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간의 대화
폴 슈메이커의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이하 <이념>)은 무려 1000쪽 가까이 되는 방대한 책이다. 더구나 정치 철학과 정치 이론, 이데올로기에 관한 난해한 쟁점들을 다뤘다. 그런데도 이 책은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 슈메이커는 여러 이념의 논리 구조를 딱딱하게 해부하는 대신, 다양한 정치 이념이 현대 사회의 주요한 철학적·정치적 질문에 어떻게 다른 응답을 내놓고 있는지를 '논쟁적'으로 추적한다. 그와 동시에 상쟁하는 이념들 간에 '건설적' 대화가 가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일관되게 묻고 있다. 바로 거기서 저자의 정치'이론'이 제시된다.
논쟁적이면서도 건설적인 대화. 그것은 손쉬운 중도주의, 절충과 화해의 해결책을 거부한다. 그것은 교조적 진영 대결을 넘어, 정치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는 이념적 응답을 모색한다. 그래서 이 책은, '진보-보수'의 대립 속에 사회적 가치, 철학, 이념의 성숙이 지체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널리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데올로기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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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폴 슈메이커 지음, 조효제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이념>의 원제는 "From Ideologies to Public Philosophies"다. 번역자는 저작 전체에 걸쳐 'ideology'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념'으로 번역했다. 아마도 번역자가 이런 결정을 한 까닭은 슈메이커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한국에서는 주로 '이념' 대립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슈메이커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비성찰성, 폐쇄성 등의 속성을 부여한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현실 인식과 사고를 일정 방향으로 인도하거나 왜곡하는 특수하고 편협한 렌즈"(77쪽)며, 그래서 "상호주관적 합의 형성을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이런 속성이야말로 이데올로기가 정치 행동과 투쟁을 이끄는 힘을 갖게 만드는 근거다.
왜냐하면 지성과 숙의는 명백해 보이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데 반해, 정치 행동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확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의심과 확신 중 무엇이 더 낫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적 확신은, 그것의 진리성과 타당성에 관한 성찰의 결과로서 획득돼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종종 이런 성찰을 막는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이념이라는 나무의 뿌리
그렇다면 견고한 신념 체계로 구성된 상쟁하는 이념들이 서로 건설적 대화와 대결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념 논쟁이 정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공공선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는 동력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성찰하고 숙의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이 <이념>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여기서 저자는 각 정치 이념의 평가로 곧장 들어가는 최단 경로가 아니라, 그 토대를 이루는 철학적 가정과 정치 원리를 추적하는 긴 여정을 택했다.
저자는 각 이념이 세계·인간·사회에 관한 특정한 철학적 가정, 그리고 정치의 근본 질문들에 관한 원리적 입장을 갖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념의 뿌리를 이루는 이 '암묵적' 가정과 원리야말로 이념 간의 대화를 막는 요인이자, 또한 대화로 들어가는 문을 열 열쇠다.
<이념>은 이념의 나무들을 단지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 뿌리로 깊이 들어가 '좋은 나무'를 키울 방법을 찾고 있다. 그 결론이 바로 '다원적 공공 철학'이다.
다원적 공공 철학
저자에게 '다원적 공공 철학(plural public philosophy)'은 이념들 간의 대화와 합의 형성을 위한 철학적 토대다. 그것은 각 이념의 강점과 약점, 정치 공동체에 대한 잠재적 기여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이다. 또 특수한 정치적 입장과 규범적인 보편성 요청을 성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전제다. 그 공공 철학은 어떤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는가?
저자의 주장은 네 가지 층위에 걸쳐있다. (1) 가치 지향 : 정치 이념은 특정 집단의 배타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선의 관점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2) 철학적 가정 : 정치 이념은 세계와 인간 본성의 복잡성, 사회 권력의 다원성, 인식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3) 정치적 덕성 : 정치이념은 차이에 대한 관용과 상호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4) 정치 노선 : 정치 이념은 어떤 절대화된 이념에 따라 사회와 인간을 재조직하려는 극단주의를 거부해야 한다. 다원성, 공공성, 관용과 절제가 그 핵심이다.
저자는 다원적 공공 철학이 단지 중도, 절충을 뜻하지 않으며, 이념들 간의 합의, 화해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건설적인 논쟁과 상호 계몽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제시된다. 치열하게 논쟁하되 그 논쟁은 정치 공동체의 공공선에 기여하고 서로를 계몽시키는 계기가 돼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려면 어떤 공동의 지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정치 이념
위의 관점에서 슈메이커는 19세기 이래 인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12가지 정치 이념을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가 철학적 가정, 정치 원리, 정치 이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각 이념들을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를 그림으로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위의 분류 체계 하에 전개되는 긴 이념사적 서술에서 두 가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하나는 다원적 공공 철학의 원환 '내부'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선에 관련된다.
먼저 원환의 '내부'를 보자. 저자가 다원적 공공 철학에 기초한 이념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좌·우익 급진주의다. 현대 자유주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다. 현대 보수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전통적 보수주의라는 두 이념을 결합시켰다. 급진 좌파는 사회민주주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급진 페미니즘과 생태주의를, 급진 우파는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등을 포괄한다. 저자는 이 이념들이 공공선이라는 공동의 목표 하에 성찰적 대화를 해가야 함을 강조한다.
다음은 '내부/외부' 경계선의 문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급진주의(radicalism)'와 '극단주의(extremism)'의 구분이다. 이 구분 자체는 새롭지 않다. 사회·정치 운동 연구에서 이 구분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양자를 나누는 핵심 기준은 다원적, 민주적, 입헌적 원리와 제도를 긍정하느냐 아니냐다. <이념>에서 새로운 것은 이 구분을 다원적 공공 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급진주의는 다원 사회를 개선하는 동력이지만, 극단주의는 그에 대한 위협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다원적 사회는 유토피아 사상과 허무주의에 의해 그 존립이 위협과 침해를 당해 왔다."(873쪽) (좌우를 막론하고) 총체적 현실 부정과 총체적 전복의 이념, 또 종종 그에 수반되는 냉소주의는 일견 가장 '급진적'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세계의 실제적 개선을 가로막거나 심지어 심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과 <이념>의 메시지
<이념>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나아가 한국 사회와 정치에 줄 수 있는 함의는 무엇일까? 이 저작의 관점에서 한국의 이념 대립을 성찰해본다면,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념담론의 범람 속에 다원적 공공 철학이라고 하는 '안감의 결핍'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때론 이 결핍이 인지되지도 못하고, 때론 인지되었으나 정치적 요인에 인해 그것의 공론화가 억제된다. 슈메이커가 이 상황을 표로 만든다면 아래와 같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A↔B] 갈등이 격렬하고 요란스럽게 계속되는 동안 [X→Y] 방향의 발전이 지체되고 있음이 은폐되고, 그 결과 [C↔D]의 이념 논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게 핵심이다.
"너는 진보냐, 보수냐, 자유냐? 좌냐, 우냐, 중도냐?" 하는 이념적 추궁이 빈번하다. '좌빨, 친북, 수구, 꼴통' 등, 낙인과 거부의 어휘가 가득하다. 자신만이 '진정한 진보', '정통 보수'라 주장하고, 이를 통해 권위를 강요하는 이념적 순수주의가 잔존한다.
하지만 자신과 타인의 이념이 터하고 있는 철학과 가치, 또 그것이 정치 공동체에 의미하는 바를 성찰하는, 이념적 진정성에 허용된 땅은 좁다. 지금 <이념>은 이념 대결 안에서 이념을 사유하는 것을 넘어, 이념 대결의 뿌리를 사유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몇 가지 이견
하지만 <이념>에 대해 이의가 없지 않다. 먼저 이 저작의 '전체주의(totalitarianism)' 개념이 그러하다. 전체주의 개념은 다양한 맥락에 놓일 수 있고, 그 맥락에 따라 사상적·이론적 의미가 달라진다. 어떤 개념의 의미의 중핵을 파악하기 위한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개념이 무엇과 대조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슈메이커는 '전체주의 이념'과 '다원적 정치 이념', '다원적 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적"(151쪽)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 개념 쌍은 다원·자유민주주의의 전통에서 이뤄진 비교정치학 연구에서 친숙한 것이다. 이들의 전체주의론은 '전체주의'로 명명된 사회의 동질성을 과장하고, 그 역동성을 폄하하며, 그것을 악마화함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미화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 블록 전체를 전체주의로 비판할 때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는 분명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여전히 논쟁적으로 남아 있지만, 슈메이커는 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성찰성의 결여는 더 실질적인 철학적, 이론적 문제로 이어진다. 강한 가치 평가적 대조법에서는 항상 '인정/배제'의 정치학이 작동한다. 여기서는 무엇이 '내부'로, 무엇이 '외부'로 간주되느냐가 중요해진다. <이념>에서 '전체주의'는 '다원적 공공 철학의 적'이라는, 더 상위의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전체주의와 더불어 '다원적 공공 철학의 적'으로 간주된 이념은 무엇인가? 바로 '좌·우익 극단주의'다.
그런데 여기서 '극단주의 좌파'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놀랍다. '反신자유주의 강단 좌파'(네그리, 하트), 포스트구조주의(푸코, 데리다, 무페), 포스트모던 페미니즘(버틀러), 심층 녹색주의(돕슨) 등이 극좌로 분류된다. 이것은 이들을 '다원민주주의의 적'이라는 대범주 하에 공산주의, 파시즘과 나치즘, 종교적 근본주의와 동급으로 놓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이념 이해 자체가 이념적으로 경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그런 의혹의 근거는 이 저작의 이론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심원 모델' 자체에 있다. 원환의 중심에는 현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있다. 그 주변에 급진주의자들이 있다. 사회민주주의가 그 중 하나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20세기 정치의 양대 기둥의 하나를 이뤘던 사회민주주의가 동심원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시 이 동심원의 중앙에 있는 '현대 자유주의'와 '현대 보수주의'는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을 뜻하는 게 아닐까? 보편적 언어 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은 실은 미국적 맥락이 아닐까? 우리는 저자의 철학적, 메타 이론적 메시지를 수용하면서도 저자와는 다른 이념의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이념이 뿌리내린 토양
<이념>이 터한 역사적 준거를 묻고 있는 위의 질문들은 이 저작이 다루지 않고 있는 더 깊은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바로 저자가 말하는 '철학적 가정'이 놓여 있는 더 넓은 역사적 지평, 체험의 지평, 이해의 지평에 대한 사회학적 질문이다. 저자가 정치 이념의 뿌리를 캤다면, 남겨진 과제는 이념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적 토양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 토양에서 토질 개선의 방법을 찾아야만 '이념의 대화'가 가능하다.
존재론과 인간학, 사회론과 인식론에 관한 슈메이커의 논의는 대단히 체계화된 지적 담론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처럼 지성화된 담론의 저변에는 그 시대와 사회의 생활세계, 역사적 어휘들과 담론의 질서가 놓여 있다. 그것을 생산, 재생산, 변형하는 담론적 실천들이 있고, 담론적 투쟁이 벌어지는 제도적 장이 있다. 슈메이커의 주장이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수준에서 어떤 '사회적 가치'가 광범위한 합의를 획득해야만 한다.
슈메이커는 정치 이념의 '안감'과 '겉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때 '안감'은 단지 철학적 가정만을 의미할 수 없다. 그것은 집단적 체험의 차이, 사회 구조 내의 서로 다른 위치들, 구조적 환경이 강제하는 이해관계의 대립, 각 주체들이 속해 있는 담론적 장의 차이를 포함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토양이다. <이념>이 추구하는 이념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 상호 계몽은 바로 그 토양의 실질적 개혁과 함께 갈 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