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 현장에서 노래도 하고 이곳저곳에 글도 기고하는 음악가인 D와는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다. 언젠가 친구들 여럿이 함께 학교 매점에서 컵라면에 만두 따위를 늘어놓고 식사를 때우고 있었는데, 라면 면발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D가 외쳤다. "싫어! 이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한테도 안 주던 거야!" 그러면서 날름, 뭔가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누가 뭘 뺏어먹으려 했나 보다. 정색하는 그의 나무젓가락이 닿은 곳을 쳐다보니 하얀 바탕에 분홍색 회오리무늬가 들어간 '소용돌이 맛살'이 있었다. 별 맛도 없고 식감도 뚜렷하지 않은 그 건더기에 어머니까지 들어가며 집착하다니, 황당하면서도 회가 동했다. 늘 헤헤거리는 성격에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 그였기에, 이런 황당한 시점에 슬쩍 끼워 얘기하는 게 괜히 짠하기도 했다. 남은 국물과 함께 음식물 버리는 곳 위로 흘려보내던 그 맛살이 그날부터 '뺏기면 안 되는 것'으로 승격한 것이다.

졸업 직후 잠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과 같은 사옥을 쓰던 잡지사에서 일했다. 당시 점심시간이면 동료·선배들은 모두 사옥 11층의 대기업이 운영하는 '짬밥' 식당으로 이동했지만, 나는 늘 1층 입구의 카페로 갔다. 11층 식당이 워낙 복잡하고, 짬밥이 싫기도 했지만 그 카페에서 파는 당근 머핀이 기막히게 맛있었기 때문이다. 직원 카드로 1000원이면 먹을 수 있는 대기업 백반을 포기하고 2.5배나 되는 값을 주고 머핀으로 식사를 하면서도, "이렇게 맛있는 머핀을 멀리 가지 않고 매일 먹을 수 있다니"라며 감동하곤 했다.

그 머핀과 재회한 곳은 한때 출입처였던 통일부 기자실 냉장고 앞에서였다. 'OO건물 1층에서만 팔아요'라고 트위터에서 자랑이라도 할까 했던 '나만의 머핀'이, 똑같이 생긴 치즈, 과일, 초콜릿 머핀 등과 함께 4행 3열로 맞춰져 대형 할인점 '코스트코' 박스 안에 가지런히 포장되어 있는 것이었다. 순간 신설동 풍물시장에서 파는 전투식량이 떠올랐다. 가격도 1000원 백반보다 100원 싼 900원이라 했다. 평소 대량 생산되는 프랜차이즈 빵집 빵을 '개무시'하고 작은 빵집을 전전하던 자칭 '빵 덕후'로서, 멋쩍은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오무라이스 잼잼>(조경규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이상의 사례에서 본 바대로 우리 주변에 흔해빠진 '일상 음식'들은 각자의 경험이나 시점에 따라 잠시나마 소중한 것, 특별한 것이 되곤 한다. 소용돌이 맛살이건 코스트코 머핀이건 전국 어딜 가나 똑같은 맛을 내며 도시 어디에 표류되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기억과 맞물리면서 한 명의 친구, 한 때의 착각이라는 고유한 포장지에 담기는 것이다.

사실 <잡식동물의 딜레마>(조윤정 옮김, 다른세상 펴냄)의 마이클 폴란 같은 이들이 "제발 먹으려거든 '음식(food)'을 먹어라"라고 당부하는 것처럼, 도시에 진열된 먹을거리들은 대부분 공장에서 찍어낸 '먹을 수 있는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컵라면 소용돌이 맛살이나 대형 할인점 머핀 같은 것 자체만이 아니라 심지어 원재료라는 밀가루마저, 엄밀히 따지면 플레이도우(컬러 점토) 같은 장난감과 별 차이가 없다. 삼켜서 소화를 시킬 수 있다는 것, 영양소 표기를 달고 나온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역설적으로 식도락 만화 <오무라이스 잼잼>(조경규 지음, 씨네21북스 펴냄)의 탄생과 이 책의 부제에 나오는 '경이로운 일상 음식'이란 수사를 가능하게 한 특징이 아닌가 싶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지난해 4월부터 7월까지 27회에 걸쳐 연재된 동명의 웹툰을 예쁘게 묶은 이 책은 '음식 같은 물질', 흔해빠진 음식 이야기들로 그득하다.


ⓒ조경규
저자와 아내, 딸 은영이와 아들 준영이 등 네 가족이 먹고 소개하는 음식들은 자장면이나 피자, 뼈다귀 해장국처럼 비교적 '요리'에 속하는 것도 있지만 포테이토칩과 맛동산, 컵라면과 스팸처럼 그야말로 공산품에 속하는 유사 음식들이 대다수다. (소개된 음식 중 경험하기 어려운 건 '스님이 담을 넘는다'는 뜻의 중국요리 불도장(佛跳墻), 홍콩의 '거북 젤리' 정도다.)

<오무라이스 잼잼>에 <신의 물방울>의 와인이나 <미스터 초밥왕>의 스시처럼 특정 장소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요리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경이로운' 음식 이야기가 가능한 이유는 대략 이렇다.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백 수천만의 다른 경험들로 먹혀질 수 있고, 장난감처럼 출시 비화나 포장지의 발전 과정 등 산업 제품으로서의 매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코카콜라 음료는 거들떠 안 봐도 그 병은 수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된다.)

무엇보다 '대중'의 입맛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되는 제품인 만큼, 맛과 포장 마케팅에 걸쳐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이 공통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을 녹여내게 된다는 점. (내가 머리털 난 뒤 여태껏 라면 맛없다는 놈은 한 놈도 못 봤다!) 그건 궁핍과 무료, 허기와 우울 등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모두가 느껴봤을 감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작가와 가족이 2년째 중국 베이징에 머무르는 중이니 이 음식들의 공산품적 성격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오요우취'(좋은 친구 칩)란 이름으로 팔리는 '포카칩', '하오리요우파이'(좋은 친구 파이)란 이름의 초코파이, '하오위뚜이'(아주 많은 물고기)로 둔갑한 고래밥 등 중국 마트에서도 한국의 그것과 똑같은 맛의 과자들을 만날 수 있다. (4화 부록,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 과자')


ⓒ조경규
부부끼리 울릉도를 여행하던 중 만난 어느 민가의 할아버지는 "내가 일하다가 힘들 때마다 조금씩 마시는 것"이라며 황토색 즙을 사발에 건네는데, 다름 아닌 믹스 냉커피였다. (8화 '울릉도 냉커피') 울릉도 특산 자양강장제가 아닐까 하는 예상은 믹스커피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 장난감 음식들이 울릉도부터 베이징까지 징그럽게도 퍼져 있다며 세계화나 입맛 평준화에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그 전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거다. 포카칩보다는 '프링글스'가 맛있지, 프링글스 중에는 치즈나 양파 향을 첨가한 것보단 오리지널이 짱이지, 하면서 공산품 안에서도 분명히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제는 "OO 카페의 OO산 원두로 내린 커피가 맛있더라"고 말하는 기자도 학생 시절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뽑아 먹곤 하던 300원짜리 냉커피를 떠올리며 그때만 누릴 수 있었던 여유와 풍경을 추억했다. 언젠가 커피 믹스가 온 국민의 커피 취향을 통일시키고 있는 게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그리 큰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딜 가나 똑같은 맛이기에 '싸구려 커피'라는 정서 또한 공감을 살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만화가·그래픽 디자이너인 저자 조경규는 중화요리 식도락 만화인 <차이니즈 봉봉클럽>, 동물 캐릭터 둘의 만담형 상황극 <내 이름은 팬더댄스> 등 다른 만화에서도 뛰어난 음식 묘사 능력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전작들을 보면서는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다. 내용은 훌훌 넘기면서, 소개된 음식점에 한 번 가보고 싶다거나 '이렇게 만들어 먹으면 맛있지 않을까'하는 느낌을 받은 정도였다. 그런데 <오무라이스 잼잼>은 받아들자마자 단숨에 읽고, 대부분의 식사를 함께 하는 남자친구에게도 추천한다며 손에 쥐어주었다.


ⓒ조경규
왜일까. 이 만화 속 맛 공동체로 등장한 게 다름 아닌 저자와 저자의 가족이어서가 아닐까. 식구(食口)는 그리스 신화부터 일일 연속극까지 동서고금 비극적 서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오무라이스 잼잼>의 사각 틀 안에서처럼 가장 친밀하고 밥맛 오르게 하는 존재다.

사이좋고 먹성이 좋은 것 뿐 아니라 이 가족은 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에 아주 적절한 요소를 갖췄으니, 바로 귀여운 아이들 은영이와 준영이다. 누나 은영이는 실수로 연못에 도끼를 빠트린 나무꾼은 흥하고, 일부러 빠트린 나무꾼은 망한다는 '금도끼와 은도끼'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부터 '실수로'는 착한 것, '일부러'는 나쁜 것을 이르는 줄 착각하고 모든 행동에 '실수로'를 갖다 붙인다. 동생 준영이는 자석낚시 놀이용 열대어를 접시에 담아 아빠에게 내밀며 "이건 굴비야. 굴비는 딸기 맛이랑 사과 맛 두 가지야"라고 주장한다. 가족에게 실례되는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직접 낳고 기르고 관찰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훌륭한 만화 '소재'다.

오므라이스도 잼도 메인 메뉴로 등장하지 않지만, 제목이 <오무라이스 잼잼>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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