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은 고려 조선의 천문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창립 700주년'인 동시에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천문의 해'였다.

이 땅에서는 고려 충선왕 때인 1308년 천문, 역법, 지리, 택일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을 통합한 서운관이 설립돼 600여 년 동안 지속한 결과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천문 유산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서운관의 전통은 1974년에 설립된 국립천문대를 거쳐서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 나온 <조선의 서운관(The Hall of Heavenly Records)>은 바로 이런 우리의 천문학을 재조명한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가 낳은 가장 훌륭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중국 과학사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조지프 니덤과 그의 동료들이 지난 1986년 오랜 연구 끝내 내놓은 역저이다.

이 책을 집필하고자 니덤과 그의 동료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중보문헌비고>와 같은 조선의 문헌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중 일부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해 혼천시계 등 일부 현존하는 유물을 직접 조사하는 열정을 보였다. 또 1936년에 출간된 연희전문학교 천문학과 교수 루퍼스의 <Korean Astronomy>와 그의 천문학사 관련 논문도 꼼꼼히 검토했다.

<조선의 서운관>의 집필에 한국의 연구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특히 전상운(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이 1977년 MIT에서 출간한 <Science and Technology in Korea>와 그가 개인 서신으로 제공한 자료는 니덤과 그의 동료들이 이 책을 내는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런 노력 끝에 나온 <조선의 서운관>은 조선의 각종 천문 의기와 과학 유물을 설명하는 내용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각종 자료, 도표, 그림을 통해서 조선의 천문학의 전통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 동안 감춰져 있었던 조선의 각종 천문 의기에 대한 연구와 복원에 대한 관심이 활발해진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이다.

조선은 '지적 정체' 상태였다?


▲ <조선의 서운관>(조지프 니덤 지음, 이성규 옮김, 살림 펴냄). ⓒ살림
니덤 등은 서문에서 조선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통렬히 비판한다. 조선에 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진부한 인식은 조선이 무미건조한 신유교주의와 관료적 파벌주의가 초래한 정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덤 등은 이러한 인식이 "서양 선교사와 일본 식민주의자의 이기적인 서술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에 서술된 활발한 과학 활동이 그 반박 증거로서, 이는 조선이 '지적(知的) 정체' 상태였다는 생각을 타파한다. 니덤은 이미 앞서 과학사의 기념비적인 저서로 꼽히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에서도 "중국 문화권에 속하는 모든 민족 중에서 한국인은 과학, 기계 기술, 의학에 가장 관심이 컸다"고 두 번이나 역설했었다.

니덤이 이렇게 조선의 과학을 높이 평가한 것은 바로 천문학 때문이다. 한국의 천문학은 중국에서 전해진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었지만, 특히 세종대왕 때의 천문 의기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만든 것에 한국적 변형을 가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천문학 전통에 이슬람의 기술이 결합된 독창적인 산물인 것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새로운 천문학 의기들을 제작하고자 엄청난 국고를 썼으며, 그 결과 니덤 등이 "15세기 조선은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 의기를 만들었다"고 단언할 만한 빛나는 과학 전통을 탄생시킨 것이다. 니덤 등이 새삼 조선의 천문학 전통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과학사적 의의 때문이었다.

빛나는 조선의 천문학

이제 책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1장에서는 조선의 천문학이 형성되는 과정을 중국 천문학의 전통 속에서 살피고 있다. 특히 이 장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천문 의기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천 과정을 겪었는지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결과 세종대왕 때 천문학이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2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세종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18가지의 천문 의기의 목록을 제시한다. 다양한 종류의 해시계, 정교한 물시계가 포함돼 있는 이 목록의 유물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니덤 등은 <세종실록>, <중보문헌비고> 등의 문헌 내용을 인용해서 천문 의기의 작동 원리를 논하고, 복원 모습까지 제시했다.

특히 자격루는 각종 문헌을 토대로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30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런 니덤 등의 노력에 호응해 최근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팀은 오랜 연구의 결과 자격루를 복원해 주목을 받았다. 현존하는 유물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조선의 서운관>이 복원 사업을 자극한 것이다.

1992년에 이 책을 접한 필자 역시 이런 자극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다. 다만 이 책에서 제시한 목록에 들어 있는 천문 의기 중 일부는 니덤 등의 주장이 부각되면서 폄하되는 것이 있어서 안타깝다.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 의기인 측우기의 경우 13세기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니덤 등의 주장이 세계 학계에서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한 예이다.

3장에서는 문종에서 영조까지(1450∼1776년) 세종 후대 왕들이 천문 의기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논의하고 있다.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은 역법 '시헌력'이 도입되자, 조선 천문학은 세종 이후 또 한 차례 도약하는 기회를 맞는다. 이 책도 이 시기에 주목해 특히 효종, 헌종 시대의 천문 시계의 제작에 초점을 맞춘다.

니덤 등은 1669년 조선 현종 때 만든 송이영의 혼천시계를 동양의 의기 제작 전통과 서양의 시계 제작 기술을 합한 혁신으로 받아들이며 "동아시아 시계학 역사의 획기적 사건"이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 시계 장치가 일본에서 제작된 시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니덤 등도 송이영의 혼천시계의 앞선 모델로 언급한 1957년 홍문관 최유지의 혼의는 사실상 작동 메커니즘이 송이영의 혼천시계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구만옥, 김상혁 등 국내 학자의 연구를 통해서 여러 차례 입증되었다. 니덤 등이 관련 자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면서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과학사학자 이성규는 역자 후기에서 니덤의 주장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의 어느 학자도 이에 학문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질타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조선의 천문 유물에 대한 국내 학자의 연구 성과를 역자의 주를 통해서라도 소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살아난 조선의 과학기술

4장에서는 계속해서 송이영의 혼천시계를 자세히 설명한다. 국보 230호인 송이영의 혼천시계는 훼손된 상태인데, 이 책은 그 작동 원리를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충북대학교 천문의기복원연구실에서는 이 설명을 기초로 혼천시계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시행착오 끝에 2005년 9월에 작동 모델 제1호가 복원되었다

아래 [그림 1]은 <조선의 서운관>이 제시한 복원도이고, [그림 2]는 이것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런 복원 과정을 통해서 <조선의 서운관>에서 니덤 등이 가정한 작동 원리와 기계 정치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었다. 330년간 멈춰 있었던 조선의 찬란한 전통이 이 책을 계기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 [그림 1] 달의 삭망을 보여주는 니덤의 도식적 복원도(왼쪽). [그림 2] 니덤의 복원도를 토대로 작동 원리를 규명해 복원한 의기(오른쪽). ⓒ이용삼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니덤 등은 세밀한 분석과 대담한 가설을 통해서 수많은 천문 의기의 복원도로 제시했다. 이제 그들이 일궈낸 여러 가설은 국내 학자의 철저한 연구를 통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과학을 밝혀낸 영국 학자의 노고와 이에 고무되기만 했지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지적한 역자의 질책에 답하는 길이리라.

다만 복원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또 다른 창작이라는 사실에 공감하면서 시민들이 더 많은 응원과 지원을 보낸다면, 복원 연구를 하는 소수의 외로움이 덜할 것 같다. <조선의 서운관>을 더 많은 독자들이 읽고서, 조상의 천문 의기를 복원하려는 이런 노력에도 관심을 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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