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있다. 우연한 동행, 한 여자는 "저는 아프리카에 가요"라고 묻지도 않은 그녀의 이야기를 한다. 다른 여자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딸 이야기를 꺼낸다. 한 여자는 잠비아의 커다란 폭포와 그 밑에 지을 자신의 미용실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여자는 딸을 잃은 친구의 이야기를 한다.
그녀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비에 젖어 한기가 든 그녀들의 몸은 서로가 나누는 체온으로 조금씩 따뜻해진다. 이제 그녀들의 몸은 조금 따뜻해졌고, 아직 비 내리는 밤길, 우산은 없지만 서로 나눈 체온이 있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허니, 그녀들이 나눈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었다 해도 무에 그리 대수로울 것인가.
'아직은 밤', 어둔 밤길을 정처 없이 헤매는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헛된 희망, 혹은 무해한 기만이라도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아직은 밤'). 윤영수의 <귀가도>(문학동네 펴냄)의 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간신히 부여잡고, 겨우겨우 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잉어'의 석형은 가족도, 친구도 없이 잉어와 말을 나누는 데 골몰해 있고,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의 혜순은 평생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눠 본 적도 없는 친구의 오빠와 사랑에 빠졌다는 환상으로 남편의 학대를 견디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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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가도>(윤영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귀가도>에는 사실 집은 없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뿐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따뜻한 보호 고치나 안식처 따위는 없다. 존재하는 것은 가학과 피학의 관계나, 무관심, 타인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들고야마는 온정을 가장한 적선의 세계뿐이다. '철학잉어'의 석형의 외로움과,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의 무기력함은 이 세계에서는 가장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이나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의 혜순은 윤영수의 평판작이었던 이전 작품 '착한 사람 문성현'의 '착한 문성현'을 연상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귀가도>에 대한 서평들이 주로 착한 인물이나 선함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착한 사람 문성현이 선천적인 장애로 고통 받는 인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순봉도 정신 지체로 불운한 삶을 살아가고, '아직은 밤'의 주인공은 교통사고로 실명한 딸의 자살로 고통 받고 있다. 이 인물들이나 상황들은 자연스레 '착한 사람 문성현'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귀가도>가 온전히 이전 작품의 반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귀가도>의 작품들에서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맡겨져 있다. 어떤 인물들은 선천적 장애나 신체적 질병처럼 말 그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에 처해있다면, 또 다른 인물들은 비합리적인 상황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윤영수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두 가지 주제를 반복해서 탐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자신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견디며 생을 계속해나가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 혹은 노예적 삶에 길들여진 인간의 무기력함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할 것이다.
딸을 잃고 비탄에 빠진 여자는 남편이 과수댁과 바람을 핀다는 의도적인 오해를 고집하며 부부 관계의 파탄을 방기한다.('아직은 밤') 자신의 집을 차지해버린 낯선 타인의 폭력 앞에서 착한 유순봉은 "전과자라고 다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며 폭군과의 동행을 방치한다.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의 혜순 역시 다른 남자에 대한 환상적 사랑에 기대어 남편의 폭력과 외도를 묵인한 채 살아간다.
윤영수의 주요 관심은 '착한 사람'에 대한 탐구이다. <귀가도>의 여러 작품 속에서 그 착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착한 사람들'의 삶은 사도-마조히즘적이라 할 만큼 폭력에 대한 무기력과 방치, 묵인, 자발적 복종으로 얼룩져 있다. 물론 <귀가도>는 이런 문제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윤영수는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무기력함에 빠진 인물들이 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기대는 거짓말이라든가, 헛된 희망, 무해한 기만 같은 것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무기력함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누군가는 잉어와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는 보낼 수 없는 연애편지에 매달리고, 누군가는 갈 수 없는 아프리카에 관한 무해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 사랑과 환상과 거짓말은 때로는 무해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삶을 곤궁에 빠뜨리고, 자신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윤영수가 보기에 누구도 이 기이한 집착과 희망과 기만을 비난할 권리가 없다. 그러한 삶을 무기력하다고, 노예적이라고, 안타깝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삶에 대한 연민도 배려도 아니다.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의 유순봉에게 왜 폭군 기천웅을 쫓아내지 않느냐며 다그치는, 동정과 연민을 가장한 방송국 피디(PD)가 유순봉에게는 결국 기천웅과 마찬가지의 "강한 인간"이듯이 말이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여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따듯한 안식처가 없는 이들에게는 그 무언가는 더 절실하지 않으랴. 그게 비록 말하는 잉어같이 어처구니없는 것이라 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윤영수는 아마 우리 삶에서 문학이라는 것이 말하는 잉어나 마찬가지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말하는 잉어를 사랑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거나, 아니면 결국 거짓된 기만의 시장에 팔려버리는 일일지라도, 그 잉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인 것처럼. 오늘날 문학을 사랑한다는 일은 이와 다르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집이 없는 세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귀가도>의 인물들의 발길처럼, 위안이 없는 세계에서 기만적인 위안이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문학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설사 기만적인 위안일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생의 위기를 가까스로 견뎌나가기 위해 애를 쓸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귀가도>가 놓치지 않고 있듯이 그 위안에 대한 집착은 기만이기에 자신의 노예적 삶을 공공연히 상연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윤영수가 <귀가도>를 통해 보여주는 오늘날 문학의 운명 역시 안간힘과 곤궁 사이에서 가까스로 겨우 생존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