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이건 이념 논쟁과 이념 갈등이 활발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념은 정치·경제·사회적 가치를 가늠하는 사고의 기본 틀이며, 대다수 정책 역시 이러한 이념 틀 안에서 추진되기 때문이다.

최근 전 지구적으로 탈(脫)이념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념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은 아니다. 상황과 국면에 따라 이념 논쟁과 이념 갈등이 강화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 인류는 이념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념 구도와 이념 갈등을 다루는 게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정치 사회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는 데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이념 논쟁은 정치적 동원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며, 이 때 사실판단을 넘어선 가치판단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념 논쟁이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될 경우 그것은 비생산적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 우리 사회가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이념 논쟁이 유독 두드러진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우리 현대사가 갖는 특수성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은 해방 직후 본격화했다가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파가 사실상 불허돼 수면 아래 잠복했다. 이 대립이 다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며, 이후 치열한 이념 논쟁이 진행돼 왔다. 이념 논쟁의 '뒤늦은 개화'가 이뤄진 셈이다.


▲ <좌우파 사전 :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구갑우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서평의 서론이 길어졌다. 최근 출간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우리 사회의 이념 구도와 이념 논쟁에 평자의 생각을 잠시 적어봤다. <좌우파 사전 : 대한민국을 이해하는 두 개의 시선>(구갑우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은 여러 점에서 주목을 끄는 책이다.

첫째, 그 동안 치열한 논란을 이뤄 온 좌파와 우파에 대해 설득력 높게 설명하고 정리하고 있다. 저자들은 '국민주권과 대의제'에서 '고교 평준화와 학교 다양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를 가르는 핵심 쟁점들을 명쾌하게 비교하고 또 분석하고 있다. 책의 맨 앞에 놓인 '개념과 현실'은 좌파와 우파의 구분에 대한 여러 이론적, 경험적 토론을 일목요연하게 재정리함으로써 전체 논의를 효과적으로 이끌고 있다.

둘째, 좌파와 우파에 대한 서구적 특성과 한국적 특성을 적절히 결합시키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은 서구 근대 사회 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는 대외적으로 남북 관계나 한미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적 맥락을 갖고 있으며, 대내적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경로 의존성이 반영돼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서구적 전통과 한국적 현실을 종횡무진 검토함으로써 좌파와 우파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제공한다.

셋째, 전문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 교양서를 지향하는 것도 눈에 띠는 미덕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적잖은 내용이 전문적 진술을 담고 있지만, 저자들은 시민들도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기술하고 있다. 학문적 글쓰기에 익숙한 전문 연구자들이 대중적 글쓰기를 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생각할 때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서려는 저자들의 노력은 상당히 돋보인다. 더욱이 개별 주제 말미에 '더 읽을거리'와 해당 주요 개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덧붙여 독자들을 배려한 것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이 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가 대립해 온 치열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한국 현대사에 대한 상이한 시각이 상대적으로 소략하게 다뤄지고 있다. 북한을 어떻게 보고 어떤 대북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를 포함해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우리 사회에서 관찰되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에서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평자가 보기에 필자들 가운데 역사학 전공자가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나중에 개정판을 내게 된다면 이를 보완하는 것도 한 번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00쪽이 넘는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맨 먼저 떠오른 것은 이념 구도는 물론 이념 논쟁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이 읽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한 정치 국면이 전개되면 어김없이 이념 논쟁이 진행돼 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한국전쟁의 성격, 박정희 시대의 해석 등을 중심으로 논란이 불거지고 상대방에게 이념적 낙인을 찍어왔다. 최근에 북한 인권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더해졌지만, 좌파와 우파의 구도는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균열의 하나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이념 자체라기보다 그 이념 논쟁이 소비되는 과정에 있다. 하나의 이슈가 제기되면 그것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근거가 없거나 빈약한 비난들이 이어지고, 의도했던 '정치적 효과'가 달성되면 이내 자취를 감춘다. 이념 비판에 대한 대응 논리도 차이가 없다. 문제에 대한 합리적 반론이 아니라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양 이념적 역공을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친북좌파', '수구꼴통'과 같은 색깔론은 이러한 저급한 이념 논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들이다.

평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념의 의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이념은 현실 세계를 독해하는 틀이자 눈이다. 또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 및 이익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에 쉽게 양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자가 우려하는 것은 이념 비판에 담겨진 정치적 의도의 과잉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파적 이익을 국가적 이익 또는 개인의 인권에 앞세우려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통합의 제고가 우리 사회에 부여된 주요 과제 중 하나라면, 먼저 우리 사회가 왜, 어떻게 이념적으로 나눠져 있는지를 가능한 객관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조건적 사회 통합이 중요한 게 아니라, 통합을 저해하는 균열의 원인과 구조를 가능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 진정한 사회 통합은 상대방의 이념을 승인하고 그 공존을 모색할 때 가능한 법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 구도와 이념 논쟁에 관심을 두고 있는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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