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여성의 섹스 이야기

20대 여자가 직접 쓴, 20대가 섹스하는 이야기. 2010년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제리>(김혜나 지음, 민음사 펴냄)를 한 문장으로 규정짓자면 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나 자신도 20대이고, 남성이며, 문학의 창작이나 비평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익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긴 하나, 최근 화제작인 <제리>를 논하기 위해서는 저 문장을 발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책은 20대 여성이 쓴 20대가 섹스하는 이야기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문단에 의해 주목받았다.

'오늘의 작가상' 심사 위원의 심사평을 살펴보도록 하자.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제리>를 "21세기적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루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춘들에 대한 킨제이 보고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섹스는 "메타포가 아니라 리얼리티"이다. 다른 심사 위원의 평가도 비슷하다. 소설가 박성원은 "충격적이고, 반도덕적인 소설"이라고 <제리>를 평가한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노래방에서 남자 도우미들을 불러 선택하는 첫 장면부터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수많은 섹스 장면이 등장한다. 특히 주인공인 '나'의 남자 친구 혹은 섹스 파트너인 '강'과의 관계 장면에서 항문 성교가 등장하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을 것이다. 군인들이 음란물 대신 즐겨 읽는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국내 서점가 및 문학계를 휩쓸고 지나간 지 10년이 더 지난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렇다.

문학에 등장하는 섹스, 그 섹스의 묘사와 자극 등에 있어서 <제리>가 이루어낸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특별하거나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설령 소설의 주인공인 '나'의 "앞니가 귀두에 닿지 않도록 입술을 오므리고 혀끝으로 조심스레 성기를 감싸며 불알을 향해 내려갔다"(208쪽) 하더라도 말이다. 이미 한국의 독자들은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소설에 대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성적 묘사에 대한 논의 역시 한 단계 메타화될 수밖에 없다.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20대가 섹스하는 소설'이 등장하는가? 그리고 왜 한국의 문단과 언론은 바로 그런 소설에 주목하는가?

20대의 자기 식민지화


▲ <제리>(김혜나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의 공저자인 박권일과 결별한 후, 몇 권의 책을 더 쓴 우석훈은 <88만 원 세대>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펴냄)를 내놓았다. 전작에서 젊은이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쌓고 짱돌을 던지라'고 요구했던 그는, 그 짱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코코 샤넬과 같은 문화적 혁명'이라는 답을 돌려주었다.

비록 전작의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우석훈 본인의 지속적인 활동과 맞물려 그러한 메시지 역시 현재의 '20대 담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리> 역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촛불 집회가 불거지던 국면에서 <88만 원 세대>의 메시지가 결국 '젊은 너희들이 시위에 앞장서지 않고 무엇하느냐'는 꾸중으로 이어졌듯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 역설한 20대 문화 생산자와 문화 혁명의 요구는 바로 이와 같은 형태의 결과물을 낳고 있는 것이다.

아르투르 랭보, 프랑수아 사강, 장뤼크 고다르 등등. 젊은 나이에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어내 문화계의 지형을 뒤흔들고 인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꼽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살던 시대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젊은 나이에 작품을 써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른바 '걸작'에 속할 만한 어떤 기준선이 있고, 그 기준선을 매우 이른 연령에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반면 현재의 '20대 문화 생산자'론은 그와 다르다. 20대 소설가도 '있어야' 하고, 20대 영화감독도 '있어야' 하며, 20대 철학자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논의가 곡해되어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20대 창작자의 존재는 기존의 흐름에서 도출 혹은 돌출되는 것이 아니다. 장려되고 육성되어야 할 무언가로 격하되어 있다. 즉 현재의 20대 담론에서 '20대 창작자'는 차라리 박정희 시대의 수출 기업과도 유사한 개념인 것이다.

그 지점에서 20대는 창작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창작물의 객체가 되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20대 담론'이라는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렇다. 20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발굴해야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힌 기성세대를 전제로 놓고 본다면, 어쨌건 본인의 성과물로 공정한 평가를 받고 싶은 20대 창작자가 택할 수 있는 소재는 결국 '우리 20대의 이야기'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이미 출판계에는 비슷한 콘셉트의 단행본이 몇 종 출간되어 있다. 20대 필자를 발굴하는 게 요즘 트랜드라는군, 게다가 요즘 20대 이야기 많이들 하잖아? 그럼 20대에게 20대 이야기를 시키면 되겠네. 기획회의 끝.

그러한 맥락을 놓고 볼 때 <제리>의 '오늘의 작가상' 수상 및 출간은 전혀 놀랍거나 생경한 일이 아니다. 심사평의 말처럼 "독자가 경험하지 못한 이상하고도 낯선 세계의 존재를 예감케"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의 출현은 현재의 20대 담론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그 친숙한 세계의 존재를 절감케 한다.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20대의 자기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입을 틀어막은 까닭은…

백인들이 범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내려올 때, 그들은 어떻게 흑인들을 잡아서 노예선에 태울 수 있었을까? 무작정 보이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죽이고 쇠사슬에 묶었으리라고 우리는 곧잘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주로 해안에 사는, 부유하고 군사적으로 강한 흑인 부족들이 내륙에 사는 다른 흑인들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바로 그 포로들을 위스키, 금, 화약 등과 거래하면서 노예 무역이 성립한 것이다. 아프리카 식민 지배의 역사는 원주민들 사이의 내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나친 비유일 수 있지만, 뚜렷한 담론적 해법이 도출되고 있지 않은 가운데, 20대 담론의 진행 과정도 이와 유사해지고 있다. 20대에게 20대의 이야기를 묻는 것.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20대가 스스로를 바라보고 이해하고 묻는 내부적인 사유의 메커니즘이 온전하게 성립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20대가 쓰는 20대 이야기'의 실제 소비자는 결국, 그 담론의 구조를 만들고 세부적인 이야기를 주문하는 사람들일 것이며, 압박 면접과 심층 토론으로 단련된 20대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자아를 확인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탐색하고 그에 몰두해야 한다. 20대가 스스로를 확인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20대 스스로에 대한 동어반복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속해 있고 살아가고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 그 자체에 대해 탐구하고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젊은 천재들의 작품들은 전부, 설령 그들이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보편적인 지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20대를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쓰지 않았다. 20대가 '바라보는' 세상을,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제리>는 실패하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20대는 모두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서로의 꿈이 뭐냐고 물어보고 모텔에서 섹스를 한다. 서로의 존재로 이루어진 비누 거품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작가의 의도 중 하나이므로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아가 드러나는 순간은 그 거품 속으로 이질적인 무언가가 틈입되는 순간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제리>는 세계와의 대면이 아닌 도피를 택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자.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인천의 전문대에 다니는, 그것도 재수해서 들어간 학생이다. 그는 특별한 수입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래서 제리를 다시 불러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강'의 지갑에 손을 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매일 술을 마시며 용돈을 탕진한다. 용돈? 그렇다. '나'는 부모님의 집에 살며 용돈을 받는 대학생이다. 바로 그것이 소설의 화자가 놓인 유물론적 조건이라는 것은 소설의 초반에 드러난다.

우석훈·박권일의 책 <88만 원 세대>의 첫 장이 '첫 섹스의 경제학'이었다는 것, 즉 연인과 성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모텔에 들어가야만 하는 젊은이들의 경제적 조건에 주목했다는 점을 이 지점에서 새삼스럽게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독립된 주거 환경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섹스를 할 때마다 모텔비를 내야 한다는 것과 함께, 섹스를 하고 외박을 할 때마다 '부모',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 '엄마'의 존재를 상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20대 소설'이 그런 지점을 다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회적·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서, <제리>가 부모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이 작품의 지향성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소설적 기법 혹은 등장인물의 설정을 통해 부모를 소거하지도 못했고, 부모, 즉 '세상의 대변인'과 '나'의 대화를 주선하지도 못했다. <제리>에서 '세상'은 화자의 입을 통해 설명될 뿐이다. 현실 속에서 그 '세상'의 메시지를 젊은이에게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 '엄마'의 입을 작가는 힘겹게 틀어막는다. 가령,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내가 살고 있는 층의 버튼을 눌렀다. 내 뒤에 서 있던 엄마가 뒤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는 더디게 움직였고,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았다. (…)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조금 연 뒤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어 놓고는 도망치듯 내 방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135~136쪽)

라는 대목을 보자. '나'는 엄마와의 대면을 회피한다.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는 친구에게도 "나갈 때 방문 좀 꼭 닫아 주고, 엄마한테는 괜히 인사하지 말고 그냥 가"(71쪽)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마음의 벽을 굳건하게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말 그대로 기능적인 설정으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나'의 내면을 보여주고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를 포기한 채, 저자는 오직 제리와의 섹스 묘사 및 그 섹스에서 오가는 대화의 기술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제리>의 주인공인 '나'의 엄마는 딸에게 간섭하지도 않거나 못하고, 지방대에 다니는 딸이 술에 진탕 절어서 외박을 하고 돌아와도 그의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 아직 '나'는 대학생이라는 허울 좋은 신분에 의해 '세상'의 풍파로부터 한 단계 떨어져 있다. <제리>는 엄마의 입을 막고 대신 '나'로 하여금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설명하게만 할 뿐이다. 술집에 앉아 잔뜩 취한 채 친구들과, 혹은 모텔에서 섹스를 하며. 저자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등장할 수 있는 '세상의 대변인'을 봉인한 채 '세상 속의 20대'를 보여주려 한다.

서로 꿈이 뭐냐고 묻지만, "수도권의 별 볼일 없는 2년제 야간대학조차 겨우 다니고 있는 나에게 어떠한 꿈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74쪽)하며, 남자들은 대형 마트의 물류팀 직원이나 컴퓨터 수리 기사 따위가 되고 여자들은 조그마한 사무실 사무 보조원으로 취직하는 게 고작인데, "그중에서 내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75쪽)는 등의 '20대 심경 고백'이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꿈이 아니라 생계를 걱정하라고, 혼자만의 미래가 아닌 시집 장가가는 일을 신경 쓰라고 다그치며 '현실'을 주입해주는 존재, 즉 부모가 <제리>에서는 그저 유령처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제리>에서 묘사하는 '20대의 희망과 절망'은,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깊은 내면성의 표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이른바 '20대의 고민'은 철저히 대외용이다. 젊은이들은 서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만큼 친해지면 그때부터는 서로 각자의 부모가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사회적 압박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제리>에 결여된 바로 그런 이야기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20대가 '보고 있는 세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겠지만, <제리>는 그저 기존의 매체에서 발굴된 '20대의 고민'을 또 다시 단편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20대가 '보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과, 20대를 '보여주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제리>가 설령 후자를 성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전자를 제시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20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세상에 20대를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20대 담론에 갇힌 20대

20대를 보여주는 소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왜 심사 위원들이 "읽는 내내 불편했고, 읽은 다음에도 며칠 동안 불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를, 이 작품의 섹스신을 "메타포가 아닌 리얼리티"로 받아들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충격 보고, 요즘 젊은이들은?> 같은 방송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이 작품이 이해되고 수용된 것이다. 하지만 심사 위원의 우려와는 달리 이 작품의 섹스신은 결코 리얼리티가 아니다. 그 '리얼리티'를 탐구해보도록 하자.

'나'는 남자 친구이자 섹스 파트너인 강에게 버림받은 후, 친구들을 불러 모아 또 노래바 도우미를 부른다. 제리가 나올 때까지 초이스를 미루고, 결국 찾아낸 제리를 끌고 나가 섹스를 시작한다. 그 섹스의 과정에서 제리는 드디어 자신의 속을 내보인다. 바로 이와 같이. 원문의 충격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길게 인용해본다.

질 안쪽으로 그의 성기가 밀려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제리는 숨이 차는지 잠시 신음 소리를 내뱉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어떻게라도 한번 해 보겠다고 회사에서 큰 돈 빌려다 성형 수술을 하는 형들도 있어. 눈만 고치면, 코만 세우면, 턱만 깎으면 자기도 에이스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성형을 해 봤자 본래 생겨 먹은 판때기가 어디 가겠어. 수술해서 잘생겨지는 것도 가만 보면 다 처음부터 잘생긴 애들이나 더 잘생겨지는 거야. 원래 잘생겼는데 쌍꺼풀이 얇은 게 조금 흠이라든가, 이목구비가 다 뚜렷한데 광대가 살짝 도드라진 게 아쉽다거나 하는 얼굴들 말이야. 그런 얼굴은 단점만 조금 보완하면 정말 완벽해지거든. 하지만 그냥저냥 평범하게 생긴 얼굴들은 한두 군데 고쳐 봤자 티도 안 나고, 그렇게 계속 성형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성형 중독으로 번져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얼굴로 남는 경우가 더 많아. 그렇게 여기저기서 빚만 지고, 그 빚 갚으려고 자꾸만 돈 끌어 쓰다 보면 결국에는 재정이 마이너스가 돼서 평생을 노예처럼 살아야 돼.

나이가 들면 선수로 뛰는 것도 불가능해져서 은퇴를 하고, 그러고도 빚을 다 못 갚아서 결국엔 여기 남아 숙소 청소하고 애들 밥해 주면서 먹고사는 형들도 있어. 그래서 나도 어떨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 영원히 여기서 이 일만 하면서 살게 되리라는…… 나도 그렇게 평생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 바닥에서만 빙빙 돌고 있을 것 같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도 결국에는 다 에이스들뿐이야. 걔들이야 워낙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바쁘다 보니 나처럼 술 마시며 돈 쓸 일도 없고, 실질적으로 받는 수당이나 팁이 더 많으니까 1~2년만 일하면 금세 돈이 모여서 대학을 가든지 자기 장사를 하든지 뭐든 하게 되지. 정말 운이 좋은 애들은 연예 기획사 사람들에게 스카우트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돈 많은 여자들이 펫으로 키우려고 집 사 주고, 차 사 주고 해서 팔자 고치는 경우도 있고……. 나 같은 애들은 그냥…… 아무리 노력해도 이 바닥인 거야. 이 바닥에서도 가장 밑바닥인 존재로 늘 이렇게 빚만 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아무리 여자들에게 선택을 받으려고 해도, 아무리 돈을 벌어 보려고 해도, 아무리 이 바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 봐도 결국에는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채 늘 찌그러져 있는 거야. 더는 못해 먹겠다, 내일부터 진짜 안 나온다, 하면서도 매일매일…… 여기를 벗어나 봤자 어차피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210~212쪽)

물경 세 쪽에 이르는 이 기나긴 논설은, 앞서 말했듯 '섹스 도중'에 제리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리의 심폐 지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정한 반복 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조리 있게 늘어놓는 일이 과연 일반적인 사람에게 가능하기나 한가? 제리는 섹스를 하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기 위해 섹스하고 있다. 제리가 두 문단 가량의 이야기를 더 늘어놓고 나서, 한참 후에야 이 섹스는 끝난다.

물론 이러한 식의 작법이 국내 소설에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리얼리티'라고 부를 수는 없다. 작가가 섹스를 '통해' 젊은이들의 공허와 희망 없음을 전달하고 있다는 평가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섹스 장면을 '배경으로 삼고', 직설적으로 그 내용을 전달하고 있을 따름이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에로스 그 자체를 자신의 주제 의식과 하나로 사출해내느냐, 아니면 에로스를 소재로 삼아 자신의 주제를 전달하느냐가 나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가 전자에 비해 반드시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작품의 심도가 다소 얕게 느껴지는 일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고 앞서 등장하는 다양한 섹스신에서, 우리는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20대 담론'의 여러 형태를 엿들을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걸핏하면 인용되곤 하는, 섹스를 하며 전화를 하는 남자처럼,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섹스를 하며 20대 담론을 떠올리고 논의하고 그 담론 속에서 절규한다. 그 지점에서 <제리>의 장르는 차라리 로망포르노에 더욱 가까워진다.

1970년대 일본의 영화사들은 값싼 에로 영화를 양산하기 시작했고, 10분에 한 번씩 나체가 등장한다면 어떤 식으로 영화를 찍어도 간섭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등장인물이 섹스를 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토론하고 혁명과 자유연애를 논하는 <에로스+학살> 같은 괴작이 등장하기도 했다. 저 섹스신을 읽으며 나는 그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대의 섹스신을 보여주며 20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20대 주인공. 그렇다. 이것은 로망포르노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시, 창작자의 의지로 돌아간다. 일본의 로망포르노는 거대해져가는 영화 산업에서 틈새를 찾아내 솟구치고자 하는 젊은 영화인들의 탈출구이자 훈련장이었다. 한국의 소설 <제리>는, 혹은 이와 같이 '20대 보여주기'의 일환으로 등장한 창작물들은, 그와 비교할 만한 어떤 창작 의지를 담지하고 있는가?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제리의 말을 다시 읽어보고, 실망하게 된다. 에로 영화의 가운데에 등장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이질적인 요소이며 분열이고 탈출이지만, 20대 소설 속에서 20대 담론을 말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의미를 갖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제리>는 섹스를 하는 그 순간까지 '보여주고' 있다. 20대 담론에 갇힌 20대의 모습만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했다고, 어떤 '리얼리티'에 접근했다고 믿고 싶어할 그 사람들의 시선을, 제리와 '나'는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에도 의식하고 있다.

더 많은 하지만 '다른' 로망포르노가 필요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의 서평을 쓰는 나 자신이 20대이기 때문에, 읽고 느낀 그대로 평을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동질감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내가 느낀 바 그대로 비판할 경우 '요즘 20대는 서로 띄워주지는 못할망정 깎아내리는 일에나 열심이다'라는 비아냥거림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뇌리에서 떨쳐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제리>의 저자가 20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타자들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강요되고 있는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과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같은 비판을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고작 서평 하나를 쓸 때조차 '이 사람은 20대니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나는 어떤 정신적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20대 담론의 해법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20대가 이야기하는 것, 20대가 20대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 그 모든 행위는 결국 20대가 아닌 누군가의 시선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 결국 당사자들은 인정 투쟁에 뛰어들거나, 인정 투쟁에 뛰어들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20대 저자, 20대 필자로 인정받기 위해 당사자가 아닌 이들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러한 작업은 새로운 주체성의 확립이나 이 시대 젊은이들의 리얼리티 포착과는 무관한, 소모적인 양태를 띌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지점에서 탈출하는 것이 지금의 20대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제리>에서 적극적으로 젊은이의 섹스, 혹은 피어싱 등으로 대변되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세계를 탐구하고 개척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디딤돌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류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섹스를 해왔고, 섹스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니 말이다. 문제는 그 이면에 무엇을 담아내고자 하는가이다.

<제리>에서는 20대가 섹스를 하며 20대 담론을 이야기했다.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20대'로서' 누군가를 설득하고 반박하고 갈등하고 사랑하기 위한, 그런 언어가 쏟아질 수 있는 장이 아직 우리의 담론의 장에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더 이질적인 균열로 이루어진 로망포르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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