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거 몇 개월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필요한 데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 나온다." 야권의 차기 대권 주자 부재 문제를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 명언이다.
천안함 문제를 취재하면서 기자의 머릿속에는 DJ의 그 말이 떠나지 않았다. 국면마다 민군 합동조사단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 일본에서, 캐나다에서 들려올 때마다 어찌 이런 '물건'들이 나올까, 곱씹고 또 곱씹었다.
<천안함을 묻는다>(강태호 엮음, 창비 펴냄)는 바로 그 '물건' 당사자들이, 혹은 그 '물건'과 대중을 연결했던 기자들이 모여 만든 책이다. 서재정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교 교수, 이승헌 버지니아 대학교 교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김종대 <D&D 포커스> 편집장, 박선원 브루킹스연구소 초빙연구원 등등.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르는 천안함 사건 4개월 반의 기록은 달리 말하자면 이 책의 필자들이 활약했던 기록이다. 전문성과 정의감을 무기로 한 이들의 활약은 결론을 미리 내놓고 얼렁뚱땅 끼워 맞추면 될 거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한 정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
▲ <천안함을 묻는다>(강태호 엮음, 창비 펴냄). ⓒ창비 |
"나는 한나라당 지지자고,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그런데 내 양심에 비춰볼 때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나."
<천안함을 묻는다>의 필자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책의 곳곳에 인용되어 있는 이종인 알파잠수공사 대표. 해난 사고 전문가인 그 역시 천안함이 낳은 '물건'으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
좌초론을 주장하는 이 대표는 토론회 같은 데에 나오면 우선 자신의 정치 성향부터 밝힌다. 자기는 오로지 양심만으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정부 입장에서는 누구보다 두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 꿇릴 것도, 아쉬운 것도 없어 보이는 자유인 이종인 대표는 현장 전문가답게 글 같은 건 쓰지 않는다. 대신 인천 앞바다에 금속 조각을 묻어 부식 실험을 하고, 직접 배를 몰고 천안함 사고 해역을 탐사한다.
역시 필자로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책에서 수차례 언급되는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 지질과학과 양판석 분석실장도 빼놓을 수 없다. 양판석 박사는 이승헌·서재정 교수가 시작한 흡착 물질 논쟁에 다소 늦게 뛰었지만, 곧장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들어가 합동조사단을 쩔쩔매게 했다. 에너지 분광(EDS) 분석 전문가인 양 박사는 천안함 및 어뢰에 흡착된 물질이 비결정질 산화알루미늄이라는 합동조사단의 주장을 일축하고 알루미늄이 녹슬 때 나오는 수산화알루미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대한 합동조사단의 대응은 기상천외했다. <천안함을 묻는다>에 실린 기자의 졸고에 양측의 공방이 정리되어 있다.
양 박사는 2005년 황우석 사태 당시 인터넷 토론장으로 주목받았던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게시판을 '천안함 게시판'으로 바꿔 놓았다. 이 게시판에 가면 두 명의 '양판석'을 만날 수 있다. 합동조사단을 논박하는 진짜 양판석과 '위니(winnie)'란 대화명으로 '소설 천안함'을 쓰는 양판석이다. 두 경우 모두 그의 전문가적 견해와 상상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천안함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지질학자가 이슈의 주역으로 떠오를 줄이야, DJ의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기왕 '천안함과 사람들' 얘기로 흐른 마당에 꼭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노종면 YTN 전 노조위원장. 낙하산 사장을 거부하며 정부 및 사측과 싸우다 결국 해고됐지만 그의 DNA에는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기자 정신이 있는 모양이다. 노종면 전 위원장은 한국기자협회·한국PD연합회·전국언론노조가 구성한 '천안함 조사 결과 언론 보도 검증위원회'를 이끌며 천안함과 관련한 각종 쟁점들을 집대성해 깎고 다듬는다.
언론 검증위원회를 대상으로 지난 6월 29일 국방부가 마련한 설명회에서는 노종면 전 위원장의 진가가 그대로 드러났다. 흡착 물질, 스크루 변형, 물기둥 목격 진술 등 각종 쟁점에서 그는 합동조사단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이 책의 필자들과 이종인 대표, 양판석 박사가 분야별 전문가라면 노 전 위원장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반론이라면 아무 것이나 무작정 갖다 쓰지 않는다는 점도 무섭다. 냉정과 자제를 잃지 않고 합동조사단과 맞서는 반론에 대해서도 검증하고 또 검증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하루 빨리 원래의 일터로 돌아가야 할 기자다.
이들은 왜 이토록 천안함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6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 들어서 추락하는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의 교차로에 천안함 문제가 놓여 있다고 말했다. 천안함의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라고 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한 <천안함을 묻는다>의 필자들, 그리고 이 글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그 중에서 민주주의의 문제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때가 어느 땐데 그렇게 허술한 논리로 국민들을 무시하느냐는 것이다. 결론을 먼저 내리고 근거는 대충 끼워 맞추고, 그래도 안 맞는 부분은 "천안함 사건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된 현상"이란 '용감한' 말로 건너뛰는 것은 유권자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상식과 합리주의를 위한 싸움이다.
그런 그들에게 '친북'이니 '빨갱이'니 딱지를 붙이는 것을 보면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을 찍은 젊은이들은 북한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고위 당국자의 말이 상징하듯 이명박 정부는 국민들을 합동조사단을 믿는 쪽과 안 믿는 쪽으로 나누는 '두 국민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런 야만의 논리가 더 이상은 발붙이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는 천안함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