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금융 위기를 포함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주요 선·후진국 금융 위기의 기록들.

"주택 가격은 정점 대비 평균 35.5% 하락. 최저점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총 평균 소요 기간 6년."
"주가는 평균 55.9% 하락. 최저점 도달 기간 3.4년."
"실업률 평균 7%, 최저점 도달 기간 4.8년."
"GDP 하락폭 9.3%, 1.9년"
"금융 위기 이후 정부 부채, 위기 이후 3년 동안 평균 86% 증가. (대공황기에는 84% 증가하는데 6년 소요됨!)"

이번에는 다를까?


▲<이번엔 다르다>(케네스 로고프·카르멘 라인하트 지음, 최재형·박영란 옮김, 다른세상 펴냄). ⓒ다른세상
과연 과거의 경험과 이번 위기는 다르게 전개될까? 그래서 과거 자료는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 사실 2008년 8월 위기 발생 이후 2009년 하반기에 이르자, "이번엔 다르다"라는 분위기가 슬슬 퍼지기 시작했다. 각국 정부가 사상 유래 없는 금융 완화, 재정 확대 정책을 펴자 처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넘어가겠거니 하는 분위기 말이다.

올해 들어 그리스 등에서 국가 채무 부도의 위험이 대두하자 이런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다시금 비관주의로 반전되는 양상이다. 케네스 로고프와 카르멘 라인하트의 <이번엔 다르다>(최재형·박영란 옮김, 다른세상 펴냄)는 거부하기 힘든 방식, 즉 위에 인용한 몇 가지 예처럼 역사적 자료를 들이대는 식으로 이런 반전된 분위기를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번역본에서는 슬쩍 빼 버렸지만 이 책의 부제는 "지난 800년간 저질러진 금융/재정의 우매한 짓들(Eight Centuries of Financial Folly)"이다. 1800년 이후부터 보더라도 국가가 외국 채권자에게 부도를 낸 사례가 250건, 국내 채권자의 돈을 떼어먹은 사례가 70건이 넘는다.

그러나 돈 빌려준 측이 볼 때 돈을 떼일 것이 분명했다면 애당초 대출을 해 주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대출과 부도)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났을까? 그건 거의 예외 없이 '이번에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저자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번에도 다르기는커녕 결국은 과거의 패턴의 반복이라는 것.

저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잘못된 믿음의 예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있지만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질문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반복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까'이다. 평자는 이 책의 저자들이 다루는 멀고 먼 시대 이야기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250년 전 소설이 생각난다.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년)에서 주인공 캉디드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엄청 고생하고 깨지면서도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가진 사부 팡글로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팡글로스는 이렇게 능청스럽게 자신의 낙관주의를 말한다.

'가능한 세계 중의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이 연계되어 있다네. 자네가 이런저런 고생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그 화려한 인생 경험을 했겠나?

정말이지 근대인은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뭔가 멋진 일이 나에게 생기지는 않을까'라는 기대로 하루를 시작한다. 10년에 한 번도 아니고 매일 아침마다! 그러니 과도한 일을 과도한 줄도 모르고 하게 마련 아닌가? 팡글로스식 논법을 적용하면 이런 말도 할 수 있을 법하다.

'그렇게 대형 사고가 많은 200년의 역사였지만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크게 보면 인류 역사상 가장 눈부신 성장의 역사 아닌가? 1800년 이후의 인간 역사는 그 이전 현생인류가 출현한 이후 10만 년과 비교해서 완전히 달라. 그 이전에는 인구법칙에 매여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

인류는 최근 200년 동안에 이 법칙에서 벗어났으며 가끔 일어나는 대형 사고는 엄청난 속도로 (그러니까 언제나 약간 무모하게) 전진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부산물이라고나 할까. 과속을 하면 사고는 가끔 나는 법이지. 시시때때로 좀 고통을 겪는 것(지불하는 비용)은 그 성과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봐야지.

그래, 빠르게 상승하는 자산 가격, 실질 성장률의 현저한 하락,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민간과 정부의 부채의 지속적 증가 등은 저자들 말대로 다가오는 금융 위기의 전조라는 것을 인정하자고. 그래도 파티는 즐겨야지, 갑자기 중간에 중단할 수야 없지. 필요하면 이른바 전문가를 동원하여 지금은 과거와 다르다고 한마디 하게 하고….'

저저들의 암묵적 믿음은 이런 팡글로스식 사고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가 만약 과거로부터 배워 국가 채무 부도, 은행 위기의 전조에 대해 잘 알고, 위험 신호가 왔을 때 행동을 바꿀 수 있다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단 저질러진 실수에 대해서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벗어나는 길은 없다.'

팡글로스식 철학적 정당화를 비웃는 이런 저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위기는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피할 수 있다. ② 적어도 실수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 이런 저자의 두 가지 주장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평자의 입장을 밝혀보고 싶다.

어리석음을 경고하는 '어리석은' 신념

첫째, 과거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데 평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저자들과 완전히 다르다.

2008년 위기가 월가와 미국 정부, 금융 전문가의 '어리석은' 믿음 때문일 리 없다. 또 단지 눈앞의 이익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실수를 했기 때문도 아니라고 본다. 그런 생각 자체가 로고프처럼 미국 공화당 노선을 따르는 중도 보수 자유주의 학자들의 '어리석고 근거 없는' 신념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현실의 흐름을 추종하고 또 거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주관적으로 장밋빛 전망을 갖게 마련이다. 달리 말해 그런 믿음은 결과이며, 현실의 반영이자, 사태를 강화하는 2차적인 원인을 수는 있으나, 사태 발생의 최초의 원인은 결코 아니다. 거칠게 평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원인은 당시의 국내/국제적 객관적 힘의 역학이다.

예를 들자면, 중국의 과잉 저축이 미국 금융 시장으로 밀물처럼 몰려 온 사실, 그것이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린 사실 등의 배후에 놓인 중국의 국내 정치 역학(왜 1인당 소득 3000달러도 안 되는 중국인들이 그렇게 과도한 저축을 했을까, 중국의 기업과 정부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잉여를 인민들로부터 '약탈'할 수 있었을까), 미국 금융 자본주의의 배경(미국 노동자/서민을 금융과 시장에 완전 포획한 현실, 이른바 금융화) 등이 바로 최초의 원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금융, 국가 채무 위기는 자신만의 독특한 역학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저자들처럼 무슨 실수나 잘못된 믿음이 진정한 원인은 아닐 것이다. 평자는 수백 년 동안의 주요 사건이 유혹에 넘어가거나 잘못된 믿음에서 저질러진 무슨 실수 때문이라는 발상 자체의 어리석음(folly)을 지적하고 싶다.

지금은 부자가 대가를 치러야 할 때

둘째, 일단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대가를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이 다르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에서 7월 하순에 재정 건전화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로고프는 내용과 그 수준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재정 팽창을 주문하는 이른바 케인스주의자를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시장에서 정부 공채의 낮은 조달 금리는 문제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며, 신뢰란 비선형적(non-linear)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보수적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어차피 상당 기간 불확실성, 정치적 격변 등이 예상되므로 재정적 보수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사려 깊은 태도라고 덧붙였다.

액면 그대로 보면 참으로 건전한 사고이다. 그런데 로고프는 그 어디에서도 현재의 위기 극복책으로 재정 건전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재정 확장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특히 미국에서 극도로 악화된 소득 분배를 개선하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올리고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대대적으로 사회복지 지출을 늘리는 방안이 있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부자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국면이다. 그동안 누린 이득, 그리고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원죄 등을 생각해서라도 그렇다. 이대로 재정이 긴축 기조로 돌아서고 경제가 다시 활기를 잃는다면 다시금 가난한 사람에게 비용이 전가될 것이다.

미래를 열어가는 경제학의 모습은?

세계 소득의 90%에 해당하는 66개 국가의 200년에 걸친 시계열 자료를 분석한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적 업적이다. 국가 채무 위기의 다양한 사례들, 채무 부도의 은폐된 방식들(예를 들어 금본위제 하에서 금속 성분 감소, 불환지폐제도 하에서 빈번하게 이용된 통화 증발과 인플레이션), 은행 위기의 기록들과 그 파급 효과, 2007년 미국 경제 위기와 대공황과의 비교 등 온갖 문제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직접 읽어봄으로써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업적은 계량경제사(cliometrics) 분야의 업적일 수 있으나 출판사가 주장하듯이 경제 정책가나 투자 전문가들이 역사적 교훈이라는 넓은 의미의 배움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어떤 지식, 지침을 얻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저자들도 밝히듯 이번 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과 비견될 세계적 위기이며 당시와 지금은 정치적, 기술적, 경제적 조건이 너무도 당시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이 결코 저자들이 비판하듯 근거 없는 낙관주의의 이유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전개 양상을 사뭇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의 충분한 근거는 된다. 그들 자신이 예측하듯 경제학도 이번 위기 이후 크게 변할 것이다. 미래는 열려 있는 것이며, 역사란 단지 미지를 향한 출발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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