. 텍스트를 한 번에 읽어 내려갈 수 없는, 끊임없이 텍스트 바깥의 이미지가 간섭해 들어오고 독자로 하여금 독서 이외의 행위를 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야말로 평론집의 특징일 것이다.

하나 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펴낸 평론집 <필사의 탐독>(바다출판사 펴냄)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우열 그림, 바다출판사 펴냄)는 그보다 더 복잡한 형태의 독서를 요한다. 1989년 창간한 영화 잡지 <로드쇼>의 편집차장을 시작으로, 1995년 창간됐고 한국의 시네필 문화에 지대한 기여를 한 영화 잡지 <키노>의 편집장이자 혹은 1990년대 중반 라디오 프로그램 <정은임의 FM영화음악>에 출연하여 새로운 영화들을 청취자에게 소개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을 아는 이라면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일의 글은 일반적인 영화 '감상문'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한국의 영화평론계에서 독보적이고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는, 한 편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적으로 '본다'. 독자 역시 그 글을 읽으며 그의 시선을 경유하여 그 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는 독자가 거기서 멈출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선을 경유하지 말고 결국엔 당신 자신의 시선을 고민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독려하고 선언한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는 수동적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 정성일을 따라잡기 위해서, 혹은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

영화 정보와 가벼운 감상평을 공유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쩌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혹은 더 확장된 삶의 태도를 고민하는 독자라면, 이 두 권의 평론집을 통해 확장과 공감과 배움의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열렸던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로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던 그를 인터뷰하며, 평론집에 얽힌 궁금증들을 질문했다.


▲ 영화평론가 정성일. ⓒ프레시안(손문상)

- 영화평론가로서 오래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번째 평론집을 내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책 자체를 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흐른 다음 남는 건 영화지, 그 영화에 관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둘러싼 글이라는 건, 그 글이 쓰인 특정 시간 동안 유효할 뿐이며 소설처럼 계속 읽힐 순 없다. 매우 미안한 얘기지만 그 시들이 남지, 시집 뒤의 김현의 평이 남진 않을 것 같다. 혹은 그 소설들이 남지, 그 소설에 관한 김윤식의 평이 남을 것 같진 않다.

말하자면 그건 비평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영화에 대한 글은 그것이 발표된 지면의 운명과 함께 한다. 만일 지면이 오래 남는다면 그 글도 오래 남을 것이고 지면이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면 그 글도 그 운명을 따라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태가 좀 변했다.

나는 인터넷이 생기기 이전부터 글을 쓴 사람인데, 인터넷이 활성화되자 예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 글들이 되돌아오고 다시 떠돌기 시작하고 무한 자기 증식을 시작했다. 어쩌면 이 글들이 다른 방식으로 소멸하거나 살아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내가 나서서 책으로 내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임권택 감독(<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현실문화 펴냄))과 김기덕 감독(<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행복한책읽기 펴냄))의 이름 뒤에 숨어서 머물고 싶었다. 첨언하자면, 김기덕 감독 인터뷰를 올해 초에 한 달 반 동안 새롭게 진행했다. 그 책은 아마 올 겨울에 나올 거다. 임권택 감독도 인터뷰를 새로 했다. 감독님의 신작 <달빛 길어 올리기>에 관한 인터뷰까지 추가한 다음, <달빛 길어 올리기> 개봉에 맞춰 출간할 예정이다.


▲ <필사의 탐독>(정성일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오랜 시간 생명력을 유지하는 훌륭한 평론집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프랑소와 트뤼포가 앨프리드 히치콕을 인터뷰한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펴냄) 같은 책 말이다. 당신이 편집장으로 재직한 영화 잡지 <키노>에서도 그런 책들을 전략적으로 소개하고 칭송했는데, 왜 본인의 평론집에 대해서는 그렇게 주저한 건지 궁금하다.

그들만큼 훌륭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들이야 워낙 눈이 밝은 사람들이니까. 예전에 프랑스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1959년판을 구해 읽은 적이 있다. 그때도 별점을 매기더라.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년)와 장뤼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59년)의 별점을 보고 흠칫 놀랐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대부분의 비평가들에게 그 해의 새로운 영화라는 찬사를 받았고,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네 멋대로 해라>에 대해선 '어린 평론가가 감독을 한답시고 되게 서툴게 할리우드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 철없는 영화'라는 평이 주류를 이뤘다. 그런데 <카이에 뒤 시네마>의 당시 평론가들, 나중에 우리가 눈여겨보게 되는 그 감독들인 에릭 로메, 자크 리베트, 프랑소와 트뤼포 등의 별점을 보면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 별 하나, <네 멋대로 해라>에 별 넷을 줬다. 이쯤 되면 이 사람들이 좀 무서워지는 거다. (웃음)

어떤 영화가 시간을 견디고 남을지를 당대에 딱 알아본다는 거, 정말 대단하다. 그런 안목은 훔치고 싶지. 내게 그런 안목이 있는가에 대해 끝없이 의심스럽고, 종종 시간이 흐르고 나면 예전에 그 영화를 잘못 봤구나 후회하기도 하고. 여담이지만, <씨네21>의 20자 평이 결정적으로 재미없는 건 대부분의 영화에 별 셋, 혹은 별 셋 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럼 이 영화와 저 영화의 차이가 뭔지를 알 수가 없다. 별 하나를 주는 경우는, 굳이 안 봐도 별 하나짜리인 줄 아는 영화뿐이다. (웃음) 그건 곤란하지 않은가. 물론 그의 안목과 그의 평, 그의 설명이 영화만큼 오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젠 교양이 되어버린 앙드레 바쟁, 폴린 카엘, 수잔 손탁, 앤드류 세리스 등. 하지만 대부분의 비평문이 그만큼 시간을 견딜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글쎄…….


ⓒ프레시안(손문상)

- 서문에서 편집자와 3년 전 "첫 영화를 찍은 다음 책을 내겠다"고 약속했고 정말 <카페 느와르>를 마치고 난 다음 두 권의 평론집을 출간하게 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바다출판사 편집자가 3년 전에 처음 전화해서 책을 내자고 제안했다.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 아직 낼 때가 안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대체 이유가 뭐냐고 묻는데,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다. 마침 <카페 느와르> 제작 준비 단계여서, 첫 번째 영화를 찍고 나서 책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자 정말 연락이 끊겼고,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카페 느와르>가 상영된 직후 전화가 왔다. "자, 이제 책을 내실 때가 왔습니다." (웃음) 그래서 진행하게 됐고, 대신 한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여기에 실릴 글은 내가 고르지 않았다. 이를테면 <필사의 탐독>은 21세기에 발표된 한국 영화로 한정하자는 원칙 하에 에디터가 내 평론 중 일부를 선택했다.

아마 다른 에디터가 일했다면 <필사의 탐독>은 전혀 다른 내용이 됐을 수도 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도 에디터와 (일러스트를 그린) 올드독(정우열)이 함께 글을 선정했다. 그 권리를 그들에게 넘김으로써 그런 결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할까? 음…나는 책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 책이라는 물적 존재에 대해서.

똑같은 글이라도 책에 실린 글은 다르다. 내가 사방에서 썼던 글들이 샘물처럼 흘러들어 고여 한 권의 책이 된다는 것, 한편으론 그 호수의 고요함과 깊이가 좋지만 또 한편으론 호수의 특징 중 하나가 '썩는다'는 점이다. 뭔가 생각이 멈춘다는 게 싫었다. 내가 글들을 직접 선택한다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내가 이 책에 붙잡힐 거란 생각도 들었다.

- <필사의 탐독>에 실린 평론의 순서는 영화의 개봉 순서와 맞지 않다. 예를 들어 2006년 7월에 개봉한 <괴물> 다음에 6월의 월드컵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이유가 궁금하다.

에디터한테 그렇게 부탁했다. 이 책이 연대기로 읽히길 원치 않는다고. <필사의 탐독>이 행여나 21세기 첫 10년간의 한국 영화사로 읽히길 원치 않았다. 그저 10년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이 언제나 순서대로 간직되는 건 아니지 않나. 개봉 순서보다는 책 전체를 쭉 읽어나갈 사람들의 독서의 리듬을 더 많이 생각했다.

- 그 글이 다루고 있는 영화 자체의 리듬이기도 할까?

둘 다다. 혹은 한 가지 더. 그 영화에 접근한 방식의 리듬도 고려했다. 어떤 것은 비평, 어떤 것은 인터뷰, 어떤 것은 현장 방문이다. 난 '현장 방문은 비평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평에는 서로 다른 태도가 있다. 현장 방문과 인터뷰 역시 하나의 비평적 태도다. 어떻게 보면 아카데미에서 시작한 비평가가 아니라, 현장에서 기자로 시작한 비평가인 내가 갖는 메소드의 스펙트럼이랄까,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훈련받은 비평가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인터뷰나 취재에는 현장에서의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난 비평가 후배들이 영화를 본 다음 책상에서만 비평을 쓰는 게 굉장히 불만스럽다.

내가 존경하는 비평가들은, 예를 들어 세르주 다네를 보자.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다가 그 영화 속 바람이 궁금해졌다. 아무리 영화를 들여다봐도 바람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모르겠어. 그럼 방법은 하나다. 현장에 가는 거다. 아키라가 자기의 프레임에서 어떻게 바람을 창조하는가를 견학하러 가는 그런 태도, 또는 프랑소와 트뤼포가 에릭 로메와 함께 히치콕의 <이창> 현장을 방문하여 그 메소드를 구하고 싶어 하는 태도, 오즈 야스지로와 동시대를 살지 못했던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가 오즈의 촬영 기사와 긴 인터뷰를 하며 오즈의 창작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그 태도가, 지금의 비평가들에게는 명백히 결여돼 있다. 말하자면 호기심의 빈곤, 한편으로는 맹렬한 비평적 애티튜드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라는 건 책상에 앉아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만일 후배 비평가들이 <필사의 탐독>이라는 책을 필요로 한다면, 특정 영화들에 대한 나의 견해가 아니라 오히려 그 메소드를 생각해주었으면 고맙겠다. 책상에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현장에서, 한편으로 감독과의 인터뷰로 영화에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 <필사의 탐독>에서 제외된 영화, 제외된 평론에 대해서는 본인으로서도 아쉬움이 남겠지만, 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알지 못하는 독자들로서도 많이 궁금해 할 것 같다. 이를테면 2004년에 중요하게 다뤄졌던 한국 영화에 관한 글들은 여기 없다. <송환>, <빈 집>, <귀여워>, <마이 제너레이션> 같은 영화들 말이다.

혹은 <사랑니>도 빠졌다. 마음 속 한편으로는 이 글이 왜 빠졌지 하는 생각은 분명 있다. 하지만 영화의 상영 시간이 결정된 것처럼 책의 쪽수도 결정되어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이건 전집이 아니다. (웃음)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자.


ⓒ프레시안(손문상)
- 두 권의 표지는 각각 어떻게 선택한 건가. <필사의 탐독>은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 역의 김상경이 비 맞으며 손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선택했고,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알파빌>의 안나 카리나가 폴 엘뤼아르의 시집을 쥐고 있는 장면을 선택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부터 얘기해보자. <알파빌>에 끌렸던 이유는, 영화 속 도시 알파빌에서 '사랑'과 '왜?'가 금지돼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네필들에게 부족한 건 그 두 가지가 아닌가 싶다. 영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영화를 본 다음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지금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와선 "별 두 개야" 혹은 "별 넷이야"라고 말한다. 그 외에는 어떤 궁금증도 없다. 혹은 어떤 관객은 너무 근심어린 얼굴로 "큰일이야. 이 영화 백만이 안 될 거 같아"라고 한다. 아니, 근데 그걸 자기가 왜 걱정하냐고! (웃음)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표지를 보면, 안나 카리나가 이렇게 폴 엘뤼아르의 책을 들고 허공을 바라본다.

그건 두 가지 뜻이다. 첫째, 영화를 읽지 말고 보세요. '영화를 읽는다'라는 말은 아카데미가 만들어냈는데, 사실 영화를 '읽으면서부터' 영화에 대한 비평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걸 이야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영화에서 보지 못한 걸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지젝이나 들뢰즈 같은 온갖 이론가들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은 '본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다.

둘째, 그 영화를 볼 땐 교양을 잊지 말아주세요, 교양의 바탕 위에서 생각해주세요. 만일 여러분들이 '교양은 필요 없고 영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영화는 과연 기뻐할 것인가. 교양 없이 얻어낸 그 승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필사의 탐독>의 경우,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손금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본다는 뜻이다.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지금의 영화를 정확하게 읽는다면 한국 영화의 과거를 볼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니까. 말하자면 과거를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한국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 대신 그걸 남에게 맡기지 말고, 자기 운명은 자기가 보자는 뜻이다.

난 그 장면에 굉장히 마음이 끌렸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이 책의 태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디터에게 부탁했다. 다른 순서는 뒤섞어도 괜찮지만 이것만은 지켜달라고. <필사의 탐독>에서 죽은 자에 대한 애도가 제일 처음 들어가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고(故) 정은임 아나운서에 바치는 추모사가 끝나자마자 시작하는 원고가 <생활의 발견>이었으면 좋겠다고.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정성일 지음, 정우열 그림,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필사의 탐독>의 첫머리는 고 정은임 아나운서에게 바치는, 지금은 가고 없는 영화 친구를 향한 애도다. 그리고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은 올드독이라는 새로운 영화친구를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두 책의 첫머리가 그렇게 대구를 이룬다. 그건 결국 가고 없는 친구를 그리워하고,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나의 새로운 영화 친구가 되어달라'고 초대한다는 인상을 준다.

(한참 생각하다가) 지금 내가 믿는 정치학은 딱 하나다. 우정의 정치학. 예전의 시네필들은 영화의 친구를 애타게 찾았고 그들과 무리지어 다니고 주말엔 중국집에 모여 자장면을 먹으며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때로 싸우고 때로 설득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1인의 시대다. 개인 블로그, 개인 트위터의 시대다.

오로지 태그에 걸린 영화에 관한 단어들 때문에 수많은 낯선 사람들이 그 블로그 혹은 트위터를 찾아온다. 그들은 블로그나 트위터의 주인이 누군지 알 리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영화에 대한 이 사람의 관심이 나와 어떤 지점에서 조응하고 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거다.

질문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시네필은 그 낯선 이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블로그들을 읽다보면 보면 종종 거칠게 얘기가 진행된다. 너 오지 마. 난 이렇게 살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같이 보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좋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가장 감동받는 순간은,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장면에 이르러 극장 어디선가 누군가 "아…" 하는 탄식을 지르는 걸 들을 때다. 그 순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거다. 이것이 영화를 보면서 갖는 나의 우정의 방식, 낯선 사람에 대한 환대의 방식인 셈이다. <필사의 탐독>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두 권의 책에 일관되게 흐르는 건, 다소 하드하고 따분한 표현이지만 우정의 정치학, 낯선 친구에 대한 환대를 생각해달라는 나의 호소다.


ⓒ프레시안(손문상)

- 평론들이 원래 실렸던 매체에서 붙인 글의 제목과, 이번에 평론집 내에서 새롭게 붙인 글의 제목 사이에 보이는 긴장감이랄까, 미묘한 차이가 흥미롭다. 어떤 면에선 바로잡고, 어떤 면에선 보충하고, 또 어떤 면으로는 수수께끼 놀이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체에 내 글이 실릴 때 내가 제목을 붙이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첫째로 제목을 붙이는 건 편집자의 권리니까. 두 번째로, 내 글에 관한 독후감이 바로 그 제목이니까, 제목을 어떻게 붙이는지가 궁금하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이상한 제목이 붙어서 당황하기도 하고, 어떨 땐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근사한 제목을 붙여 과분하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래도 매체에 글을 실릴 때는 제목이 시의성을 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제목이 생뚱맞게 들릴 때도 많다. 그래서 이번에 에디터가 제목을 새롭게 달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각 잡고 단 건 아니고, 한편으론 유머처럼 혹은 그 글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나의 메시지 같은 성격으로 제목들을 뽑았다.

- 기억에 의존해서 영화평을 써야 하는 것의 힘듦을 기술하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평론을 쓸 당시 영화에 대해 잘못 기억하고 있던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이 책에 그대로 싣는다고도 했다. 내가 본 것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 부분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장면이 명백히 롱테이크라고 생각했는데 쇼트가 쪼개진 거야. 혹은 그 장면이 명백히 클로즈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카메라가 미디엄 쇼트만큼 물러나 있었던 거야. 예전에 임권택 감독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감독님, 보통 '영혼을 끌어내는 듯한 연기, 그 사람의 고통이 드러나는 듯한 얼굴'이라는 표현을 쓸 때, 어떻게 고통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건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님은 그런 연기를 시키고 끌어내지 않습니까? 그 비결이 뭡니까?"

감독은 0.5초 만에 대답했다.

"그거 다 사기여 사기. 그런 게 어딨어요."

핵심은 다음 말이다.

"그래서 연출의 핵심은 착시요."

잘못 기억된 어떤 순간이 오히려 연출의 의도일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여기서 당신과 대화하고 있다. 미디엄 쇼트만큼 물러앉아 당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어느 순간 손을 입가에 올릴 때, 당신의 얼굴이 딱 클로즈업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연출자는 미디엄 쇼트로 계속 찍다가 배우에게 '어머'하면서 손을 입으로 올리게 한다. 쇼트는 그대로인데, 본 사람들은 나중에 컷이 쪼개졌다고 생각한다. 미디엄에서 클로즈업으로 들어갔다고.

그런 어펙티브한 쇼크를 줌으로써 우리의 기억을 건드리는 거다. 그 연출이, 되게 중요하다. 그래서 기억의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수학 문제를 풀거나 팩트를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심리적 기준을 갖고 비평을 쓰는 사람이니까 그 기억의 오류를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더 중요하다.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되, 그 안에서 나도 모르게 벌어진 기억의 착시야말로 내가 그 영화랑 소통했던 순간이었던 거다. 사실은, 다음 번에 쓰고자 하는 책의 주제가 착시다. 클로즈업, 롱 쇼트, 투 쇼트 등 영화의 개념들을 죽 설명하는데, 정석적인 설명이 아니라 내가 거기서 오류를 범했던 순간들, 착시를 일으킨 순간들을 쓸 거다. 말하자면 퍼스널한 터미놀로지에 대한 해설이 될 거다. 영화의 매직은 오히려 거기 있는 게 아닌가, 라는 깨달음이 긴 시간 동안 영화를 보아온 나의 결론 같은 것이다.

- 그렇다면 영화를 보고 나서 평을 바로 써야 할 때, 어느 정도까지 메모를 하면서 보는 쪽인가?

메모를 하지 않는다. 메모하면 영화가 안 보인다.

- 그렇다면 <생활의 발견> 평론 등에서 보이는 신과 쇼트의 수는 어떻게 기록하는 건가.

영화 보면서 손가락으로 센다. <생활의 발견>의 경우는 두 번을 보고 쓴 거지만, 대개의 경우는 직접 세어 본다. 칸영화제에서 하루에 6편씩 볼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났을 때 장면이 30컷 미만이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세기 시작한다. 대충 어떤 템포로 흘러가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그게 아마 지금의 젊은 세대와 나의 차이일 텐데….

내가 비디오를 처음 본건 20대 후반이었다. 그 전까지 영화는 오로지 극장에서 봐야만 했다. 한번 보면 끝이다. 이 영화를 내가 소장하기 위해선 기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그건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세대 평론가들의 공통적인 훈련 과정이기도 하다. 정보에 접근성이 용이해질수록 기억의 능력이 퇴보하기 시작한다는 글을 보고 나도 공감했다.

지금 영화과 학생들을 보면 리와인드해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너무 크기 때문에, 막 보고난 영화를 쇼트 바이 쇼트(shot by shot)로 기억하지 못한다. 10분 전에 본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기억이라는 능력의 퇴화, 퇴보라기보다는 퇴화가 더 정확하겠다. 그럼으로써 영화의 착시라는 매직을 얻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중요한 능력 하나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프레시안(손문상)

- <필사의 탐독>에서는 2006년 월드컵의 스펙터클에 관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서는 김선일 참수 비디오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영화평이 이어지다가 문득 현실의 이미지를 논하는 그 글들이 등장하는 순간 유독 도드라진다. 이 글들을 저널에 발표할 당시에는 그 무렵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당연한 발언이었겠지만, 몇 년 뒤 책으로 엮일 때 이 글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는 어떤 특정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두 글 모두, 난 그 글이 활용되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썼다. 말하자면 영화평론가가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 말이다. 평론가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수는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해 격문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글은 철수가 쓰고 영희가 쓴 거지 영화평론가가 쓴 글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영화평론가라면 광화문 촛불 집회 당시, 집회에 참가한 경험을 쓰는 게 핵심이 아니라 그것이 중계되는 방식에 대해 쓰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촛불 집회가 방송에서 올바르게 중계되고 있는가, KBS와 MBC가 이를 중계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그 쇼트의 운영 방식에서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는가. 그것이 평론가가 정치적 임무를 실행하는 방식이다.

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이 죽여요, 라고 쓰는 건 영화평론가의 글이 아니다. 대신 NHK와 한국 방송의 중계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중계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할 때 스포츠의 윤리에 대한 평론가의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나 평론가들이 그 메소드, 그 애티튜드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고 자기의 방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 그렇다면 스펙터클에 관한 이 글들이, 월드컵 사진과 김선일 사진이 없이 책에 실린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책을 낼 때 원칙 중 하나는, 정말 필요하지 않다면 사진을 삽입하지 말자는 거였다. 많은 이들이 들뢰즈의 <시네마 : 운동-이미지>, <시네마 : 시간-이미지>에 대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책들에게 가장 영향을 받은 건 스틸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맨 처음 불어판본을 받아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무슨 영화 책이 사진이 없어! (웃음)

나도 모르게 관습적으로 생각한 셈이다. 하지만 그 책을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미지가 운동하고 있을 때만 영화이고, 이미지가 시간 안에 있을 때만 영화이다. 그걸 멈춰 세운 스틸 이미지는 이미 영화가 아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번 평론집에서도 장식으로서의 사진을 빼자고 했다.

- 평론집에서 당신이 되풀이 강조하는 바는 환상에 대한 거절이다. 관객이 영화에게 기대하는 환상, 영화에서 읽어내려는 환상, 혹은 감독이 제공하는 거짓된 위안으로서의 환상. 그 태도에 대해 어쩌면 찬반의 의견이 갈릴 것 같다.

나한테 영화는, 결국 로베르토 로셀리니다. 로셀리니가 세상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 영화가 가져야 하는 윤리, 그 윤리가 영화의 형식이 되어가는 과정, 그럴 때에만 비로소 영화가 부서지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나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동료들을 비판하고 싶진 않다. 서로 다른 견해의 다양성이 그만큼 영화에 대한 생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충분히 존중한다.

하지만 나라는 평론가가 영화를 보면서 영화와 관계 맺는 방식, 혹은 영화로부터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로셀리니적인 태도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지지하고 있는 영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 <필사의 탐독>에서 개인적으로 놀랍게 읽은 글은 허진호 감독의 <외출> 평론이다. 작품의 완성도에 상관없이, 말하자면 영화의 '얼룩'이라고 할 만한 어떤 디테일에서 시작한 의문으로부터 그 글은 시작되고 결론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진다. 일반적인 영화평이 영화의 전체적 완성도라든가 전체를 관통하는 무엇에 대해 쓰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언젠가부터 영화 기자나 비평가들이 갖고 있는 고질병은, 자신이 쓰는 그 글이 그 영화에 대한 최종본이 되길 바란다는 점이다. 그런 글이 있을 리가 없잖아. (웃음) 보편적 비평, 일반적 비평이라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비평은 특수한 비평이다. 난 영화에서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에 대해 답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시작이라고 본다. 영화를 보다가 문득 나를 멈춰 세우는 대목들 말이다.

왜 이렇게 됐지? 이 대목에서 감독이 명백하게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영화 전편으로 확산되는 하나의 논리일 수도 있다. 내가 그에 대해 답을 낼 수 있다면 사실상 이 영화의 논리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게는 못 만든 영화와 잘 만든 영화 두 가지가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궁금한 영화와 내가 무관심한 영화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 할지라도 내가 무관심하다면, 글을 쓸 때 쥐어짠다는 느낌이 있다. 아,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웃음) 쓰고 나서도 스스로 너무 못마땅해. 하지만 모두가 별로라던 <외출>을 봤을 때, 난 어떤 장면에서 멈춰 섰다. 이런 이상한 연출이 왜 나온 걸까?

혹은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의 마지막 장면, 수애가 남편의 뺨을 때린 다음 바로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난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영화를 여기서 끝낼까? 아, 이 감독은 지금 나랑 다른 논리로 영화를 끌고 왔구나.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다시 거꾸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 점에 있어 정말 흥미롭고 궁금한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다. 그의 영화는, 매 장면이 다 그렇다. (웃음) 1시간 40분의 러닝 타임 동안 한 장면만 나를 멈추는 게 아니라 매 장면이 다 그렇다. 모든 장면을 그렇게 운용하는 홍상수의 영화적인 비전, 그의 영화의 리듬에 이르면 "아, 굉장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손문상)

- 사실 지금까지 왜 당신이 홍상수 감독에 관한 책을 내지 않는지 늘 궁금했다. 어딘지 모르게 그에 관한 긴 발언을 미루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거꾸로 임권택 감독과 김기덕 감독에 관한 인터뷰집을 낸 이유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임권택 감독과 김기덕 감독에 대해 책을 쓰기까지 나를 이끈 열정의 근원은, 그들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서도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만 영화를 배웠다. 자기가 자기로부터 배운 사람들. 그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나은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나아갔다.

한편으론 그 태도를 배우고 싶었고 또 한편으론 그 자수성가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 과정의 기록이 지금 막 영화를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중요한 격려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 역시 한 번도 영화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여기까지 왔다는 동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선생님이 가르쳐줬다면 한 시간 만에 끝났을 일이, 어떤 경우에는 1년, 어떤 경우에는 10년이 걸리기도 한다. 오로지, 끊임없이 몸으로 배우는 거다. 또한, 그들이 만든 최종 결과물로서의 영화로부터 배움을 구할 수도 있지만 난 인간의 기록을 하고 싶기도 했다. 결국 영화는, 어떤 예술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이 만들기 때문에 흥미롭다.

사람이 먹고 사는 건 언제나 치사한 일이고 자신의 배움을 배신하는 일이다. 타협하고, 교활해지고,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일상이 그의 예술적 영혼을 갉아먹고, 갉아 먹힌 다음 앙상한 나머지만을 끌어안고 그걸 부숴가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 제일 역겨운 건 비평가나 전기 작가들이 그 과정을 멋있게 치장하는 거다. 아름다운 표현이 정말 싫다. 난 스스로 경험한 자의 목소리로 직접 담고 싶었다.

반면 홍상수는 그들과 다르다. 홍상수는 결론을 갖고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사실상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찍었을 때 이미 자기 영화를 완성했다. 그 다음부턴 끊임없는 변주만 해나가고 있다. 난 홍상수 감독의 말이 궁금하거나 만드는 과정을 알고 싶지 않다. 그의 영화가 흥미롭고 그의 영화가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홍상수는 충분히 미루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를 인터뷰하고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그의 예술적 태도에 온당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 영화사에 위대하고 훌륭한 감독들이 많다. 그러나 홍상수는 어쩌면 한국영화사가 처음 맞이하는 예술가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난 그의 작업에 대해 좀 더 시간을 벌고 싶다.


책 속으로

무엇보다도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기억을 다루는 것이다. 물론 그 영화를 당장 다시 보면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차라리 필사적으로 기억을 찾아서 다시 생각하고, 왜 그것만이 기억에 남았는지를 생각하고, 그런 다음 왜 저것은 사라져버렸는지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게서 사라져가는 시간과 남아있는 시간 사이에서 오가는 불안과 행복 사이의 경기장이다. 나에게 영화란 그것을 보는 시간과 그것을 보러 가는 시간, 그리고 보고 난 다음의 시간, 세 개의 시간 사이에서 기억의 사용에 대한 용법과 능력의 문제이다. 그저 자유롭게, 종종 선험적으로 상상하며, 때로는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서 영화를 보면서 즐겁게 세상을 쳐다본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13쪽)

나는 오픈 토크에서 앙겔로풀로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시대는 영화가 이미지에 포위당한, 점점 더 야만적인 이미지들, 이를테면 게임이나 뮤직비디오처럼 사유하지 않는 이미지들에 의해 영화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화에서 에술을 향해서 싸우고 있는 당신에게 영화의 미래는 어떤 것입니까?"

앙겔로풀로스는 매우 길게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인상적인 말로 마무리를 했다.

"결국 영화는 하나의 기록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그것을 포기한다면 더이성 우리 시대의 인간에 대한 시선의 기억은 말소되고 말 것입니다. 시선을 거둘때, 우리는 더이상 다른 사람을 보지 않겠다는 시대를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를 만드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너를 볼 때, 이미 너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입니다."

그리스에서 온 이 현자는 우리들에게 왜 여전히 영화가 필요한지 웅변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몇 번이고 말했다. "영웅적인 절망을 포기하지 마라." 그는 우리 시대에 거의 마지막 남아있는 거인이었다. 다시 한번 그의 영화를 모두 볼 생각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422~423쪽)

(내 생각에) 홍상수의 새로운 점은 바로 그 변덕, 말하자면 종합의 포기에 있다. 그는 균형을 잡으려 들지도 않고, 그 안에서 그 어느 것에도 명령의 자리를 넘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변덕을 멋대로 되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홍상수는 자기 영화의 원칙에 대해서 엄격하다. 심지어 이 원칙에 대한 엄격함은 그 자리에 대한 권리를 그 자신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때로 그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 혹은 사건에 대해서조차 애매하게 볼 때가 있다. 이미 던져져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거의 자포자기한 세상에 대해 홍상수의 유일하게 반성적인 태도는 그의 직관이다. 그러나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를 직관에 내맡길 때 그는 그 직관이 붙든 것을 분석이 설명하려 드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해서 영화를 흔든다. 그가 영화를 흔드는 방법은 언제나 시간이다. 그 안에서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럼에도 시간은 되돌아오거나 혹은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에서 앞의 시간은 반복으로 보이고, 뒤의 시간은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에서 반복과 차이는 착시이다. 대부분 그의 영화에서 반복과 차이를 말하면서 그것이 착시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안에서 홍상수는 우리의 기억과 경쟁한다. (<필사의 탐독>, 234쪽)

정성일 : 교실에서 회의를 하는 장면이 아마 내 생각에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가장 공들인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촬영이라는 점에서도. 사실 이 신 전체를 신기하게 찍었는데,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백한상을 죽이러 가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카메라가 다 움직이는 쇼트로 찍었어요. 그렇다고 롱테이크로 찍은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장면은 장면대로 나누면서, 핸드헬드로 마치 '대사의 액션 장면'처럼 영화를 연출하고 있거든요. 나는 이 회의 장면을 무척 이상하게 봤어요.

박찬욱 : 여기가 가장 활력있는 장면이죠. 액션 장면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금자 씨가 총을 들고 뛰어가는 장면보다 훨씬 더 에너지가 가득하고 활력있는 장면이라고 봤어요. 그들이 거기서 논쟁을 벌이고 의견을 나누고 하는 것이 찍기에 따라서는 그냥 맥 빠지고 무기력한 군상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 절박한 일이고, 아이들이 죽은 뒤 자신의 인생을 결산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자기 의견도 개진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럴것 같았어요. 그럴 때 이것을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뭐랄까 너무 좀 편하게 간달까요, 감독으로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필사의 탐독>,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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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게모니 전쟁

결국 '그람시'가 옳았다. 문화라고 통칭되는 한 사회의 주요한 생각, 의지, 행동, 믿음, 관습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완전한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지배도, 저항도, 전복도 결국 헤게모니의 문제이고 그것이 완결되지 않는 한 이데올로기 사이의 쟁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적 반신자유주의자인 수전 조지가 <하이재킹 아메리카>(김용규·이효석 옮김, 산지니 펴냄)를 그람시를 인용하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수전 조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모국인 미국이 적어도 지난 30년간 우파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인해 완전히 변모했고 오늘날의 미국이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원래의 '건전한' 미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녀에 의하면 진보적이며, (최소한) 전통적인 의미의 미국은 종교와 자본 그리고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탐욕의 이데올로기 간의 동맹에 의해 납치당해 사라졌다.

착한 미국의 추억


▲ <하이재킹 아메리카 : 미국 우파는 미국인의 사고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나>(수전 조지 지음, 김용규·이효석 옮김, 산지니 펴냄). ⓒ산지니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착한' 미국은 어떤 미국이었는가? 두 대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미국은 오랫동안 나라 밖 일에는 무지한 자아도취적 카우보이거나 반대로 양의 탈을 쓴 탐욕스럽고 호전적인 제국주의주자들이었다.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한 세기 가량 유색인의 완전한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나라였고 기회의 땅이라는 타이틀은 수많은 차별에 대한 인내를 지불하며 유지되었다. 지난 세기 중반까지 정치적 마녀사냥인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반쪽자리 공화국이었다.

사실 그녀가 기억하는 진보적이고 좋은 미국의 시절은 그런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햇빛을 받던 짧은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FDR의 집권 이후부터, 사회적으로는 최소한 JFK의 등장 이후로 겨우 한 세대를 넘기는 짧은 시기였다. 그 미국은 <타임>이 1965년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들이다"라는 표지를 선보이던 시절에 극에 달했으며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주창하는 복지 프로그램과 민권법(Civil Rights Acts)을 제정하던 시대에 찬란히 빛났다.

미국 현대사를 보면 다른 시대와 구별되는 이 시기 미국 사회의 진보적 업적에 놀라게 된다. 명분 없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수세기 동안 뿌리내린 인종적 차별에 대한 저항, 불평등과 가난에 대한 사회적 투쟁을 벌이며 미국은 오래된 건국의 이념과 헌법을 진보적으로 해석하여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는 진정한 자유의 가치를 최고조로 올려놓았다.

이 시기 수많은 대법원 판례 속에 나타난 사회적 가치와 신념을 둘러싼 대립의 내용은 역사상 가장 문명화된 투쟁이었고 실천적 승리였다.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들이다"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이런 좋은 시대의 미국이 사실 그 공화국의 기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듯하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헌법을 설계한 국부(founding fathers)들은 정교 분리의 원칙을 세웠고 (그들은 겉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무신론자들이었다), 종교가 세속에 간섭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들이 만든 헌법의 권리장전(수정조항)은 끊임없이 진보적으로 해석되어 왔고 미국적 가치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미국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불과 한 세대 만에 미국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게 우경화되고 뿌리 깊게 보수화되었다.

선거 결과에 의해 단순히 어느 한 가치 쪽으로 잠시 사회적 선택의 추를 옮긴 것이 아니라 '미국적'인 것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거짓과 탐욕으로 뭉쳐져 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는 무시되며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반계몽주의 운동은 합리적 지식과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부의 재분배는 형편없어지고 빈곤은 더욱 폭넓게 악화되어 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내재화되고 일상화됨에도 미국의 대중들은 전혀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단 말인가?

하이재커들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

<하이재킹 아메리카>는 미국을 변화시킨 자들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이다. 수전 조지는 지난 한 세대 동안, 또 특별히 부시 정권 들어서 미국을 난도질한 세력들에 대한 자료를 엄청나게 모아 신랄한 고발장을 작성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고발장의 내용들이 비밀 문서나 내부 고발자들에 의해 제공된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정보 공개 절차를 통해서 혹은 아예 공개적으로 발표된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서 얻은 것이란 사실이다.

그런 내용은 대부분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유명한 인사들이지만 대개는 외국인으로서는 거의 알기 어렵거나 혹은 미국인들도 쉽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실명을 전혀 감추려하지 않는다. 매서운 비판도 있지만 이들에 대한 객관적 사실의 기술만으로도 정치적 의미를 드러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수전 조지의 비판은 당연히 신자유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하이에크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론적, 철학적 비판에 공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이에크주의자로 나타난 신자유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고 이를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보급시켰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 흐름의 선구적 인물은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이다. 그는 진보적(미국식으로는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과 보수 재단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우파의 사상적, 제도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런 크리스톨 프로그램은 대안적 우파 엘리트 기관을 양성하는데 초점을 맞추었고 이를 수용한 네 자매(Four Sisters) 재단, 즉 '브래들리', '올린', '스미스-리처드슨', '스카이퍼' 같은 대규모 재단은 막대한 자원을 퍼부어 이런 목표를 현실화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들 우파 재단은 진보 재단이 단기적으로 특정한 프로젝트에 치중할 때 자신들의 우파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학자, 연구소, 대학, 대중운동 단체에 관대한 아량으로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리 돈으로 수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수십 년 동안 방대하게 제공해 왔다.

여섯 형제(six brothers)라고 불리는 '헤리티지재단', '미국기업연구소', 스탠퍼드의 '후버연구소', '맨해튼 연구소', '카토연구소', '허드슨 연구소' 같은 네오콘 두뇌 집단은 네 자매 재단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진보적 제도를 붕괴시키는데 역할을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이들은 우파 정권의 인재 공급처로 성장해왔고 제도 속으로 한발 한발 행진하여 정책 결정 과정 자체를 접수했다.

이들에 키워진 수많은 전문가들은 감세, 낙태 반대, 사회복지 철폐, 소수 인종 우대 정책 폐지, 군비 강화, 팽창적 외교 정책, 민영화 정책들을 성공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우파 재단은 대학 신문부터 엘리트 잡지까지 후원하고 우파 연구자들의 특정한 책이나 그들에게 유리한 TV 프로그램의 제작에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우파 연구 집단의 성과물과 그들에 대한 기사는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등에도 쉴 새 없이 게재되어 왔다. 또 우파 재단은 미국 사회를 좌우하는 강력한 집단인 법조계에도 침투했다. 예를 들어 올린 재단이 후원하며 신자유주의 교리를 전파하는 '연방주의협회'는 3만여 명의 법학 교수와 150개 상위 법과대학의 학생 회원을 갖고 있는데 석유 기업에 손해가 되는 환경법이나 세금 관련 법안 등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데 앞장서며 보수적 연방판사의 임명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제도 속으로 진군하는 우파 연합"

이들 비종교적 신자유주의 우파와 함께 수전 조지는 미국 내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종교적 우파들에 대해서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기독교인의 엄살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생각보다 훨씬 종교적인(기독교적인) 국가이다.

상당수의 미국인은 아직도 세계가 6일 만에 창조되었다고 믿으며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성경과 헌법 사이의 선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한다. 급기야는 성경에 의해 계산하면 지구의 나이는 4400년이라는 주장을 신뢰하기도 한다.

아담과 이브가 티라노사우르스와 함께 살고 있는 그림이 있는 유레카 스프링스의 기독교 테마 파크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이들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들은 '지적설계론' 혹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교육에서 진화론을 대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 근본주의 교육을 위해 공교육을 공격하며 학교 교육을 포기하는 홈스쿨링 제도를 50개 주에서 합법화시켰다.

점차 교육, 사회 정책, 그리고 외교 정책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위험스런 현실적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예수 재림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야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는 제리 폴웰 목사의 말은 정책으로 실현되고 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인에게 신이 지구의 모든 것을 지배할 권리를 주셨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 등의 인간에게, 특히 거대 자본에게 책임이 있는 환경문제를 쉽게 무시한다. 심지어 이들은 지구 온난화를 오히려 예수 재림의 징조로 환영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미국은 아직도 전근대성에 맞서 계몽주의가 싸워야하는 그런 곳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소수 광신자들의 것이 아니라 점차 미국 대중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정치권 내부로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팻 로버슨 같은 기독교 우파 지도자들은 그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을 뿐 아니라 매일 수백 개의 기독교 TV방송에 나와 미국의 진보 세력을 비판하고 미국에서의 신정정치를 주장한다.

'국가정책자문위원회 CNP'라는 언뜻 보기에 비종교적일 같은 조직은 기금 제공자, 두뇌 집단, 언론, 대중 조직을 은밀하게 연결하며 우파 종교인의 의제를 공화당의 감세, 자유방임주의, 반세속적 진영의 정책과 결합시키고 있다. 공화당 정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이들 회의에 참석해 연설했고 부시도 대선을 앞두고 이들의 회의에 참석해 연설을 했다. 비종교적 우파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우파들도 비슷한 양상으로 제도 속으로 들어가 미국의 진보적 가치를 공략하고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계몽에 대한 공격과 반민주 신정정치"

수전 조지는 이들 종교인, 자본가, 이데올로그들의 불순하고 탐욕스런 만남이 네 개의 M, 즉, 자금(money), 미디어(media), 마켓팅(marketing), 경영(management)을 동원하여 "제도 속으로" 장구한 행진을 벌여 미국을 접수하고 납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거짓말, 의회와 삼권분리도 무시하고 인권도 짓밟은 대통령의 권한 등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태였다. 권력 기관, 지적 활동, 대중의 우매한 감정적 지지까지 얻은 우파의 하이재킹은 이미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짓밟고 있다.

저자는 이들 종교/비종교적 우파들의 작업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지만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경고한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들이 단지 미국뿐 아니라 세계를 위험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와 진보 세력에 대한 경고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두 가지이다. 첫째, 미국의 밖에서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미국인과 미국을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미국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더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미국 엘리트들의 행태 뿐 아니라 미국의 대중들이 얼마나 바보같이 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의 우매한 선택이 세계를 위기에 빠지게 하며 나와 나의 이웃의 목숨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불행하고 마뜩치 않은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의 변화에 대해 촉각을 세우는 것은 살아남고, 부분적으로는 그 속에서 잘살기를 원하는 세계인의 처세술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문화가 아무리 세계화 되어도 미국인의 가치와 행동은 우리가 보편적 세계인의 그것이라고 믿는 것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생각보다 보수적이고, 유럽인들보다 훨씬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심지어 우리보다도 더 전통적인 사람들이다. 230년의 짧은 건국 역사에 1000년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일상 속에서 전혀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청교도의 성스러운 엄숙함과 헌법 설계자들의 세속적 이상이 현실의 삶 속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그런 나라이다. 때론 이해하기 힘든 이런 나라에 커다란 변화가, 그것도 세계인이 우려하고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니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 우파는 한국 우파의 모범인가?

둘째, 무엇보다도 이 책이 전달하고 있는 중요한 가치는 미국의 우경화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다. 수전 조지는 한국어판 서문에 한국 우파의 "미국 따라하기"는 국내 및 해외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무서운 일이다. 한국 사회의 최근 변화에서 미국 우파의 발자취가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보수 집단은 유럽의 보수보다는 미국의 신보수와 신자유주의를 롤 모델로 삼은 듯하다. 미국의 신보수가 미국정치의 오랜 제도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화' 보다는 배제와 적대를 내세운 것처럼 한국의 보수는 상생, 견제, 대화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프레임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정권의 거짓말과 그 거짓을 옹호하는 또 다른 거짓의 과정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것도 부시 정권의 예와 유사하다. 진보 세력이 건전한 카운터 파트너로 삼기도 어려운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는 셈이다.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건전한 보수의 역사가 부재하기 때문에 이들의 전횡은 더 거칠고 날 것이며 잔혹하다.

또 최근 불거지는 한 사례를 보자. 정부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며 보수와 진보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국제적 경쟁력 있는 연구 집단으로 간주되는 세종연구소를 전경련 산하의 한국경제연구원과 통합하여 거대한 보수 연구소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

세종연구소에 소속된 진보적 학자를 추방하기 위한 목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여러 보수 재단과 연구소를 벤치마킹한 자본과 보수의 아성을 획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연구소의 전신이었으며 전두환이 만든 일해재단이 부활하는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SERI)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전경련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연구소가 어떤 주장과 정책을 만들어낼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미 한국 사회의 전문가 집단은 각개 약진할 수밖에 없는 진보적 학자들과 엄청난 정부와 자본의 혜택을 받는 보수적 연구자들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그 중간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일반 사회과학자들은 정부가 관장하는 한국연구재단에 대한 종속이 심화되고 있고 정부 비판적인 혹은 제도권적이지 않은 연구는 시행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졌다.

기독교의 보수화 또한 마찬가지다. 민주화 운동에 공이 큰 진보적 기독교계는 날로 위축되는 가운데 아직도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탁한 상당수 보수 기독교계는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사상과 주장을 그대로 수입하고 있다. 미국 거대 전도 단체의 모습을 빼닮은 한국 거대 교회의 세습화, 한국 교회 특유의 프랜차이즈화는 기독교의 세속적 영향력을 확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슬람 선교에 대한 독선적 시각 및 무슬림과 이스라엘에 대한 복음주의 교파의 태도는 미국의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아직은 정교 분리와 세속주의가 강력한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주장이 대중에게 합리적으로 받아드려지지는 않지만 거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인맥의 정치적 진출은 현 정부 들어 위험 수위까지 다다랐다. 다른 종교에 대한 암묵적 무시와 배제를 둘러싼 의심도 커져가고 있다. 종교적 갈등이 거의 없으며 종교 간 평화가 놀라울 정도였던 한국 사회에 보수 기독교의 극단적 가치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한국 우파의 미국 모방하기 과정 속에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왜 보수를 지지하면 안 될 것 같은 중산층 이하의 대중들이 왜 보수에 표를 던지는가에 대해 답답해하고 의아해 하고만 있을 것인가? 문화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투는 한국 사회에서 보수 우익에 의해 시작되었다.

미국과 유사하게 그들은 좌파가 대학, 연구소, 예술계,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공세를 취하고 있다. 진보 세력은 공정한 경쟁에 호소하고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지만 보수우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어떤 장기적 과제를 만들어 사회를 변화시킬지에 대해 역설적이긴 하지만 미국의 우파들은 오늘날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아쉬운 것들

이 책에서 아쉬운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방대한 자료를 포괄하고 엄청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 부족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제공하는 많은 '사실'이 실제로 어떻게 거대한 음모의 계획 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음모론은 장막 뒤에 가려진 어떤 사악한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만약 미국을 끔찍하게 만든 그런 사악하고 일체화된 공모의 실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몇몇 우파의 지식인들과 행동가들이 오랫동안 문화투쟁에 대한 주장을 해왔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돈이 많이 쏟아 부어졌다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엄정한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이 고발하는 내용은 인과관계에 대한 이론이 부재하고 현상만 무리지어 나열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원동력이 그런 우파의 계획을 가능하게 했는지, 우파의 전략은 왜 성공적이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 공백 상태로 남아있다. 차라리 인지과학에 기반 하여 우파의 전략을 분석한 조지 레이코프의 연구가 더욱 설득력 있다.

저자는 충격적인 사실들을 이데올로기-종교-학문-기업이라는 몇 가지 프레임에 넣어서 전달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프레임을 정교하게 엮어 나가는 데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물론 그런 과정을 완전히 성공하기는 무척 어렵고 얼마나 긴 시간과 자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런 부족함 때문에 이 책의 가치가 저하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을 입증하고 대응해야할 과제는 오히려 이 책이 세상에 요구하는 몫이기도 하다.

학문적 입증은 부족하지만 세상을 향해 과제를 던졌다

둘째, 좌파 재단과 연구 집단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수전 조지는 보수화를 방조한 좌파들을 충분히 비판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보수화된 미국 중산층 이하의 대중이 1960년대의 진보적 세대가 1990년대를 관통하며 금융과 IT혁명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위선과 배신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소위 머리와 윤리는, 미국식으로, 리버럴하고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생활은 부유한 "캐딜락을 탄 좌파"에 대한 혐오가 어떻게 미국을 보수 근본주의자와 신자유주의들의 행복한 사냥터로 만들었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즉, 미국 진보 세력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빠진 것이 아쉽다.

진보파에 대한 미국 민중의 인식이 비록 우파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도 진보 세력의 방심과 방만, 탐욕과 부패 그리고 배신과 위선의 문제 또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드는데 일조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책의 안팎에서

이 책은 두 명의 역자가 번역 작업을 했다. 공동 역자의 책이 흔히 겪는 문체의 변화나 표현의 혼란스러움을 크게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역자들이 시간을 두고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사회과학 번역서들의 경우에는 번역 전문가가 아니라 해당 분야 전문가의 번역으로 거친 직역투의 문장이 많은데 이 번역은 그런 읽기의 부담감이 거의 없다.

아주 사소한 오역들, 예를 들면 하원 의장(the Speak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을 하원 대변인으로 번역한 것(80쪽) 등을 제외하면 매우 깔끔하고 맛깔스런 느낌의 번역이다. 게다가 미국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적절한 역자 주(註)도 칭찬해주고 싶다.

사족으로 출판사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자 한다. 산지니 출판사는 이 책을 받아보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하던 출판사였다. 하지만 출간 도서 목록을 보니 수전 조지의 다른 책(<Another World>)를 비롯하여 미국과 국제 문제에 대한 진보적, 비판적 서적이 많았다.

무엇보다, 드물게도 부산에 위치한 인문사회과학 출판사로서 부산과 부산의 예술, 문화, 인문지리에 대한 서적을 발행해온 모양세가 보통의 뚝심과 내공이 있는 출판사는 아닌 듯하다. 지역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출판사가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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