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이 1985년 10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 보름 동안 했던 강연을 엮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이 최근 나왔다. 세이건은 이 강연에서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히 밝힌다.

특히 세이건은 종교의 긍정적, 부정적 역할을 논하면서 그 동안 자연, 우주 속에서 신의 존재 증거를 찾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한다. 특히 세이건이 수천 년 동안 제시된 신 존재 증명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내용은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의 전주곡을 보는 듯하다.

이런 세이건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한국을 대표하는 천문학자 홍승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종교학자 김윤성 한신대학교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홍승수 교수는 세이건의 명저인 <코스모스>(사이언스북스 펴냄)를 완역해 국내에 소개하는 등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과학자다. 홍 교수는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각 장별로 꼼꼼하게 해설하면서, 세이건의 입장을 비판한다. 세이건의 책과 홍 교수의 서평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를 바라보는 과학자의 다양한 관점을 살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인 김윤성 교수가 홍승수 교수에 비해서 세이건에 호의적인 것도 흥미롭다. 김 교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거론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세이건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하고 나서, 역시 책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의 주장에서 음미해볼 만한 지점을 짚었다. 김 교수는 세이건에 대한 논평을 통해서 종교에 대한 '맹신'과 '부정'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과 종교에 대한 또렷한 관점을 제시하는 홍승수, 김윤성 교수의 서평을 전제한다. <편집자>


▲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칼 세이건 강연, 앤 드루얀 편집,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인류 문화의 위대한 유산인 종교와 과학은 늘 묘한 길항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칼 세이건이 1985년에 한 기퍼드 강연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은, 이 길항의 균형이 과학에 의하여 이미 깨뜨려졌음을 독자에게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쓰인 듯하다. 이 책에서 세이건은 '신을 탐구하는 행위'는 아무리 과학적 경험에 기초하려 한들 결국 종교 행위일 뿐임을 지적하고, 과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 기존 종교의 한계를 비판한다.

현대를 과학 기술의 시대라 일컫는 걸 보면, 과학과 종교가 벌이는 길항의 균형추가 과학 쪽으로 이미 기울어진 듯하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한가? 꼭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힘의 균형이 과학 쪽으로 기울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아직 종교는 과학과의 겨루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해서도 안 된다.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해도 종교가 해야 할 몫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아니, 둘은 애초부터 겨루기의 상대가 아니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 비해 '힘'이 월등하게 우세하기 때문에 상대가 못 된다는 뜻이 아니라, 종교와 과학의 소관 사안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은 종교적 교의가 허구라고 판단하고 간섭하고, 종교는 과학의 내용이 교의에 어긋난다고 문제 삼는다. 소관 사안이 다를지라도 어떤 답에 이르려면 과학과 종교가 같은 길을 밟아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과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라보면서 그 현상을 굴러가게 하는 이면의 기본 얼개를 찾으려 노력한다. 한편, 종교는 동일한 자연 현상에서 절대적 초월자의 뜻을 읽어 내려고 애를 쓴다. 소관 사안은 이렇게 다르지만 거기에 이르게 하는 매체는 동일한 자연 현상이었다. 여기서 길항의 관계가 비롯한다.

그러나 매체가 되는 자연 현상이 하나라도 거기서 도출하려는 '작동 얼개'와 '신의 뜻'은 분명히 다른 내용의 진실이다. 하나의 사실에서 단 하나의 진실만이 허락된다면, 그건 '이름 달리 부르기' 놀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이 하나 이상의 진실을 함축하고 있음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사실에서 서로 다른 내용의 두 가지 진실이 양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과학과 종교 사이에 벌어지곤 하는 길항의 관계가 서로를 보듬어 안는 보완의 관계로 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 보완의 관계를 '공감'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종교가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면 둘은 반드시 공감의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공감을 희원(希願)한 한 과학자의 고뇌가 담겨 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의 원고가 된 기퍼드 강연 원고를 준비하면서 얼만 많은 사색의 시간을 보냈을까? 과학과 종교 사이에 공감과 보완의 관계가 유지되기를 희원하는 필자에게 역시 이 책의 서평을 쓴다는 일은 도전이면서 고역이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용에서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을 느끼게 마련이며 그 경외심의 뿌리에 초월적 절대자가 자리한다고 믿는다. 그러고 그 믿음이 주는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삼아 매일 실천으로 옮기는 이들을 우리는 신앙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인간의 이와 같은 신 탐구 내지 종교 행위가, 자신의 다양한 과학적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저 허구일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자연과 우주 속에서 하느님 또는 신에 대한 증거를 아직 과학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판에 사용된 잣대는 물론 과학의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신앙에 과학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민 것이다. 그래서 세이건의 논지는, 과학의 눈으로만 보면 매우 명쾌할지 모르겠으나 종교의 가슴에는 멍만 남길 수도 있다. 그 까닭에 필자는, 이 책의 서평은 과학과 종교의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처리돼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는 이 책의 부제에서 세이건의 시각이 어떤 것인지 예상할 수 있다. 예리한 독자라면 이 책 영어판의 부제가 '신에 대한 나의 탐구(A Personal Search for God)'가 아니라 '신 탐구에 관한 나의 소견(A Personal View of the Search for God)'이라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시각이 신 존재에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지금 손에 든 당신이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간에, 세이건이 이 책에서 택할 관점의 향방을 미리 짚어 보기 바란다.

나는 이 책의 매 장(章)을 먼저 과학의 시각으로 읽으면서 논지의 핵심을 설명하겠다. 그 다음 종교의 시각으로 세이건의 논지를 재조명함으로써, 그가 종교를 과학의 잣대로 재단하는 과정에서 범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겠다.

필자는 과학의 시각이 일부 편협한 종교인에게 경고의 불빛을 비춰 주기 바란다. 그러고 종교의 시각이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에 쐐기로 작용하길 희망한다. 과학의 시각이 저자의 논거에 대한 필자의 해설을 제공할 것이다. 한편,, 종교의 시각은 필자에게 가슴 착한 신앙인을 위한 변호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1강 자연과 경이

세이건은 종교(religion)의 어원적 해석으로 이 책의 첫 장을 연다. 그에 따르면 'religion'이 '함께 묶기'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왔다고 한다. 세이건 주장은, 과학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는데, 종교는 자연에서 우러나는 경외감을 절대자와 연결하고자 하므로, 연결의 관점에서 과학과 종교의 목적하는 바는 같다는 것이다.

필자는 'religiion'의 어원적 의미는 물론이고 세이건의 해석인 '함께 묶기'가 단순히 두 개의 사물이나 현상을 하나로 연결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과학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의 이면에 숨은 입증 가능한 '진실'을 찾아내어, 그 둘의 근원적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한편,, 종교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라는 텍스트에서 신의 뜻이라는 '진실'을 읽어 내어 그 진실을 '믿음'으로 간직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경우, 두 연결 대상 중 한쪽에 늘 신이 자리하는데 비하여, 과학은 그 자리에 물질계의 작동 원리가 앉아 있다.

세이건은, 과학과 종교의 목적은 같지만,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과 찾아낸 진실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방식에서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길을 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종교는 찾아낸 진실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객관적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가질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에서의 진실은 믿음의 대상이지 입증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서 필자는 세이건에게 묻고 싶다. 입증된 진실이라면 믿을 필요가 있겠는가? 입증된 진실은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 것이다. 믿음이란 공개적 또는 노골적 입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믿음은 믿는 자의 결단을 요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이 종교에게 "네가 읽어 낸 믿음의 신빙성을 내게 입증하라."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은 그 믿음이 가져오거나 가져올 결과만을 문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세이건이 과학과 종교의 이질성을 어떻게 '문제 삼고 있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자. 세이건은 천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현상들의 영상을 독자에게 차례로 보여 준 다음, 그 영상들이 품고 있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눈을 들어 밤하늘을 보면 대자연이 연출하는 신비가 펼쳐진다. 밤하늘의 장관과 위용과 신비에서 누구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경외심을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렀다. 종교적 감흥을 자아낸 이와 같은 현상에서 과학은 인과의 원리를 밝혀낸다. 종교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위용에서 우러난 종교적 감흥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종교는 원리 대신, 그 진실 너머에 또 어떤 초월적 절대자가 자리한다고 믿는다.

세이건은 종교가 주장하는 진실 너머의 진실이 갖는 허구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자기 식의 몇 가지 독특한 논거들을 제시했다. 종교적 감흥을 자아내게 하는 별과 은하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사실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한 다음, 은하 수명의 유한성이 신의 영원성과 화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초신성과 같은 거대 규모의 폭발이 일어나면, 은하에 존재할지 모르는 아니 확실히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는, 생명이 멸절(滅絶)되거나 지적 기술 문명권이 파괴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전선(全善)하신 신이라면 은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허락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모순을 지적한다. 신은 영원불멸하므로 죽음에서 해방된 존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을 유한한 수명의 존재로 만들어 인간에게 죽음의 공포를 안겨 준 것을 보면, 신은 결코 전선할 수 없고 오히려 극도로 잔인한 존재일 것이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므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서양 전통 종교의 신은 지극히 지구 중심적이라고 질타한다.

세이건의 결론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이 결코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서양 종교에서 상정하는 '초월자'가 존재하더라도, 그 초월자는 지극히 지구 중심적인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고 강조한다. 우주를 아우르기는커녕 은하조차 보듬지 못하는 '졸렬한'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세이건이 제시한 이 논거를 읽으면서 내 식으로 그에게 '어깃장'을 놓고 싶어졌다. 은하 도처에 문명권이 자리하고 있지 않는 한, 하나의 문명권이 초신성 폭발로 파괴될 확률은 거의 0이다. 그만큼 문명권들의 평균 거리가 엄청나게 멀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생명이 출현하려면 먼저 성간 물질에 탄소를 비롯한 중원소가 충분히 공급돼야 한다. 그런데 초신성 폭발이야말로 중원소의 주요한 공급 기작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성간에 중원소를 부지런히 공급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다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신의 무한한 자비를 느껴야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위상의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고 종교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일부 종교에서는 부활이란 정화된 언어로 죽음의 허상과 공포를 극복하게 한다. 당신이라면 자신의 육신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유지하고 싶은가? 필자라면 그런 식의 영원한 삶이라면 도대체 지루해서 못 견디고 말 것이다.

나의 '어깃장' 놓기는 계속된다. 어쩌다가 우리 은하의 한 문명권이 폭발하는 초신성의 바로 곁에 자리하게 됐다고 하자. 그 문명권은 자기네의 불운을 단순한 '재수 탓'으로 돌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문명권의 지적 생명체가 지구의 신앙인들과 같은 종교적 존재라면, 자신들에게 불어 닥친 불행을 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읽어내려 할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이 가상의 사건을 돌아볼 수 있다. 만약 그 문명권이 인접 문명권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속성의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초신성을 폭발하여 그 문명권을 일찌감치 멸망케 한다면, 은하 전체의 선익(善益)을 위하여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세이건은 서양 종교의 전통적인 신을 인간 중심 또는 지구 중심의 편협한 신이라고 질타한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라고. 필자도 동의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어깃장 놓기'가 지구 중심적 신은 물론이고 은하 중심적인 신을 위한 '겉보기 변명'의 구실은 했으리라. 필자가 '어깃장'이니 '겉보기 변명'이니 하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 건, 세이건 식의 논의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이다. 필자는 세이건이 제시하는 논거들 역시 단순한 어깃장 놓기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 종교의 교조적 편협성을 일깨우는 데 세이건이 일조는 했겠지만, 그가 바라는 인간 종의 영원한 안녕을 도모하는 데 그의 논거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독자들이 세이건이 겨냥하는 편협하고 교조적인 종교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장의 해설을 마친다.

2강 코페르니쿠스로부터의 후퇴

아폴론 신전에 옴팔로스라는 이름의 돌 제단이 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이 세계와 우주의 중심에 솟는다고 믿었던 돌기를 이 '배꼽 돌'이 대신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천문학의 발달은 옴팔로스의 이전(移轉) 역사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최초의 그래서 가장 힘이 들었던 이전의 주역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등에 업은 교회의 권위를 거역하면서까지 그는 옴팔로스를 지구에서 태양으로 옮겨 놓는 데 성공했다. 15세기 중엽에 일어난, 조용했지만 거대한 혁명이었다. 그 결과 우주의 중심이라 자처하던 지구와 지구인의 위상에 회복할 수 없는 흠집이 났다. 알고 보니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도는 여러 행성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자신의 평범성에 대한 지구인들의 최초 눈뜸이었다.

지구인의 위상이 이렇게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20세기 초에 와서는 허구의 '화성인'까지 '출몰'하기에 이른다. 한편,, 우주의 중심을 지켜 줄 줄로만 믿었던 태양마저 우주커녕 우리 은하의 중심도 차지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 사건 역시 20세기 초에 있었다. 태양도 변방에 던져진 그저 그런 수많은 별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던 것이다. 우주에는 아예 중심 같은 건 없다. 이제 자신의 평범성을 깊이 인식한 지구인들은 외계 문명권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15세기에 이미 완성된 혁명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이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은 지구와 외계 문명과의 교신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평범성에 대한 인식의 뿌리는 옴팔로스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상대성 이론이 특권적 지위의 좌표계 따위는 아예 바라지도 말라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현대인들은 인간 이성의 자신감을 상실한 채 코페르니쿠스 이전(以前)의 특권적 허상을 그리워한다는 게 세이건의 진단이다. 세이건은 이 장에서, '설계로부터의 논증'을 다시 내세우는 창조론자들의 최근 동향과 인간 원리(Anthropic Principle)로 우주와 인간 세상을 다 설명하려 덤비는 일부 우주론자들의 과도한 주장을 특별히 우려한다.

다윈이 궁극의 '시계 제작자'인 신의 개입 없이도,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하면, 무질서한 자연에서 질서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세이건은 다윈을 인용하여 설계로부터의 논증을 일단 반박하고,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에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있게 다룬다.

다윈의 진화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신의 창조가 자동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논쟁의 핵심은 설계로부터의 논증이 아니다. 무엇을 두고 '창조'라고 하는지가 핵심이다. 일부 편협한 기독교인들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아무도 창조를 <창세기> 기록의 축자적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이건의 반박은 공허하다. 우리가 우려할 대상은 '지적 설계론'으로 재무장한 창조 과학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창세기 식의 '창조'를 '과학'이라 호도할 위험 때문이다.

한편, 세이건은, 인류 원리의 옹호자이며 저술가인 존 배로(John D Barrow)의 "우주가 관찰자들을 산출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설계되었다."라는 언급을 하나의 증거로 삼아, 인본 원리의 실제 목적이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고, 그래서 인간이 결국 나오게 되었음'을 믿게 하려는 데 있다고 갈파한다. 세이건의 논거들을 여기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인류 원리의 가장 큰 맹점이 결과론적 주장에 있다고 본다.

이 책의 독자들이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비록 '설계로부터의 논증'과 '인간 원리'의 비논리적 측면이 세이건에 의해서 밖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자동적으로 부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이건이 신의 부재를 증명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창조 과학과 인간 원리에서 동원됐던 신 존재의 논지들이 갖고 있는 비논리적 측면을 지적했을 뿐이다. 신은 아마도 '존재 증명'을 거부하는 '존재'일 것이다.

3강 유기 우주

세이건은 이 장에서 탄소를 함유하는 간단한 분자들이 혜성의 스펙트럼에서 확인됐음을 길게 설명한다. 외계에 유기 화합물의 존재 여부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혜성에 유기 화합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특별할 게 못 된다. 혜성의 핵이 미행성체의 원형일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세이건은 일부 소행성들을 비롯하여 화성의 위성인 포보스와 데이모스의 반사도가 3퍼센트 수준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들 소형 천체의 표면에 내화성 유기 화합물이 존재할 것으로 추측한다. 토성의 바깥쪽 위성 이아페투스에 대해서도 같은 추측을 한다. 낮은 반사도가 내화성 유기 화합물의 존재를 반드시 시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토성과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는 메탄이 확실히 존재하다. 한때 메탄의 바다가 존재했을 것이란 그의 예측도 사실인 것으로 최근에 밝혀졌다.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에는 메탄의 존재가 확실할 뿐 아니라, 각종 탄화수소들이 이들 외행성계의 천체들에서 속속 발견됐다.

유기 화합물이 태양계 천체에서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세이건이 이 강연을 할 당시에 알려진 성간 분자들은 총 50여 종에 불과했지만, 현재 150종 이상의 유기 화합물 분자들이 저온의 고밀 암흑 성간운에서 발견됐다. 전파 천문학의 발달로 매우 복잡한 구조의 성간 분자들이 속속 발견되는 중이다. 이들의 거의 전부가 탄소를 근간으로 하는 유기 화합물 분자다. 그러므로 유기 화합물은 우주에서 예외적인 희귀 성분이 아니라 우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물질이다.

한편,, 우리 태양계 역시 저온 고밀의 성간운이 중력적으로 수축하여 태동했을 터이므로, 태양계 천체들이 만들어진 원료 물질에는 유기 화합물이 이미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현재 태양계 천체에서 발견되는 유기 분자들이 성간운에 들어 있던 바로 그 분자는 물론 아니다. 성간운 단계에서 원시 태양계 성운 단계를 거쳐 미행성, 혜성, 원시 행성, 소행성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대단히 복잡한 화학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계의 탄소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중원소는 그 기원이 성간운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태양계에서의 유기 화합물의 존재는 성간운에서 원시 행성계로 이어지는 진화의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생명의 기원에 절대적 요소인 이 유기 분자들 사이에서 상호 작용이 충분한 빈도로 일어나려면 적정 수준 이상의 농도가 오랫동안 유지돼야 한다. 기체 위상에서는 높은 농도를 유지하기 어려우므로 반응의 효율성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유기 화합물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액체 위상의 물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다.

원시 태양계 성운에서 지구가 태어난 지역은 물이 존재하기에는 온도가 너무 높았다. 그러나 물 분자는 수화물의 형태로는 광물 암석에 물론 갇혀 있을 수 있었다. 이들 물 분자가 암석이 용융되는 과정에서 밖으로 분출하여 지구의 원시 대기에 수증기를 공급했을 것이다. 수화물 이외의 공급원도 생각할 수 있다. 물의 분수령 바깥에서 형성된 미행성체들에는 얼음이 풍부했을 것이다. 이 점은 혜성의 핵이 온통 얼음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확실하다. 얼음을 잔뜩 머금은 미행성체들이 분수령 너머에서 안으로 이주하면서 일부는 원시 지구에 포획된다. 그 결과 원시 지구는 엄청난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증기를 포함한 원시 지구의 대기가 식으면서 수증기는 비가 되어 운석 구덩이가 널린 원시 지구의 표면에 떨어져서 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유기 분자가 녹아든다. 호수의 물이 증발하면 유기 분자의 농도가 자동적으로 높아진다. 이리하여 원시 지구의 표면 도처에 '원시 스프(primordial soup)'의 연못들이 자리할 것이다.

원시 스프 성분 분자들의 억겁에 걸친 상호 반응에서 자기 복제의 기능을 갖춘 분자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다음에 일어날 반응은 이 분자가 전적으로 지배할 것이다. 분자들의 무작위 반응이 촉매로 기능할 단백질 분자를 만들어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태동한 분자들이 단세포 생물로 발달하기까지에는 숱하게 많은 난관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난관들이 과연 무엇인지는 현재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주 복잡한 분자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아미노산 분자 다섯 개가 모여 특정 기능을 발휘할 효소 분자 하나가 만들어질 확률은, 20종의 아미노산 분자들 중에서 다섯 종을 특정 순서로 배열하면 되므로, (1/20)5≃1/(3×106)이다. 다시 말해서 대략 300만 번의 무작위 시도 끝에 원하는 분자가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러한 논지를 근거로 생명의 기원을 신의 창조 손길에만 의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세이건이 배척하려는 창조의 손길이, 아미노산 하나하나를 원하는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신 스스로 꿰맞추는 행위를 의미한다면, 평자도 세이건의 주장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아무도 이런 식의 창조를 신의 창조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라면 자신의 창조 과정을 이런 식으로 '미련하게' 이끌어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필요조차 없지 않았겠는가. 신학도 이런 개념의 창조를 용도 폐기한 지도 꽤나 오래됐다.

그러므로 세이건의 논지는 이미 생명을 잃은 '적(敵)'을 한 차례 더 죽이는 격이다. '왜'를 고민하는 종교에게 과학의 잣대를 일방적으로 들이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는 종교에게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건 과학의 몫으로 남겨 둬야 한다.

필자는, 세이건의 논지를 신의 창조를 배제하는 데 동원하고 싶지 않다. 지구 생명이 이 장에서 논의된 대로 태동했다면, 생명 현상의 범 은하적 보편성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생명이 성간 교신의 능력을 갖춘 기술 문명으로 발전할 것인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세이건의 논지가 생명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길을 열어 준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외계 문명과의 교신은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세이건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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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외계의 지적 생명체

태양계 밖에서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이 발견이 우리에게 가져올 철학적, 윤리적, 정치적, 신학적 충격은 가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것이다. 그 까닭에 우리는 외계인의 존재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러한 관심이 20세기에 들어와서, 화성 표면의 운하, 고대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 미확인 비행 물체 등으로 표출됐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 장에서 로웰의 화성 운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한다. 외계인의 지구 방문과 UFO의 문제는 다음 장에서 다룬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조반니 스키아파렐리가 화성 표면의 줄무늬를 설명하고자 사용했던 '관(管, channel)'이라는 뜻의 이탈리아 어 '카날리(canali)'를 영어권에서 '카날(canals)'로 번역하면서, 지적 존재가 모종의 의도를 갖고 건설한 '운하'라는 개념이 이 단어에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스키아파렐리가 건강상 이유로 화상 관측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구한말 외교관의 자격으로 조선을 방문하기도 했던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애리조나 주 플래그스태프에 자비로 훌륭한 천문대를 건설한다. 오늘날 로웰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로웰은 '카날리'를 집중적으로 관측하여 '화성 지도'를 작성하면서 '화성 운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굳혀 간다. 이어서 로웰의 '화성 운하' 아이디어는 SF의 형태로 대중 문학으로 깊숙이 들어왔고 라디오 방송까지 타게 되면서, 카날은 화성인들의 지구 습격 가능성으로 확대 재생산되기에 이른다.

지상 망원경의 제한된 분해능으로 얻은 화성의 줄무늬는 로웰만 본 것이 아니었다. 릭 천문대의 대장을 지낸 라이트도 로웰의 줄무늬를 보았을 뿐 아니라, 라이트와 로웰의 화성 지도에 유사성도 발견된다. 문제는 줄무늬가 아니라 줄무늬에 대한 로웰의 해석에 있었다. 과학자로서 로웰이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된 저간의 사정을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지구에서는 수에즈 은하나 파나나 운하와 같은 거대한 운하 건설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여기에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쓰라린 경험이 우주 전쟁의 공포로 연결됐던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인간의 본성에 있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경향이 있다. 즉 화성인이 지구 문제의 해결사가 되어 주기를 지구인들이 원했던 것이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세이건은 화성의 운하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에서도 인간의 신을 향한 염원의 기원과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세포에서 시작한 지구 생명의 진화가 인간에 와서 끝날 이유가 없다. 지구 문명이 당장 멸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구 문명의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그 변화의 속도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지구에서의 기술 문명의 발달이 그럴진대 외계에서의 상황은 또한 어떻겠는가. 지구보다 다만 천 년이라도 먼저 생명이 출현한 외계 행성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의 생명도 지구에서와 같은 다윈 진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면, 저들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진화에 허용된 시간만 생각한다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 문명을 갖춘 지적 생명체들을 우리는 은하 도처에서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세이건은 드레이크의 방식을 따라서 우리와 교신 가능한 문명권이 은하수 은하 안에 몇이나 있을지 추산해 보인다. 그러나 추산의 관건은 전적으로 기술 문명의 예상 수명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된다. 지구 문명의 미래가 희망적일수록 그만큼 많은 수의 외계 문명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교신 가능한 외계 문명을 찾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견 자체가 지구 문명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세이건은, 수동적 교신의 방안으로 현재 진행 중인 SETI 계획을 제안하고,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를 우주로 내보낼 충분한 능력을 지구 문명이 현재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세이건은, 외계 생명의 문제를 과학적 실험의 대상으로 구체화했다. 외계 생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관측을 제안했다. 여태껏 단순한 믿음을 근거로 한 주장에 불과하던 논의를 실험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왔다. 지구에서 발견된 물리 법칙의 범 우주적 보편성을 근거로 외계 문명과의 교신 가능성을 그는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구 문명에 가져올 엄청난 의미를 바르게 짚어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세이건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종교에 대한 거의 '적대감'에 가까운 태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종교의 기원이 '대리 해결사'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됐다는 세이건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이 인간의 신을 향한 염원을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다. 외계 문명의 도움으로 지구의 문제를 일부 해결할지 모르지만, 외계 문명이 완전한 의미의 '해결사'는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의 이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을 세이건 자신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5강 외계인 민간 전승

이 장에서 세이건은 구체적 예를 들어가면서, 고대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에 대한 주장과 미확인 비행체(UFO)에 관한 수많은 보고가 갖고 있는 논리의 허구성을 하나하나 짚어 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스터 섬의 거대 석상, 나스카 사막의 대형 그림 등이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에리히 폰 데니켄의 <신들의 전차>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부가 판매됐다고 한다. '비행 접시'라는 표현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1947년 이래 약 100만 건에 달하는 UFO '목격' 사례가 보고됐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러한 주장과 보고의 허술한 구석이 바로 노출되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주인의 지구 방문 흔적과 그 가능성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인의 지구 방문 증거로 제시된 거대한 패턴, 그리고 UFO의 목격담과 관련 사진 등에는 어떤 의도를 갖고 조작된 사례들도 발견되지만, 대부분은 선량한 필부들의 진솔한 '경험담'이다. 하지만 그 '경험'이 재확인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 경우 경험이 사실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희망 사항이 '경험'으로 둔갑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주인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세이건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 자신이 저질러놓은 비극적 사고(事故)의 완벽한 해결사의 역할이라고 한다. 전 세계의 핵무기 보유고만 놓고 생각해도 이 비극의 실상이 머리에 쉽게 떠오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신산한 삶에서의 행복한 탈출은 우리 모두의 꿈이 아닌가.

신들의 전차든 UFO의 목격담이든, 그것은 의식의 저변에 자리하는 인간의 원초적 염원의 굴절된 표출이라고, 세이건은 진단한다. 원시인들은 신을 확장된 아버지로 받아들이면서 신에게서 해결사의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다. 언젠가 내게 떨어질지 모르는 '벼락의 비극'을 '천둥의 신'께서 내 대신 미리 막아 주기를 염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세이건이 이 장에서 내린 결론은, '신들의 전차'나 '비행 접시'에 거는 현대인의 열광도 종교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심성의 발로라는 것이다.

이 장의 결론에 접하면서 나는 저자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그렇다면 종교는 진화 중이란 말인가, 아니면 정체(停滯)가 종교의 버릴 수 없는 한 가지 속성이란 말인가? '천둥의 신'을 외계인으로 동정(同定)하게 될 즈음, 종교가 인류 문화에서 완전히 사리질 것인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세이건이 이 장에서 겨냥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의 지적 수준이 원시 동굴의 상황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했음을 지적하기 위함인가. 외계인이라면 직접 방문보다 전자기파를 이용하는 교신을 택했을 터이니, 외계로부터 지적 존재의 직접 방문은 기대하지 말자는 제안일까. 종교라는 게 이렇게 무지한 수준이니 종교에 더 이상의 기대를 걸지 말라는 요구일까. 아니면 종교가 인간의 원초적 심성의 발로이니 우리와 영원히 같이 할 것이라는 인식의 토로인가.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나는 외계와의 교신에 적극 매달리고 싶다. 저들의 신과 우리의 신을 비교한다면, 우주의 창생과 신의 문제에 해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6강 하느님에 대한 가설들

하느님의 관한 논의를 합리적으로 이끌어 가려면, '하느님'이 무엇인지, 적어도 어떤 속성의 존재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어떤 종류의 신에 관해 이야기 하자는 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그런 속성의 신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신의 속성이 문화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 문제를 극복할 한 가지 방안으로 우리는 자연 신학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자연 신학이란, 오로지 이성, 경험, 실험을 통해서만 수립될 수 있는 신학적 지식 체계를 의미한다. 신의 속성을 알아내는 데 계시나 신비 경험 따위는 배제하고 오로지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하겠다는 것이다.

자연 신학을 근거로 한다면, 믿음의 세부 사항이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벌어지는 관측 가능한 현상들의 실상은 관측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다. 관측자가 속한 문화가 천상의 현상을 좌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연 신학이 인류 공통의 신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과연 그러할까. 겉을 드러난 현상으로부터 보편타당한 지식을 발굴해 내려면 반드시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석이란 해석의 틀을 구축하는 작업이다. 해석에는 반드시 모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모형이 언어다. 언어를 생각의 거푸집이라고 하지 않던가. 해석의 결과도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지리, 역사, 문화 등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 신학도 지리, 역사, 문화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성격의 지식도 많다. 신학이 그런 지식의 대표 격이다. 즉 신비는 종교의 빼놓을 수 없는 속성인 것이다.

신학을 벗어나 우리에게 친숙한 문학으로 가 보자. 언어를 유일한 도구로 삼는 문학에서조차 언어의 한계가 노정된다. 그래서 특히 문학의 한 형식인 시(詩)에서는 '비상의 언어'를 동원하여 '통상의 언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일부나마 극복하고자 한다. 언어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는 음악, 미술, 무용 등을 좋아하며, 수학과 과학에 커다란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 까닭에 애초에 자연 신학에 걸었던 우리의 기대를 접거나 축소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신학은 자연 신학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함으로써, 신 존재의 증명을 자연 신학에 의뢰하려던 본래의 목적마저 저버렸던 것이다. 신학과 자연 신학의 관계를 마음에 새기면서 칼 세이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로 하자.

칼 세이건은 이 장의 신 논의를 주로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전통의 유일신에 맞추었다. 하느님은 전지(全知), 전능(全能), 지선(至善)하신 초월적 존재로서 우주를 창조하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며 인간의 삶에 간여 등을 하시는 분이다. 이런 속성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연 신학이 제시한 여러 가지 논증들이 있다. 그중에서 세이건은 ① 우주론적 논증, ② 설계로부터의 논증, ③ 도덕적 논증, ④ 존재론적 논증, ⑤ 의식으로부터의 논증, ⑥ 경험으로부터의 논증, 하나하나를 차례로 설명하면서 각 논증의 한계를 일일이 지적한다.

여기에 각 논증에 대한 그의 설명과 비판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어떻든 세이건의 결론은 이렇다. 이 논증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사실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어떤 것에 대한 합리적 정당화"를 추구하고 있다. 즉 신 존재의 증명이라기보다 신에 관한 합목적성의 설명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신학과 자연 신학의 관계에서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결론이다.

이 단원을 닫기 전에 몇 가지 사항만 간략히 언급해 두겠다. 신에 관한 '우주론적 논증'이 현대 우주론의 중심 주제와 아주 자연스럽게 연계돼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하느님과 우주 중에서 누구의 나이가 더 많은가의 질문이 신학과 천문학을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다. 우주론적 논증이 자연 신학의 본령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이건이 이 책에서 '설계로부터의 논증'에 퍼부었던 비판들은 창조 과학이 최근에 들고 나온 '지적 설계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도덕적 논증'도 일종의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심도 종교적 경험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적 논증'에 대한 세이건의 비판은, 우리가 도덕적인 존재인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이건은 같은 맥락의 비판을 안젤모 성인이 제창한 '존재론적 논증'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즉 존재론적 논증의 단초로 삼았던 안젤모 성인의 '하느님은 완전하다.'는 주장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세이건은 되묻는다. 그러고 세이건은, 아직 의식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의식으로부터의 논증'도 신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경험으로부터의 논증'에 대한 세이건의 비판에 필자가 가한 비판은 '7장 종교적 경험'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꼭지의 서두에서 서술한 신의 속성은 하나같이 '무한'을 향한 인간의 '희망과 승복의 외침'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한'을 주요 속성으로 하는 그 무엇이 자연 신학이 추구하는 이성적 분석에 알맞은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의 속성에 '무한성'을 부여하면서, 인간의 유한한 이성을 도구로 하는 자연 신학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신은 존재 증명을 거부한다.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신을 인간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존재가 증명될 수 있는 신이라면 믿을 필요가 없다. 이해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이 단원에서 시도한 신 존재의 증명 노력은 애초부터 부정적 결과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 존재의 증명 실패가 신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7강 종교적 경험

현대 문명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채 아직도 수렵과 채집만으로 살아가는 원시인의 집단들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이들을 오랫동안 관찰한 문화 인류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민주적 집단과 강력한 위계 질서로 묶인 독재 체제의 집단으로 대별될 수 있다고 한다. 식량이 넉넉한 환경에서는 전자가 흔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는 후자의 체제를 선호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은 늘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고민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나 선택을 지도자의 몫으로 일단 돌리면, 개인은 자신의 자유를 일부 잃게 되겠지만 고민과 고통에서 해방되는 편리함이 있다. 즉 인간 정서에는 수평적 민주와 위계적 독재를 향한 두 가지 상반되는 성향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원시 시대로부터 시작한 인간 심리에 공존하던 이 불편한 관계가 오늘까지 유지되어, 현대의 민주 국가에서도 우리는 전쟁을 책임지는 군대라는 위계 조직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세이건은 종교의 기원이 위계적 질서를 향한 인간의 원초적 정서에 있다고 주장한다.

가족 관계에서 위계의 최고 지위는 아버지의 몫이다. 부족 사회에서는 족장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다. 가족과 부족의 당면 문제를 무리 없이 잘 해결해 주던 아버지와 족장이라 하더라도 자연 재해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으므로, 위계의 더 높은 자리에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신(神)들이 자리하게 됐을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의 기분을 언짢게 하면 그로부터 얻는 게 없으며, 부족원이 족장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따라서 누가 벼락을 맞는 불행을 당했다면 천둥 신의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저들은 믿었을 것이다. 세이건은 이런 논지를 근거로, 신이 아버지의 확장된 개념이며 신에게 바치는 기도와 희생의 종교 행위는 신을 기쁘게 하려는 인간 측의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수렵-채집 사회의 종교 의식에서는 종교적 감흥(感興)을 고양하기 위하여 종종 환각 물질을 복용한다. 조울증 치료에 쓰이는 리튬만 보더라도, 외부로부터 투여한 화학 물질이 사람의 신경 생리학적 반응을 조정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세이건은 인체에서 자체 생성되는 엔케팔린과 엔도르핀과 같은 두뇌 단백질을 예로 들면서, 종교적 감흥 역시 특정 화합물에 의한 신경 생리학적 반응일 것으로 추측한다. 즉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필자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 앞에 서면 자연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성스러움을 느낀다. 우리는 모성애의 위대함에서 사랑의 지순함을 읽어 낸다. 모성애가 없는 종은 자연 선택의 관문을 넘기 어려웠을 터이므로 종으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다윈 진화가 모성애의 필연성을 담보한다 하더라도, 모성애에서 느꼈던 나의 종교적 경험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기작의 성립이 더욱 신비로울 뿐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게 마련인 이와 같은 종교적 경험 역시, 세이건의 주장대로라면, 특정 화학물질이 신경 생리학적 반응에 간여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투여된 약물로 인해 유발된 종교적 감흥과 자연적으로 우러난 종교적 경험이 한 사람의 삶에 가져다 줄 변화는 질적으로 서로 다를 것이다. 사랑 없이 이뤄지는 성행위와 사랑하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세이건 자신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자식을 위하여 어머니가 흘린 눈물과 화학 조성이 완전히 일치하는 혼합물을 누군가 조합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혼합물을 눈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종교에 관한 세이건의 분석적 논지에 함정이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신은 증명될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바람직한 신앙인이라면 종교적 경험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덤비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느낀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을 믿는다고 그저 고백할 뿐이다.

세이건은 이 장의 결론을 갈음하기 위하여 버트런드 러셀의 <회의적인 에세이>에서 한 구절을 가져왔다. 그 인용문은 원래 사회 현실과 정치 체제에 관한 언급이었지만, 러셀이 지적한 '정치·사회 현실'의 아이러니를 세이건은 '과학과 종교'에 내재하는 같은 성격의 아이러니로 치환해서 읽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인용문을 다시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세이건 자신도 '과학의 증명'과 '믿음의 고백'이 인간 사유의 서로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임을 인정한 듯하다. 러셀의 언급은 지극히 역설적이며 비아냥조로까지 들린다. 비아냥의 표적은 정치·사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논리의 무력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세이건은 자신의 결론을 러셀이 지적한 정치·사회 현실의 아이러니로 대신하려 했단 말인가. 신 존재에 관한 증거 부재가 신앙을 부정할 이유가 못 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가치를 가늠하는 데 과학의 잣대는 완전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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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창조에 반하는 범죄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는 전통과 관습이란 인류가 수만 또는 수십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알아낸 삶의 농축된 지혜일 것이다. 종교는 이러한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그런데 최근세기에 들어오면서 전통과 관습이 전하는 지혜의 한계성이 노정(露呈)되기 시작했다. 현대가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인생의 훌륭한 지침으로 작용하던 전통 가치가 그 아버지의 아들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지혜란 고대 교의에의 단순한 집착에 있지 않고, 오히려 회의(懷疑)를 통한 그 대안의 창출에 있다고 저자는 이 장에서 주장한다.

세이건은 자신의 화성 탐사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현대 천문학이 인류의 지구 생명에 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독자를 설득한다. 화성의 자연 환경이 생명의 출현을 받아들일 만했던 적이 과거에 있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오늘의 화성 표면은 불모의 사막으로 남아 있다. 달은 물론이고 지구와 쌍둥이라는 금성에서조차 우리는 생명의 존재를 기대할 수 없다. 토성의 거대 위성인 타이탄에서 발견된 유기 화합물이 생명의 전조가 될지 모르겠지만 거기에서도 지구 생명과 같은 존재는 찾아볼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생명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태양계에서 오로지 지구에만 생명이 서식한다는 이 사실을 놓고 볼 때, 인류는 행성 지구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세이건도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고 있다. 그는 고생물학적 증거들을 열거하면서 지구에 있었던 생명의 대량 멸종 사건들에 독자의 특별한 관심을 불러 모은다. 특히 공룡의 멸종을 불러왔던 6500만 년 전 지구 환경의 변화 원인과 변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그때의 파국적 상황이 소행성이나 혜성의 충돌의 결과라지만, 오늘날 전 세계의 핵무기 보유고와 거기서 비롯할 가공할 실상이 소행성의 충돌 결과와 다를 바가 없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지구 생명을 대멸절의 위기로 몰아갈 파국을 지금 우리 자신이 조성 중인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창조에 반하는 범죄 행위의 동인(動因)으로 기능한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 생명계의 구원을 위하여 이 대멸절의 위기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인이 지구라는 배의 유일한 승무원이므로, 종교의 막중한 임무는 우리들로 하여금 배 전체를 볼 줄 아는 건전한 시야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인종(人種) 차별의 악습에 대한 진지한 자기 반성이 가능할 것이다. 인종 차별에 대한 반성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범하고 있는 종(種) 차별의 횡포에 대한 깊은 각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상호 의존도보다 실은 사람이 자연에 훨씬 더 넓고 깊게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각성이 우리에게 빨리 오면 올수록 인류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 신앙인이면서 대량 살상 무기의 개발과 생산에 종사한다면, 그 무기가 인류의 미래에 가져올 끔찍한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의식해야 한다고, 저자는 이 장에서 신앙인들을 다그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세이건의 통렬한 비판이 이 장 말미에 와서 종교를 향한 탄원성의 호소로 돌변한다. 원수 사랑의 황금률이 무모한 핵 경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도덕적 표준이 된다고 세이건 자신이 믿기 때문이다. 무릇 종교는, "남이 너한테 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똑같이 하라."라고 가르친다. 세이건은 핵 경쟁의 역사를 이 가르침의 계(係, corollary), 즉 "네가 남에게 하는 대로 남도 너에게 똑같이 할 것이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특히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향하여 스스로가 가짜 기독교 신앙인이든가 아니면 함량 미달의 신자임을 고백하고 시인하라고 외친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필자는 이 장에서도 칼 세이건의 주장과 논지의 모순을 보게 된다. 인간이 느끼는 정의와 자유, 지고의 선과 미, 사랑의 감정,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성스러움 등과 같은 종교적 경험이 초월적 절대자에 그 뿌리가 있다고 우리가 믿어야만 황금률과 같은 종교적 가르침이 비로소 우리 개개인에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지혜는 반드시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세이건은, 종교적 경험이 초월적 존재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혈액에 흐르는 특정 분자들로 인한 결과라고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인류 문화의 전통적 지혜로서 기능하던 종교적 가르침이 현대로 오면서 과학에 의하여 그 효력을 점점 상실했다고 역설하던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그의 주장대로라면 이미 무기력할 대로 무기력해졌을 종교적 가르침을 지렛대로 삼아, 어떻게 지구 문명과 생명계의 미래를 총체적 위험에서 구하겠다는 것인지 무척 당혹스럽다.

미국 정치 지도자들에게 특정 분자의 약물을 투여하여 그들이 종교적 경험을 느끼게 된다면, 그들이 지구를 핵전쟁의 위기에서 구할 특단의 조치라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약물 투여가 사람을 종교적 경험으로 유도할 수는 있더라도, 그 약물이 초월자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9강 탐색

현대 지구 문명의 비극은, 종교가 갖는 믿음의 차원을 과학의 이름으로 배제하려는 데서부터 그 싹이 텄다. 사용하려던 지렛대가 충분히 길지 않다는 사실을 세이건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종교의 위력에 우리가 다시 손을 내밀더라도, 지구인은 당면한 위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오늘의 문제는, 유사 이래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성격의 난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의 심각성은, 현대 과학 기술이 인류는 물론이고 지구 생명을 통째로 멸종시킬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서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을 잘 해결해 왔다. 저자는 이 장에서 그 예를 몇 가지 제시한다. 인류는 시민 혁명을 통하여 왕권신수설의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속하는 것이라 여겼던 노예 제도는 또 얼마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던가. 하지만 성서 구절까지 지목하면서 노예 해방이 신의 의도에 반한다고, 헛된 주장을 펼치던 노예주들을 이제는 지구상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합법적 노예 제도가 근본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한 것도 우리의 지혜와 분별력이 성취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핵겨울의 공포는 이러한 문제들과 그 성격이 확연하게 다르다. 왕권신수설, 노예제도, 여성 차별 등의 경우에는 이를 옹호했을 때 생기게 마련인 이득을 탐하는 기득권층이 늘 존재했다. 그러나 인류는 물론이고 전 생명을 멸종으로 몰아갈 핵전쟁에서는 그 누가 기득권적 이득을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점이 현대 지구 문명이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이라고 세이건은 강조한다.

변하는 생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개체는 씨족, 부족, 국가, 제국의 순으로 자신을 동정(同定, identify)할 줄 알았다. 이렇게 개체와 집단의 동정을 통해서 기득권 세력에 효과적으로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핵전쟁의 파국을 막으려면 자신이 국가가 아니라 인류의 구성원임을 자각해야 한다. 핵 경쟁이 불러올 파국은 개체가 아니라 종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볼 줄 아는 지혜가 쥐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지구를 바깥에서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록 절묘하기는 하지만 지극히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더욱 깊이 실감하게 된다. 즉 지구인이 자신의 위치를 우주 진화의 깊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인류라는 종의 미래가 보장된다. 세이건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그러한 벤티지 포인트에 이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외계 문명권과의 통교에 있다고 설파한다.

칼 세이건이 마지막 장의 서두를 안나 카레니나의 인용으로 장식한 배경이 이제 확실해졌다. "내가 도대체 누구이며 어찌하여 시공의 이 점에 자리하게 됐는지를 알아야 나 자신의 삶이 가능하다." 시대를 앞선 톨스토이의 지성에서 우리는 지구 문명의 난제를 해결할 한 줄기 서광을 본다.

세이건이 넘어야 할 벽

나는 거의 매일 도시락이 들어 있는 배낭을 메고 관악산에 오른다. 계곡과 능선이 갈라지는 저수지에 이르러 나는 잠깐 망설이고는 한다. 오늘은 어느 쪽 길을 걸을까, 하고 말이다. 계곡을 택하면 물소리가 내 귀를 맑게 하지만 동행을 고집하는 날파리 떼의 집요함을 견뎌야 한다. 능선 길에 올라서면 넓은 시야가 내 가슴을 열어 주지만 한여름의 태양과 힘겨운 씨름을 벌이게 된다. 물과 파리가 계곡에 상존하는 선과 악이라면, 한강대교까지 열리는 시야와 땡볕은 능선이 거느린 선과 악이다. 이 세상의 악을 신 부재의 증거로 내세운 세이건의 논지를 따르면 그렇단 말이다. 계곡과 능선엔 선도 악도 없다. 선악은 내 마음의 잣대가 판단한 가상의 가치일 뿐이다. 땡볕이 있다고 해서 내 어찌 능선의 고마움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선 은하에서는 대략 50년에 한 번꼴로 초신성이 폭발한다고 한다. 폭발 현장 가까이 문명의 싹을 틔운 행성이 마침 자리한다면, 그 행성의 모든 생명은 대 멸절의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신이 지선하신 존재라면 이런 비극은 은하에서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은 은하계 하나도 제대로 보듬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상이 신의 전능을 부정하기 위해 세이건이 내세운 몇 가지 논지 중의 하나다. 과학의 단선적 사고와 저자의 종교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이 억지를 읽으면서, 우리네 세상살이의 중층성에 천착하는 종교가 과학의 시각에 곱게 보일 리가 없다고 이해하기로 했다.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초신성이 불러올 비극을 자신의 선익(善益)이 아니라 범 은하적 '선익'의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다. 절대자의 입장에선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마음 착한 신앙인이라면 초신성에 희생될 외계 생명의 운명을 동정하면서, 자신이 언젠가 잠결에 때려잡은 모기의 혈흔을 기억할 것이다. 구두에 밟혀 죽는 개미의 운명도 걱정할 것이다. 세이건과 신앙인의 잣대는 이렇게 다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의 잣대로 종교를 재단했다. 그것도 종교의 피상적인 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과학의 잣대를 종교에 들이밀어야 할 경우가 있다. 과학이 찾아낸 사실의 진위 여부를 종교가 문제 삼는다면, 그건 마땅히 과학의 잣대로 해결돼야 한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가톨릭 교회의 갈등이 그런 경우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불러온 창조와 진화의 대결 구도 또한 그러하다. 종교가 과학적 사실의 진위를 놓고 과학을 공격할 때마다 종교가 패배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종교가 과학의 힘을 빌려 자신의 교의(敎義, dogma)를 입증하려 할 때에도 종교는 엄청난 과오를 범하고는 했다.

신학이 자연 신학의 도움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시대가 있었다. 세이건이 이 책 6강에 정리해 놓았듯이, 자연 신학의 존재 증명을 통해 드러나게 된 신 개념의 논리적 모순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신의 부재를 믿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증명될 대상이 아닌 신을 과학의 이름으로 증명하겠다고 신학이 무리수를 둔 결과다. 존재 증명의 실패가 반드시 부재의 증명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신의 개념 문제였다. 세이건도 존재 증명의 실패가 부재의 증명이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 책이 벌이는 논의들의 배경에는 그런 주장이 어렴풋이 깔려 있다. 이 책을 손에 든 독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신이란 존재 증명을 거부하는 속성의 존재인지 모른다.

자기 수정의 기능을 갖춘 과학과 계시와 교의에 의존해야 하는 종교의 속성에는 이렇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엄존한다. 그 까닭에, 천동설은 과학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였는데 불구하고 그 실수가 자아낸 피해는 종교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종교와 과학의 길항과 갈등의 관계는 문자로 기록된 계시의 축자적 해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칼 세이건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경전의 축자적 해석을 고집하는 일부 편협하고 교조적인 종교인들에게 하나의 좋은 경종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칼 세이건의 용기와 지성에 큰 박수를 보낸다.


▲ 칼 세이건. ⓒ사이언스북스
서평을 마치면서 책장을 덮자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의 제목이 내 눈길을 잡는다.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위용 앞에 서면 자신의 저 깊은 내면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어떤 성스럽고 숭고한 감흥을 감지하게 된다. 이 느낌을 아인슈타인은 '종교적 경험'이라고 불렀다. 종교적 경험 너머에 초월적 절대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 신앙인이다. 세이건은 그 감흥을 종교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불러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가두지는 못한 듯하다. 세이건은 초월적 절대 세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세계의 유용성은 인식한 듯하다.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라면 기억할 것이다. 이 책의 종반부는 현대 문명이 당면한 전 지구적 난제들을 열거하면서 지구 문명의 총체적 파산을 막으려면 과학과 종교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논지로 일관한다. 아니 종교를 향해 도움의 손길을 달라고 절절하게 요구한다.

필자는 세이건에 묻고 싶다. 종교적 감흥마저 과학에게 내어 준 종교가 어떻게 과학이 저질러 놓은 총체적 파국을 막아 줄 수 있겠는가. 종교적 감흥을 잃은 종교는 칼 세이건이 바라는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종교가 이미 아닐 것이다.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종교로부터의 구원의 손길도 끊어진다. 손을 잘라 놓고 손을 달라고 하니, 과학의 단선적 사고가 빚어낸 아이러니의 백미다.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넘어야 할 준엄한 벽이 바로 여기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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