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팀으로 발령이 난 뒤 처음 겪은 큰 사건이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선임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 어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경영학과 후배다. 이른바 고소영(대통령과 인맥이 겹치는 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이 현 정부에서 중용된다는 뜻)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것은 당연지사.

한국 보수의 형용모순

그 무렵, 어느 자리에서 '소망교회 금융인 선교회'(소금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주목받는 모임이다. 이야기를 듣다 문득 성서의 어느 한 대목이 떠올랐다. 성전을 더럽히는 환전상을 예수가 채찍으로 내쫓는 대목이다. 성서 속 환전상은 요즘 세상에서라면, 금융인이다. 주일 예배를 마친 뒤, 교회 안팎에 모여 금융권 뒷이야기를 나눌 소금회 회원들은 성서의 이 대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증이 타올랐다.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게끔 하는 금융의 순기능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돈'을 다루는 일이 지저분하거나 천박하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인데, 대부분의 욕망은 돈으로 매개된다.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궁금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성(聖)'과 '속(俗)' 사이에 경계가 있는지였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에 따르면, 성(聖)이 속(俗)에서 분리되는 순간 종교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소금회 회원, 소망교회 열성 신도인 그들에게 성과 속의 경계란 어떤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었다.

하긴, 성(聖)과 속(俗)의 구분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를 자처한다면, 함부로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분수를 지키고, 경계를 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자기가 맡은 바 본분에 전념하는 게 보수의 미덕이다. 그런데 성과 속이 일상에서 뒤엉킨 보수라니…. 솔직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다움'의 논리와 공자


▲ <공자, 최후의 20년 : 유랑하는 군자에 대하여>(왕건문 지음, 은미영·이재훈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그때 꺼낸 책이 왕건문의 <공자, 최후의 20년 : 유랑하는 군자에 대하여>(은미영·이재훈 옮김, 글항아리 펴냄)다. 공자는 '정명(正名)', 요컨대 이름을 제대로 붙이는 일을 평생 화두로 삼았던 지식인이었다. '군군신신(君君臣臣)',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그의 소신은, 오랫동안 동양 사회의 지배원리로 작동했다.

이런 '~다움'의 논리에 대해 진보적인 이들은 종종 불편해 한다. 이유가 있다. 예컨대 과거 군사정권은 이런 논리로 학생운동을 탄압했다. '학생은 공부에 전념해야 학생답다. 사회 구성원이 각자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잘 지킬 때 사회가 평화롭다.'

198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이런 주장이 헛소리라는 걸 몸으로 안다. 피로 얼룩진 광주, 숱한 의문사,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대표되는 당시가 평화로웠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게다. 그래서인지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띤 이들 사이에서 공자가 품었던 '정명'의 소신은 별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조금 달라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눈앞의 모순을 바꿔서 세상을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게 진보 정치의 역할이라면 말이다. 지금 우리는 이름과 실질이 엇갈린, 이름이 실질로부터 모욕당하고, 실질이 이름에 감춰지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보수'라 불릴 수 없는 게 '보수'라는 이름을 뒤집어쓴다. 노골적인 욕망이, 심지어 폭력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2003년 당시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략하며 '십자군'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이게 우리 시대의 모순이라면, 그래서 피 흘리고, 눈물짓는 이가 있다면, 이른바 '진보'는 '정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명목에 실질을 맞추려다…", 유랑하는 군자의 삶

공자는 지금처럼 이름과 실질이 어긋난, 한마디로 '난세(亂世)'를 살았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지만, 관운이 썩 좋지는 않았다. 51세가 돼서야 비로소 벼슬다운 벼슬을 했고, 54세에 정치 역정의 절정을 맞았다. 노나라의 대사구(법무부 장관 또는 대법관)가 됐다. 명목상으로는 대부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왕처럼 굴었던 삼환 씨를 토벌한 게 이때다. '명목과 실질의 일치'라는 신념의 적극적인 실천이었다. 공자는 실질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넘어 실질을 이름에 맞게 고치려 했다.

요즘이라면, 공자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 그래서 명분이 없는 권력이 선출된 권력, 즉 명분이 있는 권력을 압도하는 현상을 바로잡으려 들지 않았을까. 예컨대 재벌의 지나친 영향력 말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깨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삼환 씨 일파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결국 공자가 졌다. 이듬해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유랑 생활을 했다.

<공자, 최후의 20년>은 바로 이 시기, 공자의 유랑 시절을 다룬 책이다. 현실에 좌절한 이상주의적 지식인의 내면, 그러니까 오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것을, 사료를 통해 잘 복원해냈다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또 스승 잘못 만나 인생이 꼬였다며 툴툴대는 제자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자로가 화가 나서 공자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상을 품고 부지런히 도를 실천하였는데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군자는 곤궁해도 도를 지키고 도를 실천하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닥치는 대로 행하며 탈선하게 된다.'
공자가 곤궁에 처한 군자의 몸가짐을 일러주었지만 제자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연이어 세 명의 제자가 찾아와 공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는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왜 정착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이리저리 방황해야 합니까'"

공자의 난처한 표정, 그리고 제자들의 비참한 표정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제자들에게 공자는 '옳은 도리가 현실에서 꼭 이기거나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 현실에서 유리한가에 따라 입장을 정하는 것은 천박한 짓이다'라는 논리를 반복한다. 그러다 공자는 좋은 날 못 보고 죽는다. 제자들도 대부분 비슷한 운명이었다.

공자가 살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름과 실질이 제각각인 지금, '정명'을 꿈꾸는 이들도 어쩌면 비슷한 운명을 맞을지 모른다. 성(聖)과 속(俗)이 뒤엉킨 삶을 살면서, '신앙'을 내세우는 이들을 떠올리며 이 책을 덮었을 때 마음이 착잡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이름값 못하는 공공 기관…'21세기의 공자'가 할 일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이 책을 다시 꺼냈을 때, 눈에 들어온 뉴스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해 산업 재해 승인을 거부해 온 근로복지공단에 관한 것이었다. 이렇게 까다롭게 굴던 근로복지공단이 자기네 식구들, 그러니까 공단 직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했다. 공단 체육 대회나 등반 대회에서 다친 것도 산재였고, 선반에 손가락을 베인 직원도 산재 보상을 받았다.

공자가 살아있었다면, 사익이 아닌 공공성(公共性)을 가리키는 '공(公)'이라는 글자를 이름에서 떼어 내야 한다고 꾸짖었을 게 뻔하다. 아니다. '근로복지공단' 이름을 내걸었으면서,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보다 오히려 삼성 편을 들었다는 정황까지 보고 나면, 아예 공단 문패를 뜯어내려 들게다.

지금도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 편에 서서 산재 승인을 받으려 애쓰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활동가들이 있다. 공자의 눈으로 보면, 이들이야 말로 '근로복지공단'이 '이름값'을 하게끔 이끄는 이들이다.

이들이 꼭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마치 '이름 바로잡기'를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공자가 자신의 생애에서 성공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2010년 현실의 승자는, 아마도 몇몇 소망교회 신자들처럼 신앙의 이름으로 출세를 도모하는 이들, 요컨대 이름과 실질을 교묘하게 분리하는 이들일 게다. 하지만 긴 역사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공자를 몰아냈던 노나라 대부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공자는 현실에선 패배했지만 역사에선 승리했다. 적어도 역사에선, '반올림' 활동가들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문학 전공자로서 나는 누군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를 번역해 주기를 오랫동안 바랐다. 영문학이라는 제한된 분야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또 글을 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말을 다루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물건인가! 아니 '물건'이란 말이 살아 움직이며 역동적 변화 과정을 겪는 말을 가리키는 적절한 말이 될 수 있는가? 사전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하나의 말은 다른 말을 가리키고, 그 다른 말은 또 다른 말을 불러들인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말의 움직임을 가리켜 어떤 철학자는 '대리보충(supplem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사전을 들추어보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말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더욱이 말은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순전히 자의적 기호 체계에서 일어나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감정, 욕망, 가치, 이해관계가 개입된 의미(meaning)의 각축 공간이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의미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전투가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말은 현실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 투입된 역동적 '생산'의 과정이다. 윌리엄스가 이 책에서 일정 부분 원용하는 러시아 언어철학자 볼로시노프의 말처럼 언어는 계급 투쟁이 일어나는 격전장이다.


▲ <키워드>(레이먼드 윌리엄스 지음, 김성기·유리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핵심 어휘'라는 창을 통해 계급 투쟁의 역사적 현장을 누비고 그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문화 전투 일지이다. 더욱이 그는 직접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은 채 기록만 하는 중립적 기술자가 아니다. 그는 웨일스의 노동 계급 출신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기원을 잃지 않고 노동 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하여 어휘의 변천사를 기록한다.

키워드라는 20년에 걸친 그의 장기 프로젝트 자체가 자신의 노동자 계급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윌리엄스는 문화적 충격에 빠진다. 친구들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는 "저들은 우리와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 이 발견은 노동 계급 출신인 그가 귀족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케임브리지에 처음 입학했을 때 느꼈던 위화감과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스는 '영어'라는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는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발음이나 억양의 차이를 넘어서는 '의미의 차이'였다. 저들의 언어에 동조할 수 없었던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이 개설한 일반인 대상의 '성인 교육' 강좌를 맡으면서 노동 계급 수강생과 함께 찾고 만들어간 열정의 산물이 바로 <키워드>라는 어휘 사전이다.

하지만 <키워드>는 단순한 어휘 사전이 아니다. 이 책의 모태가 된 <문화와 사회>(1956년)가 무엇보다 '문화(culture)'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의미의 갈등, 투쟁, 변천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19세기 이후 진행되어온 영국 문화사, 지성사, 사상사를 다시 읽어내는 비판적 작업이었다면, <키워드>는 윌리엄스가 이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핵심 어휘들을 통해 영국 사회의 문화적 변동을 읽어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와 사회>에서 윌리엄스는 '문화', '계급', '예술', '산업', '민주주의', 이 다섯 개의 어휘가 상호 연결되어 복잡한 의미망을 형성해왔음을 추적한다. <키워드>는 원래 이 책의 부록에 싣기 위해 만든 60개의 단어 해설집에서 출발했는데, 출판사에서 분량 문제로 수록을 거부하자 묵혀 두었다가 1976년 초판 발행 시 110개의 표제어를 실었고 1983년 재판을 찍을 때 21개의 단어를 추가하여 총 131개 어휘에 대한 분석 및 해설을 싣고 있다. 이번에 국역된 <키워드>는 이 재판을 완역한 것이다. 어휘 사전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책은 어휘라는 매개를 통해 문화와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는 비판적 독해이자 문화 유물론적 실천이다.

그렇다면 왜 키워드인가? 그리고 키워드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윌리엄스는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이 특정 학문 분야의 사전이나 용어 설명 책자가 아니며, 사전 편찬의 역사에 대한 보충 설명이나 다수 낱말을 풀이한 사전도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어휘에 대한 탐구의 기록"(21쪽)이라고 말한다. 이 때 키워드로 선정된 어휘들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정의된다.

1) "어떤 종류의 활동과 그 활동의 해석을 연결하는 중요한 단어."
2) "어떤 사상의 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

윌리엄스가 다루는 키워드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단어이다. 하지만 그 속엔 역사적 활동 및 해석과 사상을 구조화하는 핵심적 이슈가 들어있다. 따라서 이런 키워드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집단에 의해, 어떤 의미가 특권화되고, 어떤 사회·문화적 제도를 거쳐 형성되어왔는지 추적해보면, 해당 사회를 역사적으로 구조화해온 담론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스스로 '역사의미론'으로 명명한 이런 방법론을 통해 윌리엄스는 궁극적으로 영국 사회를 형성해온 담론의 역사를 노동 계급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대안적 의미를 구축하고자 했다.

사실 <키워드>는 단어의 의미를 중립적으로 기술한 책이 아니며, 정통적 시각에서 해당 어휘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책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윌리엄 엠프슨의 <복잡한 단어의 구조>나 <옥스퍼드 영어 사전>과는 지향점이 다르다. 윌리엄스가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해당 어휘의 지배적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갈등'과 '대결'과 '각축'의 국면이다.

윌리엄스가 <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년)에서 정식화한 '잔존', '지배', '부상' 문화의 역동적 대결 과정은 특히 '민주주의', '기회', '교육', '계급' 등 해석의 차이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의미를 구축할 수 있는 단어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윌리엄스는 사전이라는 권위 있는 외피 뒤에 숨음으로써 이런 의미의 대결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상식이라는 지배적 의미에 안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만큼 윌리엄스의 어휘 설명이 많은 반론과 저항에 부딪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의 부족은 이 남성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남아있는 문화적 공백 지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국역본에는 빠져있지만 영어 원본의 맨 마지막에 '독자 메모'라는 형식으로 그가 백지를 끼워 넣은 것은 부상하는 새로운 의미에 자신을 개방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에도 지적되어 있듯이,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요즈음 국내 학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나 '번역어' 연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의 작업이다. 영국에서는 <키워드> 초판 출간 30주년이 되던 2005년에 그의 후계자들이 <뉴 키워드>(2005년)를 출판하여 자기 시대의 어휘 정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각 시대는 자기 시대의 문학 전집을 가져야 하듯, 자기 시대의 <키워드>를 가져야 한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어휘를 둘러싸고 격렬한 의미의 전투를 치러왔고, 아직 이 전투는 종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국회, 법정, 학교 같은 제도화된 공간뿐 아니라 거리에서, 술집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그리고 가정집 거실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 낯익은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각축과 투쟁의 역사를 누군가 기록하여 후세에 물려준다면, 우리는 우리의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오롯한 사전 하나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키워드>가 필요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낱말이 외국어 번역어이듯이, 번역된 근대를 거쳐 온 우리에게 <키워드>는 문화 번역의 과정을 담고 있는 번역어 사전일 수밖에 없다. 사실 윌리엄스가 설명하고 있는 많은 영어 단어도 희랍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사이에 의미의 이동, 횡단, 혼융의 과정을 거쳤던 낱말들이다.

역어의 선택에서부터 그것의 의미 구성에 이르기까지 키워드의 역사는 이질 문화가 서로 만나 몸을 섞는 의미 혼숙의 과정이기도 하다. 특정 문화의 의미 체계가 낯선 이국성을 만나 자신을 변용해내는 의미 생성 과정으로 문화 번역을 이해한다면, 한국에서 키워드 편찬 작업은 서양 문화를 번역해내는 문화 번역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누가 과연 이 거대한 작업을 할 것인가! 한국의 인문학은 해야 할 일이 많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미숙의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그린비 펴냄)를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불편했다기보다는 내용을 다루는 방식과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누누이 강조해온 분이 이런 좋은 얘기를 왜 이런 문체로 썼을까?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고 나서 고미숙의 책을 읽을 때면 비슷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우린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얘기하면 될 것을, 너네는 왜 우리처럼 못 사니라고 쪼아대니 불편할 수밖에.

그래서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지 않았다면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않았을 책을 굳이 읽고 서평을 쓰는 오지랖은 이 책의 독자로서 느낀 불편함을 전하고 다음번에는 같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수다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고미숙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이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서평을 부탁받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동네 청년들과 함께 책을 읽는데, 그 모임에서 고미숙 선생의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그린비 펴냄)를 읽었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 '에로스를 글로 배웠습니다'라는 감상문을 썼다. 책의 제목은 에로스인데 몸이나 에로스에 관한 구체적인 실화는 없고(심지어 '원 나이트 스탠드'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나고!) 난데없이 세미나 얘기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지붕 뚫고 하이킥2>의 '애교를 글로 배웠습니다' 편이 생각났다, 이런 내용의 감상문이었다. 그런데 출판사가 이 글에 새 책이 나왔다는 트랙백을 걸어 놨다. (불편한 글에도 트랙백을 거는 출판사의 센스?).

사실 <호모 코뮤니타스>도 비슷한 느낌으로 읽었다(이게 나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호모 코뮤니타스>의 구성은 <호모 에로스>와 비슷하다. 요즘 세태에 대한 적당한 비판(주변 사람들에게서 적절히 모은 정보들), 돈을 잘 벌고 쓰는 노하우, 돈에 대한 상상력, 에필로그이다. 두 책의 다른 점은 고미숙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한 세 사람의 글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점 정도? 구성이 책의 내용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그리고 시리즈라서 구성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구성상 현실에 대한 재기발랄한(?) 비판이 달인의 노하우로 잘 연결되지 않는다.

모두가 부유한 삶이라는 헛된 꿈을 향해 질주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이야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이 책은 그 대안으로 학교에 다니지 말고 가족에 얽매이지 않고 젊었을 때 사서 고생하라고, 비슷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과 더부살이하며 공동체를 꾸리라고 충고한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좋은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 얘기들은 몇 권의 책을 읽는 세미나 시간에 나눴던 수다를 책으로 옮긴 듯하다. 물론 그런 수다의 내용이 소중하지만 그런 수다가 책으로 나오려면 적어도 몇몇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일상적 차원의 윤리나 실천"만이 아니라 "경제 구조나 정책 사안"도 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요즘 부모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명분 가운데 하나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자식들이 기죽지 않고 살려면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명목 하에서"라는 현실 진단이나 "이게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아주 평균적인 행보다. 이 행보가 죽 이어지다 보면 '쇼핑족들의 헤븐'이라는 홍콩까지 드나들게 된단다"라는 진단은 좀 당황스럽다. 수다를 떠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현실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이 진단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몇 사람의 수다가 아니라 사회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면 조금 더 사회 계층 피라미드의 밑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대안을 자유로이 선택하며 누릴 수 있는 사람들보다 대안에 냉소하고 때론 대안을 증오하기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책의 좋은 얘기들은 불가능한 것의 상상이 아니라 가능한 사람들의 여유로 그치지 쉽다.

예를 들어, 책은 가족과 분리된 삶을 찬양하지만 사실 그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이다. 마치 몇몇 대안 학교들이 '자기 아이들'을 공부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놀고 예술적인 아이로 키우려는 부모들의 욕망을 반영하듯이. 하지만 가족을 거북이등껍질처럼 이고 살아 온 사람들에겐 "부모의 가난은 자식한테는 차라리 축복"이라는 말처럼 불편한 말도 없다.

격월간 잡지 <민들레> 69호에서 현병호는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에 대한 불편함을 털어놓았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지독한 가난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리라. 가난은 불편을 넘어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아침에 배달되는 도시락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독거노인이나, 아이를 키우면서 끼니 걱정을 해본 사람이라면 저 말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게다.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무료 급식을 받아야 점심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들에게도 가난은 불편을 넘어서 자존감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들의 탐욕 아니면 청승, 그들의 공동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강연료 얘기를 할 때이다.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 강연료 얘기를 꺼내고 정신노동의 화폐가치를 얘기하며 "풋, 더 어이없다"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게 우연한 만남의 기회와 장을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책 곳곳에서 비노바 바베나 마하트마 간디의 얘기를 칭송하니 어리둥절하다. 바베나 간디도 자신의 얘기를 듣고자 청한 단체에게 그렇게 반응했을까?

이런 불일치가 실수로 느껴지지 않는 건 마쓰모토 하지메의 행동을 "화폐에 대한 통쾌한 복수"라고 얘기하면서 <수유+너머>가 보증금 1억 원에 월세 1000만 원을 내며 돈이 "흘러오는 만큼 다시 흘러가게" 하는 단체라고 자랑(?)할 때이다. 허나 일본에서 곧 헐릴 건물을 수리해서 활용하는 '아마추어의 반란'과 비교한다면 <수유+너머>는 이미 가난뱅이와 무관하다(오히려 서울 해방촌의 '빈집'이 하지메와 더 가깝다). 책을 읽다 문득 개그 콘서트의 행복 전도사가 생각났다. "이 정도는 누구나 하잖아요. 이 정도도 못하면 그건 공동체가 아니잖아요, 그냥 청승이지." 옛날 살던 옥탑방에서 길 건너편 래미안 아파트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한겨울에 수도 파이프 얼어 터질까 걱정하며 주방 창문 열고 담배 한 대 피는데, 저쪽에서는 반팔 입은 사람들이 거실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책에서 고미숙 선생이 예로 드는 대안은 좋은 세상이지만 <수유+너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의 세상이다. 그 공동체 밖의 세상에 관한 얘기는 거의 없고 가끔 있더라도 언론에서 다뤄지는 기사처럼 매우 추상적이고 현실감이 떨어진다(참고로 얘기하자면 한국에 '분당시'는 없고 <문탁네트워크>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있다). 자기 공동체의 단단함과 이런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 밖의 세계를 접하지 않고 자기 세계의 원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수유+너머>가 쪼개져서 전국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다지만 그 공동체는 여전히 자기만의 원리로 움직이는 공동체이다. (<수유+너머>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는 게 인문학적으로 긍정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공동체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가급적이면 말을 가려서 쓰는데, 그 이유는 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기 만족감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즐기는 건 그들의 자유이다. 허나 그런 공동체가 대안 공동체를 자처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들면 좀 불편해진다. 화폐 없이 생활하는 공동체들이 많아지는 건 분명 우리 사회의 축복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니 우리의 방식을 따르라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이 세상에는 몰라서 못 사는 사람보다 알아도 못 사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나름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는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디딤돌이 될 때 운동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공동체는 공간 내에서의 차이와 증여보다 공간 밖과의 강한 충돌을 겪으며 조금씩 확장될 것이다. 독자로서 나는 그런 충돌에 관한 얘기가,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보다 실패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사람들의 얘기가 더 궁금하다.

장일순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도둑을 만나면 도둑이 돼서 얘기를 나눠야 해요. 도둑은 절대 샌님 말은 안 들어요. 저 사람도 나와 같은 도둑이다 싶으면 그때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한단 이 말이에요. 그때 도둑질을 하려면 없는 사람 것 한두 푼 훔치려 하지 말고 있는 사람 것을 털고 그것도 없는 사람과 나눠 쓰면 좋지 않겠냐고 하면 알아들어요. 부처님은 마흔네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다는 말이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이 말이에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ㅇㅇ 2012-06-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평이었습니다. 책은 못봤지만...책에 우장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잘 드러내신거같아요
 

이념 간의 대화

폴 슈메이커의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이하 <이념>)은 무려 1000쪽 가까이 되는 방대한 책이다. 더구나 정치 철학과 정치 이론, 이데올로기에 관한 난해한 쟁점들을 다뤘다. 그런데도 이 책은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슈메이커는 여러 이념의 논리 구조를 딱딱하게 해부하는 대신, 다양한 정치 이념이 현대 사회의 주요한 철학적·정치적 질문에 어떻게 다른 응답을 내놓고 있는지를 '논쟁적'으로 추적한다. 그와 동시에 상쟁하는 이념들 간에 '건설적' 대화가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일관되게 묻고 있다. 바로 거기서 저자의 정치'이론'이 제시된다.

논쟁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대화. 그것은 손쉬운 중도주의, 절충과 화해의 해결책을 거부한다. 그것은 교조적 진영 대결을 넘어, 정치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는 이념적 응답을 모색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진보-보수'의 대립 속에 사회적 가치, 철학, 이념의 성숙이 지체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데올로기와 정치


▲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폴 슈메이커 지음, 조효제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이념>의 원제는 "From Ideologies to Public Philosophies"다. 번역자는 저작 전체에 걸쳐 'ideology'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념'으로 번역했다. 아마도 번역자가 이런 결정을 한 까닭은 슈메이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한국에서는 주로 '이념' 대립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슈메이커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비성찰성, 폐쇄성 등의 속성을 부여한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현실 인식과 사고를 일정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왜곡하는 특수하고 편협한 렌즈"(77쪽)며, 그래서 "상호주관적 합의 형성을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이런 속성이야말로 이데올로기가 정치 행동과 투쟁을 이끄는 힘을 갖게 만드는 근거다.

왜냐하면 지성과 숙의는 명백해 보이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데 반해, 정치 행동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확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의심과 확신 중 무엇이 더 낫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확신은, 그것의 진리성과 타당성에 관한 성찰의 결과로서 획득돼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종종 이런 성찰을 막는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이념이라는 나무의 뿌리

그렇다면 견고한 신념 체계로 구성된 상쟁하는 이념들이 서로 건설적 대화와 대결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념 논쟁이 정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공선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는 동력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성찰하고 숙의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이 <이념>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여기서 저자는 각 정치 이념의 평가로 곧장 들어가는 최단 경로가 아니라, 그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가정과 정치 원리를 추적하는 긴 여정을 택했다.

저자는 각 이념이 세계·인간·사회에 관한 특정한 철학적 가정, 그리고 정치의 근본 질문들에 관한 원리적 입장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념의 뿌리를 이루는 이 '암묵적' 가정과 원리야말로 이념 간의 대화를 막는 요인이자, 또한 대화로 들어가는 문을 열 열쇠다.

<이념>은 이념의 나무들을 단지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 뿌리로 깊이 들어가 '좋은 나무'를 키울 방법을 찾고 있다. 그 결론이 바로 '다원적 공공 철학'이다.

다원적 공공 철학

저자에게 '다원적 공공 철학(plural public philosophy)'은 이념들 간의 대화와 합의 형성을 위한 철학적 토대다. 그것은 각 이념의 강점과 약점, 정치 공동체에 대한 잠재적 기여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이다. 또 특수한 정치적 입장과 규범적인 보편성 요청을 성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전제다. 그 공공 철학은 어떤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는가?

저자의 주장은 네 가지 층위에 걸쳐있다. (1) 가치 지향 : 정치 이념은 특정 집단의 배타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선의 관점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2) 철학적 가정 : 정치 이념은 세계와 인간 본성의 복잡성, 사회 권력의 다원성, 인식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3) 정치적 덕성 : 정치이념은 차이에 대한 관용과 상호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4) 정치 노선 : 정치 이념은 어떤 절대화된 이념에 따라 사회와 인간을 재조직하려는 극단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다원성, 공공성, 관용과 절제가 그 핵심이다.

저자는 다원적 공공 철학이 단지 중도, 절충을 뜻하지 않으며, 이념들 간의 합의, 화해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건설적인 논쟁과 상호 계몽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제시된다. 치열하게 논쟁하되 그 논쟁은 정치 공동체의 공공선에 기여하고 서로를 계몽시키는 계기가 돼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떤 공동의 지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정치 이념

위의 관점에서 슈메이커는 19세기 이래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12가지 정치 이념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가 철학적 가정, 정치 원리, 정치 이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각 이념들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를 그림으로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분류 체계 하에 전개되는 긴 이념사적 서술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다원적 공공 철학의 원환 '내부'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선에 관련된다.

먼저 원환의 '내부'를 보자. 저자가 다원적 공공 철학에 기초한 이념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좌·우익 급진주의다. 현대 자유주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다. 현대 보수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전통적 보수주의라는 두 이념을 결합시켰다. 급진 좌파는 사회민주주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급진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를, 급진 우파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등을 포괄한다. 저자는 이 이념들이 공공선이라는 공동의 목표 하에 성찰적 대화를 해가야 함을 강조한다.

다음은 '내부/외부' 경계선의 문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급진주의(radicalism)'와 '극단주의(extremism)'의 구분이다. 이 구분 자체는 새롭지 않다. 사회·정치 운동 연구에서 이 구분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양자를 나누는 핵심 기준은 다원적, 민주적, 입헌적 원리와 제도를 긍정하느냐 아니냐다. <이념>에서 새로운 것은 이 구분을 다원적 공공 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급진주의는 다원 사회를 개선하는 동력이지만, 극단주의는 그에 대한 위협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다원적 사회는 유토피아 사상과 허무주의에 의해 그 존립이 위협과 침해를 당해 왔다."(873쪽) (좌우를 막론하고) 총체적 현실 부정과 총체적 전복의 이념, 또 종종 그에 수반되는 냉소주의는 일견 가장 '급진적'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세계의 실제적 개선을 가로막거나 심지어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과 <이념>의 메시지

<이념>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나아가 한국 사회와 정치에 줄 수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이 저작의 관점에서 한국의 이념 대립을 성찰해본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념담론의 범람 속에 다원적 공공 철학이라고 하는 '안감의 결핍'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때론 이 결핍이 인지되지도 못하고, 때론 인지되었으나 정치적 요인에 인해 그것의 공론화가 억제된다. 슈메이커가 이 상황을 표로 만든다면 아래와 같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A↔B] 갈등이 격렬하고 요란스럽게 계속되는 동안 [X→Y] 방향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음이 은폐되고, 그 결과 [C↔D]의 이념 논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게 핵심이다.

"너는 진보냐, 보수냐, 자유냐? 좌냐, 우냐, 중도냐?" 하는 이념적 추궁이 빈번하다. '좌빨, 친북, 수구, 꼴통' 등, 낙인과 거부의 어휘가 가득하다. 자신만이 '진정한 진보', '정통 보수'라 주장하고, 이를 통해 권위를 강요하는 이념적 순수주의가 잔존한다.

하지만 자신과 타인의 이념이 터하고 있는 철학과 가치, 또 그것이 정치 공동체에 의미하는 바를 성찰하는, 이념적 진정성에 허용된 땅은 좁다. 지금 <이념>은 이념 대결 안에서 이념을 사유하는 것을 넘어, 이념 대결의 뿌리를 사유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몇 가지 이견

하지만 <이념>에 대해 이의가 없지 않다. 먼저 이 저작의 '전체주의(totalitarianism)' 개념이 그러하다. 전체주의 개념은 다양한 맥락에 놓일 수 있고, 그 맥락에 따라 사상적·이론적 의미가 달라진다. 어떤 개념의 의미의 중핵을 파악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개념이 무엇과 대조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슈메이커는 '전체주의 이념'과 '다원적 정치 이념', '다원적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적"(151쪽)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개념 쌍은 다원·자유민주주의의 전통에서 이뤄진 비교정치학 연구에서 친숙한 것이다. 이들의 전체주의론은 '전체주의'로 명명된 사회의 동질성을 과장하고, 그 역동성을 폄하하며, 그것을 악마화함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미화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 블록 전체를 전체주의로 비판할 때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는 분명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여전히 논쟁적으로 남아 있지만, 슈메이커는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성찰성의 결여는 더 실질적인 철학적, 이론적 문제로 이어진다. 강한 가치 평가적 대조법에서는 항상 '인정/배제'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여기서는 무엇이 '내부'로, 무엇이 '외부'로 간주되느냐가 중요해진다. <이념>에서 '전체주의'는 '다원적 공공 철학의 적'이라는, 더 상위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와 더불어 '다원적 공공 철학의 적'으로 간주된 이념은 무엇인가? 바로 '좌·우익 극단주의'다.

그런데 여기서 '극단주의 좌파'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놀랍다. '反신자유주의 강단 좌파'(네그리, 하트), 포스트구조주의(푸코, 데리다, 무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버틀러), 심층 녹색주의(돕슨) 등이 극좌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들을 '다원민주주의의 적'이라는 대범주 하에 공산주의, 파시즘과 나치즘, 종교적 근본주의와 동급으로 놓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이념 이해 자체가 이념적으로 경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 의혹의 근거는 이 저작의 이론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심원 모델' 자체에 있다. 원환의 중심에는 현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있다. 그 주변에 급진주의자들이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그 중 하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20세기 정치의 양대 기둥의 하나를 이뤘던 사회민주주의가 동심원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시 이 동심원의 중앙에 있는 '현대 자유주의'와 '현대 보수주의'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을 뜻하는 게 아닐까? 보편적 언어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은 실은 미국적 맥락이 아닐까? 우리는 저자의 철학적, 메타 이론적 메시지를 수용하면서도 저자와는 다른 이념의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이념이 뿌리내린 토양

<이념>이 터한 역사적 준거를 묻고 있는 위의 질문들은 이 저작이 다루지 않고 있는 더 깊은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말하는 '철학적 가정'이 놓여 있는 더 넓은 역사적 지평, 체험의 지평, 이해의 지평에 대한 사회학적 질문이다. 저자가 정치 이념의 뿌리를 캤다면, 남겨진 과제는 이념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적 토양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 토양에서 토질 개선의 방법을 찾아야만 '이념의 대화'가 가능하다.

존재론과 인간학, 사회론과 인식론에 관한 슈메이커의 논의는 대단히 체계화된 지적 담론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지성화된 담론의 저변에는 그 시대와 사회의 생활세계, 역사적 어휘들과 담론의 질서가 놓여 있다. 그것을 생산, 재생산, 변형하는 담론적 실천들이 있고, 담론적 투쟁이 벌어지는 제도적 장이 있다. 슈메이커의 주장이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수준에서 어떤 '사회적 가치'가 광범위한 합의를 획득해야만 한다.

슈메이커는 정치 이념의 '안감'과 '겉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때 '안감'은 단지 철학적 가정만을 의미할 수 없다. 그것은 집단적 체험의 차이, 사회 구조 내의 서로 다른 위치들, 구조적 환경이 강제하는 이해관계의 대립, 각 주체들이 속해 있는 담론적 장의 차이를 포함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토양이다. <이념>이 추구하는 이념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 상호 계몽은 바로 그 토양의 실질적 개혁과 함께 갈 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티븐 호킹이 돌아왔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외치며 그가 돌아왔다고 여기저기서 호들갑이다.

호킹의 내공이 세긴 센 모양이다. <위대한 설계>(전대호 옮김, 까치 펴냄)가 만만하게 읽히는 책이 아님에도 나오자마자 '아마존(amazon.com)'에서는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고 국내에서도 출간되자마자 화제를 몰고 왔다. 이 책을 통해서 호킹이 '가장 많이 팔렸으면서도 가장 읽히지 않는 책'의 저자라는 오명까지 떨쳐버릴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신의 존재'를 결정적인 한방으로 날려버린 든든한 무신론자 동지를 얻었다고 의기양양한 것 같다. 한편, 또 다른 사람은 신에 대한 호킹의 경박하고 불경한 태도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투다. 혹자는 호킹이 우주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위대한 설계>는 그 많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간의 역사>의 변주곡이고 후일담인 것 같다. 사실 그는 늘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위대한 설계>(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까치 펴냄). ⓒ까치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이미 "우주는 어디서 왔을까? 우주는 어떻게, 어떤 원인으로 시작되었을까?" 같은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데 너무 골몰해서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를 물을 틈이 없었다"는 점을 고백했었다. 또 "한편, '왜(이유)'를 묻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철학자들)은 과학적 이론의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따라오지를 못했다"고 부연하면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규명 작업은 이미 철학자의 손을 떠났고 과학자의 몫이 되었음을 분명히 했었다.

호킹은 이런 맥락에서 우주의 기원과 진화와 미래가 '어떻게' 또 '왜' 그러한지에 대한 현대 과학적 해답을 제시하는 작업을 <시간의 역사>를 통해서 시도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의 서문에서 그를 대신해서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시작과 종말이 없는 우주, 그래서 조물주가 할 일이 없는 우주라는 결론이다"라고 적고 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단호한 태도는 이때 이미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교황과 호킹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81년 바티칸에서 현대 우주론에 관한 학회가 열렸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학자들 앞에서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항상 자연과학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우주의 근원에 관한 궁극적 미해결점을 안고 있다. 우리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진리라 믿는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으로 내어 주겠지만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종교가들이 알아서 고민할 터이니 (아니면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 입을 다물라는 주문이었다. 호킹도 이 학회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교황을 알현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받아쳤다.

"나는 내가 방금 학회에서 했던 강연의 제목이 우주에는 시초나 창조의 시기가 없었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음을 교황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이런 호킹이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위대한 설계>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더 정교하고 더 적극적이고 더 구체적이다. <시간의 역사>의 위대한 변주가 시작된 것이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존재할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오래된 같은 질문이 시작된다. 호킹은 '철학자는 죽었다'면서 우주의 양자역학적 본성을 바탕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연주를 시작한다.

양자역학적 본성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성 원리를 수반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하나가 정확하게 결정되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덜 정확하게 결정될 수밖에 없다. 공간이 비어 있다는 것은 장의 값과 그 변화율이 둘 다 정확히 0이 된다는 뜻인데,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빈 공간은 없다. 다만 양자역학적인 무(無)는 가상의 입자 쌍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양자요동을 치는 진공이라는 최소에너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양자요동에 의해서 양자역학적인 무(無)의 상태로부터 무수히 많은 미세한 우주들이 창조되고 소멸될 것이다. 이들 미세 우주들 중 일부는 임계점을 넘어서 각자 다른 자연 법칙을 갖는 어느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한 수많은 '어느' 우주들 중 하나는 급팽창을 겪고 별과 은하를 만들어 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양자요동의 자식인 것이다.

파인만의 대안 역사 개념을 도입하면 우주는 하나의 역사만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역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호킹은 이로부터 이렇게 일갈한다.

"파인만 합에 기여하는 역사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측정되느냐에 의해서 존재한다. 역사가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한다."

호킹은 변주의 완성을 위해서 '끈 이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네트워크 이론인 'M 이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시간의 역사>의 변주의 결론을 내린다.

"자발적 창조야말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 신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결국 호킹의 견해를 따르자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마치 에셔의 '그림을 그리는 손'에서 서로를 그리는 두 손처럼.

<위대한 설계>를 통해서 호킹의 명확하고 개연성 있는 논리 전개 솜씨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왜'라는 논의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오는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이 책은 과학이 현재 알려져 있는 과학적 인식 체계를 통해서 '왜'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를 우아하고 명쾌하게 보여주는 책이었고, 이것은 전적으로 그의 미덕에 기인한다.

또 <위대한 설계>는 왜 이런 종류의 책을 여러 이론을 조망하듯이 아우를 수 있는 호킹이 써야만 하는가를 보여준 책이기도 하다. 그의 우아한 형식미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철학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호킹의 이런 시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고 공유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명쾌한 논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관건은 결국 그의 제안이 관측적으로 얼마나 증명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일종의 '통일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내세운 M 이론에 대한 좀 더 명쾌한 관측적 결론이 필요할 것 같다.

무엇보다 <위대한 설계>는 호킹의 멋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주제 면에서나 내용 전개 면에서나 여전히 전작인 <시간의 역사>의 담론을 답습하고 있고 좀 까칠하게 보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아직은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좀 더 세밀하고 친절한 후일담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만큼 호킹이 집요하게 이 문제에 매달린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쉽지만 그의 전혀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쁨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설계>는 현재 시점에서 여전히 호킹의 청사진이고 <시간의 역사>의 변주곡이며 후일담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