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노동으로 깊게 주름진 노인의 일상적인 두어 마디에서 문득 시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짧은 그 순간에 새삼스럽게 다가서는 삶의 면면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언어의 매개 없이 온몸으로 직접 세계와 대면하는 데서 오는 인식의 투명함이라든지, 오랜 시간 가슴 속에 품어왔던 서러운 눈물과 땀방울의 염도와 같은 것, 혹은 세상을 느슨하게 놓아두면서도 자신의 방식으로 따뜻하게 품어내는 넉넉함 등. 생경한 지식이나 조잡한 기교 따위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깊이와 내력이 이 속에 묻혀 있다.

그네들의 몇 마디가 시의 자리로 성큼 이월할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내공이 개입하기 때문일 터이다. 공선옥의 장편 소설 <꽃 같은 시절>(창비 펴냄)의 가장 커다란 미덕이라면 이러한 지점을 효과적으로 살려내었다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대략적으로 내용을 살피고 난 후, 그 미덕의 근거를 파악해 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1. <꽃 같은 시절>의 대략적 내용과 리얼리티


▲ <꽃 같은 시절>(공선옥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자, 여기 젊은이들은 떠나가 버리고 노인네들만 남은 마을이 있다. 평생 농사나 지으며 순박하게 삶을 이어오던 그네들이 데모에 나섰다. 새롭게 들어선 '순양석재'가 법적인 절차도 무시한 채 돌 깨는 작업을 시작하자, 그로 인한 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첨엔 쿵쿵 허는 소리가 나길래 다시 인공이 되얐는가, 혔는디 그것이 아니고 독공장에서 독 깨는 소리여. 독 깨는 소리가 어뜨케나 큰지 인공 때 대포소리 같애. 그 소리에 놀래서 어미 뱃속에서 소새끼가 죽고 염생이가 죽고 갱아지가 죽고 닭이 알을 안 낳고 천지사방이 문지투성이라 깻잎삭 한나를 못 묵어. 그란디도 나랏님들은 '돈을 벌어야' 쓴다고 독공장 돌리는 것을 안 막어. 그렁게 디모를 헌 거여."(254쪽)

데모하는 노인들을 경찰이 고압적으로 다그치지만, 그네들이 데모에 나선 까닭이나 시종 원하는 바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저 "조용히 살다 죽고 잡다"는 것(66쪽). 칠팔십에 이르러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의 이 소박한 바람이 어째서 이처럼 냉혹하게 짓밟혀야 하는가.

기실, 소설에서 그려내고 있는, 공권력이 자본의 편을 들고 나서는 장면은 현실 세계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바다. 예컨대 나는 2009년 5월 어느 날 용산 철거민촌 현장에서 이를 똑똑히 확인했다. 용역 업체 깡패들은 험악한 기세로 누차 시비를 걸어오는 한편, 문화 행사 참가자의 얼굴을 유유히 사진으로 채증하고 있었다(그 사진이 어디로 건네질 것인지 여부는 상식 수준의 판단에 맡기겠다).

거꾸로 문화제를 진행하는 측에서 충돌 상황을 사진으로 찍노라면 용역 깡패로부터 초상권 운운하는 고함 소리와 함께 사진기를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꽃 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깡시인'의 모델 송경동 시인은 격한 몸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골목 입구에 서 있던 전경들은 철거민 측이 용역 업체 깡패들에게 맞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용역 업체 깡패들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 이르러 개입하는 방식으로 출현했다.

용역 업체를 구조적으로 비호했던 검찰, 경찰의 비정상적 행태야 여러 경로로 지적된 바 있으며, 그네들이 남발한 무수한 소환과 기소는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어째서 이처럼 냉혹하게'라는 물음이 오히려 어수룩하게 다가올 정도로 우리는 철저하게 일그러진 세계에 살고 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이러한 현실을 실감나게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선에서 넘어가고자 한다.

2. 어쩌다 내 자식이 저렇게 변했나, 울고만 싶은 노인들

<꽃 같은 시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이러한 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자, 등장하는 노인들의 사유 방식을 먼저 살펴보자. 그네들은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복주 엄마'를 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기양 돈으로 해결을 볼라고 해갖고 우리가 복주 어매를 위원장으로 올려분 거여."(178쪽)

기실 젊은 세대에 해당하는 자식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들이 적당한 보상금으로 타협하기를 원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판단이 뿌리 내리고 있는데다가, 돈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데 깊숙하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엄마, 고춧가루가 다 떨어졌네? 고춧가루 좀 보내줘. 사먹는 건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 왜 아무 말 안해, 엄마? 아유, 돈 보낼게에."
(…)
"아이, 자식한테 묵을 것 보냄서 어느 부모가 돈 욕심을 낸다냐. 그런 방정맞은 입초실랑은 놀리지를 말어라."
했더니,
"엄마, 좀더 솔직해지면 안돼? 돈이 좀 적다, 라고 한달지, 뭐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져서, 당최 아무 소리도 안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쩌다 내 자식이 저렇게 변했나, 울고만 싶었다. (232쪽)

노인들은 자식 세대가 내보이는 의식 세계로부터 멀찍하게 떨어져 있다. 예컨대 '복주 엄마'네 식구가 이사 오자 아랫집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살갑게 대하며 음식을 갖다 주곤 했다. '해정'이 이사를 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는 동네에 사람이 들어왔으니 인사 정도는 터야 사람 사는 동네라 헐 수 있지 않겠느냐, 허는 것"이 이네들의 상식이다(84쪽).

즉 나와 너의 경계가 선명하게 나뉘어졌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라는 단위를 전제하고 그 안에서 나와 너를 하나로 이어가는 공동체 의식이 그네들 사유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군청 앞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장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그네들과 닮아가며 비로소 하나로 자리 잡아간 '복주 엄마', 즉 '영희'의 진술이다.

"첨엔 그랬어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만날 악만 쓰고. 점심을 날마다 사먹을 수도 없고 노인들이 도시락 챙기기도 그래서 군민의 쉼터에서 해먹었는데 무슨 피크닉하는 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맛있겠다며 밥 좀 달라고 오죠. 그러면 특히 할머니들이 어서 오시라고 하고 밥을 퍼주죠. 그런데 노인들이 왜 군청 앞에서 밥을 해먹고 있는지 묻지도 않고 밥만 먹고 가버려요. 나는 첨엔 그것도 화가 났어요. 근데, 이젠 제가 그래요.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오라고 하죠. 그래서 그 사람이 와서 맛있다고, 잘 먹고 간다고 하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가 없어요. 내가 뭐라고 해도 할머니들이 그냥 웃기만 하는 것이 첨엔 답답했죠. 근데 자꾸 반복되다보니까, 제가 그분들을 닮아가요. 근데, 그분들처럼 하니까 맘이 좋더라고요. 그냥 좋아요." (183~4쪽)

지금은 서로 대치해서 팽팽하게 맞선 관계일지라도, 좁은 지역 안에서의 문제인 까닭에, 그 관계는 만남의 다른 조합 속에서 일순 허물어질 수도 있다. 가령 시위대를 감시하는 '강 형사'이지만, 그 어머니가 젊어 어려웠던 시절 '공님'에게 크게 신세진 바 있고, '공님'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으니 어쩌면 어색한 장면에 직면함직도 하다. 그 어색한 순간에 맞닥뜨려 '공님'이 '강 형사'를 마음속으로 끌어안는 방식에서도 공동체 의식은 유효하게 작동한다.

강 형사가 부끄러워하며 밭가 나무 뒤로 돌아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담배는 몸에 해롭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고,
"집이 오마니한테도 담배 한나 주소."
하고 말았다. 나무 뒤에서 담배를 피우며 먼 하늘을 쳐다보고 섰는 것이 영락없이 서울 왕십리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아들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도 저러고 건물 귀퉁이 같은 데 돌아서서 담배를 피우겠거니 싶어서 마음이 짠해졌다. (229쪽)

맞은편에 대치하여 맞서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짠한 마음'을 품어 안는 노인네들의 인식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이는 <꽃 같은 시절>의 문학적 의미를 따져 묻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작가와 변별되는 공선옥의 특징이 여기서 돋을새김 되며, 우리가 잊고 있는 전통의 한 가지 맥락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3. <꽃 같은 시절>이 근대 이후의 세계로 미끄러져 나갈 가능성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 먹었을까.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답변이 가능할 텐데, 근대에 돌입해서는 "모든 것의 전제로서 개인을 설정해 놓고, 사회를 개인의 의사에 따라 구성하거나 해체할 수 있는 집합체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즉 각각의 개별자(個別子, individual)들이 모여서 사회 계약설에 근거하여 만들어 나간 합체(合體, assemblage)를 사회라고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개별자의 욕망이 해방되고 충족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개별자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한 개별자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생각과 행동이 허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개별자―합체 세계관')

하지만 우리네 전통 사상에서는 사회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해 왔다. 예컨대 성리학에서는 우선 통체(統體, whole)로서 태극(太極) 개념을 설정하면서부터 논의가 시작된다. "태극은 천지만물이 생성 전개되는 원리인 동시에 현상으로 드러난 천지만물의 총체이다." 그리고 "개체는 전체인 태극에서 성분(成分)을 본분(本分)으로 부여받아 직분(職分)으로 실천하는 분적(分的) 존재이다."

따라서 이때의 개체는 통체의 분신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부분자(部分子, positioner)라고 부를 수 있겠다. 사회에 관한 인식은 이러한 철학적 사유 위에서 펼쳐졌다. "사회는 통체로서 전제되지만 개체가 통체의 분신이기 때문에 통체와 개체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 개체가 남녀노소나 존비귀천 등에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는 것은 통체에게 부여받은 분수(分數)가 다르기 때문이다." ('통체―부분자 세계관')

두 개의 세계관을 비교하여 어느 하나가 우위에 놓인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단점을 꼬집어 말하자면, '개별자―합체 세계관'이 먼저 발생한 서구는 "다른 문화권을 침략하고 정복하여 개별자적 욕망 충족에" 몰두해 왔다. 그들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 관점을 열등한 타자로 규정하는 한편, 인간 바깥의 모든 자연에 대해서는 개발의 대상으로 설정해 버렸던 것이다.

한편, '통체―부분자 세계관'이 형성된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의 자유, 평등, 해방 등의 개념이 생겨나기 어려웠다. "성리학에서 자유는 관계의 이탈을, 해방은 관계의 무력화를 뜻할 수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두 개의 세계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 잡기가 요청되는데, '통체―부분자 세계관'의 '통체'를 천황이라든가 김일성, 박정희 따위로 대체해서는 파시즘으로 기울어지기 십상이고, 근대 너머로 나아가기 위하여 '개별자―합체 세계관'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동원된 노예의 삶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다. 후자의 위험성은 일제의 신체제(新體制), 박정희의 병영 국가 등을 통하여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그러니 개체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세계에 대한 경외감을 회복하되, 자유·평등·해방 등 근대의 긍정적인 유산을 이월시키는 방향에서 '근대 이후'를 모색해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성싶다.

공선옥의 <꽃 같은 시절>은 이러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내장하고 있다. 이론을 통해 사상을 뚜렷하게 가다듬은 것으로 파악되지는 않으나, 현재 농촌의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따라잡아 복원함으로써 그러한 지점 위에 올라선 것이다. 자, 보라. <꽃 같은 시절>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공동체 의식 위에 발을 딛고서 야만적이고 타락한 자본주의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자유·평등·해방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꽃 같은 시절'은 바로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다. "못살겄다고 악을 써도 암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암도 들어주는 디가 없으면 가서 악을 쓰는 것이 디모여. 디모를 다 해보고, 경찰서를 가보고 이 오맹순이가 말년에 꽃시절을 보내고 오네, 시방."(254~5쪽) 요즘 지독한 자기 연민, 욕망, 좌절 속에서 한국 작가들이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운데, 공선옥은 건강한 민중(노인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나름의 탈출구를 제시하고 있다. <꽃 같은 시절>의 의미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4. '홀로어멈'에서 <꽃 같은 시절>에 이르는 길

사실 나는 <꽃 같은 시절>을 읽으면서 작가가 1999년 가을 <창작과비평>에 발표했던 '홀로어멈'을 떠올렸더랬다. '홀로어멈'은 세 아이를 이끌고 촌으로 내려온 남편 없는 여인의 좌충우돌기다. 이 여인은 고단한 현실에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만큼 결기가 있으며, 논리적으로 행동할 만큼 지식도 있다.

그렇지만 타지 사람으로서 마을 공동체 속으로 편입해 들어가기가 너무도 어렵기만 하다. 주인 없는 감나무인 줄만 알고 감을 한 부대 땄다가 문제가 되자 "대뜸 자루 하나에 얼마냐"라고 물어서 곤경에 처하는가 하면, 산사태로 교통이 두절되자 군청에 전화 걸었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우리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살았소"라고 질책 받는 식이다. 이 자의식 강한 여성이 어떻게 공동체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갈 수 있을까. '홀로어멈' 이후 공선옥의 행로가 내심 궁금했던 까닭은 이러한 물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꽃 같은 시절>에도 '홀로어멈'에 나타났던 여성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여전히 살아있고, 행정심판위원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의 논리력 또한 갖춘 것으로 드러난다('영희'). 그런데 그러한 자의식, 논리는 공동체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다. 이는 작가의 시선이 민중(노인들)에 맞춰져서, 그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지로까지 나아갔기에 가능해진 결과이리라.

기실 소설의 여성주의 요소는 할머니들의 지난한 삶 속에서 펼쳐지고 있으며, 논리도 공동체의 일상을 깨뜨리는 외부 세력을 향해 벼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위치를 가늠케 하는 '영희'나 '해정'은 할머니들을 닮아가는 양상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홀로어멈'에서 <꽃 같은 시절>에 이르는 동안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넓고 깊게 구축하기 위해 개별자의 울타리를 차츰차츰 허물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성싶다. 독자인 나로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이 반갑고, 고마웠다.

문학으로써 세계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고자 하는 작가는 그 자신의 자리 역시 조금씩이나마 바꿔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꽃 같은 시절>을 들고 나온 공선옥은 그 길을 보여주고 있다.

3절의 직접 인용은 최봉영의 <본과 보기 문화 이론>(지식산업사 펴냄)의 제6장 '문화권의 중심 본보기와 세계관의 유형'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아울러 '개별자―합체 세계관', '통체―부분자 세계관'에 관한 분류 또한 여기에 기대고 있음을 부기합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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