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핵에 홀렸다.

지난 1월 믿을 수 없는 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을 통해서 발표되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발표한 이 결과를 보면, "원자력 발전소가 필요하다"고 답한 응답자가 93%에 달했다. 원자력 발전소 수출을 성사시켰다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호들갑을 떤 뒤였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핵'에 대한 이런 열광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러는 동안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광화문에서 총질을 하는 장면을 찍어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테러리스트들이 서울 도심을 초토화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수단은 바로 북한에서 몰래 들여온 핵무기다. 이런 드라마의 설정이 낯설지 않을 만큼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핵전쟁의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다.

이렇게 핵에 홀린,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주목해야할 책이 나왔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본문만 1000쪽에 가까운 이 책은 원자폭탄을 최초로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년)의 삶을 다룬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미국으로 물리학의 중심을 옮겨온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개발의 전 과정을 지휘한 당사자다. 그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나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찬사를 받지만, 결국 자신이 세상에 내놓은 핵무기에 대한 열렬한 반대자로 변신한다.

냉전의 시대에 소련과 핵 경쟁을 진행 중이던 미국에서 이런 오펜하이머는 희생양이 되었다.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그는 반역자로 몰렸으며, 1954년 치욕의 청문회 이후로 역사 속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 청문회를 둘러싼 상황은 과학과 정치의 관계,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 책은 이 전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한 세기 전 과학자의 삶을 살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이라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무릎을 칠 것이다.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과학자의 삶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틀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의 삶 속에서 지금 우리를 좌지우지하는 많은 것이 이미 '결정'되었다.

만약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그 때 그 사람들이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달랐으리라. 이런 아쉬움은 다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앞으로의 세상의 모습도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 중 한 명인 미국 터프츠 대학교 교수 마틴 셔윈과 이메일로 의견을 나눴다. 대학에서 영문학, 미국사를 가르치는 그는 <파괴된 세계 : 히로시마와 그 유산들(A World Destroyed : Hiroshima and its Legacies)>(1975년, 1987년, 2003년)의 저자로 미국 핵 개발 역사의 권위자다.


▲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인류의 역사는 이날을 기점으로 또 한 번 바뀌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wikipedia.org

21세기에 오펜하이머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프레시안 : 25년 동안 오펜하이머의 삶에 집중했다. 그의 삶에 관한 이런 방대한 평전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셔윈 : 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원자폭탄이 개발되고 그것이 히로시마에 투하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한 <파괴된 세계 : 히로시마와 그 유산들>을 1975년에 펴냈다. 25년간 계속해서 판을 거듭해서 나오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나는 오펜하이머의 글을 여러 차례 읽고 또 인용했다.

오펜하이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삶이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 있는 주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과학 정책, 대공황,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 원자폭탄 프로젝트, 핵확산 반대 운동,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매카시즘과 마녀 사냥, 미국 정부의 비밀 정책의 이중성, 오펜하이머의 믿을 수 없이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격 등….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오펜하이머의 삶 전체를 다룬 평전이 없었다. 기존의 책들은 오펜하이머 개인과 정치의 관계를 누락한 채 전쟁과 그것의 폐단에만 초점을 맞췄다. 더구나 그가 자기 안의 악마와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완전히 빠뜨렸다. 나는 그를 삶 전체와 많은 일화를 통해서 이해하고 싶었다.

프레시안 : 21세기에 오펜하이머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셔윈 : 이런 훌륭한 질문에 어떻게 간단히 답해야 할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펜하이머의 승리와 좌절이 미국의 대외 또 국내 정책의 원형이라는 사실이다. 오펜하이머가 산파 역할을 한 원자폭탄은 전 세계에 걸친 핵무기 경쟁 및 핵 확산을 가져왔다.

미국 국내 정치에 초점을 맞춰보면, 내가 '신공화당'으로 규정한 이들이 주도하는 '깅그리치 국회'가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우파이면서, 정치적으로는 신파시즘에 가까운 요소를 갖는 무책임한 정치 세력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1953~54년 오펜하이머의 명성을 파괴하고자 조직되었던 음모와 다를 게 없다.

프레시안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외에도 2000년대 들어서 오펜하이머에 대한 연구가 크게 늘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기밀 해제된 문서 때문인가?

셔윈 : 앞에서 언급했듯이 오펜하이머의 삶은 우리 시대가 꼭 다뤄야할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밀 해제된 문서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비롯한 오펜하이머 연구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오펜하이머에 대한 연구가 늘어난 다른 이유를 하나 더 언급하자면, 바로 이 책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를 연구하는) 동료들은 내가 이 평전을 끝낼 수 있을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1979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2005년까지 출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5년을 넘게 오펜하이머에 매달린 것이다. 그런 더딘 작업이 (오펜하이머에 관심을 둔) 동료를 자극하는 신호를 보냈을 수도 있다.

원자폭탄 만들기, 오펜하이머의 선택은 옳았나?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가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원자폭탄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역사의 한 변수가 되었다. 원자폭탄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순식간에 자신을 절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들 얘기하지만, 만약 1920~30년대의 물리학자들이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숙고했다면, 그래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데 좀 더 신중했다면, 오펜하이머의 삶은 물론 이후의 세계사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셔윈 :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런 실제로 있었던 일과 반대되는 상황을 가정해보는 일은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 어떤 결정도, 혹은 인류의 결정에 따라서 일어난 어떤 사건도 필연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항상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셔윈의 첫 번째 역사 법칙'으로 부르고 싶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1939년 과학자들이 핵분열을 발견한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이야말로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국과 영국의 과학자는 독일의 과학자가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그 당시 그들은 핵무기와 관련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떠올리기보다는 전쟁의 종언에 집착했다.

원자폭탄 만들기, 즉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의 사용에 반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오펜하이머는 그들에 속해 있지 않았다.

프레시안 : 당신이 언급했듯이, 오펜하이머와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에 나서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움직임이었다. 물론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독일에서 원자폭탄이 개발될 가능성은 낮았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오펜하이머와 동료들이 그런 정보로부터 차단되어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만들기에 동참하게 된 데는,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확인해보려는 호기심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이지도어 라비와 같은 과학자가 오펜하이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에 계속 주저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더욱더 그렇다.

셔윈 : 라비는 자문에 응하기만 하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를 거절한 특이한 경우다. 로버트 윌슨은 평화주의자였지만, 독일이 원자폭탄을 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원칙을 포기했다. (물론 전쟁 막바지에 그는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했다.) 물론 과학자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호기심이 강력한 동기가 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프레시안 : 앞의 질문과 같은 맥락이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 전쟁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의 사용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책에서 언급하다시피, 그 때 이미 일본은 항복하기 직전이었다. 이 책은 역시 정보의 차단을 중요한 이유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가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사용을 승인한 사실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개발한 원자폭탄이 과연 제대로 기능하는지 보고자 그것의 사용을 추인한 것은 아닐까?

셔윈 : 원자폭탄을 직접 일본에 투하하는 것을 놓고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원자폭탄이 전쟁을 종결짓는데 영향을 주리라 믿고 폭탄의 사용을 지지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는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서 폭탄의 사용에 동의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은 어땠을까?

트루먼은 원자폭탄 사용을 소련에 대한 효과적인 경고로 보았고, 또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여겼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은 (전부 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했다. 이 책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일이 중요해지기를 원했다.

히로시마, 오펜하이머의 양심을 깨우다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나서부터 그것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런 변화의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동료인 로버트 윌슨은 원자폭탄 실험을 보고 나서 큰 심리적 동요를 느낀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그런 심리적 동요를 보였던 것 같지는 않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가? 특별히 언급할 만한 일이 있는가?

셔윈 : 원자폭탄 때문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목격된 죽음과 파괴는 오펜하이머의 양심을 갑자기 움직이게 하였다. 아까도 말했듯이, 그는 원자폭탄 만들기가 전쟁을 끝내는 것처럼 중요한 영향을 주기를 원했다. 그런 생각은 일본을 상대로 원자폭탄을 사용하는 것을 추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원자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을 보고 나서는 오펜하이머와 동료는, 한스 베테가 수없이 되뇄듯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뭘 한 거지? 우리가 뭘 한 거야? 이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돼!" 히로시마는 (또 나가사키는)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전환적인 사건이었다.

1945년 9월,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 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10월에 대통령 트루먼에게 미국이 직면한 위험을 호소하면서 "내 손에 피가 묻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46년 1월, 원자력 에너지의 통제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데 참여했는데, 이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는 핵무기의 전면적인 철폐였다.


▲ 폭격 이후의 히로시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발생한 사망자 약 22만5000명 의 95% 이상이 민간인이었고, 대부분 여성이거나 어린이였다. 생존자의 절반 이상이 몇 달 내에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 ⓒ사이언스북스

그 때부터 '비밀 과학'이 시작되었다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둘러싼 모든 과학 활동이 비밀에 붙여지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과학 활동은 오펜하이머가 거부해온 바로 그런 모습대로 가고 있다. 정부, 기업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많은 과학자에게 비밀 서약은 필수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의 원조가 바로 오펜하이머의 맨해튼 프로젝트인데….

셔윈 : 정확히 지적이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 활동에서 비밀 서약이 필수인 최근의 흐름을 낳았다. 당신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프레시안 : 그나마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통제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과학자는 자신이 하는 연구가 어떤 프로젝트의 일부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과학자에게 윤리를 기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회의적이 된다.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는 자신의 과학 활동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지만, 로버트 윌슨을 제외하고는 윤리의 문제에 둔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 활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런 과학자들에게 과연 윤리의 문제에 민감하기를 기대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셔윈 : 로버트 윌슨은 윤리 문제를 깊이 숙고하면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한 최고의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오펜하이머의 평전이지 맨해튼 프로젝트의 역사가 아님을 기억하라. 원자폭탄 만들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과학자는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했다.

윌슨뿐만 아니라 레오 질라르드, 유진 라비노비티, 제임스 프랑크와 같은 이들이 그런 과학자다. 원자폭탄 사용에 반대했고 또 전후 반핵 운동에 헌신했던 이런 과학자의 활동을 기록한 완벽한 책은 앨리스 킴볼 스미스가 쓴 <위험과 희망(A Peril and A Hope : The Scientists' Movement in America, 1945~47)>이다. 이 책은 수십 년 전인 1965년에 나왔지만, 여전히 이 주제에 대한 최고의 연구다.

매카시즘의 광풍은 반복되는가?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의 삶은 두 가지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이면서 한 편으로는 '광풍의 희생양'이다. 특히 당신은 책 전체에 걸쳐서 '광풍의 희생양'으로서의 오펜하이머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당신이 이런 변호를 통해서 의도했던 것은 무엇인가? 혹시 상원의원 풀브라이트가 했던 이런 추모를 염두에 둔 것인가?

"이 특별한 천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합시다!"

셔윈 : 미국인은 미국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통치하는 나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1953~4년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오펜하이머를 침묵시키고, 미국의 핵 정책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을 파괴하고자 미국의 법을 위반했다. 이 책은 오펜하이머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극히 정의와 반대되는 일을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프레시안 : 이 책은 매카시즘과 그것을 용인한 당대의 미국 사회에 비판적이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은 그때와 다른가? 미국 안팎의 많은 지식인은 2000년대 들어서 미국이 보이는 모습에서 매카시즘의 모습을 연상한다.

셔윈 : 미국인에게 매카시즘 시기는 어둡고 위험한 시대로 간주된다. 그것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미국인의 양심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한 역사적 시각이 지배적인 한, 매카시즘의 광풍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싶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좋은 예이다. 당신의 지적처럼 부시 행정부와 매카시즘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한국어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표지에는 "대통령이 읽는 책"이라는 홍보 문구가 있다. 실제로 이 책이 퓰리처상을 받고 나서 전 미국 대통령 부시가 읽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셔윈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미국 판에는 102장의 사진이 있다. 부시가 (책을 읽었다면) 그 사진들이나 넘겨봤겠지….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은 읽었을 수도 있다.

프레시안 : 만약 부시가 당신에게 미국의 핵 정책 혹은 대외 정책에 대해서 자문을 요청했다면,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었나?

셔윈 : 5분 만에 대통령 집무실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전 대통령 부시가 핵무기에 대해서 제안한 거의 모든 것은 잘못됐고 위험했다.

사회주의에 끌린 오펜하이머…그 이유는?

프레시안 :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에 끌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20세기 초반의 많은 미국 혹은 서구의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끌린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셔윈 : 1930년대의 대공황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가장 최악의 모습으로 드러냈다. 이론적으로는, 반복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훨씬 정의롭고, 훨씬 이성적이며, 훨씬 더 효과적인 체제를 제안하는 것처럼 보였다. 덧붙여서, 당시 미국에서 공산당은 진보 조직의 최전선에 있었다.

미국 공산당은 인종 차별, 빈곤 문제, 노동운동, 보건의료, 사회복지 등 결국은 미국 시스템의 일부분이 된 거의 모든 선진적인 사회법의 제정을 위해서 맨 앞에서 싸웠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사회 정의에 관심이 있었던 오펜하이머와 같은 지식인이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에 끌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 이후 세대의 미국의 과학자 공동체는 대체로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들은 여전히 넓은 의미에서 왼쪽의 정치 성향-예를 들면 민주당-에 가까운가?

셔윈 : 나는 과학자 공동체가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가지는지 연구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만 지적하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보이는 과학자들의 모습을 당시의 과학자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1930~40년대 중요한 물리학자의 대다수가 (진보적인) 자유주의자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학자는 물리학자만큼은 아니었으며, 다수의 엔지니어는 정반대로 보수적이었다. 전후 냉전이 나타나면서 과학자 사회는 미국 사회처럼 정치적으로 진보, 보수 양편으로 분리되었다. 특히 냉전을 거치면서 미국 과학자 공동체의 일부가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는 일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은 1939년 9월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독일이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사이언스북스

"그는 내가 만났던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프레시안 : 이 책에서 오펜하이머는 과학 외에도 온갖 것에 관심을 둔 이른바 '두 문화'의 벽을 넘나드는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묘사된다. 오펜하이머 세대 이후에 그런 지식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당신은 오펜하이머와 같은 모습이 지향해야할 지식인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셔윈 : 오펜하이머는 흉내를 내기 어려운 사람이다. 오펜하이머는 특별한 존재였다.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한스 베테는 오펜하이머를 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내가 만났던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프레시안 : 그런 지식인이 오늘날에도 가능할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셔윈 : 오펜하이머와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갖춘 지식인은 오늘날에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우리는 오펜하이머를 등장하게 했던 환경을 잘 알고 있다. 그런 환경 혹은 그것과 비슷한 환경은 거의 반복될 수 없다.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는 단순히 폭넓은 교양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을 넘어선 사회, 국가, 문명의 문제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참여하는 지식인'이었다. 원자폭탄 만들기에 나선 것도 이런 지식인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과학자에게서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의 과학자는 자기 연구 외에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이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를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으로 부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이런 변화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셔윈 : 글쎄…. 나는 지식인의 모습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했듯이 오펜하이머는 그의 시대에서조차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질문들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이 훌륭한 평전이 나왔음에도, 오펜하이머의 삶을 둘러싼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탈고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무엇인가?

셔윈 : 서둘러서 오펜하이머에 대한 또 다른 책을 내놓으라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프레시안 : 오펜하이머의 삶에 대한 다른 평전이 나온다면, 특별히 더 주목했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가?

셔윈 : 누구든 그런 도전을 하라. 그러나 반드시 내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서 했던 것과는 다르면서도 더 흥미로운 질문을 물어야 할 것이다. 당신도 지적했듯이 아직도 오펜하이머의 삶에는 대답해야할 수많은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이 책이 좋은 평가를 받은 이후에 새로운 후속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셔윈 :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과 그것이 핵전쟁으로 이어질 뻔했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제목은 "아마겟돈을 건 도박(Gambling With Armageddon)"이다.

한반도와 핵폭탄…희망은 있다

프레시안 : 원자폭탄은 한국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 본토의 원자폭탄 공격은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해방을 불렀다. 그러나 그렇게 강대국에 의한 해방은 곧바로 분단으로 이어졌다. 결국, 전후 65년이 된 지금 한국은 전 세계에서 핵전쟁의 위험이 가장 높은 곳이다. 이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 어떻게 읽히기를 기대하나?

셔윈 : 지난 65년 동안 전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핵전쟁의 발발이라는 오펜하이머의 음울한 예측이 실현될 뻔한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사건은 1962년 10월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그 전에도 핵무기를 사용할 뻔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한반도가 그곳이다. 한국의 독자는 알겠지만, 한국전쟁 중에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진공해 오자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핵무기의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대통령 트루먼에게 요청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와 핵무기는 핵시대의 초창기부터 악연으로 엮여 있었다.

이런 악연은 1970년대에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갖추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포부와는 관계없이 그가 암살당하면서 끝났다.

지금은 또 다른 악연이 진행 중이다. 고립된 국가인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핵개발은 과학, 문화, 상업의 주류에서 고립되어 있고, 심지어 자국민을 먹여 살리는 데조차 실패한 국가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오펜하이머가 줄기차게 강조했듯이 핵무기의 전 세계적 확산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를 포함한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당부를 한다면….

셔윈 :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주장했듯이 핵무기의 철폐는 문명의 생존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선결 과제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되었으나, 핵 대결이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는 한반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오펜하이머가 전쟁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늦게 진행되고 있는 이런 현실을 본다면 개탄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제안했던 전 세계적인 핵무기 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펜하이머의 삶과 그의 절실한 고민은 누구보다도 한국의 독자에게 중요한 가치를 가질 것이다. 오는 11월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다. 그 때 한국의 독자를 직접 만나서 더 많은 의견을 나누고 싶다.

이런 셔윈의 당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삶터를 잿더미로 만들 뿐만 아니라 세계를 결딴낼 수 있는 핵에 홀려 비판적 성찰을 방기하는 우리의 모습은, 원자폭탄을 터뜨리는 실험에 성공하고서 오펜하이머의 동료 케네스 베인브리지가 내뱉었던 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개자식이야!(Now we're all sons-of-bitche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년 전 번역돼 좋은 반응을 얻은 <르몽드 세계사> 제1권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 지구적 이슈와 쟁점들'에 이어서 제2권 '세계 질서의 재편과 아프리카의 도전'이 책으로 나왔다.

원저 <아틀라스(Atlas) 2006>에 이어서 <아틀라스 2009>를 번역한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발행하는 <아틀라스> 시리즈는 그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바와 같이 '지도'를 곁들여 "우리 눈앞에서 격동하는 복잡한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지침서이다.

과거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재의 역사를 분석하고 전망을 내리는 어려운 작업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복잡하고 딱딱할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아틀라스> 시리즈가 프랑스는 물론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독자가 변화하는 세계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시리즈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복잡한 국제 문제를 그 분야 전분가들이 2쪽의 제한된 좁은 지면에 짧고 쉽게 설명한 글과, 문제를 일목요연하게 뚫어볼 수 있는 지도와 도표를 곁들인 것이 비결이다. 그래서 대학생이나 학교 교사, 세계 문제에 관심 있는 비전문 독자들이 독자층을 이루고 있다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평이다.


▲ <르몽드 세계사 2 : 세계 질서의 재편과 아프리카의 도전>(르몽드 디폴로마티크 기획, 최서연·이주영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르몽드 세계사 2 : 세계 질서의 재편과 아프리카의 도전>은 (1) 새로운 국제 역학 관계 (2) 세계를 보는 시각 (3) 에너지의 도전 (4) 계속되는 분쟁 (5) 전환점을 맞은 아프리카라는 다섯 개의 큰 주제 아래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주요 국제 문제 88개를 다루고 있다. 다섯 주제마다 덧붙여진 한국 필자의 글을 포함하면 총 93개의 문제를 포괄한다.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판된 200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고 9·11 테러가 일어난 지 8년, 그리고 미국 금융 위기 1년을 맞아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다. 이 격변기를 진단하고 처방을 찾은 책이 바로 이 <르몽드 세계사> 제2권이다. 이 책은 우리도 함께 겪고 있는 격동기를 현명하게 탈출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지침서가 될 수 있으라고 본다.

그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기와 처방을 다룬 정보가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의 미디어는 대부분 자국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정보와 처방으로 세계인이 고민하는 공동의 위기 탈출 해법을 제시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 정보들도 적지 않았다. 위기의 주범인 월스트리트의 자본주의 입장에서 문제를 봤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의 필자들은 우선 신자유주의자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지적 수준이나 이념면에서 자본주의 무조건 옹호론자보다는 훨씬 신뢰할 수 있는 학자나 저널리스트들이다. 이들을 선정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지금까지의 지적 정직성이 그것을 보증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 시리즈를 읽은 10여 개 국가 지식인들의 반응이 그것을 방증해 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틀라스의 필자들도 인간인 만큼 판단에 과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분석이나 전망을 받아들이는 데도 비판 정신은 놓지 말아야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정직성은 믿어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르몽드 세계사> 제2권을 꼼꼼히 읽고 느낀 소감은 2쪽의 아주 좁은 지면에 문제의 핵심과 해답을 잘 압축했다는 것이다. 건성으로지만 그래도 국제 문제를 반세기 가까이 지켜본 필자도 아틀라스를 읽고 배운 것이 많았고 머릿속의 혼란이 정리되었다. 국제 문제를 아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서 문제의 핵심을 재확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국제 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압축한 문제의 핵심과 전망을 기준으로 새롭게 국제 정치를 보는 훈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압축 요약해서 사용할 줄 모르면 방대한 자료가 자산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부피가 큰 자료는 요점과 핵심을 요약하지 않으면 실제로 사용할 수 없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반드시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 탓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긴 문장의 핵심 부분을 100자 이내로 줄이는 훈련을 시킨다. 또 대학 입학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도 긴 문장의 핵심 내용을 발췌 요약하게 하는 시험을 친다. 이 책은 불과 몇 분 안에 세계적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아 학생들이 내용을 압축하는 훈련의 모델로 삼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각 항목을 다룬 지면 끝에 참고할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소개하고 있는 것도 읽은 내용을 확인 보완할 기회를 주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배려다.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제시하는 것은 이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에 의례 따라붙는 하나의 관행이 돼 있다. 관련 사이트는 짧은 설명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가 문제를 좀 더 깊이 천착(穿鑿)하는데 아주 유익하다.

원서에는 지면 말미에 관련 사이트를 소개하고 있는데 번역판에는 그것을 권말의 '참고 문헌'에 한데 모아 놓아 이용하기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트가 프랑스어로 된 것이 많아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자에게는 별로 소용이 없으리라는 판단에서 그랬으리라고 이해는 하지만, 국제기구의 사이트는 영어로 된 것이 많고 프랑스어 사이트에서도 영문 설명을 추가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시리즈는 '지도'가 텍스트 못지않게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흔히 지도라고 하면 우리의 통념상 영토나 땅만을 생각하기 쉽다. 우리가 지도(地圖)라는 말을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지도를 뜻하는 아틀라스는 이제 더 이상 땅과 관련된 지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아틀라스는 아주 다양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한 사회의 보이지 않는 문화의 정치적 이념적 현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구상화하는데 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도의 새로운 이용에 있어 프랑스는 다른 나라보다 단연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이미 2003년부터 정치사회적 아틀라스를 제작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사회적 아틀라스"가 차츰 유행하기 시작해서 <지도 밑에 숨겨진 아틀라스>(Atlas dessous des cartes)와 <인간의 아틀라스>(Atlas des peuples)는 수십만 부가 판매됐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 같은 판매 현황이 아니라 모든 아틀라스 시리즈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이렇게 대중적인 큰 성공을 거두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3월호 '눈 땅 지도 제작자' 참고).

첫째 이유는 3개의 사건-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 2001년의 9·11테러, 2008년 10월 15일의 금융 공황-이 국제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세계적으로 경제, 사회, 정치, 이념 및 군사적 틀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이전의 세계를 보는 틀을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어떤 것은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냉전 시대의 양극 체제에서 1990년대의 미국 지배 시대로 이어지고 이제 다시 새로운 다극화 세계로 이전하고 있다. 이런 급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들은 현재 진행 중인 격변을 이해하는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르몽드 세계사>가 제시하는 지구적 시각이 아니면 이 격변을 설명하기 어렵다는데 공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지금 세계는 정보의 과잉 상태에 있다. 모든 사람은 과잉 정보를 얻고 있다. 양적으로 정보는 계속 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인터넷을 통해 얻는 정보는 뒤죽박죽 상태의 정보이다. 정보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럽다. 이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보의 위계를 설정하고 판단해서 정리하는 틀이 필요하다. <르몽드 세계사> 시리즈가 짧고 간결한 설명과 지도, 도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러한 뉴스의 위계화와 잔망의 틀을 제공하고 독자들이 이러한 시도에 만족하고 있다.

셋째, 우리는 지금 이미지(image) 시대에 살고 있다. 이미지 문화는 가장 젊은 세대가 앞으로 세계를 이해하는데 불가결한 도구 역할을 한다. <르몽드 세계사>의 '지도'는 "슈퍼 이미지"이다. 몇 센티미터의 지면에 많은 정보가 담긴 지도는 긴 글보다 더 효과적으로 쟁점의 열쇠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넷째 이유는 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국한된 이야기이지만 세계를 보는 거시적인 비전에 민감한 동시에 자기 분야의 전문가인 80여 명의 기고가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제작 팀 간에 의견과 토론-때로는 충돌하기도 했지만-을 통해 일관된 공동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이 책의 분석의 질과 권위를 높여준 것이다.

다섯 째 이유는 '지도'의 영향이다. 저널리스트들은 뜻이 명백한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해답을 내놓기 보다는 우회적인 또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얼버무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도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지도의 선과 색채는 "적당한" 것을 표현할 수 없다. 가부가 분명해야 한다. 지도가 독자의 판단을 분명하게 해주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르몽드 세계사>의 지도 제작자는 글로 쓰인 설명을 기계적으로 선과 색채로 옮기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선의 길이와 굵기 방향 및 크레용의 색채를 통해서 짧은 글로 설명이 충분치 않은 국제문제 해답의 간극을 직감적으로 메워주고 연결해 주는 기술자인 동시에 "예술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총 93편의 글에 지도와 도표가 300개 이상 사용되고 있으며 80여 명의 기고가에 지도 제작자가 7명이나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르몽드 세계사>가 지도의 역할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책을 읽을 때 텍스트 뿐 아니라 지도를 특별한 관심을 읽어야 각 항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 주고 싶다.

<르몽드 세계사>는 그 분석과 전망에 공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격변하는 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길라잡이가 될 수 있는 유익한 지침서라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2009년은 고려 조선의 천문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창립 700주년'인 동시에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천문의 해'였다.

이 땅에서는 고려 충선왕 때인 1308년 천문, 역법, 지리, 택일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을 통합한 서운관이 설립돼 600여 년 동안 지속한 결과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천문 유산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서운관의 전통은 1974년에 설립된 국립천문대를 거쳐서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 나온 <조선의 서운관(The Hall of Heavenly Records)>은 바로 이런 우리의 천문학을 재조명한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훌륭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중국 과학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조지프 니덤과 그의 동료들이 지난 1986년 오랜 연구 끝내 내놓은 역저이다.

이 책을 집필하고자 니덤과 그의 동료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중보문헌비고>와 같은 조선의 문헌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중 일부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해 혼천시계 등 일부 현존하는 유물을 직접 조사하는 열정을 보였다. 또 1936년에 출간된 연희전문학교 천문학과 교수 루퍼스의 <Korean Astronomy>와 그의 천문학사 관련 논문도 꼼꼼히 검토했다.

<조선의 서운관>의 집필에 한국의 연구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특히 전상운(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이 1977년 MIT에서 출간한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와 그가 개인 서신으로 제공한 자료는 니덤과 그의 동료들이 이 책을 내는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런 노력 끝에 나온 <조선의 서운관>은 조선의 각종 천문 의기와 과학 유물을 설명하는 내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각종 자료, 도표, 그림을 통해서 조선의 천문학의 전통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 동안 감춰져 있었던 조선의 각종 천문 의기에 대한 연구와 복원에 대한 관심이 활발해진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이다.

조선은 '지적 정체' 상태였다?


▲ <조선의 서운관>(조지프 니덤 지음, 이성규 옮김, 살림 펴냄). ⓒ살림
니덤 등은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통렬히 비판한다. 조선에 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진부한 인식은 조선이 무미건조한 신유교주의와 관료적 파벌주의가 초래한 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덤 등은 이러한 인식이 "서양 선교사와 일본 식민주의자의 이기적인 서술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에 서술된 활발한 과학 활동이 그 반박 증거로서, 이는 조선이 '지적(知的) 정체' 상태였다는 생각을 타파한다. 니덤은 이미 앞서 과학사의 기념비적인 저서로 꼽히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에서도 "중국 문화권에 속하는 모든 민족 중에서 한국인은 과학, 기계 기술, 의학에 가장 관심이 컸다"고 두 번이나 역설했었다.

니덤이 이렇게 조선의 과학을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천문학 때문이다. 한국의 천문학은 중국에서 전해진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었지만, 특히 세종대왕 때의 천문 의기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것에 한국적 변형을 가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천문학 전통에 이슬람의 기술이 결합된 독창적인 산물인 것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새로운 천문학 의기들을 제작하고자 엄청난 국고를 썼으며, 그 결과 니덤 등이 "1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 의기를 만들었다"고 단언할 만한 빛나는 과학 전통을 탄생시킨 것이다. 니덤 등이 새삼 조선의 천문학 전통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과학사적 의의 때문이었다.

빛나는 조선의 천문학

이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1장에서는 조선의 천문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중국 천문학의 전통 속에서 살피고 있다. 특히 이 장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천문 의기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천 과정을 겪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결과 세종대왕 때 천문학이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세종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18가지의 천문 의기의 목록을 제시한다. 다양한 종류의 해시계, 정교한 물시계가 포함돼 있는 이 목록의 유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니덤 등은 <세종실록>, <중보문헌비고> 등의 문헌 내용을 인용해서 천문 의기의 작동 원리를 논하고, 복원 모습까지 제시했다.

특히 자격루는 각종 문헌을 토대로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30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런 니덤 등의 노력에 호응해 최근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팀은 오랜 연구의 결과 자격루를 복원해 주목을 받았다. 현존하는 유물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의 서운관>이 복원 사업을 자극한 것이다.

1992년에 이 책을 접한 필자 역시 이런 자극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제시한 목록에 들어 있는 천문 의기 중 일부는 니덤 등의 주장이 부각되면서 폄하되는 것이 있어서 안타깝다.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의기인 측우기의 경우 13세기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니덤 등의 주장이 세계 학계에서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한 예이다.

3장에서는 문종에서 영조까지(1450∼1776년) 세종 후대 왕들이 천문 의기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논의하고 있다.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은 역법 '시헌력'이 도입되자, 조선 천문학은 세종 이후 또 한 차례 도약하는 기회를 맞는다. 이 책도 이 시기에 주목해 특히 효종, 헌종 시대의 천문 시계의 제작에 초점을 맞춘다.

니덤 등은 1669년 조선 현종 때 만든 송이영의 혼천시계를 동양의 의기 제작 전통과 서양의 시계 제작 기술을 합한 혁신으로 받아들이며 "동아시아 시계학 역사의 획기적 사건"이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시계 장치가 일본에서 제작된 시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니덤 등도 송이영의 혼천시계의 앞선 모델로 언급한 1957년 홍문관 최유지의 혼의는 사실상 작동 메커니즘이 송이영의 혼천시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구만옥, 김상혁 등 국내 학자의 연구를 통해서 여러 차례 입증되었다. 니덤 등이 관련 자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면서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과학사학자 이성규는 역자 후기에서 니덤의 주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어느 학자도 이에 학문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조선의 천문 유물에 대한 국내 학자의 연구 성과를 역자의 주를 통해서라도 소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살아난 조선의 과학기술

4장에서는 계속해서 송이영의 혼천시계를 자세히 설명한다. 국보 230호인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훼손된 상태인데, 이 책은 그 작동 원리를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충북대학교 천문의기복원연구실에서는 이 설명을 기초로 혼천시계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시행착오 끝에 2005년 9월에 작동 모델 제1호가 복원되었다

아래 [그림 1]은 <조선의 서운관>이 제시한 복원도이고, [그림 2]는 이것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런 복원 과정을 통해서 <조선의 서운관>에서 니덤 등이 가정한 작동 원리와 기계 정치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330년간 멈춰 있었던 조선의 찬란한 전통이 이 책을 계기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 [그림 1] 달의 삭망을 보여주는 니덤의 도식적 복원도(왼쪽). [그림 2] 니덤의 복원도를 토대로 작동 원리를 규명해 복원한 의기(오른쪽). ⓒ이용삼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니덤 등은 세밀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을 통해서 수많은 천문 의기의 복원도로 제시했다. 이제 그들이 일궈낸 여러 가설은 국내 학자의 철저한 연구를 통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과학을 밝혀낸 영국 학자의 노고와 이에 고무되기만 했지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지적한 역자의 질책에 답하는 길이리라.

다만 복원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또 다른 창작이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 시민들이 더 많은 응원과 지원을 보낸다면, 복원 연구를 하는 소수의 외로움이 덜할 것 같다. <조선의 서운관>을 더 많은 독자들이 읽고서, 조상의 천문 의기를 복원하려는 이런 노력에도 관심을 주기를 희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점을 중심으로 반지름이 다른 무한한 수의 원을 그릴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구체적 인간이든 추상적 인류든 삶 자체가 여행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자신이 선택하는 방향이 길이요, 제각각 발걸음을 내딛는 곳이 길이다. 그래서 길에는 양극단의 두 종류가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과 누군가 지나간 길이다.

사람들은 흔히 가지 않은 길을 선호하고 권장한다. 개성과 창의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제도화된 과정에서는 누구나 못 가서 안달인 탄탄대로를 고집하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일류 학교나 유명한 대기업이 그 예다. 지상에 난 물리적인 길에 한정하여 보면, 가지 않은 길은 탐험가나 모험가의 몫이다. 그 밖에 여행이라 부르는 모든 행위는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정수일 지음, 창비 펴냄)은 여행기다. 기왕에 존재하던 길을 답습한 뒤 여정에서 얻은 정보와 해석과 소회를 담은 글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문명 교류사의 한 장을 밝히는 여행기다. 인류의 발길이 동서를 교차하면서 형성해 놓은 무수한 문물과 사상과 습속의 반경을 통찰하듯 음미하여 정리한 학술적 보고서다.


▲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정수일 지음, 창비 펴냄). ⓒ창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보통의 문명 교류사 여행기가 아니다. 정수일의 문명 교류사 여행기다. 정수일은 일제 식민지 시절 연변에서 태어나 일본 패전 이후 중국 외교관을 지냈고, 평양에서 대학의 교단에 섰으며, 지금은 한국의 학자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집에서는 조선어를 사용하였고, 베이징 대학 이후 중국어를 일상어로 하는 공무원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러시아 어를 공부했고, 카이로 대학에 유학하여 아랍어를 통달했다. 게다가 영어, 불어, 독일어에 필요에 따라 익힌 타갈로그 어 등을 합치면,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언어 서넛에 요긴한 사항의 확인에 동원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는 일고여덟 이상이다. 그래서 그를 문명 교류학에 관한 한 파미르 고원 이동에서는 최고라고 하는 것이다.

정수일은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끊임없이 답사를 한다. 답사는 외견상 여행의 형식이어서, 이미 나 있는 길을 되풀이하여 걷는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길,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길, 무수한 물건과 감정과 행위가 교차한 길만 찾는다. 목적은 오직 하나, 다른 사람들은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보물을 찾는 일이다. 그 보물은 다이아몬드라 불러도 좋고 진주라 하여도 상관없다. 인류의 발걸음 속에서 문명 교류의 흔적을 체계화하고, 그 안에서 다시 지금의 우리와 나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초원의 실크로드를 다룬 이 책의 서문에서 스스로 초양노옥(草洋擄玉), 초원의 바다에서 문명의 주옥을 건져낸다고 밝힌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여행은 다르고, 여행기는 특별하다. 가장 오래된 길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찾는 기록이다.

문명 교류는 인류의 생명이 탄생한 이래 그 삶의 양식과 질을 드높이고 확장해 온 총체적 궤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어휘다. 까마득한 과거부터 살다 간 선대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를 개척할 후손의 모든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 자체가 문명 교류의 길이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길이 실크로드다. 실크로드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구체적 교역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교류에 기여하는 통로 자체를 일컫는 보통명사가 돼버렸다. 하늘의 실크로드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동서를 연결하는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세 가닥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인 육로, 즉 타클라마칸 주변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를 따라가는 길이 첫 번째다. 오아시스로의 위쪽 초원을 가로지르는 길과 배를 타야 가능한 바닷길이 나머지 둘이다. 이 책은 제목이 나타내듯 초원의 실크로드를 답파한 여행기다. 4년 전에 오아시스로 편(<실크로드 문명 기행>, 한겨레출판 펴냄)을 냈으니, 조만간 해상로 편이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원로 역시 크게 세 구간으로 구분한다. 책의 순서대로 말하면 중국 션양에서 시작하여 내몽고라고 부르는 네이멍구까지 돌아오는 대흥안령 구간, 칭기즈칸 제국의 중심에 해당하는 몽골 전역, 전장 1만㎞에 시간대가 일곱 번이나 바뀌는 광대한 시베리아 초원로다.

정수일은 이 책을 쓰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모두 43일 동안 여행하였다. 하지만 어디 그게 전부이기야 하겠는가. 진지한 학자의 발걸음은 횟수에 관계없이 반복하는 데서 관광객들과 차이가 난다. 정수일은 모든 답사로를 두 번째 이상 밟았다. 1952년 초가을 베이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처음 장거리 기차를 탔을 때(42쪽), 그로부터 6년 뒤 8월 카이로 대학 유학을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길에(21쪽), 30년 전 모스크바로 가던 도중 비행기의 불시착으로(456쪽) 모두 한 번 이상 들렀던 곳을 되새김질 하듯 다시 탐색하였다. 기묘하게도 그는 같은 장소를 거듭 찾을수록 새로운 것들을 발견해 내는 능력을 가졌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텐호프가 이름 붙인 이래 실크로드가 세계인의 관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을 전후하여 유럽의 탐험가들이 사막 주변의 유적을 발굴하면서부터다. 지난 세기 후반까지 일본에서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었던 분야가 실크로드였다. 그러다 어느새 그 열기는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실크로드가 살아 움직이는 거의 유일한 곳이 우리나라일지 모른다. 우리에겐 정수일이란 뛰어난 문명학자가 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독립한 학문으로 체계화를 시도한 뒤 (<씰크로드학>, 창비 펴냄 ) 계속 답사와 연구와 사색의 결과를 내놓고 있다.

독자를 시원한 초원의 길로 안내하는 이번 저서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여행기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여정에 따라 보고 듣고 만나는 문물과 사람에 관한 세밀한 기록이다. 대상에 대한 기술의 태도가 주지주의적이어서, 치밀한 만큼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직접 번역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창비 펴냄)가 그러하듯, 깨알 같은 글씨를 인내심으로 읽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이븐 바투타는 물론, 현장이나 마르코 폴로나 혜초의 여행기 모두 마찬가지다.

정수일의 실크로드학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보통의 실크로드 지도는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장안(시안)을 이으며, 중간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강조하는 정도다. 분명 무지 또는 게으름의 소치다. 길이 어찌하여 거기에 그칠 뿐이겠는가. 교류의 흔적이 있는데 길이 없을 리 없다. 울산과 경주 경계 부근의 괘릉 입구에는 신라 때 다녀간 페르시아 인의 석상이 있다. 정수일은 기존의 실크로드 지도를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걸쳐 다시 그렸다. 바로 한반도 확장설이다. 새 지도는 오아시스로뿐만 아니라 초원로와 해로에도 공통으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그의 답사 여행은 민족사의 복원 작업이며, 이번에 낸 책은 초원 실크로드의 한반도 확장론에 대한 시론이다.

초원로의 몽골 구간 여행에서 울란바토르 부근의 노인울라 고분군을 찾았던 이유는 흉노가 동서 교류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331쪽). 그러나 악천후로 현장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점은 이 여행기의 아쉬운 한계에 해당한다. 중요한 목적을 너무 쉽게 포기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도 사정은 있다. 충분한 비용으로 자기만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여행이 아니라 언론사의 기획 취재 형식으로 동행하였기에, 여정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었다.

그런 아쉬움은 글의 내용에도 조금씩 드러난다. 답사를 통한 나의 뿌리 찾기에는 보편적으로 가깝게 알려진 북방뿐만이 아니라 남방도 예외가 될 수 없다(406쪽)는 탄력적 사고를 보여주다가, 신라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 씨의 혈연이 흉노에 닿아 있다는 유력한 주장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거부한다. '흉흉한 일설'(321쪽), '의아스런 화제' 또는 '자가당착적'(336쪽)이란 표현은 뿌리 찾기에 대한 유연한 태도에서 갑자기 벗어나는 듯하다. 선생의 민족주의 감정이 조금 과하게 분출한 듯 보일 수도 있으나, 기실은 신문에 연재한 내용이라 애당초 분량에 제한이 있어 충분한 논지를 펴지 못한 때문으로 추측한다.

물론 그 밖에도 사소한 아쉬움은 있다. 천전리 암각화의 소재지는 경상남도임에도 경상북도라 한 것(69쪽)이 거슬린다. 그렇지만 그런 오기를 압도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여러 곳에 깔려 있다. 초원에서는 시신을 매장할 때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풀이 덮힌 바닥에 감쪽같이 비장하고 장례에 참석한 종자들까지 살해한다. 동시에 어미 낙타가 보는 앞에서 어린 새끼 낙타까지 칼로 베어 버린다. 다음해 제사 때가 되면 한 맺힌 어미 낙타의 모성을 앞세워 매장한 장소를 찾아낸다(110쪽).

쿠빌라이가 카이펑(開平)에서 대칸으로 등극하고는 그곳을 상도로 선포했다. 상도는 곧 국제 무역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성하였으며, 마르코 폴로도 17년 동안 주된 거주지로 삼았다(147쪽). 상도와 지금의 베이징인 대도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만약 거기에다 훗날 영국 시인 콜리지가 쿠빌라이 칸을 시로 읊으며 상도를 제너두로 표기했다는 사연까지 덧붙였다면 어땠을까. 영화 제목이나 클럽 상호 또는 그룹 이름으로 제너두에 익숙한 신세대 젊은이들에게도 친근감을 줄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여러 방면에 걸친 집요한 추적과 간략한 설명은 그 이상으로 독자를 역사의 지적 호기심의 문턱 너머로 안내한다. 소주의 원류를 몽골 교류주에서 찾고(306쪽), 설렁탕과 제주 조랑말도 몽골에서 들어온 사실을 확인하며(307쪽), 몸을 도구로 한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는 문신의 기원을 스키타이 고분에서 발견하고(296쪽), 동양 음악 일파의 음계와 발성법과 악기의 근원을 초원에서 다시 일군다(271쪽 이하). 성인용 영화 제목으로 쓰이던 애마는 원래 몽고풍의 고려 부대 이름이었다는 사실(303쪽)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가.

정수일의 글은 감성적으로 나아갈 여유가 없이 정보로 채워져 있다. 설명은 필요한 부분에 한정하며 반드시 일정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 시베리아의 부랴트 공화국에 관한 한 구절을 보면 이렇다.

"현대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부랴뜨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삶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방편에는 이런 종교뿐만 아니라, 고유의 샤머니즘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 무속의 원류가 바로 북방 민족들 고유의 샤머니즘에 닿아 있으니, 그 현장을 찾아가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386면)."

같은 곳을 찾았던 영국 작가 콜린 더브런의 표현을 비교해 보자.

"부랴뜨 족의 집단적 기억이 한때 기독교의 것이었던 담 속에 유폐된 채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1920년대에는 47개의 사원들이 번성했지만, 1939년쯤에는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불교는 되살아나고 있다고 내 뒤로 마지막 문을 잠그면서 유물을 관리하는 여자가 말했다" (<순수와 구원의 대지 시베리아>, 까치 펴냄, 253쪽)

정수일의 여행기는 문장보다 의미로 읽어야 참된 가치를 알 수 있다. 그의 의도는 우리에게 참된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파미르 고원 이편 동쪽의 최고 권위자인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틀림없이 저편인 서양의 문명사가와의 학문적 교류일 터이다. 그의 진지한 실크로드 저서들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작업이 그의 학문을 완성시키는 관건이라는 점을 떠올려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꼭 1년 전 이맘때, 경기도 평택은 전쟁터였다. 대규모 정리 해고에 맞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77일 동안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점거 농성이 장기화되고 정리 해고 대상자에서 제외된 이른바 '산 자'들이 공장 밖에서 "파업을 중단하라"며 맞불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진압의 시점을 재고 있었다.

2009년 8월 5일, 경찰은 마침내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있던 도장1공장 옥상에 경찰은 컨테이너를 이용해 뛰어 내렸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노동자들이 경찰의 손에 목덜미가 잡혔다. 경찰은 넘어져 쓰러진 노동자를 발로 밟았다. 곤봉이 하늘에서 노동자의 몸으로 떨어져 내렸다. 군홧발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그 지옥 같았던 현장에서 기자는 활자의 한계를 처음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글자를 이어 쓰는 글은 분명 훌륭한 의사소통 수단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기막힌 잔인함을 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곳을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간신히 쥐어 짜낸 가장 훌륭한 단어의 조합도 짧은 순간 촬영된 영상이나 사진 한 장보다 힘이 약했다.

<나는 왜 저항하는가>(세스 토보크먼 글과 그림, 김한청 옮김, 다른 펴냄)의 책장을 넘기면서 다시 그 여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을 떠올린 건 그래서였다. 토보크먼의 그림은 그 어떤 언어보다 훌륭하게 "암울한 21세기의 첫 10년을 적절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신문에서는 볼 수 없는 일들이 엑스선처럼 드러나다"


▲ <나는 왜 저항하는가>(세스 토보크먼 쓰고 그림, 김한청 옮김, 다른 펴냄). ⓒ다른
<나는 왜 저항하는가>는 만화책이다. 하지만 단순한 만화가 아니다. 이 책의 원제 <Disaster and Resistance(재앙과 저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만화는 재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저항을 그린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정치 만화다.

저항이 촉발되는 곳은 어디든 재앙이 먼저 있었다. 그 재앙은 때로 '카트리나'와 같은 자연재해이기도 하고 9·11과 같은 예상치 못했던 정치적 재앙이기도 하며, 때로는 사모펀드 회사 칼라일그룹이 일으키는 숨겨진 재앙이기도 하다.

미국의 흑인 운동가인 무미아 아부자말은 "토보크먼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대표되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계급적, 인종적 범죄에 대한 정면 대응을 그려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국가가 시민에 가하는 공격과 반대되는 의미의 저항"이라 덧붙였다.

토보크먼의 눈이 머무는 재앙의 피해자는 언제나 약자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며 또 그래서 "가혹한 세상의 돌과 화살"을 너무 자주 맞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절망과 슬픔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그림으로 그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전 지구의 재난과 저항"을 전한다.

"토보크먼의 만화는 우리가 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볼 수 없는 일들을 엑스선처럼 속속들이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아부자말의 평은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한 번 떠오른다. 그리고 그의 만화를 연재하던 <뉴욕타임스>가 중도에 연재를 중단했던 까닭도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의 글과 그림은 어떤 글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의 본질로 곧바로 진입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른


재앙의 현장에 차려진 작업실

토보크먼의 붓과 펜에 성역은 없다.

"미국이 추위에 떨면 지구상의 나머지 나라들은 독감에 걸린다고 부모님은 말했다. 구역질나게도 아직도 우리 정부는 이라크에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는지에 대해 인권 단체와 논쟁을 벌이고 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우리에게 사실을 알리는 데 태만하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은폐하는 분위기다."

당연히 토보크먼은 그저 들은 얘기를 기록하지 않는다. 그는 "스케치북, 녹음기,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현장으로 뛰어간다. 자신이 직접 본 것, 알아낸 것을 통해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면서 사건의 실질적인 원인"을 보여주기 위해 애쓴다.

특히 그가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과 조지 부시의 형'과 관련된 칼라일그룹의 문제점을 파헤친 것은 인상적이다. 그는 칼라일그룹의 정치적 유착과 전쟁을 통한 이윤 확대 과정을 어떤 신문기사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게 드러낸다.

"중동에서 전쟁이 확대되면서, 피 흘리는 곳에서 돈을 버는 정치와 경제를 통치하는 지배계급이 있다. 부시와 빈 라덴 가문은 그 일원이다."

그의 작업실은 재앙이 벌어지는 바로 그 곳, 재앙에 맞선 저항 운동이 파고를 이루는 바로 그 땅이다.


ⓒ다른
"9·11 공격이 미국을 바꾸었다? 우리가 어떻게 바뀌었단 말인가?"

토보크먼은 미국 시애틀과 칸쿤의 반세계화 시위, 워싱턴에서 일어난 세계은행에 대한 저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폭력, 미국 뉴올리언스 빈민들의 호소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세상에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그림과 글을 읽는 이들에게 그는 질문을 던진다.

"9·11 공격이 미국을 영원히 바꾸었다고 지겹도록 말들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바뀌었다는 말인가. 몇 년 동안 미국인들은 자국의 외교 정책을 망각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가 이란, 과테말라, 칠레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일을 알고 있는 미국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 사실 미국인들에게 냉담해도 될 핑계로 삼을 만한 것이 많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걱정하는 이들은 정말 게으르고 인생이 공허한 사람들일까?"

그가 언제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제를 알기 위해 그는 2002년과 2003년 중동 여행을 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은 기존의 그의 만화들과는 "다른 취급"을 받았다. 시카고에서 열린 슬라이드 상영회에서는 "검은색 모자를 쓴 우파들에게 심한 야유"를 받았고, 심지어 그의 만화는 "친팔레스타인 좌파의 몇몇 분파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20쪽 분량의 만화를 읽고 독자들이 나의 관점에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에 잠시만이라도 자신들의 확고한 신념에 대해서 되새겨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그러한 신념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정보의 원천은 정말 신뢰할 만한가? 당신들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을 알고 있는가?"


ⓒ다른

"우리만 행동한다면 상황은 변할 수 있다"

토보크먼은 아는 것에 그치지 말라고 틈날 때마다 진심을 담아 당부한다. 우리의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는 신념이 그의 만화의 제일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이 각종 시위 현장의 포스터나 선전물로 사용됐음은 토보크먼 자신이 제일 먼저 행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변할 수 있다. 만약, 우리 시민들이 행동을 취한다면."


ⓒ다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