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의 당혹스러움
의학에 '왜?'라는 질문이 등장하면 그 때부터 난감해지기 시작한다. 20세기에 확립되어 오늘날 주류 의학의 위치를 차지한 생물의학(biomedicine)의 관점에서 '왜?'라는 질문은 사실상 별 의미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즉, 의사나 의학자의 입장에서 이 '왜'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며, 따라서 엄밀하게는 의학의 영역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의학의 영역은 지금도 여전히―적어도 원칙적으로는―질병 발생의 자연적 '원인'과 이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율이 엄격히 적용되는 물리적 무대일 따름이다.
게다가 의사나 의학자들은 이 '왜(Why)?'라는 질문을 흔히 '어떻게(How)?'라는 질문으로 바꿔 놓는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왜 아픈가?'라는 질문은 곧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아프게 됐는가?'를 의미한다. 사실 생물의학의 관점에서 '왜'는 '어떻게'와 동의어다. 다시 말하면 '왜'와 '어떻게'를 서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폐결핵 환자의 경우, '그 발병 원인이 결핵균이라는 특정 세균의 감염이고 결핵 발병의 위험 인자로서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다'라는 의학적 사실은 중요하지만, 도대체 왜 이 환자가 이러한 질병에 걸렸을까 혹은 걸려야만 했을까 하는 실존적 질문은 생물의학의 영역에서 중요하지 않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 폐결핵에 걸렸을까는 곧 폐결핵에 걸린 의학적 원인이 무엇일까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대리언 리더와 데이비드 코필드의 <우리는 왜 아플까>(배성민 옮김, 윤태욱 감수, 동녘사이언스 펴냄)에 대한 서평 의뢰를 받았을 때 도서의 부제목("몸과 마음의 관계로 읽는 질병의 심리학")을 미처 살피지 못한 채 본제목만 듣고는 근래 하나 둘씩 번역돼 나오기 시작한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 관련 도서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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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왜 아플까>(대리언 리더·데이비드 코필드 지음, 배성민 옮김, 윤태욱 감수, 동녘사이언스 펴냄). ⓒ동녘사이언스 |
생물학을 포함하여 의학의 영역에 최초로 '어떻게'가 아닌 '왜'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진 학문 분야가 바로 진화 의학이기 때문이거니와 이미 이와 관련하여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랜덜프 네스·조지 윌리엄즈 공저, 최재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라는 유사한 제목의 번역서가 시중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생물의 진화는 질병 발생의 궁극인(窮極因)이다.
그러나 웬걸? <우리는 왜 아플까>는 진화 의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부제목 그대로 딱 '몸과 마음의 관계로 읽는 질병의 심리학'을 여러 임상 사례들과 더불어 상세히 논해 놓은 책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던지는 '왜?'라는 질문 역시 몸과 마음의 상호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즉 어떤 방식으로 질병에 걸려 아프게 되는가를 의미하는 질문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들의 입을 빌려 이 질문에 답을 해 보면, "주요 질병 가운데 오직 마음의 문제 때문에 걸리는 병은 하나도 없다. 마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질병도 없다. 결국 몸과 마음은 잠재적으로 얽혀 있다."(16쪽) 그리고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기제를 한 가지로 단정 짓거나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17쪽).
데카르트주의와 정신신체 의학
이렇게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개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연결 방식에 따라 어떠한 질병이 발병하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저자들은 누가 뭐라 하든 진정한 데카르트주의자임이 확실하다.
이들은 그 규명의 무대로서 정신신체 의학(psychosomatic medicine)을 상정하고 있는데, 명칭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정신신체 의학 또한 정신과 신체를 두 개의 실체로 인정하고 그 상호 관계를 병리적 측면에서 접근해 들어가는 분야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신신체 의학은 데카르트의 적통인 셈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정신신체 의학은 정신의학계에서 통용되는 정신신체 의학의 일반적 범주보다 포괄적이며, 따라서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여 상당히 혼잡스럽다. 가령 전환 장애(conversion disorder)의 경우 미국의 정신 질환 분류 기준인 '정신장애진단 통계편람' 최신판(DSM-Ⅳ-TR)에서는 정신신체 질환과 전혀 다른 범주로 분류하고 있지만, 저자들은 이를 정신신체 질환의 일종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이러한 모호성은 저자들이 채택한 전략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정신신체 의학이란 관련 질병들을 분류하고 진단하기 위한 정신 의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일종의 "질병을 다루는 방식"(385쪽)이다. 즉, 몸과 마음이 상호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신체 질환의 치료에 심리적 요소를 충분히 고려하는 그러한 '방식'이 곧 정신신체 의학이다.
따라서 독립변수로서의 정신신체 질환 또는 정신신체 장애가 가지는 독자적 영역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질병 단위가 아닌 온갖 임상 증상의 사례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독자는 그러한 정신신체 의학 사례들의 화려한 축제 속에 파묻혀 중도에 자칫 길을 잃어버릴 염려마저 있다.
이쯤에서 이러한 책이 나오게 된 동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류 의학인 생물의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함이라는 것. 사실 생물의학은 그간의 인상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극히 일부 질환의 원인만을 규명해 냈을 뿐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질환의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근래에는 리처드 윌킨슨 같은 사회의학자의 저서가 번역·소개되면서 질병의 원인으로서 생물학적 요소가 아니라 불평등, 가난, 계급, 사회적 지위와 같은 사회적 요소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거시적인 사회 이론은 의사와 환자가 일대일로 만나는 임상 현장에서의 실천 행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400년 전의 데카르트에 매몰돼 있는 정신신체 의학을 무대로 한 이 책의 심신상관 담론이 돌파구를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상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논리는 유감스럽게도 저자들의 시각과 달리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생물의학이 지배하는 현실 의료와 의학의 영역에서도 상식 수준에 속하는 진부한 것이다. 다만 정작 의료 현장에서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상식이라는 점에서 '고매한' 상식에 머물 따름이지만….
정신분석학의 효용 가치
주류 생물의학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 저자들은 정신신체 의학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았다. 그 다음으로 이들은 의료 현장에서 환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정신분석학,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채택하고 있다. 철학 용어로 바꿔 말하면 데카르트주의를 배경으로 치료적 실천 행위의 구체적 도구로서 정신분석학을 택한 것이다.
"주의 깊게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가장 적절하게 대답하는지 판단하는 작업이 정신분석"(433쪽)이라면 왜 저자들이 생물의학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택했는지 그 이유를 어렵잖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요컨대 생물의학의 치명적 약점인 환자 소외 현상을 정신분석이 극복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에서 비롯된 정신분석학은 생물의학과 동일한 사상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근대의 자식이다. 특히 뉴턴 역학과 기계적 결정론을 따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저자들의 주장대로 라캉주의 정신분석이 환자의 증상 설명에 치우치기보다는 경청을 통해 "환자가 전기(biography)를 구성하도록 돕는다"(385쪽)고 할 것 같으면 저자들이 정신분석학에 갖는 친밀함과 기대감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생물의학이 정신을 무시하는 수위만큼이나 육체를 무시해 버리는 프로이트식 정신분석학의 치료 방식이 진정한 데카르트주의자로서 정신과 신체의 상호 영향을 강조하는 저자들의 지론과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직된 이론 체계와 달리 임상 현장에서의 정신분석은 한층 유연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과학주의자들의 오판과 달리 정신분석의 임상적 효용 가치는 오늘날에도 충분하다. 물론 생물정신의학의 대성공으로 정신의학의 영역에서 역동정신의학, 즉 정신분석학의 위치가 협소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앞으로도 정신분석은 치료의 도구로서 꽤 오랜 기간 살아남게 될 것이다.
과학적 생물의학이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임상의학이 일반적인 자연과학과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즉, 임상의학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인간, 곧 살아 숨 쉬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실천 분야라는 것. 요컨대 치료 효과가 과학적 정합성에 우선한다.
저자들은 결론적으로 라캉의 견해를 빌려와 "정신분석이 의사라는 고유한 자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실천"(434쪽)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여기서 고유한 자리란 경청자로서의 전통적인 의사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은 상당히 암울한 편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진정한 데카르트주의 콘텍스트는 몸과 마음이 단절된 상태로 변질되어 버렸으며, 의사들은 동서를 불문하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환자와 대화하며, 환자를 존중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해 가고 있다. 환자들 역시 의사를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의학의 변화
저자들은 최종적으로 대화를 통한 이야기의 복원을 꾀하고 있다. 인간은 원래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통해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 동물이다. 인간의 이러한 서사적 전통은 인간이 삶을 이해하고 삶에서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지침 역할을 해 왔다.
의학에도 역시 질병 체험을 재구성하여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는 서사적 전통이 존재한다.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를 통해 환자에게 접근해 들어가는 전통이 그것이다. 그러나 진단 기술의 발달과 의료의 기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서사적 전통은 점차 망실되어 가고 있으며,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에서 배제되는 일이 아주 흔해졌다. 이런 이유로 책의 저자들은 라캉의 입을 빌려 "정신분석이야말로 전통 의학의 마지막 유물"(433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내 의료계 및 의학 교육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인간의 이야기적 정체성의 중요도가 재평가를 받게 되면서 이른바 '서사 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든가 '의료 커뮤니케이션'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진료의 시작이자 끝이랄 수 있는 '환자-의사 관계'의 중요성도 재부각되고 있다.
의학 교육에서도 의료인문학이 중요해지면서 문학, 영화 등 서사적 장르를 의학에 접맥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의대생들이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성 교육을 강화해 나가는 추세에 있다. 여전히 생물의학 중심의 질서가 굳건하지만 그 속에서 작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가 상호 교감하는 서사 가운데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누구나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복원되면 환자는 병이 나을 권리뿐 아니라 혹시 병에 걸릴 권리까지도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저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권리란 병에 걸릴 권리를 말한다. 환자는 다른 영역에서 나타나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피하려고 신체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정말 이런 사례가 있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까?" (417~418쪽)
덧붙임
사소한 번역상의 오류가 하나 눈에 띄어 부기해 둔다. 119쪽의 '토머스 윌리스'는 물리학자가 아니라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의사이다. 물론 이것이 전체 논지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