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폭발했다. 승객과 행인 1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해결책으로 120대 버스의 운행을 중지한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어느 버스인지는 알 수 없다. 다음날도 버스는 여전히 시내를 오간다. 버스 안에는 평소만큼의 승객이 앉거나 서 있다. 무심한 그들의 표정이 반문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10대는 고달프다. 적어도 19세기 이후에는 항상 그랬다. 주지하듯이 청소년이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만들어진 때는 19세기이다. 그 이후 청소년은 항상 착취당하고 배제되어 왔다. 당장 성인보다 낮은 임금을 감수해야 했고 청소년 금지 구역을 설정하면 가지 말아야 했다. 민주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투표는 할 수 없었다.

때로 그들은 청년 문화를 만들어 저항했다. 효과는 거의 없었다. 아니 효과가 있기는 했다. 10대가 입던 옷이 유행 아이템이 되고 10대가 듣던 음악이 차트를 장악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여전히 그들은 투표권 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제한된 공간을 어슬렁거려야 한다. 이제 저항은 포기한 것 같다. 남은 것은 그저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는 것 뿐. 그래서 어쩌라고?

모처럼 만화책을 보았다. 학습 만화도 아닌데 아직도 만화책을 내는 출판사가 있다니 신기했다. 그것도 잡지나 인터넷 연재를 통해 검증되지도 않은 만화를! 마찬가지로 연재도 하지 않고 바로 책을 내는 만화가 역시 신기하다. 알량한 인세로 노동비나 뽑을 수 있을까? 수채화 작업을 하느라 고급 물감을 샀다고 한다. 저런, 물감 값은 따로 안줄 텐데…….


▲ <울기엔 좀 애매한>(최규석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울기엔 좀 애매한>(최규석 지음, 사계절 펴냄)은 제목처럼 좀 애매한 만화이다. 수채화지만 '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다운' 그림은 결코 아니다. 수채화 물감이 번진 것처럼 펑퍼짐한 모습의 주인공은 도무지 우리가 기대하는 '만화의 주인공'을 닮지 않았다. 마치 이름은 원빈이지만 원빈과 전혀 닮지 않았듯이.

원빈은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지만 이혼 후 분식집을 하는 엄마에게는 학원비가 없다. 매일 만화만 그려대는 아들을 보며 고민하던 엄마는 취한 김에 큰 맘 먹고 아들을 학원에 등록시킨다. 수강생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서 만화나 보며 자란 아이들이다. 그들은 모두 만화학과 진학을 꿈꾸고 있다.

그 다음엔? "가난한 싸이코 만화가"가 되어 가난한 사이코 만화가와 결혼한 후, 줄곧 만화만 보며 만화가를 꿈꾸게 될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지옥의 무한루프"(26쪽)이다. 빠져나갈 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기댈 것은 "어떻게든 되겠죠"(28쪽) 뿐이다.

그래서 공통의 목표를 지닌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모여 있지만 그들 사이에 연대는 형성되지 않는다. 라면을 먹으며 그저 죽어라고 그림을 그릴 뿐. 그들의 세계에 합류한 원빈도 생라면을 씹으며 그림 그리기에 매달린다. 겨울이 되었을 때 원빈은 마침내 대학 합격 통보를 받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 해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최규석은 이게 바로 우리 사회 10대의 삶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사회의 10대는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온갖 제약을 받으면서도 그 대가로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자. 최저 임금마저 갈취당하고 공모전 부정, 입시 부정에 동원되며 성인의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다. 대도시 유흥가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입시 학원의 모습은 주차한 트럭의 바퀴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길고양이의 모습만큼이나 위태롭다.

오래 전 닐 포스트만은 <어린이의 소멸(The Disappearance of Childhood)>(Vintage Books, 1982)에서 텔레비전의 영향으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가는 미국 어린이의 현실을 개탄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10대는 어른의 삶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10대는 힘들다. 재능과 열정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사회는 얘기하지만 막상 날아오르려 할 때 사회는 대학 등록금 한 번 대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난한 아이의 재능과 열정은 도둑맞기도 한다. 그런 현실 앞에서 10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일 뿐.

문제는 그들에게 돌파구가 없다는 점이다. 최규석이 토로하듯이 성인이라고 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저 삽 한 자루 든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지금은 원치 않는 "삽질"에 동원되고 있기도 하다. 싫어도 할 수 없다. 정리 해고가, 비정규직의 불안한 생활이, 노후 대비가 그들을 압박한다. 간신히 붙어있는 다고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떨치고 나올 용기는 없다. "착한 사람 위해서 고생하면 안 힘들어"(15쪽)라고 자위하며 오늘도 그들은 삽질에 매달린다.

10대 역시 그런 성인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10대에게 성인의 삶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10대는 스스로의 삶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어울리지 않게 "쏘 쿨"한 존재는 그런 배경에서 출현한다. "그런 걸로 상처받는 성격은 아닌데… 익숙하달까"(64쪽) 울기엔 좀 애매하다는 것은 곧 울 기회나 욕구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그들은 공감의 능력을 퇴화시키며 자기 안으로 침잠되어 간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이다.

최규석은 수채화의 번짐을 가로막는 뚜렷한 펜 선으로 10대의 세계를 단절시키는 날카로운 경계선을 표현한다. <울기엔 좀 애매한>을 보며 나는 오래 전 보았던 오세영의 <부자의 그림일기>(글논그림밭 펴냄)를 떠올린다. 두 만화의 스타일은 매우 다르지만 둘 다 정성이 깃든 그림이라는 점이 한 가지 이유이다.

좀 더 중요한 이유는 부자와 원빈의 공통점이다. 부자가 부자가 아니듯이 원빈은 원빈이 아니다. 그동안 달라진 것도 있다. 추상적으로 부자를 꿈꾸는 것에 비해 연예인 원빈을 꿈꾸는 것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물론 꿈이 구체화되었다고 실현이 더 쉬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부자가 부자가 되지 못했듯이 원빈도 원빈이 되지 못 할 것이다. 그 때도 지금도 꿈은 그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우리 출판 만화의 리얼리즘 계보를 이어간다. 리얼리즘 만화가 단행본 만화로 주로 나오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만화의 주류와 맞지 않고 상업성이 거의 없다는 것. 출판에도 온갖 고난이 뒤따른다. 운 좋게 현실 감각 없는 출판사를 만나야 한다.

최규석은 요행히 출판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그건 그냥 원빈이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독자적인 세계를 이어 나갈 수 있으려면 등록금 마련이라는 진짜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울기엔 좀 애매한>의 판매량이 그것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 최규석이 끝내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면 당분간 또 리얼리즘 만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리얼리즘에는 항상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긴 출구가 존재한다면 이미 리얼리즘이 아니리라. 다만 리얼리즘은 희망할 뿐이다. 이것이 혹시 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원빈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내 울음을 터뜨린다. 사실 생뚱맞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등록을 못하는 것이 울만한 사안인가? 같은 이유로 재수를 했던 은수의 경험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오버질'이다.

그러나 최규석은 마지막 순간에는 오버질도 허용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공감이다. 울음이라는 날 것의 감정 표출 앞에서 참았던 울음을 같이 터뜨릴 수 있다면 그 다음도 가능하지 않을까? 10대를 위해서도 만화가를 위해서도 최규석은 함께 울음 터뜨려 줄 것을 호소한다.

안타깝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어차피 만화인 것을…. 안 되면 그냥 애매한 표정 지으면 되지 뭐. 아직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어두운 이야기를 유쾌하게 감싸주는 가벼운 농담들은 체념일까 아니면 낙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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