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화면이 뜨자, 순간 내 얼굴은 굳어 버렸다.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이라는 제목을 읽자마자 그때 이미 내 볼은 마치 족발에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순식간에 불쾌감이 수직 상승해 버린 까닭은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박근혜와 '1등급 복지'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뒹굴고 있는 돼지 일러스트레이션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뒷목을 부여잡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말도 안 돼!" 아직 내용도 보기 전이었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서평 본문을 훑었다. 장문이었다. 분명 호의적으로 쓰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는 감만을 느낀 채, 내 눈은 허겁지겁 '박근혜'라는 글자를 찾았다.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등장할 만한 의미 있는 내용은 전혀 없어 보였다.

왜 "복지가 '족발'이야"라는 물음을 던졌는지도 금세 드러났다. 현재의 복지 논쟁이 장충동 족발집 원조 논쟁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해 불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어 보니…


▲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 ⓒ플래닛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지 논쟁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 깊은 반감은 도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을 상인들의 장삿속으로 치환해 버리는 이 과감한 상상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서평을 반복해서 다시 읽어 봐도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평자 엄기호가 쓴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반박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이 글은 또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란 책에 드러난 엄기호의 정치관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되었다.

이 책에서 엄기호는 20대 대학생들을 향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그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한 기성세대의 20대에 대한 비난은 부당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문제는 기성세대에게 있다고 화살을 되돌린다. 20대 대학생들에게 "너흰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20대 대학생에게 퍼붓는 비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파의 비난으로 이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좌파가 하는 비난으로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우파의 비판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되물으면서 함부로 이들의 삶을 삭제하는 무례를 범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어서 그는 젊은이들이 탈정치화되었다는 좌파의 비난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정치의 전제조건이며, 따라서 탈정치화된 존재는 언어가 부재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그들의 언어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리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면 젊은이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음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엄기호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의 관점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 파괴든 것은 개인이다!

엄기호는 글의 서두를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에 관한 이야기로 열며 이를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근대적 대서사시"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자신이 <코난>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푼 이유는 이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국가 자체를 축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거릿 대처와 그녀에 뒤이어 등장한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가운데 중앙 정부의 억압 기구 또는 정보 수집 기구를 옹호하는 데 주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CCTV, 도청, 미국의 국토안보부, 영국의 독립안보국을 비롯한 그 밖의 장치들 덕택에 근대 국가가 그들의 신민들에게 행사했던 전방위적인 통제는 오히려 확장일로에 있다." (113쪽)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 문장 속에서, 엄기호는 저자 토니 주트에 대한 근거 없는 선입견마저 드러낸다. 엄기호는 굳이 "꼬장꼬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저자를 소개하는데, "꼬장꼬장하다"는 말에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함의가 내포되어 있다. 의도적으로(무심결에 그랬다면 더 큰 문제다!), 그는 토니 주트를 젊은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들의 "탈정치화"를 우려하는 좌파 기성세대로 바라보고 있다.

꼬장꼬장한 기성세대의 젊은이 비판? 둘은 동세대다!

책의 내용을 짧게 소개한 후, 엄기호는 곧바로 문제 제기에 들어간다.

책 내용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 이유로 엄기호는 다른 책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오로지 68혁명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평가를 반박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는다. 엄기호는 주트가 68혁명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고 말한다. 좌파 기성세대와 그들의 비난을 받는 젊은이라는 그의 도식을 떠올리게 하는 판단이다.

먼저 68혁명과 그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설명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의 복지 국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가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었다. 복지 정책에 수반된 무지막지한 획일성은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했다. 또 참혹했던 전쟁과 전후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60년대 세대는 이전 세대 개혁가들이 내세운 목표인 사회정의와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표현에 가해지는 제약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95쪽)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8쪽)

토니 주트는 신좌파의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전후에 인기를 잃었던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존경심' 등을 내세우며 문화 전쟁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68혁명이 내세운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에 대한 요구가 보수주의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엄기호는 주트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을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마치 존재의 근간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주트의 비판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주트의 분석에서 68혁명이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자리마다 사회민주주의(또는 구좌파)를 집어넣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모든 것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철저히 무능하고 무지한 사회민주주의자들 탓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는 어이없는 강변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엄기호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니 주트(1948~2010년) 자신이 68혁명 세대라는 점이다. 엄기호의 시간 개념은 1차원적이다. 그에게서 모든 사건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지 않고 마치 영화의 스틸 컷처럼 정지되어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세대로 정의될 수 없는 역사를 지녔다. 기성세대만이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다. 20대 사회민주주주의자들이 있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 가운데도 사회민주주의자가 있을 것이다.

68혁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제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되었다. 당시 스무 살의 청년은 지금 우리 나이로 예순네 살이다. 그들은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기성세대다. 68혁명에 참여했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좌파 지지자가 된 자들뿐 아니라 우파 지지자가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극우파나 극좌파가 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가 된 자들도 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68혁명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에 놓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68혁명 세대의 젊은이들은 엄기호의 머릿속에서 불로초를 먹은 듯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도로' 복지 국가? 역사의 시간은 흘러간다!

토니 주트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주도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유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엄기호는 주트의 주장이 결국 "'도로' 복지 국가"에 불과하다고 단정을 짓는다.

이어서 엄기호는 68혁명이 결국 보수주의의 도래에 일조했다는 주트의 평가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신자유주의를 초래한 주범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와 어깨동무를 한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의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말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조소를 보낼까? 엄기호는 다시 역사의 시계를 19세기 후반의 수정주의 논쟁으로 돌려놓고 거기서 시계 바늘을 멈춰 세운다. 굳이 주트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1989년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충격적인 몰락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러한 사태가 서구의 좌파에게 심각한 정치적 부담감을 안겼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구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시민들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질 높은 삶을 누리고 있고, 서구의 대다수 선진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언제든지 집권당이 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엄기호는 자신의 근거 없는 억지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의 당연한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둘러 책에 대한 판결문을 내린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은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서평으로서는 최악의 악담이지만, 이미 엄기호가 사회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음을 말해 버린 마당에 다른 결론은 내려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로써 사회민주주의의 수용을 전제로 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복지 논쟁이 그에게 "무의미"한 이유도 밝혀진 셈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무능하고 무지하고, 개인들의 삶에 무관심하다?

엄기호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한 68혁명의 구호가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이유는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혁명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반면 68 세대가 한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으며 "그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국가가 만개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 봐야 하며,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 그리고 그 삶의 요구에 대해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엄기호에게 반문하고 싶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인가? 또 "사회 밖으로"를 외칠 때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권력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그리고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책 속에서 충분히 되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이 사회 복지와 공공 의료 정책의 무지막지한 획일성에 숨 막혀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트는 68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된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앞세우는 그들의 정서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등장한 우파의 감정과 일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좌파가 감정의 분출과 해방에 몰두한 나머지, 반대급부로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등을 주장하며 문화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토니 주트가 68혁명에 지나친 비난을 퍼부었다고 보고, 68혁명에 지워진 책임을 사회민주주의에 뒤집어씌우려 애쓰며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서문에서 둘 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두 책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하고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는 정치인과 정치 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혐오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독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꾀하면서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행동이 낳을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136쪽)

하지만 이어지는 논의에서 두 책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토니 주트는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할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엄기호는 반대로 젊은이들이 정치에 냉소적인 이유를 천작하고 정치가들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와 정치인이 20대에게 다가가야 하는 방식에 대해 엄기호가 제시하는 모범답안은 충격적이다.

엄기호는 정치에 냉소적인 20대가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때는 따로 있다고 말한다.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진정성이 아니라 재미, 오락"만이 이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에서 20대는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라면 정당과 정치인들은 오락 기계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엄기호는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엄기호가 젊은이들의 정치적 언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의 실체이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정치적 능력의 주체로 설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고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시키면서, 엄기호는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는 책의 의도와 달리 사실상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확정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0대 또한 언젠가는 30대가 되고, 40대, 50대의 기성세대가 될 것이다. 20대에 오락으로 즐기던 정치가 나이를 먹으면 과연 다른 정치가 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인가, 만화적 상상력인가?

지난 몇 달간 복지 논쟁은 아주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울 시장은 무상 급식을 둘러싸고 시의회와 맞붙어 싸웠고, 여러 정당과 유력 정치인들은 복지에 대한 정강과 정견을 앞 다투어 밝혔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정치인들은 표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만큼 여론의 동향에 민감하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 논쟁은 정쟁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을 통해 드러난 민심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복지는 차기 정권 창출의 명운이 걸린 핵심 의제로까지 대두되었다.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라는 용어가 익숙해질 만큼 복지 수준을 어디까지 높여야 하느냐에 대한 백가쟁명이 일어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복지 망국론과 포퓰리즘 공세도 이어졌다. 언론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기호는 장충동 족발집들의 원조 논쟁처럼 "무의미하다"는 한 마디로 복지 논쟁을 일축한다. 정치적 냉소주의에 관해서는 학생들이 아니라 엄기호 자신이 더 문제인 듯하다.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와 혐오의 늪에 빠져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복지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적 차별성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한 번도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설사 백 번 양보해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엄기호의 말처럼 '도로'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을지라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도로'가 아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진 논쟁을 두고 엄기호는 우리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조롱한다.

그는 "해방에 대한 요구"는 더 많아지고 커졌으며,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하지만 엄기호가 "현존하는 모든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다고 보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엄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는 아마도 각각이 독자성을 갖는 예술 작품처럼 자유롭고 완성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일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말 그대로 "해방"된 삶 말이다. 그는 정치의 미학화를 꿈꾼다.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에는 정당의 이름이 적혀 있는 현판이 없다. 당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는 개개인의 이름이 정당이고, 개개인의 삶이 이념이다. 마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 작품처럼 그가 말하는 정치는 개념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68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평가에 그토록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분석은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옳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정치를 정치적 범주 속에서 상상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범주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야 할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한다. 당연히 우리만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앞 세대 또한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 왔다. 거기에는 성과도 있었고 오류도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바탕 위에서 상상한다. 성과를 이어받고, 오류를 삭제하며 더 나은 삶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과거는 항상 미래에 비해 더 밝은 빛 아래 놓여 있다"

엄기호가 말한 바처럼 아직도 정치는 기껏 "생존"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정치, 그리고 모든 이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상상하고 주장하며 많은 피를 흘려 왔고,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많은 이들의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를, 그리고 복지 국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와 억압이 두려워 정치를 포기할 때, 우리는 어떠한 통제와 억압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존"이 보장돼야 엄기호가 그토록 강조해서 말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생존"의 보장, 정치와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일차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사회라는 미명하에,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자들의 식판을 발로 걷어차 엎어버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글은 지난 3월 11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0호에 실린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서평에 대한 반론이다. (☞관련 기사 : '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

안성열 대표는 1969년생으로 자신을 "386 세대의 끝자락"이라고 규정한다. 자기 소개 부탁에 그는 "미학을 공부했으며 미술판을 잠시 기웃거리다 출판계로 흘러들어왔다"며 "40대 초반의 두 아이의 아버지로 NL, PD 같은 용어를 아직도 헷갈려 할 정도로 학생운동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정치적 관심이 고양 중"이라고 덧붙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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