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폭발했다. 승객과 행인 1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해결책으로 120대 버스의 운행을 중지한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어느 버스인지는 알 수 없다. 다음날도 버스는 여전히 시내를 오간다. 버스 안에는 평소만큼의 승객이 앉거나 서 있다. 무심한 그들의 표정이 반문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10대는 고달프다. 적어도 19세기 이후에는 항상 그랬다. 주지하듯이 청소년이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만들어진 때는 19세기이다. 그 이후 청소년은 항상 착취당하고 배제되어 왔다. 당장 성인보다 낮은 임금을 감수해야 했고 청소년 금지 구역을 설정하면 가지 말아야 했다.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투표는 할 수 없었다.

때로 그들은 청년 문화를 만들어 저항했다. 효과는 거의 없었다. 아니 효과가 있기는 했다. 10대가 입던 옷이 유행 아이템이 되고 10대가 듣던 음악이 차트를 장악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여전히 그들은 투표권 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제한된 공간을 어슬렁거려야 한다. 이제 저항은 포기한 것 같다. 남은 것은 그저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는 것 뿐. 그래서 어쩌라고?

모처럼 만화책을 보았다. 학습 만화도 아닌데 아직도 만화책을 내는 출판사가 있다니 신기했다. 그것도 잡지나 인터넷 연재를 통해 검증되지도 않은 만화를! 마찬가지로 연재도 하지 않고 바로 책을 내는 만화가 역시 신기하다. 알량한 인세로 노동비나 뽑을 수 있을까? 수채화 작업을 하느라 고급 물감을 샀다고 한다. 저런, 물감 값은 따로 안줄 텐데…….


▲ <울기엔 좀 애매한>(최규석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울기엔 좀 애매한>(최규석 지음, 사계절 펴냄)은 제목처럼 좀 애매한 만화이다. 수채화지만 '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다운' 그림은 결코 아니다. 수채화 물감이 번진 것처럼 펑퍼짐한 모습의 주인공은 도무지 우리가 기대하는 '만화의 주인공'을 닮지 않았다. 마치 이름은 원빈이지만 원빈과 전혀 닮지 않았듯이.

원빈은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지만 이혼 후 분식집을 하는 엄마에게는 학원비가 없다. 매일 만화만 그려대는 아들을 보며 고민하던 엄마는 취한 김에 큰 맘 먹고 아들을 학원에 등록시킨다. 수강생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서 만화나 보며 자란 아이들이다. 그들은 모두 만화학과 진학을 꿈꾸고 있다.

그 다음엔? "가난한 싸이코 만화가"가 되어 가난한 사이코 만화가와 결혼한 후, 줄곧 만화만 보며 만화가를 꿈꾸게 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지옥의 무한루프"(26쪽)이다. 빠져나갈 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기댈 것은 "어떻게든 되겠죠"(28쪽) 뿐이다.

그래서 공통의 목표를 지닌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모여 있지만 그들 사이에 연대는 형성되지 않는다. 라면을 먹으며 그저 죽어라고 그림을 그릴 뿐. 그들의 세계에 합류한 원빈도 생라면을 씹으며 그림 그리기에 매달린다. 겨울이 되었을 때 원빈은 마침내 대학 합격 통보를 받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 해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최규석은 이게 바로 우리 사회 10대의 삶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사회의 10대는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온갖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 대가로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자. 최저 임금마저 갈취당하고 공모전 부정, 입시 부정에 동원되며 성인의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다. 대도시 유흥가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입시 학원의 모습은 주차한 트럭의 바퀴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길고양이의 모습만큼이나 위태롭다.

오래 전 닐 포스트만은 <어린이의 소멸(The Disappearance of Childhood)>(Vintage Books, 1982)에서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가는 미국 어린이의 현실을 개탄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10대는 어른의 삶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10대는 힘들다. 재능과 열정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사회는 얘기하지만 막상 날아오르려 할 때 사회는 대학 등록금 한 번 대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난한 아이의 재능과 열정은 도둑맞기도 한다. 그런 현실 앞에서 10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뿐.

문제는 그들에게 돌파구가 없다는 점이다. 최규석이 토로하듯이 성인이라고 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저 삽 한 자루 든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지금은 원치 않는 "삽질"에 동원되고 있기도 하다. 싫어도 할 수 없다. 정리 해고가, 비정규직의 불안한 생활이, 노후 대비가 그들을 압박한다. 간신히 붙어있는 다고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떨치고 나올 용기는 없다. "착한 사람 위해서 고생하면 안 힘들어"(15쪽)라고 자위하며 오늘도 그들은 삽질에 매달린다.

10대 역시 그런 성인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10대에게 성인의 삶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10대는 스스로의 삶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어울리지 않게 "쏘 쿨"한 존재는 그런 배경에서 출현한다. "그런 걸로 상처받는 성격은 아닌데… 익숙하달까"(64쪽) 울기엔 좀 애매하다는 것은 곧 울 기회나 욕구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그들은 공감의 능력을 퇴화시키며 자기 안으로 침잠되어 간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이다.

최규석은 수채화의 번짐을 가로막는 뚜렷한 펜 선으로 10대의 세계를 단절시키는 날카로운 경계선을 표현한다. <울기엔 좀 애매한>을 보며 나는 오래 전 보았던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글논그림밭 펴냄)를 떠올린다. 두 만화의 스타일은 매우 다르지만 둘 다 정성이 깃든 그림이라는 점이 한 가지 이유이다.

좀 더 중요한 이유는 부자와 원빈의 공통점이다. 부자가 부자가 아니듯이 원빈은 원빈이 아니다. 그동안 달라진 것도 있다. 추상적으로 부자를 꿈꾸는 것에 비해 연예인 원빈을 꿈꾸는 것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물론 꿈이 구체화되었다고 실현이 더 쉬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부자가 부자가 되지 못했듯이 원빈도 원빈이 되지 못 할 것이다. 그 때도 지금도 꿈은 그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우리 출판 만화의 리얼리즘 계보를 이어간다. 리얼리즘 만화가 단행본 만화로 주로 나오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만화의 주류와 맞지 않고 상업성이 거의 없다는 것. 출판에도 온갖 고난이 뒤따른다. 운 좋게 현실 감각 없는 출판사를 만나야 한다.

최규석은 요행히 출판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건 그냥 원빈이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독자적인 세계를 이어 나갈 수 있으려면 등록금 마련이라는 진짜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울기엔 좀 애매한>의 판매량이 그것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최규석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면 당분간 또 리얼리즘 만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리얼리즘에는 항상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긴 출구가 존재한다면 이미 리얼리즘이 아니리라. 다만 리얼리즘은 희망할 뿐이다. 이것이 혹시 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원빈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울음을 터뜨린다. 사실 생뚱맞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는 것이 울만한 사안인가? 같은 이유로 재수를 했던 은수의 경험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오버질'이다.

그러나 최규석은 마지막 순간에는 오버질도 허용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공감이다. 울음이라는 날 것의 감정 표출 앞에서 참았던 울음을 같이 터뜨릴 수 있다면 그 다음도 가능하지 않을까? 10대를 위해서도 만화가를 위해서도 최규석은 함께 울음 터뜨려 줄 것을 호소한다.

안타깝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어차피 만화인 것을…. 안 되면 그냥 애매한 표정 지으면 되지 뭐. 아직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어두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감싸주는 가벼운 농담들은 체념일까 아니면 낙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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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의 <망루>(문학의문학 펴냄)를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장세니즘(Jansénisme)을 떠올렸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한들 신은 그저 조용히 관망하기만 할 뿐 개입하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장세니스트들의 현실의 모든 고통은 숙명이라는 비극적인 세계관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타락한 세계에 방치되어 오들오들 떨며 느꼈던 막막함을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팡세>)

그렇다고 주원규가 장세니스트라는 말은 아니다. 비극적인 세계를 한 편에 끌어안고 있으나 이를 타개하려는 의지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세계와 타개하려는 의지가 충돌하는 긴장이 장편소설 <망루>를 이끌어가는 힘이자, <망루>를 읽어나가는 즐거움이다.


▲ <망루>(주원규 지음, 문학의문학 펴냄). ⓒ문학의문학
먼저 비극적인 세계의 저류를 살펴보자. 윤흥길이 추천사에서 밝힌 것처럼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종교 권력이 의형제를 맺으면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권세는 바로 이 새로운 로마 제국이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로마 제국의 특징이라면 도대체 수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제국의 다른 이름인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고, 그 제의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절차이니 당연한 양상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발터 베냐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후안무치한 삼각동맹이 철거민을 지상에서 내쫓아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망루를 쌓고 그 위로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망루>의 첫 번째 미덕이라면 그러한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오래된 리얼리즘 작법의 힘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타락한 세계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방식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먼저 테러와 암살, 봉기 등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대항하는 방식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네 왼편도" 내밀라는 사랑으로 감싸는 방식이다(마태복음 5:39).

기실 이 두 가지 방식을 두고 벌어진 갈등의 역사는 퍽 깊다. 가령 서기 1세기 초반에는 전자의 방식을 취했던 열심당(熱心黨, Zealot) 당원 몇 명이 후자의 방식을 취한 예수의 제자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예수를 통하여 민족 해방의 꿈을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양 문학에서 소재로 더러 활용되었는데, 한국 문학에서는 김동리의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가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망루> 또한 이러한 계보를 잇고 있다. 저항 방식의 갈등을 도입한 것은 <망루>의 두 번째 미덕이다. 이로써 작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장편 분량을 감당할 수 있는 서사 확보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망루>의 세 번째 미덕은 '재림 예수'를 불러내는 방식에 있다. 데리다 식으로 얘기하자면, 재림 예수는 체제의 모순 위에서 출몰하여 체제 너머를 환기시키는 존재다(<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러므로 체제가 균열하며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면 예수는 언제고 귀환할 터이다.

하지만 <햄릿>의 유령이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쓴 까닭에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곤란한 것처럼, 재림 예수의 정체를 그 누구도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렇게 믿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재림 예수는 시간 위를 미끄러지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뿐 실체는 언제나 유보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망루>에 등장하는 재림 예수 역시 마지막까지 그 정체가 규정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작품에서는 그 가능성에 절박하게 매달려 "재림 예수는 누구의 것"인가 묻는 사람들이 재림 예수의 형상을 만들어 낸 양상으로 전개되어 있다(230쪽). 이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분명하다. 침묵하는 신을 향해 절규하는 그 절절한 호소가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의 처절함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다. 다음 단락은 비장한 결의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망루에 오른 인물의 내면에서 울리는 발언이다.

당신이 정녕 신의 아들이라면, 만물의 창조자라면 이 땅에 일어나는 당신의 피조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짓밟는 이 잔혹한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마라. 거침없이 생생한 분노의 응어리를 한 줌도 없이 죄다 쏟아 내어라. 당신이 지은 피조물들의 이 가혹한 잔인함을 저주하고 침을 뱉어라.

내가 왜 이들을 만들었는지, 그 돌이킬 수 없는 창조 행위를 향한 끝없는 후회와 번민의 탄식을 게워 내어라. 그 분노의 화마에 내 한 몸 휘감겨도 상관없다. 이 악의 구조를 갈기갈기 찢어낼 수만 있다면 창조주의 심판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지옥 불구덩이라도 두렵지 않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쏟아 부어라.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282쪽)

이러한 세 가지 미덕을 근거로 하여 나는 <망루>가 잘 된 소설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이 너무 술술 잘 읽힌다는 사실이다. 추천사에서 손석춘이 "첫 장을 펼치면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문제작"이라고 긍정하고, 장석주가 "빠른 장면 전환"을 덕성으로 꼽는 관점과는 다소 입장이 다른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부류의 소설은 구원에 관한 묵직한 성찰을 독자에게 남겨둘 수 있을 때 완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하다. 그런데 빠른 전개가 성찰의 여지를 제공하는 데 방해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다른 소설에서라면 장점으로 꼽아야 할 사항을 오히려 아쉽다고 판단하는 까닭이다.

사카리(단검의 헬라어 어원. 열심당원을 상징하는 상징물)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제국과 적극적으로 맞서되, 새로운 로마 제국의 노예들에 대해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는 경지로까지 인간은 어떻게 올라설 수 있을까(누가복음 6:35).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벌써 그 길을 나선 독자들이 있다면 내가 느낀 아쉬움은 한낱 기우로 굴러 떨어져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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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도쿄의 진구(神宮) 야구장. 29세의 청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외야에 앉아 야쿠르트와 히로시마의 경기를 관전하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찰나였다. '소설을 쓰고 싶다'. 그 강렬한 욕구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하늘에서 깃털이 내려와 앉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 들어섰다고 한다.

학생 시절 '1968년'을 경험하고 이른 결혼을 한 후엔, 생활비를 벌기 위해 20대의 대부분을 육체노동으로 보내야 했던 그였다. 그때까지 소설가가 될 생각은커녕, 자신에게 소설을 쓸 능력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던 그는, 이듬해 첫 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발표하고 '소설가'가 된다. 1979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작이었다.

그의 등장은 일본 문학계에 강렬한 신선함과 불편한 이질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하루키에게 군조(群像)신인문학상을 안겨준 일본의 문단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지게 될 질문을 품게 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인가'. 한눈에도 미국 문학의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번역체에 가까운 문체, 일본 문학의 전통을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의 전개, 지극히 사적인 감수성과 세계관은 분명 기존의 '쇼와(昭和) 문학' 혹은 '전후(戰後) 문학'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흔히들 제 소설이 미국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미국 소설의 영향을 받으면 왜 안 되는 거지, 싶고요." (무라마키 하루키, 무라카미 류와의 대담집 <walk, don't run>, 1981년)

그렇게 하루키는, 1976년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등장한 무라카미 류(村上龍), 1980년에 데뷔한 <어쩐지 크리스털>(1980년대 한국에서 여러 종류의 해적판이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의 다나카 야스오(田中康夫) 등과 함께, 일본 근대 문학의 종말을 앞당긴 '새로운 문학 세대'로 분류되며 문단의 주목과 외면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 하루키는 <1973년의 핀볼>(1980년), <양을 쫓는 모험>(1982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년)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문단의 평가는 여전히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기존의 문학이 유지해온 경계를 거부하는 그의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추럴한' 문장은, 일종의 '서브컬처'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충성도 높은 독자층을 꾸준히 확보해갔다.


▲ 무라카미 하루키. ⓒ연합뉴스
그러던 '문제적 작가' 하루키의 소설가로서의 인생은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크게 변화하게 된다. 1987년, <상실의 시대> 즉 <노르웨이의 숲>이 출간된 것이다. 어떤 의미로든 그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기억될 이 작품은 상, 하권 합쳐 430여만 부가 팔려나갔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100% 연애 소설'(당시의 선전 문구였다)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와 문체, 그리고 그것들이 뿜어내는 '쿨함'에 열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루키의 책을 끼고 다녔다. 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패션이기도 했다. 하루키라는 이름은 그렇게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저널리즘'의 세계에 등장했다.

그러나 '하루키 현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 후편(어쩌면 본편)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국, 중국, 타이완 등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그의 소설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하루키 세대'라는 말이 생겨났고 타이완에서는 '비상(非常)무라카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무라카미광'이 출현했다.

일본 문학의 틀을 넘어 아시아로 확장된 1990년대의 '하루키 현상'을 보면서, 많은 일본인들은 '그들은 왜 하루키에 열광하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에서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로 제목을 바꿔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아시아에서의 하루키 현상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분석들이 '하루키 현상'의 역사적 맥락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 냉전 체제의 붕괴, 자본주의 시스템의 글로벌화 등에 주목했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바뀌거나 사라지거나 무너지던 때였다. 그 안에서 허무와 불안, 상실감을 느낀 젊은 세대가 하루키의 소설이 세련되게 그려내는 이국적인(정확히는 미국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고, 국가나 가족이 아닌 오직 '나'로 시작해 '나'로 돌아오는, '타자'도 '외부'도 없는 하루키적 세계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1990년대를 거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루키 현상'은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며 일종의 '글로벌'한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양적인 문제는 아닌 듯하다. 소련이 붕괴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기에 유럽에서 그의 글이 가장 많이 팔려나간 곳은 러시아와 독일이었다. 하루키에 대해 미국의 젊은 세대가 열광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역시 '9·11' 이후였다. 즉 'HARUKI MURAKAMI'의 소비는 전 세계적으로 전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상실감'을 동력으로 하고 있는 문화 현상인 것이다.

"1993년부터 95년 사이만 해도 하루키 씨의 강연이 열린 건 미국 각 대학에 있는 일문학과가 초청한 15~40여 명 정도의 조촐한 모임이었어요. (…) 그랬던 것이 작년(2005년) MIT에서의 강연에서는, 500명 규모 강당이었는데 1300여 명이 되돌아갔어요. 그래서 하버드대에서는 일부러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을 마련했는데, 역시 500여 명이 입장하지 못했죠. 믿기지 않는 변화였어요." (제이 루빈(Jay Rubin), <세계는 하루키를 어떻게 읽는가>, 2006년)

그렇게 20여 년간 세계 곳곳에서 '이즘(ism)'으로, '패션'으로, '라이프스타일'로 소비되어온 하루키의 위상은 다시 일본으로 역수입되었다. 1989년 이후 20년 만에 판매 수입이 2조 엔 아래로 내려앉은 2009년 출판계의 불황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문화 현상'이었다.

옴진리교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을 테마로 한 <1Q84> 1, 2권은 한 해 동안 224만 부가 팔려 나갔다. 올해 발간된 3권 역시 기록적인 판매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2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고르게 분포된 독자층은 그에게 '국민 작가'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30년 전, 이전에 없던 이질감을 안겨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탈일본화'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HARUKI MURAKAMI'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지금 일본인 작가로서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동아시아와 유럽=미국, 양 문화권을 이어줄 수 있는 연결 지점 같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 한 사람의 일본인 작가로서 주어진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몽키 비즈니스>, 2009년)

오랫동안, 한국과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작가는 하루키'라는 말은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금기어'에 가까웠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하루키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세계관에 공감할 수 없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인가'라는 질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30년 전 던져진 그 질문은, 단순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기성 문학계가 새내기 젊은 작가에게 던진 꼴사나운 질문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문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자 문학이 가지는 사회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루키의 소설이 그 문학의 경계 밖으로 내밀리지도, 안으로 끌어당겨지지도 않은 채 '방치'되어 온 것 역시 사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HARUKI MURAKAMI'가 되고, '문제적 작가'에서 '국민적 작가'로 '격상'되는 사이에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하루키의 소설과 '대면'하는 비평가들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비아냥거림이 아닌 신랄한 비판이, 어정쩡한 외면이 아닌 성실한 비판이 하루키를 읽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은 2000년대 이후에 특히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일본 문학자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가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상처받은 자들에 대한 치유와 재생이 아닌 독자들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리는 역사 은폐"라고 정면으로 비판한 것은 짧은 감상평이 아닌 성실한 한 권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통해서였다. 대표적인 하루키 비평가인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나 카와무라 미나토(川村湊)와 같이 하루키의 작품 세계를 꼼꼼히 분석하고 비판하는 비평가 역시 늘고 있다.

"이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태도를 '일본적(문학적) 스노비즘(snobbism : 속물근성)'이라고 부르는 건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본질적인 갈등이나 대립, 대결은 배제된 채, '공허한 형식적 게임'으로서의 이야기 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1990년대 세계의 글로벌라이제이션 경제와 함께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인 붐을 불러일으킨 건, 이러한 '공허한 형식적 게임'으로서의 글로벌 시장 경제가 세계를 석권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카와무라 미나토(川村湊), <무라카미 하루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06년)


▲ <1Q84>(전3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1Q84>가 출간된 2009년, 한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작가의 역할이란, 원리주의나 신화성 같은 것들에 대항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며 "지금과 같은 시대이기 때문에 더더욱 이야기가 힘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1995년에 일어난 옴진리교 사건에 충격을 받은 그는, 1년 9개월간 사건의 피해자와 관계자 62명의 인터뷰를 토대로 완성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1997년)와 교단의 신자 8명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 <약속된 장소에서>(1998년)를 엮어 냈었다. 그 경험들을 녹여낸 <1Q84>는, 현실에 존재하는 (역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압도적인 폭력'에 대한 하루키식 대항인 셈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일본 근대 문학은 죽었다"고 지목한 1980년대는 '하루키의 시대'가 시작된 그 80년대였다. 30년. '무라카미 하루키'가 'HARUKI MURAKAMI'가 되는 사이 그도 변했고 세상은 더 많이 변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은 '하루키의 소설은 문학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하고 있다.

일본의 문학은 하루키에 의해 죽었고, 하루키에 의해 여전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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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의 인류의 대부분이 그 존재를 몰랐던 아메리카 대륙은 몇몇 유럽인들에 의해 급작스레 세계사에 편입되었다. 그 땅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콜럼버스는 무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로 등극했다.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를 보면 알 수 있듯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기록은 여행과 여행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92년 10월 12일 오늘날 바하마 제도에 도착한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스페인 정복자들과 연대기 작가들, 가톨릭 수사들은 정복 사업의 과정과 아메리카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기록을 남겼고, 이후로도 황금이 넘쳐나는 엘도라도와 그 아류 전설이 수세기 동안 지속되며 유럽인들은 대서양을 건넜다.

과학 탐사가 유행하던 18~19세기에는 라콩다민, 알렉산더 폰 훔볼트, 찰스 다윈 등이 남아메리카를 여행하고 그 결과물을 발표해 당대 유럽 최고의 과학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을 꿈꾸던 낭만적 여행가들도 넘쳐났고, 심지어는 1856년 아르헨티나에 왔다가 파타고니아 원주민에게 붙잡혀 3년 넘게 혹독한 노예 생활을 한 프랑스인 오귀스트 귀나르(Auguste Guinnard)의 불행한 여행기도 있다.

이처럼 신대륙을 향한 유럽인의 부단한 발자국은 아메리카에 유럽을 심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두 대륙은 5세기가 넘도록 긴밀하게 인종과 문화, 지배와 피지배, 교역 관계를 이어왔다. 유럽과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 아메리카 대륙, 그 중에서도 특히 중남미에 대해 한국이 자신의 발과 눈으로 체험하고 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남이 수백 년간 축적해둔 자료를 피상적으로 가져다쓰며 그곳을 중남미라고 부를지, 남미라고 부를지,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를지조차 아직 논의해보지 못한 상태지만 어쨌든 몇 년 전부터 그곳으로 향하는 배낭 여행객이 넘치고, 방송사의 여행 다큐, 가벼운 여행 서적과 기행문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 <뜨거운 여행 : 체 게바라로 난 길>(박세열·손문상 지음, 텍스트 펴냄). ⓒ텍스트
<뜨거운 여행>(텍스트 펴냄)의 박세열, 손문상 두 저자도 크게는 중남미로 향하는 이런 한국인 대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체 게바라의 여행 루트를 따라 가며 체의 삶과 그가 바라보았던 라틴아메리카를 느끼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두 사람이 여행할 때 나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살고 있었고, 여행기가 업데이트되기를 기다리며 챙겨보았다.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하나로 묶여진 여행기를 펼치니 시간대는 조금 달랐지만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사람과 내가 동일한 공간에서 비슷한 체험을 공유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못 마셔봤다고 아쉬워 한 카페 토르토니(Café Tortoni)의 커피를 나는 몇 차례 마셔보는 행운을 누렸고(사실 그곳의 탱고 공연도 꽤 좋은데 커피보다 더 아쉬워해야할 부분이다!), 오물을 뿌린 뒤 도와주는 척 가방을 닦으며 돈을 훔치는 수법도 내가 당한 그대로다.

2006년 언젠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몬테비데오로 가는 배를 타러 부두에 가다 오물을 뒤집어썼는데 누군가가 나타나 가방을 닦아주며 친절을 베풀었다. 너무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감사의 인사를 하며 그에게 아르헨티나 사람이냐고 물으니 아주 짧은 순간 동요하며 그렇다고 대답한다. 사태를 파악했을 땐 2인 1조였던 그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고, 그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씁쓸하지만 낯선 공간과 시간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책에서 언급된 바릴로체, 테무코, 아타카마 사막, 쿠스코, 마추피추 역시 한 번씩 가본 곳이라 친숙했다. 버스 여행 도중에 타이어가 터져서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기다린 것, 싼 버스를 탔다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일, 역마다 넘치는 숙소 호객꾼 등은 남미 여행의 필수 요소인지라 나 역시 익히 경험한 바였다.

여행기를 읽다보니 칠레에 대한 몇몇 애매모호한 정보들이 눈에 뜨인다. 그냥 지나치기 보다는 명확히 하는 게 낫겠다 싶다. 우선 마푸체(mapuche) 원주민의 명칭에 대한 부분인데,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푸체 원주민이 사는 곳을 아라우코(Arauco)라고 명명했고 거기에서 아라우카노(araucano)라는 이름이 나왔지만 원주민들은 스스로를 '땅의 사람들'이라는 뜻의 마푸체라 부르며, 스페인 사람들이 붙인 이름을 거부해왔다. 현재는 지명 아라우코가 남아있지만 일상과 학술 용어에서 마푸체라는 이름이 거의 정착했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한편, 칠레 독립기와 그 이후 엘리트들이 유럽 문화를 지향한 탓에 칠레 문화의 혼혈성을 부정해왔고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원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칠레인과 마푸체는 서로 다른 정체성 속에서 항상 갈등의 소지를 갖고 있다. 2010년 8월 현재에도 마푸체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마푸체 원주민 그룹이 거의 50일째 단식 농성을 하는 실정이다.

책에서는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는 칠레의 초대 대통령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그는 아르헨티나의 산마르틴 장군과 더불어 칠레 독립전쟁을 주도한 칠레 군인이자 정치가로 칠레 독립 이후 최고 통치권자를 지냈다. 칠레 공화국의 첫 대통령은 1826년 재임한 마누엘 블랑코 엔칼라다(Manuel Blanco Encalada)였다.

마지막으로 산티아고 근방의 해안도시 발파라이소(Valparaíso)의 뜻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아닌데, 아마 발파라이소의 여러 언덕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부르는 이름과 혼동한 것 같다. 발파라이소는 스페인 군인으로 칠레 땅을 밟은 후안 데 사아베드라가 자기 고향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붙인 이름으로, 이처럼 스페인 군인들이 고향의 지명, 인명을 따서 식민지의 새 도시 이름으로 삼는 경우는 매우 흔했다. 스페인 수호성인인 산티아고의 이름이 '산티아고 데 쿠바', '산티아고 데 칠레',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에 여러 차례 쓰인 것이 그 좋은 예다.

최근 몇 년 동안 남아메리카 여행기, 특히 쿠바 여행기나 사진집들을 다수 출간되었지만 살펴본 결과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대부분 사전 공부가 충분치 않아 한 사회를 읽어내는 관점이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스페인어를 못해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책도 있었다.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현지인과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니 당연히 부정확하고 모호한 주관적 해석이나 감상도 많았다. 교정 단계에서 스페인어 철자나 발음을 바로잡지 않은 책들도 적지 않다. <뜨거운 여행>은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을 취합해서 여행을 떠나 즉흥적이고 단순한 감상만을 담은 가벼운 여행기나 사진집보다는 훨씬 충실한 여행기이며, 그곳을 여행할 다음 사람들을 위해 사물과 지명의 이름을 스페인어로 병기해두는 수고가 돋보인다.

너무 넓고 다양한 중남미를 다 가볼 수 없기에 '체 게바라의 여행 루트'라는 다소 자극적인 선택을 했지만 두 저자는 이 여행을 통해 중남미 사회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과 틀을 얻게 되었다. 콜럼버스 이전 원주민 문명, 유럽의 식민화, 19세기 독립 이후의 권력 투쟁과 20세기 후반부의 사회주의 정치 실험까지 하나로 묶기엔 중남미가 얼마나 거대한 테마인지, 식민 문화의 유산으로 인해 서로 닮아있지만 또 얼마나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곳인지도 체감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중남미 좌파 운동을 통해서 중남미에 접근하려는 시도들이 있는데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역시 매우 협소해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여행기에서 공감되고 높이 사고 싶은 점은 여행지 곳곳에서 아시아와 아시아인에 대한 몰이해를 체감하고 그것을 꽤 솔직히 기술한 점이었다. 우리가 중남미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더 잘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나 자각은 있지만 반대로 중남미의 아시아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라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중남미가 아시아와 역사적 맥락을 거의 공유하지 못한 까닭에 아시아와 아시아인들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다. 한국인이 어설픈 이국취향으로 중남미를 보는 것도, 이제 막 유럽과 미국의 영향력을 조금씩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봐야하는 입장인 중남미가 아시아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도 앞으로 시간과 정성을 더 들여야 하는 문제다.

마지막으로 정보 하나를 덧붙이자면, 두 사람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서 닭곰탕이라고 명명한 음식은 칠레의 가장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인 닭수프 '카수엘라 데 아베'(Cazuela de av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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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상을 해보자. 나는 작가다. 문학과 현실, 그리고 역사에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작품을 발표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땀이 보답 받지 못하는 사회에 분노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감싸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해 왔다. 그렇지만 지쳤는지도 모른다. 예순 넘어서까지 여전히 현실 참여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적한 곳에 들어왔다. 의미는 있다. 회고와 성찰의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까.

그 때 나를 문학에 발 딛게 하고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이끌었던, 존경하는 문학 선생님이 노구를 이끌고 찾아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좋았던 시절을 주제로 삼을 수밖에 없을 터다. 물론 상승의 시기는 오래 걸렸지만, 전락의 시기는 극적으로 짧았다. 그러기에 비장하지도 않았다. "우스운 익살로 가득 찬 험악한 불행"이 주제어가 될 법하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노스승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올 때에는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들려주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남자이고 고령이다. '육일'(六日)야화로 만족해야 했다. 스승은 에둘러, 다시 기어들어간 고치에서 나와 제자가 현실에 발언하기를 촉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기억해야 할 것이 많고, 안타까워해야할 일이 수두룩하고, 깨우쳐야 할 것이 즐비하다고 말이다.


▲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필립 로스 지음, 양선아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기지 않았던가.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게 듣고 나서 한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양선아 옮김, 새물결 펴냄)가 꼭 그런 작품이라 여기면 된다.

스승과 제자가 화제에 올린 문제적 인물은, 스승의 동생인 아이라다. 그는 '라디오 스타'다. 링컨을 멋들어지게 연기해 대중의 환호를 샀다. 그가 다시 화제에 오른 것은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인 이브 프레임과 결혼하면서다. 도시 빈민의 아들로 한때 공장 노동자였고 부두 근로자였던 사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로 이만한 것은 없으리라.

파국은 둘이 서로를 원했던 이유와 미친 시대 때문에 일어났다. 그리고 두 가지를 묶어주는 거멀못은 아이라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에 있다. 이 정도면 예측 가능해진다. 시대 배경이 매카시 광풍을 몰고 온 미국의 1950년대였다는 것을.

아이라는 "양심을 가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남근을 가진 공산주의자"였다. 형이 회고한 대로 "아름다운 여배우를 마누라로 삼고, 젊은 정부를 두고, 나이든 창녀와 놀아나고, 가족을 갖기를 열망하고, 양녀와 다투고, 쇼 비즈니스의 도시에서는 훌륭한 저택에서 살고, 벽지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한편으론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만들고 싶어 소란 피우는" 모순 덩어리였다. 또한, 그는 "반복과 과장된 수사학적 표현, 공격적인 태도, 무자비한 어투의 연설"로 지칠 줄 모르는 적개심을 표출했고 지성을 모욕했으며 공산당의 공식 정책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선동가였다. 그는 야수였다.

이브 프레임은 왜 아이라와 결혼했을까? 그가 어린 시절 살인을 저질렀던 것도 알았고, 급진적인 사상을 품고 있다는 것도 짐작했으면서 말이다. 그녀는 "짐승을 원했어. 누가 그녀를 더 잘 보호할 수 있겠나? 짐승과 함께라면 그녀는 안전"했다. 그녀는 야수가 있어야 빛나는 미녀였다. 철없는 시절 함께 줄행랑쳤던 남자도, 게이인 당대 최고의 연기자도, 돈과 몸을 다 빼앗겼던 사기꾼도 야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아이라가 자신과 애증 관계에 놓여 있는 딸도 보호해주길 바랐다는 것이다.

잘못된 만남은 재앙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갖은 갈등과 위기 속에서도 어렵사리 버텨오던 부부 관계는 아이라의 바람기 때문에 깨지고 만다. 나이 많은 마사지 걸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고, 이에 자극받은 이브가, 정치적 출세를 노리던 매카시 일파의 선동 속에, 아이라의 사상과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낸다. 그 책이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니, 아이라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몰락하고 만다. 정신병원에 갇히고, 폐광에서 안내자 역할로 인생을 마감한다. 물론, 아이라도 복수했다. 이브의 숨겨진 과거사를 폭로했던 것이다. 이전투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필립 로스는 왜 이 이야기를 썼을까? 나는 경청하고 스승은 장광설을 떠벌이는 형식이라 결코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읽는 이를 흡입하는 힘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을 관통하는 열쇳말이 극단이라 그런 듯싶다.

아이라도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한 극단이다. 이브는 화려한 상류층의 삶을 살고 있으나 내상(內傷)이 너무 심해 썩은 내가 물씬 풍기는 또 다른 극단이다. 이들의 불화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누린 집단은 자유와 민주의 정신을 훼손한 최악의 극단이다. 이 극단의 충돌은 숱한 상처를 안겼다.

아이라의 형도 교사직을 잃고 진공청소기를 파는 영업 사원으로 전전해야 했다. 아이라와 이브도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 당했다. 이것에 주목하자는 것일까? 미친 시대가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가 말이다. 그러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작가는 이들을 이용해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한 그랜트 부부를 정성껏 묘사하고 있다. 비록 주변 정치인들이 부침을 겪지만, 이들은 시쳇말로 잘 나갔다. 작품을 읽으며 허망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히,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한 시대를 광기로 덧칠했던 이들이 총총히 별이 되어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퇴행적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매카시즘을 열렬하게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라의 이중성을 폭로해 급진주의의 어두운 내부를 까발리기는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필립 로스는 노스승도 스스로 실패한 삶이었던 양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을 지지한다. 그는 한시대의 양심을 지키면서도 중용의 길을 가려 무진장 애썼다. "종교, 이념,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으며 "교사의 노동에 대한 존경과 적절한 보수, 기타 등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나의 정치적인 신념은 학교 제도 안에서 영어 교사가 된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마녀 사냥꾼들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교원노조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줄 안다. "그저 돈만 밝히는 조직이 되어 버렸어. 돈, 그거면 다야,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은 가장 나중 일이 돼 버렸"기 때문이란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가려 애쓰며, 그 대가로 치러야 하는 희생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노교사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 희망이 아닐까.

추문과 폭로, 그리고 파멸로 점철된 소설 속에서 만난, 내 마음 속의 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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