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알랭 바디우는 한국의 철학도에게도 이제는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철학을 위한 선언>의 첫 한국어판이 1995년 백의출판사에서 이종영의 번역으로 출간되었고, 그 후 <윤리학>(이종영 옮김, 동문선 펴냄), <들뢰즈 : 존재의 함성>(박정태 옮김, 이학사 펴냄), <조건들>(이종영 옮김, 새물결 펴냄), <사도 바울>(현성환 옮김, 새물결 펴냄), <비미학>(장태순 옮김, 이학사 펴냄) 등의 책들이 번역돼 이제는 쉽게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

물론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 같은 주요 저작이라 할 만한 책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고, 그의 철학적 사유의 난해함과 낯섦으로 그의 사상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적 어려움도 있지만, 시대를 가로지르는 그의 예리한 판단과 선언이 갈수록 설득력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철학적 사유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귀를 기울여 바디우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강단 철학을 떠나 마치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국내에 소개된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은 이 시대를 진단하는 예언자적 철학자의 강력한 외침으로 이해해야 한다.


▲ <철학을 위한 선언>(알랭 바디우 지음, 서용순 옮김, 길 펴냄). ⓒ길
<철학을 위한 선언>(1989년)은 혼돈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실천의 흔적이다. 니체 이후 반(反)플라톤적 사유가 지배적이 되었고, 형이상학의 종언을 통해 철학은 존재 위기를 맞았으며, 동시에 근대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더 이상 존재에 대한 물음을, 진리와 주체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없는 철학의 장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이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작업을 옮긴이는 해제에서 "철학의 귀환"이라고 말한다. 바디우는 플라톤적 몸짓을 취하며, 철학의 가능성을 선언하고, 존재, 진리, 주체의 지속을 말한다. 최근 수년간 <세계의 논리 : 존재와 사건 2>(2006년)가 나온 후,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2009년)이 나왔지만, 1988년 출간된 바디우의 이 책은 여전히 강력한 선언으로 읽힌다.

이 책은 또 공산주의가 몰락하는 상황을 앞두고 쓰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바디우는 사건을 말하는 철학자다. 옮긴이가 바디우의 <불투명한 재앙에 대하여>(1991년)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강조한 것처럼,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현실 공산주의의 몰락을 '사건'이라 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죽은 자의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정치적 재현의 체계로서 형성된 소련 스탈린의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철학을 과학과 궁극적으로는 정치에 봉합해 철학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26쪽) 바디우는 프랑스의 1968년 5월과 폴란드의 연대노조운동이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서 어떻게 철학의 탈봉합화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디우는 정치적 재현의 체계로서 형성된 현실 공산주의 죽음을 정당한 것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이 시대에도 마오주의자임을 자처하며 "공산주의의 가설"을 주장하는 "평등"과 "해방"의 철학자다.

바디우는 <철학을 위한 선언>에서 철학의 가능성을 선언하면서, 그 조건으로 정치, 과학, 예술, 사랑의 4가지 유적 절차를 제시한다. 그는 새로운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서 하이데거와 그의 기술 이론에 근거한 허무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하이데거처럼 기술에 근거한 철학에 종말을 선언하고 시로 "구원"의 문제를 떠넘길 것이 아니라, 철학이 아직도 자본의 높이에서 사고하는 법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완성되지 못했음을 역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디우도 이 시대가 허무주의를 증언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바디우는 탈신성화 이후 도래한 우리 시대가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기술적이지도 허무주의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철학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봉합"을 만들어낸 역사적 흐름 안에서 빚어진 문제들이 허무주의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다.

이 책에서 바디우는 19세기가 폭넓은 봉합에 의해 지배되어 왔고 이로 인해 철학은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이 봉합에 의해 닫혀져 있었다고 말한다. (94쪽) 한 가지 예는, 앵글로색슨의 아카데미즘적인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실증주의적 또는 과학주의적 봉합이다. 이로 인해 봉합된 정치는 자유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체제에 대한 실용적 방어 기제로 축소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조건에 대한 철학적 봉합은 또 다른 사례이다. 예컨대 스탈린의 지시로 만들어진 철학 사전에서 플라톤은 "노예 소유자의 이데올로그"라는 짧고 거친 내용밖에 나오지 않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예술적 활동에서 실패했다. (95쪽, 144쪽)

정치와 과학에 의해 이중적으로 봉합되어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의 편으로 뒤집으려고 시도한 알튀세르의 영웅적 노력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개입이었다. 과학보다 정치적 조건에 의한 지배의 봉합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튀세르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19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에서는 다른 주인을, 즉 시를 섬기려고 한다는 징후를 볼 수 있으며, 또 레비나스의 철학에 의해 사랑의 시종이 될 수 있음도 시사하고 있다. 철학의 몸짓은 탈봉합의 몸짓인 것이다.

<철학을 위한 선언>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사건과 유적 절차라는 바디우 철학의 핵심을 볼 수 있다. <존재와 사건>(1988년)에 이어 출간된 이 책은 옮긴이의 말처럼 바디우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디우 철학을 위한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글이며 비교적 다른 저서에 비해 명료하며 쉬운 편이다.

그러나 바디우의 저술이 그렇듯이 함축적이며 이해하기 위한 선지식을 요한다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이번에 새롭게 번역된 이 책은 이종영의 예전 번역 책을 더 이상 구입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저작권을 정식으로 구입해 서용순에 의해 새롭게 번역, 출간된 것이다.

새로 번역되어 출간된 이 책에는 바디우의 최근 현황을 비롯하여 그의 철학이 갖는 철학적, 시대적 함의와 또 바디우 저술의 연대기적 분석에 근거하여 이론적 변화와 그 의의를 추적하고 있는 해제가 담겨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그에 대한 많은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역자의 땀의 결실의 산물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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