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퇴의 책, <금강경>
뒤통수를 후려치는 철퇴의 책, 어린 날 어느 해 <금강경>을 읽었다. 이 책과 묶어 읽은 노자, 장자, 반야경, 쿠자의 니콜라스, 십자가의 성 요한, 무함마드 루미는 한결같았다. 이들이 보여주는 언어의 특색은 역설(paradox)이었다. 깨우친 자들의 입술에서는 왜 똑같은 표현이 흘러나오는 것일까. 이것이 내 십대의 화두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모든 지혜를 얻기 위해서 어떤 지혜도 갈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되기 위하여,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에 대답하듯 <우파니샤드>에서 말한다.
"네가 브라흐만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면, 브라흐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금강경>이 다시 이를 받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만이 갖고 있는 남다른 진리라는 것이 없다고 내가 가르치지 않았느냐, 그래서 깨달은 사람에게는 남다른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대와 종교를 뛰어넘은 동일한 말투가 정말 아름답고 놀랍지 않은가. 이들의 전언이야말로 무릎에 손이 가도록 만들고, 뒤통수를 후려쳐 망상을 깨는 말이었다. <금강경>은 다시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아니, 이러한 화법이 <금강경>의 전체다.
'이것 봐, 네가 소위 중생을 구원한다는 보살 아니냐, 근데 너 말야, 네가 정말 누군가를 구원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눈곱만치라도 갖고 있다면 넌 벌써 보살되기는 글러먹은 게야.'
이런 말은 단순히 도덕적 차원의 겸양을 요청하는 말이 아니라 불교적 분석과 체험에서 비롯한 생세계의 사실적 표현이다.
한국에 익숙한 <금강경>은 소위 반야 사상을 표방하는 대승 경전인 반야경 유에 속하는 짧은 책이다. 그러니까 대략 인도의 고전기가 시작하는 굽타 시대 전에 제작된 것이다. 대략 기원후 400년 경에 해당한다.
이 책의 본래 이름은 '벼락처럼 자르는 뛰어난 지혜의 책'. '벼락(vajra)'은 신들의 무기로 초기 인도의 바즈라(금강)는 단단한 정강이뼈로 형상화된다. 유달리 고대 인도인의 표현 속에는 '머리를 쪼개버리겠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신들이 전투에 임해서 이렇게 말했고, 철학서 속의 현자들은 철학적 담론 속에서 상대방이 헛소리할 때만을 기다렸다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바즈라 즉 벼락은 무엇을 단숨에 박살내는 무기였다.
그런데 불교인들은, 또는 <금강경>에서는, 벼락과 같은 지혜로 무엇을 자른다는 말일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 구성물, 개념적 허구 전체다. <금강경>과 같은 반야경 유의 특징은 특정한 불교의 교리적 건축물을 축성하지 않는다. 대신 기존에 존재하고 사용해왔던, 너무 익숙해서 당연시 되었던 관념들을 무너뜨린다. 해체한다. 그러나 건축하지 않는다.
반야/중관론자들은 철퇴를 든 재건축 현장의 철거반원들이다. 반야경의 사명은 동시대 인도 불교 내의 교조화되고 문자화된 붓다의 가르침을 폐기하고 본래의 핵심적인 붓다의 가르침을 직설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일체의 비어 있음(一切皆空), 또는 자기 인식의 파괴(無我)를 끝없이 천명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그러한 하나의 작은 예이다.
남을 도와준다는 생각, 도움을 받는 대상으로서 중생, 도와주는 주체인 보살, 이 모두가 허깨비일 뿐만 아니라 여래라는 특징도 허구이며, 심지어는 진리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란 강을 건너면 버려야하는 임시적인 뗏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한형조, 김용옥, 그리고 라즈니쉬
<금강경>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읽고 자신들의 생각을 붙여왔다.
혜능과 원효가 읽었고, 이색과 원천석이 읽었다. 페터 노이야르와 이기영이 읽었고, 장일순과 이현주가 읽었다. 잭 케루악과 게리 스나이더가 읽었고 주세페 투치와 훼른네가 읽었다. 그 외 세상에 숱한 멋진 중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다. 우리 시대의 멋진 두 미치광이 오쇼 라즈니쉬와 김용옥도 읽었다. 그리고 이제 한형조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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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 : 붓다의 치명적 농담>(한형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한형조의 이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 : 금강경 별기>(문학동네 펴냄)는 불교 개설서에 해당하며 <허접한 꽃들의 축제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문학동네 펴냄)는 금강경의 글귀를 좇으며 읽어간 해설서다. 전자는 후자에 들어가기 전에, 또는 사이사이에 읽어도 괜찮은 입문서다. 사실 <별기>라는 말을 달고는 있지만 <금강경> 자체보다는 불교 전체의 이야기가 종횡으로 줄달음질 한다.
두 종류에 관한 것이라면 이미 숱한 책들이 있지만 이 책들은 굳이 의도한 기획이 있다. 쉽사리 소통되는 불교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기획한 바는 이미 수년이 지난 일이라 '소통을 위한 인문학적 불교'의 옷 색깔은 벌써 바랜 듯 느껴진다. 불교인을 위한 불교인의 언어로 썼으나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도드라진다. 책들의 제목과 <별기> 본문에서 그 냄새가 짙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시도이고 언제나 힘써야할 일이었다. 인문학적 불교를 위해서 <별기>에는 동양의 고전, 소설, 영화 이야기, 시사적 사건들과 신변잡기를 덧붙여 그의 말대로 '잡화경(雜華經)'을, 멋진 만자리(꽃다발)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소>에는 한문 원문과 혜능의 해석을 첨가했다. 보다 명료한 이해가 필요할 때는 여기에 가끔씩 콘제의 영어 번역을 더했다. 경봉의 해석과 야부의 시는 양념이다.
이 책의 미덕은 본문으로 옮겨놓은 <금강경> 언해(諺解)와 혜능의 구결이다. 현대적으로 어투를 수정한 언해본은 다른 <금강경> 주석서가 줄 수 없는 고투의 맛깔스런 향취가 난다. 여기에 해설을 가하면서 혜능의 구결을 덧붙였는데 금강경에 대한 혜능의 독특한 해석을 같이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 <소>는 불교학자를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불교도가 아닌 일반 시민 독자를 위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정말 완전히 다른 <금강경>을 '들어보고' 싶다. <별기>와 같은 일반적인 해설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직도 더 대중적인 <금강경>을 기다린다. 1할만 <금강경>인, 9할은 정말 어디서 빌려온 말이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인 그런 <금강경>을 말이다. 굳이 <금강경>을 다 따라가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학자들이 쓴 <금강경> 해설은 거꾸로 되어 있다. 답답한 지식으로 범벅이 되어 있거나, 아니면 깔끔하고 정숙한 단어들의 선택이 오히려 흥미를 떨어뜨리고 심드렁하게 만든다. 그러니 박진감도 떨어지고 경전이 주는 영성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지식이 가득차면 영감이 들어설 틈바구니가 좁아진다.
이것은 학자들이 풀어내는 <금강경>의 태생적 한계일지 모른다. 차라리 학자들끼리 읽는 정밀한 고전 주역서가 더 바람직할지 모른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김용옥이나 오쇼 라즈니쉬의 광설을 좋아한다.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통나무 펴냄)는 비록 많은 부분이 기존의 책에서 비롯된 것이고 때로 공중 부양하는 단어들도 있지만 그만의 매력적인 박진감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경우는 라즈니쉬의 <금강경>(태일출판사 펴냄)이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하는 책은 이상하게 재미가 없다. 비슷한 해설을 또 들으면 재미가 없다. 고전의 재미는 완전히 스토리가 달라지는 이본(異本)이 등장할 때 배가 된다. 이본은 일견 매우 엉뚱하다. 이본의 저자는 다른 사람들과 목소리가 틀릴 뿐만 아니라 남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허사, 무관심한 단어, 반복적인 상투어를 매우 낯설게 만드는 재능에 천부적이다.
라즈니쉬는 그러한 재능이 있다. 그는 학자들과 완전히 다른 어법을 구사하며 무엇을 설명해야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라즈니쉬와 김용옥은 유사한 점이 있다. 라즈니쉬는 붓다가 사위성에서 탁발을 하고 돌아와 식사를 하고 발을 씻는 일상적인 모습의 첫 장면을 아주 상세하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왜 이 장면이 의미 있는가를 매우 조용히 설명한다. 거기서 <금강경>과는 관계가 없는 샛길로 더 빠져버린다. 오히려 이 때문에 행간에 침묵이 있고 신비로운 정적마저 느껴진다.
그 뿐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장면에 들어서면 그 구절에 신성한 아우라를 씌워버린다. 붓다가 수부띠에게 말을 시작하기 전에 '주의깊게 잘 들어라'는 말에 무려 20쪽에 걸친 해설을 붙인다. 이 해설은 자기만의 종교적인 영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학자들은 이 지면을 어디서 빌려온 해석으로 채운다.
이러한 식으로 완전히 다른, <금강경> 이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이본, 또 다른 <금강경>의 해석은 모든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것은 불교를 떠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의 불교, 불교가 아닌 불교를 만들어낸다.
나는 불교학자들이 이 귀여운 사기꾼처럼 새로운 글을 써보길 기대한다. 그 때 아마 새로운 모습의 불교가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나, 여러분은 글쓰기의 어떤 상(相)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