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창비 펴냄)은 등단 11년차에 접어든 김중혁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가의 문학적 야심은 마지막 쪽, 작가의 말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이렇게 쓴다.

"이것은 좀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랄 만한 말은 아니다. 좀비 이야기는 언제나 좀비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불가해한 타자에 대한 공포이거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은유였다. 그렇다면 김중혁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대답은 바로 다음 문장에 있다.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좀비들>이라는 제목을 쓰고 있지만 장르의 공식을 따르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신실한 독자의 입장으로 작가의 말을 따라 읽는다면 <좀비들>의 되살아난 시체는 잊히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고 사람이며 그들의 죽음일 것이다.


▲ <좀비들>(김중혁 지음, 창비 펴냄). ⓒ창비
통신 회사 '에볼(EVOL)-LOVE를 거꾸로 쓴 것? 혹은 '소닉유스'의 세 번째 앨범 제목?-감식반에서 일하는 '나', 채지훈은 외로운 남자다. 업무용 밴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내비게이션에 표시되는 안테나 수신 감도를 측정하는 그에게는 돌아갈 집과 가족이 없다. 해가 있는 동안엔 차를 달리며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차에서 잠을 잔다. 그는 돌아보지 않기 위해 고립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친구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옛날 이야기를 해야 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옛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를 지워버려야만, 어제 이전의 모든 일들을 깊은 땅속에 묻어버려야만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5쪽)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과거와 절연된 삶을 살고 있는 그가 유일하게 깊은 땅속에 묻어버리지 않은 것은 형이 남긴 50장의 엘피판(LP)뿐이다. 그것은 박제된 기억이다.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과거의 기념품. 하지만 체호프가 이야기했듯 "작품에 총이 나온다면 그 총은 발사되어야만" 하고 엘피판이 나온다면 그것은 플레이되어야만 한다. 김중혁은 여러 단편들에서 선보인 바 있는 기발한 상상력을 다시 한 번 펼친다. 차량용 턴테이블인 '허그 쇼크(Hug Shock)'가 바로 그것. 우연히 광고를 보고 찾아간 '나'에게 대리점의 판매원은 설명한다.

"충격 완화의 신기원을 이룬 제품이라고 설명하면 어떨까요. (…)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충격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거예요. 충격이란 건 말이죠, 받아들이는 쪽에서 마음만 먹으면 아무 일도 아닌 게 될 수 있는 겁니다. (…) 우리는 새로운 물건을 발명한 게 아니라 충격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개발한 겁니다." (12쪽)

<좀비들>의 이야기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허그 쇼크'를 장착한 순간. '스톤 플라워'의 엘피판을 플레이하는 순간.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어제로부터의 노래, 죽음과 이어진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다름 아니다. 오르페우스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지옥까지 쫓아가 기어이 뒤를 돌아보는 존재다. 따라서 형이 사랑하던 스톤 플라워의 음악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가사를 모두 외울 지경"이 된 순간 시작되는 '나'의 모험은 애써 외면해왔던 기억, 형의 죽음이라는 충격을 온몸으로 마주보고 끌어안기 위해 떠나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이 될 것이다.

허그 쇼크는 내 삶도 바꾸었다. 형이 없었다면 LP가 없었을 것이다. LP가 없었다면 허그 쇼크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허그 쇼크가 없었다면 홍혜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홍혜정이 없었더라면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14쪽)

'나'의 말처럼 도미노는 계속해서 쓰러진다. 스톤 플라워는 역사 도서관으로, 사서인 뚱보130에게로, 스톤 플라워 리더의 자서전을 번역한 홍혜정에게로, 그녀가 사는 곳이자 어떤 통신도 잡히지 않는 '무통신 지역' 고리오 마을로, 의문의 노인인 케겔과 제로에게로, 마을 사람들이 죽는 순서를 맞추는 '다이토 게임'으로, 홍혜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녀의 딸 홍이안에게로 쉼 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딸깍, 마침내 좀비가 등장한다. 103쪽. 홍혜정을 추억하며 홍이안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 뚱보130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2층을 향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죽음 이후의 냄새"를 풍기며 앉아 있는 좀비를 마주한다. 그는 말한다.

혹시 좀비의 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건 엄청난 경험이다. 좀비와 대면한다는 건 허공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 (105쪽)

작가가 좀비의 등장을 최대한 늦추며 그려왔던 '나'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자. 비록 뚱보130과 홍혜정, 홍이안을 만나며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죽음이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 같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죽음을 생각하면 숨이 막힌다"(67쪽)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죽음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다이토 게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엄마처럼 따르던 홍혜정까지 만나지 않기로 결심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좀비를, 죽음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소설적 순간. 그것은 독자에게 잠시 책장을 덮고 호흡을 가다듬을 것을 요구하는 마주침이다. 하지만 다시 펼친 책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오히려 뚱보130을 독려하며 좀비와 맞서는 '나'의 모습이다.

"모르겠어. 침착해야 돼. 우선 해치우고 보자. 네가 몸 위쪽을 맡아. 내가 다리 쪽을 공격할 테니까." (106쪽)

"야, 찌르지 말고 머리를 후려쳐." (107쪽)

침착하게 머리를 후려침으로써 비교적 간단하게 좀비를 막아낸 '나'는 좀비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정당방위였다는 자기 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숨을 막히게 했던 죽음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되지 못한다. 그는 방망이 끝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쾌감을 느끼며, 마을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뚱보130의 제안을 거절한다.

"일단 여기서 상황을 좀 지켜볼게. 저게 좀비인지 뭔지는 알아야지. 저게 어째서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그건 알아야지. 짐을 싸도 그때 싸야 할 것 같아." (114쪽)

바로 이 지점부터 소설은 길을 잃는다. 아니, 전혀 다른 소설이 된다. 초반 100쪽 동안 우리가 만난 주인공은 분명 죽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 받는 인물이었다. 그것이 그를 그답게 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은 흔한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물론 인물은 변한다. 문제는 변화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마치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경구를 패러디라도 하는 것처럼. ("사는 대로 생각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한 대처법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도미노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빨라진다. 좀비들이 떼를 지어 나타난다. 군인들이 마을을 봉쇄한다. 고립된 상황에서 홍이안과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음모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장군(정 장군)이 등장하고 좀비와 고리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이 차츰 윤곽을 드러낸다.

불가해한 실재의 침입이었던 돌아온 시체들의 존재는, 이제 진부한 군사적 음모의 희생양으로 설명된다. 좀비들이 (작가의 말에서처럼) 마을 사람들이 잊고 있던, 하지만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런데 궁금한 점. 군부대에서 좀비를 구해내 지하실에 가두고 특수 제작한 리모컨을 통해 그들의 공격성을 제어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과연 윤리적인가?)

사이사이 주인공은 엄마와 형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으며 초반에 등장했던 '나'와의 연속성을 회복하려 들지만 그럴수록 이야기의 균열은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대면하기 위한 '나'의 오르페우스적 여정은, 어느 순간 '악의 축'인 '정 장군'과의 대결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의 내면에 공감하지 못한다. 단지 복잡하게(동시에 익숙하게) 꼬인 상황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다. 그것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학습된 관습적인 궁금함이다. <좀비들>에서 그 궁금증이 해소되는 과정 또한 그런 매체들이 제시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거나 소설의 막바지에 다다른 '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우는 동시에 삶이라는 이야기를 바라보는 용기를 배운다. 그간의 깨달음을 정리하는 마지막은, 그것이 그리고 있는 장면 자체로 꽤나 감동적이다. 결국 이것은 다 큰 남자의 성장담이고(어디까지나 영화 <다이하드>를 존 매클레인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그리고 등가로서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오래된 교훈이다. 피할 수 없다면 마주보아야만 한다. 깨달음의 계기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아무려나, 채지훈에게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에게 삶은 일직선이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하나의 사건은 이전 사건의 결과이자 다음 사건의 원인이었다. 형이 없었다면 LP가 없었을 것이다. LP가 없었다면 허그 쇼크도 없었을 것이고, 허그 쇼크가 없었다면 홍혜정과 홍이안과 뚱보130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도미노가 다음 도미노를 넘어뜨리듯 모든 사건은 연결돼 있었다. 처음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이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마지막 도미노는 무엇일까. 마지막 도미노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사건이 될 것이다. (375쪽)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은 도미노를 닮았다. 고만고만한 사건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하지만 우리가 도미노를 보며 기대하는 것은 블록이 넘어지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형태지 376쪽만큼의 직선이 아니다. 흔한 음모론을 향해 달려가는 일직선의 이야기 속에서 장르의 쾌감은 물론, 잊고 있던 기억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까지도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김중혁이 <펭귄 뉴스>(문학과지성사 펴냄)와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펴냄)에서 보여주었던 솜씨를 생각하면 그저 애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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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런샹의 <중국 음식 문화사>(민음사 펴냄)에 달린 주석은 모두 번역자인 주영하 교수가 단 역주이다. 주석이 하나도 없었던 원저에 옮긴이가 600여 개의 상세한 주석을 단 이유는 중국의 대중서가 한국에서는 대중이 읽기에는 어렵고 그만큼 알지 못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역사에 관한 대중서를 중국어로 옮길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한국 역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중국의 독자들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일이다. 이 주석들이 옮긴이의 이 책에 대한 애정과 번역의 진실성을 입증해주는 훈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중국에서 대중서라는 사실이 내용이 가볍거나 엄밀하지 못함을 뜻하지 않는다. 대중서라는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음식 문화가 지닌 함의들을 손쉽게 이해하도록 하고, 지루한 학문적 논증들을 생략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학문적 논증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림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예절과 풍속, 문학, 음악, 철학 등에서 중국의 음식이 어떻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가을비가 내리고 맑게 갠 날 앞산이 문득 앞에 다가와 있는 것과 같다.


▲ <중국 음식 문화사>(왕런샹 지음, 주영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 책의 원제는 "백성은 밥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이며, 부제가 "중국 음식 문화"이다. 백성이 밥을 하늘로 여긴다 함은 고금동서에 모두 해당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의 밥상 문화를 밝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대개 고고학의 발굴 자료나 문헌의 기록들은 평범한 백성들의 몫이 아니라 지배 계층이었던 까닭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음식 역시 높은 사람들의 것이다. 하기는 기장밥이나 조밥에다 절인 채소나 채소를 끓인 국을 놓고 먹는 것이 서민들의 음식이니 그 음식 문화를 기록하기도 논할 것도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높으신 분들의 음식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것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먹는 것에서라면 결코 지지 않으려 한다. 삶에 있어서 즐거움의 가치를 집이나 옷에 두기보다는 음식에 두는 경향이 많다. 이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은주 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의 지배층의 음식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왜 지금도 이렇게 음식을 중요시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지배층의 문화는 아래로 내려가 일반인들의 밥상까지도 화려하게 변모시키는 것이다.

주대의 연회에 있었던 솥에 담긴 고기 종류만 해도 입이 벌어지고, 그 이후로 내려가도 음식은 더욱 더 화려해지기만 하지 결코 쇠락하는 경향은 없다. 이런 중국의 음식 전통이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지금의 중국 백성들의 밥상을 중시하는 전통을 만들어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황제와 귀족들의 음식 문화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맛있는 음식은 오로지 황제와 대신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문화적 자산이며, 아울러 중화 민족의 것이며, 동시에 백성들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시대가 지니고 있는 문화의 정도를 살피기 위해서는 황제의 식탁을 언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행한 행동과 말도 함께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음식 문화를 이야기할 때 어디서나 부딪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의 음식들은 보잘 것 없었으며, 가진 자들만이 먹고 마시고 즐겼다. 하물며 사회주의 국가에서 황제와 귀족의 음식 문화를 논하면서 이렇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황제와 귀족들은 말로는 백성을 위하면서 실제로는 자신들의 입맛을 즐겼던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황정견이나 소식 같은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전체로 보면 그런 문화의 흐름이 5000년이나 지속되고서야 일부의 대중들이나마 그 음식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위치에 이른 것이다. 어쨌거나 이 책의 원제가 주는 의미는 실제로는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명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이 황제와 대신들의 밥상 문화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대도 그 음식 문화의 흐름은 마치 커다란 양자강의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며 흐르듯이 도도한 흐름이 아닐 수 없다. 은나라의 음주와 주나라의 음식을 먹는 자리에 부과한 수많은 예절과 형식들, 춘추 전국 시대의 음식과 관련된 원한과 정변, 한나라의 서역과 교류를 통해 풍부해진 음식 재료, 위진 남북조의 사치스러운 풍조, 당나라의 황제가 내리는 음식과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음식, 북송과 남송의 북쪽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풍부해진 음식 문화, 명·청 시기의 번성함과 서로 융합되는 음식 문화 등은 이런 도도한 문화와 풍습의 흐름을 적절하게 드러내주거니와 음식이란 것이 얼마나 정치와 풍속에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수많은 예화와 음식과 관련된 문학 작품들이 적절하게 인용되어 지루하지 않게 음식의 세계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마치 한 상의 거나한 만한전석(滿漢全席·18세기 초 청나라에서 기원한 만주족, 한족의 음식을 총망라한 황제의 상차림)을 차려놓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저자의 이야기는 두툼한 분량에도 손쉽게 책장을 넘기게 하는 재미로 가득 차 있다.

전반적으로는 이 책은 흥미로운 중국 음식, 더군다나 호화롭기 짝이 없는 중국 음식으로 풀어쓴 중국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저자의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많이 있다. 특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선사 시대인 신화 시대의 고대인에 대한 피상적인 설명과 고대인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자신을 중국의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오만함을 느끼게 한다.

고대인의 날것을 먹는 생식에서 불을 쓰는 화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나 농업과 목축의 발달은 저자가 인식하듯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고대인들도 지식의 축적이 오늘날처럼 풍부하지 않았을 뿐이지, 지혜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 지혜들이 모이고 쌓여서 지금의 문명을 만든 것이다. 수렵민이라 하더라도 자연에 대한 오랜 관찰과 지혜를 바탕으로 농업과 목축을 발전시킨 것이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고대인을 무시하는 태도는 현대에 사는 문명을 갖추지 못한 원주민을 미개인이라 폄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옮긴이가 주석에서 지적했듯이 중화주의에 매몰된 역사관은 이 책을 읽는 우리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중화주의는 중국의 것은 모두 무척이나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자신들의 것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이를테면 중국이 모든 문명의 발상지이며 외부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중화 문화에 흡수되었다는 인식이다.

장건이 서역에서 가져온 종자들은 원래 있던 식물들의 개량종을 가져온 것뿐이지 그 모든 식물들이 중국에도 있었다 하는 서술 같은 것이 그 사례이다. 하지만 그 영역이란 것이 그 당시 중원의 중국과는 관계없는 변방의 지역들에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시점에서 지리는 지금의 강역을 중국으로 삼고, 그 적용 시대는 무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과의 마찰에서 보여주듯이, 그리고 동북공정으로 우리와 마찰을 빚었듯이,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 중화주의가 수많은 불협화음을 빚을 중국인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란 사실을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중화주의가 이전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이념으로 주변과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점은 이 책이 다수의 중국 독자를 위해서만 쓰였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매우 크다. 비록 이웃한 나라의 음식 문화사이기는 하나 우리에게도 문화사 서술에 많은 시사점들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이 책에 필적할 일관된 <한국 음식 문화사>가 없다.

이 책을 번역한 주영하 교수는 <한국 음식 문화사>를 쓸 수 있는 저자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풀무원 김치박물관의 학예연구사를 지냈으며,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민속학을 전공했으며, 일본에서 연구교수를 지내 동양 삼국의 음식 문화에 대한 천착이 남다르다.

벌써 여러 권의 음식 문화에 관한 저서들이 그의 내공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제 여기에서 젊은 날 공부의 한 매듭을 맺었으니 그의 다음 과제는 <한국 음식 문화사>가 되어야 한다. 그의 다음 작업을 고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 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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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한다. 기자는 다운족(down族)이었다. 전화선을 꼽는 모뎀부터 초고속 인터넷까지 인터넷 사용 시간 대부분을 0%에서 100%까지 올라가는 '상태 바'를 바라보며 쾌감을 느끼곤 했다. 보고 듣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검색하고 찾아내 실행시켰다는 만족감을 추구하던 중증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다운족에게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은 천국이었다. 와레즈(warez) 사이트에서 수백 달러씩 한다는 고가의 프로그램을 공짜로 내려 받아도 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구입할만한 여유도 없었고, 누군가가 불법 복제라고 호통 치지도 않았다. 저작권의 개념도 모호했던 시절, 눈에 불을 켜고 승냥이처럼 탐욕스럽게 하드디스크 용량을 채워나갔다.

'소리바다'를 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MP3 플레이어 하나씩은 다 들고 다니는 요즘은 그다지 신기한 게 아닐지 몰라도 당시엔 큰 충격이었다. 매장에서 찾기도 힘든 곡을 몇 분이면 공짜로 구할 수 있었고, 더구나 그렇게 찾은 CD 한 장에 수백 곡씩 집어넣을 수 있었다. 소리바다의 채팅창은 언제나 선호하는 장르의 MP3를 교환하려는 이용자로 북적였다.

그때 내려 받았던 명곡은 지금도 가슴을 울릴 때가 있지만, 당시 소리바다는 더 이상 없다. 들을 틈도 없이 쌓여가는 파일에 질려 소리바다를 찾던 발길이 줄어들 즈음 소리바다가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고, 다른 여타 음원 업체와 마찬가지로 유료화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만 어쩌다 접했을 뿐이다. '무료 다운로드'는 비도덕적이라는 가치관이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 <소리바다는 왜? 대한민국 IT는 왜 세계적인 스타를 만들지 못하는가>(김태훈·양정환 지음,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대한민국 IT는 왜 세계적인 스타를 만들지 못하는가"라는 부제를 단 <소리바다는 왜?>(김태훈·양정환 지음, 현실문화 펴냄)를 접했을 때도 처음엔 크게 흥미가 돋지 않았다. 요새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 나오는 불법 다운로드 근절 캠페인 광고를 보면서 괜스레 마음 한편이 켕기듯이, 소리바다에 대한 추억에는 곧 '송 라이터'의 고민과 노력이 밴 결과물을 너무 쉽게 향유했었다는 일종의 '죄책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소리바다에 대한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음원을 내려 받는 데 있어서 정당한 수익이 이해당사자 사이에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소리바다에 그 명제가 적용됐던 과정은 '최악'이었다. 어쩌면 소리바다는 음악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일부 제작자와 대기업에 희생된 중소 정보통신(IT) 기업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과정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차단과 배척 그리고 추종

소리바다의 과거를 되짚기 전에 먼저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지난해 아이폰이 한국에 상륙해 돌풍을 일으켰을 때 한국은 동아시아의 'IT 강국'에서 국내 제조사와 통신사만을 싸고 돈 'IT 쇄국'으로 전락했다. 일부 '얼리어답터'를 제외하고 대리점에서 추천하는 '공짜 폰'에 익숙했던 소비자에게 아이폰은 '전혀 새로운 무엇'이었고, 그 동안 새로움을 거부하고 국산 표준 플랫폼만을 고수하던 정부에 배신감을 느꼈다.

재미있는 건 아이폰의 상륙 전과 상륙 후 제조사들과 통신사들이 보여준 정반대의 행보다. 아이폰이라는 비교 대상이 없었던 시절에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하는 국내 제조사들의 시대에 앞서가는 단말기와 어디든 터지지 않는 곳이 없었던 통신망을 자랑해 왔다. 아이폰 도입이 초읽기에 들어갔을 때도 한국 소비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DMB 기능 등이 없다는 점을 들며 현지화에 실패할 거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하지만 아이폰의 등장 이후엔 달랐다. 앞서 출시됐던 삼성전자의 옴니아 모델이 새삼스레 '스마트폰'이라는 콘셉트로 다시 홍보되기 시작했다. 아이폰 이용자들이 그동안 국산 모바일 기기에서 이용할 수 없었던 와이파이의 유용성을 깨닫게 되자 그동안 국내 단말기에서만 제외되어 왔던 무선랜 기능이 앞 다투어 탑재됐다.

결국 제조사들은 경쟁자가 없는 시장에서 비슷비슷한 성능의 단말기로 재미를 봤고, 통신사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무선 데이터 통신 요율처럼 폐쇄적인 이동통신 환경을 구축해 이들을 뒷받침 한 셈이다. 이동통신 시장은 진정한 의미의 '시장'이 아니었다. 외국에서 건너온 정체불명의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국내 기업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견고한 카르텔을 깨서 시장의 '파이'를 불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배척과 차단, 그러다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면 곧바로 그 흐름을 추종하는 전략은 한국 경제에서 곧잘 먹혀들어갔다. 하지만 그러한 전략이 꼭 외부의 강력한 제품이나 서비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그들이 쌓아온 장벽은 참신한 아이디어 하나만을 가지고 시장에 뛰어든 중소기업에도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불친절함'을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바로 소리바다의 개발자 양일환·양정환 형제였다.

소리바다의 화려한 등장과 유료화 선언까지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형제는 2000년 5월 그동안 만들어왔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국에 없었던 새로운 MP3 서비스를 만들었다. 인터넷 이용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파일을 전송할 수 있는 P2P 기능으로 '소리바다'를 선보인 것이다. 이미 미국의 음원 전송 프로그램인 '냅스터'가 저작권 문제로 소송에 들어간 상황에서 분쟁을 각오한 도전이었다.

소리바다가 처음에 각광을 받은 건 기자의 경우처럼 무료로 손쉽게 음원을 구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음원을 만드는 장본인들, 제작자와 음반사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두 형제 역시 이 점을 염두에 두었고, 광고나 소정의 이용료를 통해 수익 모델을 만들어가려는 계획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불쑥 등장한 경쟁자에 대한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소리바다의 몰락 단계는 크게 3가지다. 2000년 음반산업협회의 음반 복제 금지 가처분 신청, 2004년 한국음원제작자협회와의 법적 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음원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 SK텔레콤과의 대결이다.

음반산업협회가 제기한 문제는 인터넷 음원에 대한 저작권 개념이 국내에서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시점에서 벌어졌기에 일견 타당했다. 소리바다 역시 무료 공유를 최종 목적으로 서비스를 운영한 것이 아니기에 타협점을 모색했다.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후 소리바다는 테스트 기간을 거쳐 부분적 유료화 기능이 더해진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 이후 벌어진 분쟁은 그 성격을 조금 달리했다. 정부가 2003년 인터넷 음악 서비스의 유료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음원 시장이 본격화되자 많은 음반사들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소리바다는 오프라인 시장에서 자신들이 독점하던 영역에 침입한 이방인이었고, 이에 따라 당시 문화관광부로부터 방송 보상금 징수 단체 및 저작권 신탁관리단체의 권한을 부여받은 한국음원제작자협회의 손해 배상 소송으로 이어졌다. 정당한 보상보다는 소리바다의 퇴출을 목적으로 한 압박의 성격이 짙은 분쟁이었다.

소리바다에서 공유되는 음원 상당수의 저작권을 갖지 못했던 한국음원제작자협회와 소리바다의 싸움은 법원이 원고의 손을 들면서 소리바다가 거액의 합의금을 지불하는 결과로 끝난다. SM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대형 음반사들의 소송에 맞서 젊은제작자연대 등이 소리바다의 편에 섰지만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미국의 유사한 소송에서도 P2P업체가 패소하면서 소리바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가 측면도 있었다. 결국 소리바다는 주요 음원의 검색을 차단하는 필터링 기능을 탑재한 새로운 버전을 선보이면서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전면 유료화를 선언하게 됐다.

SK텔레콤과의 DRM 논쟁

언뜻 보면 소리바다를 둘러싼 분쟁은 인터넷에서 공유되는 음원의 저작권에 대한 가치를 정립해가는 시행착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리바다에 대한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인터넷과 모바일 시장에서 거래되는 음원의 수익성에 통신사가 주목하기 시작했고, 소리바다가 분쟁을 겪는 틈을 타 급격히 외연을 불리면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서울음반을 자회사로 둔 SK텔레콤은 '멜론'을 통해 음원 시장을 수성했고, 고초를 겪은 소리바다는 바로 뒤를 쫓는 상황이었다. 서울음반을 위시한 음반사들과 소리바다의 분쟁에서 핵심은 DRM(Digital Right Management, 디지털 콘텐츠의 불법 복제를 차단하는 기술과 서비스는 총칭하는 말)이었다. SK텔레콤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들을 수 없도록 설계된 DRM을 선보였다면, 소리바다는 더 저렴한 가격에 기간 제한이 없는 음원을 내려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인 것이 다툼의 발단이 됐다.

책에 그려진 지난한 소송 과정 속에서 소리바다는 또다시 패했다. 거대 자본을 거스를 수 없는 음반사들의 외면과 유난히 대기업에 '친절'한 정부의 판단이 여기에 더해졌다. 하지만 패소에 따른 결과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시점에 즈음하여 정부가 소리바다의 '프리 DRM'을 공식적으로 허용했고, 그 동안 소리바다의 DRM을 비난해왔던 음원 업체들이 일제히 프리 DRM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단과 배척, 그 이후 급작스런 추종 전략이 이번에도 적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장악한 인터넷 음원 시장의 모습을 어땠을까? 우연인지 아닌지 오프라인 음반 시장의 하락세는 온라인 시장의 성장으로 메울 수 없었다. 통신사의 막대한 수익에 비해 턱없이 적은 대가만이 제작자들에게 돌아왔고, 이들이 쏟아낸 한숨들이 지속적으로 언론을 통해 나왔지만 지금까지도 큰 변화는 없다. 거대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 그룹을 양산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음반 시장이 재편된 건 필연일지도 모른다.

혁신과 창의력에 대한 관용 없이 '스마트'도 없다

아이폰에는 '탈옥'이라는 편법이 있다. 앱스토어에서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을 공짜로 마음껏 설치할 수 있는 일종의 해킹이다. 애플은 탈옥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를 제공해 탈옥을 막아오지만, 탈옥 툴을 개발한 이들이나 탈옥에 성공한 이용자들을 고소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은 없다.

소비자는 일률적이지 않다. 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 얼마 정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 각각 다르다. 그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요 곡선의 정의다. 하지만 온라인 콘텐츠 시장에서 종종 기업들이 울타리를 두르고, 그 울타리를 넘어올 수 없는 이들에게 '불법'이나 '부도덕'이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합리적인 가격 조정 과정을 거쳐 더 많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보다는 경쟁을 피하고 현실의 독과점에 만족한다.

한국 음원서비스의 선구자였던 소리바다는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인터넷 음악 서비스의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음반 산업계, 음원 시장을 노리는 대기업에 휘말린 희생양이 됐다. 책 말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초의 합법적인 P2P 음원 제공사가 된 소리바다의 '뚝심'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들의 자조가 던져주는 의미는 씁쓸하다. 무늬만 'IT 강국'인 한국에서 중소기업이 살아남기가 얼마나 힘들지를 보여주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열풍 이후 정부가 IT 산업을 육성한다며 실효성이 의심되는 공허한 공약을 되풀이하는 광경을 본다. 정작 필요한 건 소리바다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혁신과 창의에 대한 관용이 없는 한 '스마트'를 외치는 구호는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높고, 소비자는 이들이 만든 장벽에 갇혀 불필요한 지출을 하게 될 거다. 소리바다의 비극이 있기 전, 그들이 열어젖혔던 '새로운 가능성'을 추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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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배의 <정보 혁명과 권력 변환 : 네트워크 정치학의 시각>(한울 펴냄)은 그동안 저자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몰두하던 연구 주제를 한번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 저자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연구자로서의 그를 기억할 수 있는 키워드는 '윈텔리즘(Wintelism)'이었다. 온라인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구성적인 권력을 '윈도우+인텔'이라는 윈텔리즘으로 정의했으니 현재의 변화하는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에 대한 연구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그의 이러한 관심사는 '지식 국가', '소프트 파워(soft power, 연성 권력)'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으며, 이 책에 소개된 많은 글의 초고가 그 과정에서 조금씩 소개되어 왔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시간동안 그가 분절적으로 소개했던 개념과 이론을 아우르는, 김상배의 네트워크 사회 권력 연구의 '정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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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 혁명과 권력 변환 : 네트워크 정치학의 시각>(김상배 지음, 한울 펴냄). ⓒ한울
우선 이 책의 미덕은, 권력이라는 정치학의 오래된 고전적인 관심사를 최근의 정보 사회 분석에 효과적으로 적용해 잘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권력=정치' 식의 무지막지한 등가관계의 분석이 아닌, '기술→정보 기술→표준 기술→권력→구조 형성'이라는 미시적 분석 경로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인터넷이나 정보통신(IT) 기기를 사용하면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오퍼레이팅 시스템(OS, 윈도우 등), 브라우저(익스플로러 등), 검색 서비스에 대한 사례 분석을 포함하고 있어서 개념·사례·이론의 구성이 매우 꼼꼼히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구나 책의 곳곳에서 사회과학에서 가장 어려운 '개념 정의'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접하는 문제에 대한 '열쇠'를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고민 없이 사용하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보편(?)적인 서비스 안에 내재되어 있는 기술력이 단지 일개 기업의 기술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표준을 장악하여 권력으로 행사되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러한 기술력 혹은 기술의 사용 정도를 정부의 힘으로 관리하려는 중국이나 쿠바와 같은 '규제 국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또 인터넷 커뮤니티, 온라인 사회운동, 온라인 재능 기부와 같은 자발적인 시민의 네트워크 효과가 나타나는 현실 온라인 공간의 모습은 어떤 가능성을 던지는가? 이런 문제들이 진지한 저자의 논술을 통해 중요한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두 번째 미덕은 이 책의 구성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가 개념, 2부가 권력 사례, 3부가 대항 권력 사례로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각 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해당 부분에서 소개한 내용에 대한 정치학 관점에서의 쟁점과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차분히 책을 따라 읽게 되면, 기술이나 정보, 네트워크라는 개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네트워크 사회에서의 권력의 실체에 대해 차근차근 계단을 올라가듯이 정말 재미있게 알 수 있다. 무릇, 사회과학의 과제가 사회의 주요 현상에 대한 개념·사례·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그러한 사회과학의 본분에 매우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미덕은 지배 권력뿐만 아니라 대항 권력의 의미를 살렸다는 것이다. 즉, 공급자 입장에서 표준을 결정하는 거대 권력만을 중요하게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일반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율과 협력의 문제 또한 중요한 가치라는 것도 비중 있게 주장하고 있다. 즉, 네트워크 정치 분야의 연구자들이 강조하는 '공급자만큼 중요한 수요자', '권력만큼 중요한 문화적 창의성', '지배만큼 중요한 동의와 협력'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강조가 제시되어 있는 만큼 매우 민주적인 관점을 가진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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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정치 분야의 연구자로서 매번 느끼는 안타까움은 인터넷이 자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정보 사회이기 때문에, 네트워크 사회로 발전하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만 사용하면 사람이나 사회가 갑자기 나아지고 발전한다고 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조차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지루함이다. 아무리 좋은 도구라도 사람이 그 원리를 알고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널려있는 수많은 기술이나 정보와 넘쳐나는 서비스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아는 만큼 이해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당연한 원리를 차분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언제까지 강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바로 그것이 네트워크 정치학에 성급한 결과물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사항이다. 이 책은 그러한 답답함의 상당 부분을 정말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부분이 있다. 또 외국 사례의 무분별한 이입이 아닌 우리나라의 현실을 끌어안음으로써 진지하고 성실하게 네트워크 사회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이해의 중요한 척도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서 느낀 저자의 또 다른 과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몇 가지 아쉬움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연구자인 나의 관점에서 보아도 책이 너무 어렵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개념 설명은 정말 정확하게 맞는 개념풀이인데, 좀 더 쉽게 쓸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학자와 일반인이 만나는 접점에서 항상 발생하는 현상일 수도 있는데, 철저한 설명의 완벽성을 좀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소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인 사례들도 좀 더 부드럽고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저자의 풍부한 고민 덕에 새로운 용어들이 꽤나 많이 제시되어 있는데 이러한 신조어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사례가 풍부하게 제시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머리에 쏙 들어오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네트워크 사회의 주요 지배 권력과 대항 세력을 서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사례에 대한 제시는 촛불 집회뿐이다. 즉, IT 강국으로서의 우리나라가 지배 권력과 대항 세력의 중요한 행위자나 의미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한 번 생각해봄직 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지배 전략을 짜는 동안, 리눅스와 위키피디아가 대안을 형성하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성찰,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일반론과 원론의 관점에서는 일단 저자가 제시하는 네트워크 사회의 구조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고 또한 맞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네트워크 사회에 대한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내는 문제들 때문에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서로 경합하는 이른바 '망제(網際·inter-network)' 구조에서 영영 멀어지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시되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인터넷 혹은 네트워크의 문제 역시 '우리의 문제'가 되었을 때 더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네트워크 사회를 연구하는 나를 포함한 다른 연구자들의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며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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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기능은 그 책을 모르는 사람에게 책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깊이 있게 전달하는 것에 있다. 한편으로 섣부른 평가를 통해 선입견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도 생각한다. 어쩌면 책에 누를 끼치는 섣부른 스포일러가 될까봐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마무리하기 전에 꼭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책은 저자의 네트워크 사회 권력 연구의 '최종 정리 버전'이 아니라 이후의 더 깊고 좋은 연구를 위한 '중간 정리 버전'이라는 것이다. 정치학의 핵심 명제는 권력뿐만 아니라 권력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을 바탕으로 또 다른 주제의 깊이 있는 후속 연구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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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 이주 여성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추석을 쇠고 이주 여성의 집에 가 보니, 연휴 사이에 초급반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이 늘었다.

"어휴, 속 터져, 속 터져.", "아무 날도 아니고 추석인데 왜 이러니?", "아이고, 답답해." 같은 생활 한국어를 가슴을 두드리거나 손가락질하는 몸동작까지 곁들여 완벽하게들 익혀 오셨다. 초급반이다 보니 평소 한글을 읽을 때는 모어 억양인데, 어째 새로 배운 말들만은 억양과 음조까지 아주 고급이다. 나는 웃었다.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은 아시아권 국제결혼 이주의 유입국이다. 2009년 한 해만도 2만5000여 명의 한국인 남성이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다. 매년 수만 명의 중국,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여성들이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간택' 과정을 거쳐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입국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외국인 여성들이 송편을 빚고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외친다.


▲ <우편 주문 신부>(마크 칼레스니코 지음, 문형란 옮김,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이런 현실이 당연해진 2010년 한국에서, 한국이 유입국이 아니라 송출국 입장인 상황을 다룬 마크 칼레스니코의 그래픽 노블 <우편 주문 신부>(문형란 옮김, 씨네21북스 펴냄)가 출간되었다. 제련소 하나 있는 캐나다 소도시, 허름한 가게에서 만화책이며 장난감을 파는 몬티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사진을 보고 고른 한국인 아내 경을 맞이했다.

'결혼 시장'에서 경쟁력 없는 남성의 환상과 욕구, 패배감이 깔린 도피가 뒤섞인 선택. 그 맞은편에는 '뭔가 변화를 원했다'고 말하는 부모 없이 자란 여성이 있다. 순종적이고 근면한 아내에게 대접 받고 살고 싶었던 소심한 남자와 모국을 떠난다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여자가 섹스를 하고 노동을 분담한다고 해서 동반자 관계가 형성될 리 없다.

몬티와 경은 서로를 마주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 있을 때에야 상대를 파악한다. 몬티는 자의로 누드모델을 하는 경, 바가지를 씌우려는 상인 앞에서 고함을 치는 경을 보고서야 자신의 아내가 마냥 조용한 동양 인형이 아님을 깨닫지만, 아내의 욕구를 무시하려고 애를 쓰고 또 쓴다. 그래야 동양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 잡지를 보면서 달래 온 자신의 욕망을 결혼으로 마침내 충족했다는 환상 속에 살 수 있으니까. 소통 없는 거래에서 출발한 관계는 자신에 대한 좌절과 서로에 대한 폭력으로 나아간다.

한국에서 한국에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을, 말하자면 경과 같은 처지일 법한 이주민들을 대하는 나에게 이 책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멀리 있다. 경이 경험하는 소소한 차별과 무지는 한국인 독자가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일본과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모른다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분노하는가. 신비로운 동양이니 순종적인 아내니 하는 말은 얼마나 불쾌한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책이 다루는 갈등은 한국 사회가 경험하는 갈등에 비해 온건하다. 몬티는 최소한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기초해 자기 아내를 골랐고, 둘의 갈등은 둘 사이의 갈등일 뿐이다. 허나 한국의 중개 결혼은 아내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체적인 결정이 아닌 경우가 많다. 한국으로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은 한국인 남편의 아내이기 이전에 중개 결혼을 주도한 한국인 시부모의 며느리이고, 그 뒤에는 한국인의 엄마로 이 밀착된 '단'문화 사회의 다인종 구성원이 된다.

경은 영어도 할 줄 안다. 제 손으로 운전도 한다. 한국으로 오는 결혼 이주 여성 중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경이 영어를 할 줄 알아 남편과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는 도입부부터 이건 어느 별나라 얘긴가 싶었고 남편의 차를 몰고 나가는 장면에서는 '운전을 하네! 이만하면 자유롭게 사는 거 아냐?'라고 생각했다.

2009년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국제결혼 가정의 60%가 200만 원 이하의 월 가구 소득으로 살고 있다. 한국어도 모르고 대체로 운전면허도 없는 여성들이 저소득 남성에게 시집을 오는 한국 현실에서는 경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설명하거나 제 힘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나가는 상황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초급반 학생 중에는 한국에 온 지 4년이 넘었고 아이도 둘이나 낳은 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나라에서 4년을 살고도 올해 초까지 한글도 읽을 줄 몰랐다. 남편이 집에서 내보내주지 않은 탓이다. 전화를 빼앗겨 한국어 수업에 오지 못했다거나, 친정에 인터넷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집 컴퓨터에 기본으로 달려 있던 웹캠을 시아버지가 떼어 냈다거나 하는 얘기는 명절을 지나면 늘어 있는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만큼이나 흔한 얘기다.

그나마도 한국어를 좀 하거나 영어를 사용하는 필리핀 출신인 이주 여성들의 얘기밖에 우리는 듣지 못한다. 필리핀에서 온 어느 이주 여성은 영어 자기 소개서에 좋아하는 과목을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이라 썼다.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앨버트 아인슈타인"을 존경하는 그는 이제 한국어로 쓰인 초등학교 2학년 수학 교과서를 공부한다. 나는 영어를 하지 못할 그의 남편이 자신의 아내가 수학에 자신이 있고 모국에서는 기술자가 되기를 꿈꾸었음을 알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우편 주문 신부>에는 한국에 온 결혼 이주 여성들이 직면하는 가장 높고 두터운 장벽, 언어의 벽이 없다.

또한 우리 사회는 폭력에 훨씬 더 너그럽다. 이 책에서 갈등이 절정에 이르는 장면의 폭력은 너무나 안온하고 비교적 동등해서, 관계의 폭력적인 단절과 주인공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견딜 만했다.'

경과 몬티의 결혼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부부라는 가장 내밀하고 가까울 수 있는 관계가 거래에서 출발해 관계맺음 없는 체념과 포기에 그치는 과정을 선명하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우편 주문 신부>는 우리의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니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지금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은 곳에, 훨씬 더 깊은 진창에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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