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삿짐을 싸 놓았다. 거실 마룻바닥에 널브러진 세간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장난감과 잡동사니, 화면 한 켠에 드러난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동 아파트. 화가 유근택의 연작 <수평적 이사>의 한 장면이다. 화가는 주엽동 아파트에서 홍제동 아파트로 '수평 이동'한 도시 일상의 한 순간을 무심한 풍경으로 그려냈다.

이사 전후의 실내는 다른 공간이지만 서로 닮아 있다. 또 다른 그림에서는, 아파트 거실의 네모난 프레임 속에 식물들이 둥둥 떠다닌다(<자라는 실내>). 허공을 화단 삼아 거실 곳곳에서 붉은 꽃이 자라기도 한다(<어떤 실내>). 유근택의 그림에서 아파트는 풍경처럼 얌전히 정지해 있으면서, 동시에 일상의 사물들과 함께 비밀스럽게 호흡하는 공간이다.


▲ 유근택, '자라는 실내' (2007) ⓒnaver..com

한편, 화가 정재호의 화폭에는 괴이한 구조의 아파트 전경이 펼쳐진다. 붕괴와 퇴색의 냄새를 풍기는 외벽과 창문들이 패턴처럼 늘어섰다. 전자는 일상 거주의 공간을, 후자는 곧 사라질 낡은 건물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둘 다 아파트라는 일상적 공간이 드러내는 비일상적 매혹에 집중한 화가라는 점에서는 같다. 아파트에게는 분명, 숨겨진 표정이 있다.

나에게는 아파트에 얽힌 특별한 추억이 없다. 그래서일까.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를 펼치면서 몇 장의 그림부터 떠올렸던 건. 아파트에 관해서라면, 미술을 전공하면서 접하게 된 시각 이미지들이 오히려 더 구체적인 기억의 자료 구실을 하는 셈이다. 사실, 아파트라는 공간에 주목하면서 현대 사회의 심리적 풍경들을 구축해 온 작가를 미술에서 찾기란 장르를 불문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플라잉시티는 아파트를 비롯한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이 공동체에 미친 영향을 연구해 온 이른바 '도시주의 그룹'이다. 젊은 작가 조익정은 <냉장고 네 대>라는 영상 작업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부'에 관한 의문과 고민을 직설적인 언어로 풀어냈다. 부의 잉여를 온몸으로 전시하는 거대한 덩치의 냉장고는 으리으리한 고층 아파트와 겹친다. 한편, 이은우는 최근 매매가 3억 원짜리 아파트의 평면도 1167개를 수집, 분류하여 <3억>이라는 출판물을 제작했다. 사진작가 이득영의 아파트 단지 조감 사진 연작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도 수록되어 있다.

자명한 사실이다. 도시는 아파트로 넘쳐난다. 따라서 그에 관한 말 역시 넘쳐날 수밖에. 이미 여러 권의 아파트 연구 서적이 출간된 바 있다. 획일적인 주거 형태와 부동산 투기 붐에 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는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여기다 어떤 말을 보탤 것인가이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박해천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아파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아파트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단연코 이 책은 아파트에 관해서 말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여기서 아파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쇳말로 작동한다.

저자 박해천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책을 설명한다.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고. 그러니 이 책의 여정은 아파트의 변천사를 설명하고 주거 풍속도를 훑어보는 수준에서 멈출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아파트에 투영된 현대인의 심리와 욕망, 그 작동 원리까지 그려내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저자 스스로 '가짜 자서전' 혹은 '허구의 회고담'이라고 표현한 이 변종 보고서는, 아파트를 통해 아파트가 아닌 한국 사회를 해부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했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한마디로 말해 이 회고담은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아파트 비판이 무기력한 까닭은…

악취 나는 투전의 장으로 전락한 아파트의 표면적 행보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담론의 세계에서와 달리 물질의 세계에서 그러한 비판은 별 쓸모가 없다. 현실의 아파트는 여전히 대중을 매혹시키고 있다. 지금도 TV를 켜면 미녀가 속삭인다. 아파트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게 있다고. 러브 앤 피스.

아파트 비판은 백전백패한다. 저자는 바로 그 이유를, 아파트가 교묘하게 구축해 놓은 시각 문화의 대중적 호소력을 간과한 데서 찾는다.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아파트는 단지 몸집만 불린 것이 아니다. 거주자의 생활양식 뿐 아니라 감각 양식까지 조직하면서, 우리가 특정한 시각 논리를 갖추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더 이상 주거 상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시각 문화 전반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급기야 도시 생활자의 시선과 인지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왔다. '보는 법'을 연구하고 그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내는 것이야말로 현대 미술의 과제라 했던가? 그러니 아파트라는 괴물이 미술의 주요 관심사가 된 것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가장 열심히 참고한 것은 문학 쪽인 것 같다. 특히 소설은 인물과 서사를 기반으로 한다.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사람의 생활과 행위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요소일 게다. 자연스럽게도, 소설과 수필들은 시대별 주거 문화의 일면과 더불어 집에 얽힌 여러 가지 표정들의 적나라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둘러싼 시대적 공기와 함께 말이다.

1부 '픽션'과 2부 '팩트'로 나뉘어진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픽션' 부분은 이처럼 수많은 문학과 사료를 인용하면서 완성됐다. 참고 문헌 페이지를 들여다보라. 이렇게 무수한 인용과 패러디의 집합이 매끄럽게 완결된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누구일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진정한 재미는 흥미로운 화자 설정에 있다. 익명의 '강남 1세대 남성'은 근대화라는 열차에 올라탄 욕망의 세속화 과정을 고백의 이름으로 항변한다. '아파트' 역시 일인칭 화자로 등장해, 자신이 어떻게 정치권력의 대리 역할을 수행하며 대중의 욕망과 결합해 왔는지를 당당히 고백한다.

심지어 비물질이라 해야 할 '시선'과 '꽃무늬'까지 발언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시선'은 프로이트, 르 코르뷔지에, 벤야민, 윙어 등 모더니티의 감각에 관한 역사적 담론들을 언급하며 자신이 국가 권력의 형태로 진화해 온 여정을 들려준다. 다소 장황한 전반부의 이론 설명도 말미에 이르면 이해가 된다. 현대 도시 상공을 활보하는 조감의 시선이 이토록 익숙한 것이 되기까지, 우리의 신체 감각은 얼마나 숱한 경험과 실험을 거듭했을 것인가.

꽃무늬의 고백

마지막은, '꽃무늬'다. 다정다감한 '꽃무늬'는 1970년대 입식 부엌과 함께 보급된 플라스틱 가전의 차가운 표면에다 일말의 정서적 교감을 새겨 넣으면서 탄생했다. 그 감수성은 모던한 시스템 키친이 부엌을 장악하면서 촌스러운 구식 취향의 자리로 밀려났다가, 최근 고급 가전제품의 상징적 도상으로 격상하며 환골탈태했다.

'꽃무늬'야말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발언자일 것이다. 사실 이 챕터는 2인칭 서술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꽃무늬'가 파란 많은 흥망성쇠의 작은 역사를 겪는 동안 줄곧 두려움과 욕망을 지닌 행위자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감정 이입을 느끼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 감정 이입은, 꽃무늬의 의인화가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기에 배가 된다.

꽃무늬는 곧 꽃무늬와 함께 했던 주부들인 것이다. 실내 장식에 애정을 쏟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기실현을 도모했던. 소비 유행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정체성의 나침반을 따라 우왕좌왕했던. 산업화의 역군이라 불린 가부장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욕망의 숨바꼭질을 통해 나름의 역사를 써온 그녀들.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타자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시용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아파트 성공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꽃무늬는 그 노력에 힘입어 확장을 거듭했다. 심지어 '세계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믿는 '상상의 눈'이 활개를 친 88 서울 올림픽 전후로는, 국가적 축제를 장식하는 꽃 탑으로 변신을 모색하기도 했으니.

꽃무늬가 당시 유행하던 자수나 꽃꽂이, 홈패션, 베란다의 미니 분수와 수족관처럼 유사한 형태의 인공 자연으로 변주되었다는 해석은 특히 인상적인 부분이다. 나 역시 1980~90년대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로 군림하던 잡지 <그린 인테리어>가 엄마의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수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엄마가 결코 버릴 수 없어 짊어지고 다녔던 '벤자민 고무나무'도.

어느 좁은 집에서는 천정에 가지가 닿기도 했던, 그 이름도 이국적인 벤자민 고무나무의 존재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이다. 그 안에서 나는, 강남 1세대와 386세대 사이에 낀 '이름 없는 세대'의 자식으로 출생해 외환 위기의 불안한 학창 시절을 거치고 비정규직 900만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가고 있는 내 세대의 역사까지도 덤으로 읽고 만다.

아뿔싸, 내가 아파트에 얽힌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은 이렇게 수정해야 한다. 나는 아파트를 이해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거라고.

아파트에 관해서 사람들은 극단적이기 쉽다. 열광하거나, 경멸하거나, 혹은 무심하다. 세 경우 모두, 아파트가 가진 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나는 세 번째 경우다. 서른이 될 때까지 아파트 청약 통장을 만드는 일이 왜 필요한지 몰랐을 정도이니. 하지만 그러한 무관심은 무의식적 회피와 다름 없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아파트와 함께 재편된 도시적 시각 질서 속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말해봐, 그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테니"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불러들이는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아파트' 스스로 대담하게 고백하듯이, 아파트는 그저 아파트가 아니다. 그는 '우리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

아파트 공화국의 미래?

책의 후반부인 '팩트'는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에서부터 분당과 용인의 모델하우스까지 아파트의 역사에 관한 객관적 서술을 담고 있다. '픽션' 부분이 감행한 허구화의 모험을 역사적으로 검증해주는 역할을 하며, 옛날 잡지 등의 도판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팩트' 부분은 불필요해 보이기도 하는데, 그건 아마도 '픽션'에서 저자의 기획 의도가 충분히 몫을 다했다는 독자로서의 만족 때문일 터. 더군다나, 이 '허구의 회고담'에 반드시 검증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저자는 문학이 삶의 풍경을 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한 사료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서문으로 돌아가 본다. 저자는 아파트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아파트가 지닌 매혹적인 힘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이 말은 대도시에 관한 게오르그 짐멜의 의미심장한 언급을 떠오르게 한다.

짐멜은 대도시의 개별적 현상들이 우리에게 호감을 주든 주지 못하든, 우리가 그러한 삶 가운데 속해 있으면서 재판관의 태도로 임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의 중대한 과제는 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옳은 얘기다. 문학도, 미술도, 다른 모든 종류의 예술도, 결국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방편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자문해 보자. 아파트 공화국의 미래는 과연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물론, 질문이 틀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재판관이 아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같은 근사한 경험을 통해 우리의 과거-현재-미래를 진정으로 이해할 더 많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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