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먼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단지 아즈마 히로키의 전작 중 국내에 번역된 유일한 저작이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퀀텀 패밀리즈>(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의 세계관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일반적으로 저패니메이션과 '미소녀 연애 육성 시뮬레이션(미연시)' 게임 등에 맹목적으로 몰입하는 오타쿠의 하위문화를 분석한 저서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특히 오타쿠를 근대 이후(post-modern)에 출현한 신인류 내지는 '뉴 타입'의 한 형태로 지목하고 있는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테면 그 오타쿠들 중 일부는 어떤 애니메이션의 전편을 보거나 미연시 게임을 즐기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러한 텍스트들이 제시하는 세계에 기초하여 팬픽이나 동인지 만화 등을 만들어낼 만큼 극심하게 몰입하곤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완결성을 갖춘 독자적인 이야기가 아닌, 원작에 충실한 디테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해당 애니메이션에 대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이를테면 중요한 메카닉(機體)의 사양 같은 것)에 완전히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얼마나 원작의 설정에 부합하고 있는지, 그것에 비추어 있을 법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지가 더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작업은 원작이라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적 원천에 기초하여 재구성 내지는 일종의 변주를 시도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 가운데 원작의 이야기는 자기증식을 거듭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며, 그 무수한 이야기의 상이한 버전들이 상호 교차하면서 동시(同時)적으로 존재하는 다소 기묘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오타쿠는 과거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이야기했던, 어떤 뚜렷한 동기도 목적도 없이 단지 가상의 형해화된 형식에 집착하면서 만족을 얻는 '속물(snob)'로 지칭되고 있으며, 이들이 기존의 우세적인 인간상이었던 근대의 주체(subject)와 명백히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사실상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첨단기기의 스펙(specification)이나 패션 브랜드, 스포츠 데이터 등에 집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이러한 신인류는 간단히 긍정되지도 부정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상의 텍스트를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각기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파생시키는 행위를 자신의 일부 또는 전부로 여기면서 만족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한 이야기의 무한한 순환 속에서 원작과 그 모방 간의 구별 내지는 위계 자체는 근본적으로 희미해져 버릴 터입니다.

요컨대 진짜(실재)와 가짜(시뮬라크르)를 식별하는 문제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원작과 그 모방들이 한데 모여 구성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 전체이고, 그 속에서 이야기가 지속될 수 있는지의 여부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투사하는 개인들이 됩니다. 이 기이한 삼위일체 속에서 그 목적이나 지향을 따지는 일은 전적으로 무의미해진다고 해도 좋습니다.


▲ <퀀텀 패밀리즈>(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그런데 이와 같은 아즈마의 역사철학적인 비전에 입각하여 이러한 속물이 근대 이후의 지배적인 인간형이 되었다는 판단을 더 밀고 나아가 봅시다. 만약 그들이 구현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무수한 상호 참조 및 그 영원한 지속과 같은 사태가 아예 이 세계 속에서 물리적으로 실현 가능해진다면 어떨까요? 사실상 <퀀텀 패밀리즈>는 바로 이러한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체라는 인간형의 모범이 견인했던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데이터베이스적 인간의 출현. 우리는 이 과도기적 사실로부터 회피할 수 없는 다분히 "세컨드 임팩트"적인 사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위한" 평행 세계입니다. (알다시피, 큰따옴표 안은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퀀텀 패밀리즈>에서, 가령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한 형용모순 내지는 이율배반을 가능성 그 자체로 수긍하도록 하는 양자역학의 가설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첨단의 네트워크를 통해 평행 세계가 구현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데이터의 진위를 식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네트워크 자체가 기존 데이터의 조합과 재구성을 통해 가상의 데이터를 무수히 만들어내면서 자기 증식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데이터가 진짜고 또 가짜인지 판별하는 것조차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환원되며 허구는 언제든 현실로 둔갑해 버릴 수 있는, 따라서 그것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것으로 되는 역설적인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네트워크를 통해 평행 세계조차도 현실 세계 못지않게 가능성의 차원에서 실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일 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과 실제적으로 연루되거나 심지어 그것으로부터 촉발되기도 하고 필립 K. 딕의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로 실현되기도 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행 세계라는 설정은 사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소설 등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며 오히려 상당히 즐겨 채용되고 있는 장치에 해당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령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리부트 버전으로 최근 제작된 <에반게리온 : 서(序)>와 <에반게리온 : 파(破)>는 그 세계관이라든가 메카닉, 등장인물 등에 있어서 1990년대의 TV시리즈 및 극장판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설정에 입각해 있으며 따라서 원작과 일종의 평행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근작 <1Q84> 역시 그렇습니다. 알다시피 이 소설의 제목 '1Q84'는 1984(1984와 1Q84는 일본어로 읽었을 때 발음이 동일합니다)년에 대응하는 가상의 평행 세계를 가리킵니다. 두 개의 달이 떠 있으며 공기번데기를 자아내는 리틀 피플이 실재하는 바로 그 세계로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가 예기치 않게 이끌려 들어가는 되는 데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히 요약하기 어려운 이 복잡한 내러티브의 소설 <퀀텀 패밀리즈>가 기존의 평행 세계를 다룬 여타 텍스트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부분은 다름 아니라 그 평행 세계 간 경험의 교차 및 인격의 교환을 이 양자 네트워크를 통해 실정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아시후네 유키토(葦船往人)와 그의 자녀 아시후네 후코(葦船風子), 오시마 리키 그리고 그들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 모으게 되는 오시마 유리카(大島有利花) 모두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제각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던 개인들입니다.

이를테면 주인공 유키토의 인격이 거주했던 2007년의 시공간에서는 후코가 출생하지 않았으며 대신 리키가 태어났지만, 그의 존재란 어디까지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입니다. 반대로 후코가 삶을 영위했던 2035년에는 당연하게도 리키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있습니다. 2007년의 유키토가 어떤 삶을 영위했는가에 따라 선택적으로 분기된 존재인 두 개인이 동일한 세계에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들은 서로에게 가공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각의 시공간 또한 그 나름의 질서에 입각하여 평행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심지어 그것을 넘어서서 유키토의 존재가 모든 원인을 제공하고, 후코가 유키토에게 메일을 전송함으로써 평행 세계 간 접촉의 계기를 촉발하며, 리키에 의해 다른 시공으로 인격을 교환 전송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 그리고 각자의 세계에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복잡다단한 사태가 유리카의 다중적 경험에 의해 종합되지 않는다면 <퀀텀 패밀리즈>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설정이 자신의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가족의 잠재적인 실존 가능성을 의식하고 나아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역설에 입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키토는 후코의 메일을 계기로 '지금 여기'의 자기와 전혀 다른, 별개의 시공에 존재하는 낯선 자신의 모습 및 그 일상세계, 그리고 그로 인한 자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삶은 결정적인 전회를 경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인격의 교환을 통해 별개의 시공간으로 진입하게 되는 모험의 도정이 바로 <퀀텀 패밀리즈>의 주된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박람강기한 지식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퀀텀 패밀리즈>에서 양자역학에 기초한 네트워크라든가 평행 세계의 존재 자체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퀀텀 패밀리즈'가 불요불급하게 휘말리게 된 데이터베이스적 시공간을 위한 일종의 전제라고 해도 좋습니다. 즉 허구와 현실이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어떤 가상도 진짜로 둔갑할 수 있지만 동시에 확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오직 부정성(否定性)의 가능성만이 농후한 네트워크 자체 말입니다.

그리고 후코가 유키토에게 메일을 전송하는 바로 그 행위가 이 가족 모두를 아직 현행화되지 않은 가능성의 집적(集積), 바로 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하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각자의 이러한 접속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살지 않았던 가상의 삶들, 그 무수한 가능성 자체를 들여다보고 또한 구성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여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허구로 돌리거나 심지어 부정해야만 하는 난국에 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한하게 파생된 가능성들의 데이터베이스에만 구애되는 것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제껏 회의된 적이 없었던 자명한 자신의 존재를 부정(否定)의 가능성에 위치시키는 것, 즉 시차(視差)에 입각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이 동요하는 위치를 통해 이 가족들 각자가 대면하게 되는 것이 오히려 과거 자기 자신의 욕망에 의한 실책 내지는 죄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후코와 리키는 각각 자신의 욕망 그 자체이자 분신(分身), 실체적으로 구현된 시오코(汐子)라는 인격이 모든 기이한 여정을 가능하게 했다는 진실에 도달하게 됩니다. 유키토든 유리카든 간에 그들이 어떤 시공간에 머물든 간에 데이터베이스의 오랜 우회를 거쳐 그들이 확인하게 되는 것은 유즈리하 나기사를 둘러싼 그들 자신의 욕망의 원죄로부터 현재의 사태가 파생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진실입니다.

20세기 이후 일체를 복수(複數)의 가능성과 시차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양자역학이 고전 물리학을 대체하는 패러다임으로 되고 있다고 해도, 또한 그들 자신이 속해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무수한 다른 삶의 가능성을 교차시킨다고 해도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유키토의 최종적인 결단 또한 이 모든 사태를 조장했다고 생각되는 시오코의 존재를 단호하게 근본으로부터 파기하는 것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 가족 모두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예시되지 않았던 완전히 다른 형태의 삶으로 회귀하게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퀀텀 패밀리즈>가 현시하고 있는 허구와 현실 간 무한한 교착상태로부터 빚어진 변증법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귀결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 점에서 <퀀텀 패밀리즈>는 이 시대의 개인들이 천착하고 있는 무수한 텍스트들 그리고 그것이 집적된 데이터베이스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시차의 위치에 입각하도록 하는 일종의 변증법적 계기로 작동할 수 있음을 환기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지금 여기와 다른 삶을 꿈꾸거나 혹은 이러한 욕망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개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자신의 시공간을 한 순간에 소거시키거나 또는 다른 세계와 순식간에 교환되거나 하는 식의 예기치 않은 악몽으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가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거울 같은 것으로 작용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중심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수한 진짜 같은 가상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시대 개인들의 정체성 내지는 그것을 형성하는 욕망의 중핵에 육박해 들어가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퀀텀 패밀리즈>는 어떤 의미에서 대단히 정통적인 소설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사물과 현상의 진위를 가늠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고 해도 일체는 어디까지나 주체의 실책, 그리고 자기 인식에 입각한 결단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시후네 유키토라는 이름에서 갈대배(葦船)에 띄워져 유기된(往), 일본 신화 상의 최초의 인간/괴물(人)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는 것은 이 점에서 다분히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역사의 종언 앞에 선 최후의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