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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들해질 때도 되었건만, '유교 재해석'과 관련된 서적을 접하면 나는 여전히 반갑고 기쁘다. 일종의 유교 복권 노력이 지난 십 수 년에 걸쳐 적잖이 진행되어 왔음에도 아직도 유교는 전통 사상으로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리라.
기껏해야 '유교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알지만, 아직까지는 여전히 '유교 정당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이지, 능력만 된다면 기꺼이 이 대열에 동참하는 것이 나의 소박한 학자적 바람이다. 하여 최근 출간된 신정근의 <중용 : 극단의 시대를 균형의 시대로>(사계절 펴냄)를 읽으면서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기간된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심산 펴냄) 등의 저술들로 이미 학계뿐만이 아니라 동양 유가고전에 관심 있는 대중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저자의 이번 책 역시 '전통과 현대를 잇는 대표적인 가교'라 해도 과찬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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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신정근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
"중화(中和)를 달성하면
천지(天地)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萬物)이 제 모습으로 자라게 된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용> 첫 장(章)의 매듭 부분이다. 여기서 중화(中和)는 중용(中庸)을 의미한다. 그러니 중용을 이루면 천지만물이 제자리를 찾고 존재 목적을 달성한다는 말이 된다. 중용의 엄청난 효력에 대한 선언이다. 이후의 전개는 자연 그 까닭과 구체적인 내용, 방법에 대한 기술일 터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에 대한 이해가 난해한 것으로 정평이 났었다.
신정근의 저작은 독자들이 보다 이를 쉽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애쓴 공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덕분에 이 책은 참으로 많은 미덕을 지니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저자는 독자들에게 <중용>을 이해시키고자 성심성의(誠心誠意)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용>은 유교 고전 텍스트 가운데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으로 널리 인식되어왔고, 실제 전공생들에게조차 녹록한 텍스트는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중용>과 그 핵심 개념인 '중용(中庸)' 및 주요 개념과 관련 일상의 사례는 물론 나아가 독자들이 접했을 법한 영화나 가요 등의 문화 상품을 동원할 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의 역사적 실제 등 풍부한 사례들을 동원하여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둘째, 이를 통한 명쾌하고도 적극적인 개념 규명이 이 책을 기존의 작업들과 변별시키는 가장 큰 장점이다. <중용>의 핵심 개념인 '중용'에 대해 저자는 '중(中)'은 '중심, 균형, 중립, 실체적 근원, 공정성 및 적합성, 적절성' 등을 내포하는 것으로, '용(庸)'은 '평범성, 일상성 및 습관, 조율된 반응'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양자가 결합된 '중용적 삶'을 "반대되는 가치와 성향들이 배척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종합" 되면서 "공정성에 기반을 둔 균형 잡힌 삶"(47~48쪽)으로 요약한다.
물론 이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삶', 곧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삶'이라는 주희(朱熹)의 중용 정의와 통한다. 나아가 이것은, 일견 추상적인 인식론으로 비칠 수도 있는 <중용>을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극단적 상황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정치사회적 안정과 평화 추구라는 탄생 배경에 대한 인식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저자 자신이 자임하였듯이, 중용의 이론적 측면과 현실에의 적용면을 동시에 고찰하고, <중용>의 중용과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중용을 비교하면서 동이(同異) 점을 찾으며, 사자(死者)와 생자(生者)와의 관계 속에서 <중용>의 귀신 장(章)의 의의를 밝히고, 일견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된 <중용>의 난해성을 쉬운 예시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며, 일견 비체계적인 <중용>의 구성과 체재를 저자 나름대로 재구성함으로써 일관성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들 또한 이 책이 높이 평가받아야 할 측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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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었을 때, 중용을 이루면 만물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식의 중용의 엄청난 위력을 공감하는 데는 다소 미진한 느낌이 있다.
첫째, '중용'의 정치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었으면 어땠을까? 장점은 대개 다른 측면에서는 단점이 되기 쉽다고, 중용의 풍부한 일상적 혹은 일반적 사례나 설명이 오히려 정치가들에게 특별히 중용을 강력하게 요구하려던 <중용>의 의도가 간과된 것은 아닐까?
어떤 인간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치 세계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정치인의 중용적 태도 보유 여부는 해당 정치 공동체 전체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정치인의 중용적이지 못한 태도는 대개 불공정한 행위가 되고, 이는 흔히 불법 내지 탈법과 연결되며, 결국은 정치 부패로 귀결되어 해당 사회의 신뢰와 질서를 붕괴시키는 요인이 된다. 사실 <중용>의 제1역할은 <대학>과 더불어 오늘날 대학(大學)에 해당하는 최고 고등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에서 미래의 정치가가 될 재목들을 상대로 중용을 비롯한 주요 실천 윤리의 덕목과 원리를 가르친 정치학 텍스트였다는 데 있다.
둘째, 서양의 인식론 내지는 분석 방법에 대해 '너무' 관대하거나 쉽게 양자를 대비시키는 이분법적 태도 앞에서는 '중용'의 위상이 더욱 왜소해지는 느낌은 과한 것일까? 예컨대 저자는 중용의 다양한 실천 방법의 성격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방법론적 다원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방법론적'이란 수식어가 있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다원주의'란 1960년대 영미식 민주주의의 자본주의적 성격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고자 1970년대식 공리주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복리 및 사회적 공정성을 우선시하는 중용의 원리를 다원주의적 방법론과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또 "서구 근대 정치 사상에서는 사람이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으며 자신의 개체성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을 자기 보존의 원리로 긍정"하지만 "<중용>에서는 이기심을 극복하는 자기 수양, 즉 수신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진술은 양자를 쉽게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킨 예이다.
로크나 홉스 등 자연권에 입각한 계약론자들의 '이기적 욕구'란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는 원칙일 뿐만 아니라 타인을 침해하지 않는 원칙과 동시적 조건하에 성립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근대의 자유라는 가치 혹은 도덕 윤리로 구성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독점자본주의 하의 통제되지 않는 무한대 이기적 욕구 관철 논리와는 다른 것이다.
다른 한편 <중용>에서 말하는 수신론이라고 해서 '자신을 보존하는 이기적 욕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장하는 정치 공동체 건설과 유지를 위해 유교적 덕성들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여민동락(與民同樂)'론이나 '양민(養民)'으로 시작해서 '교민(敎民)'으로 완성된다는 왕도정치론 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든 시장을 통해서든 무한대의 이기적 욕심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은 양자 모두 동일하다고 본다.
셋째, 유교적 수양론이 정치사회적 제도화와 거리가 먼 것처럼 인식하는 부분도 조심스럽다. 삼권분립 제도 혹은 헌법재판소 제도 등과 관련된 진술(144쪽), 또는 "<중용>의 저자는 (…) 제도의 완비보다 사람의 수양에 초점을 둔다"(146쪽)는 진술 등이 그것이다. 물론 유교를 인치(人治)로 간주, 법치는 제도를 중시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태도는 어제오늘 문제는 아니고, 유교를 따라 다니는 상표가 되다 못해 마치 본질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유교는 명문화된 법제도는 물론 각종 예법의 형태인 관습법을 비롯해 온갖 삶의 내용이 지나치게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고 할 만큼 제도의 문제를 중시했다. 다만 저자도 강조했듯이, 유교가 정치 주체의 수양을 강조한 것은 제도도 결국은 운영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정치란 기본적으로 물리적 강제력을 기반으로 해당 공동체의 가치를 배분하는 행위이고, 이때 물리적 강제력이란 어떤 형태로든 제도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 이름이야 어떠하건 간에 법이나 제도의 성격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인으로서의 수양이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수양은 정치적 산출, 곧 그것이 성문법의 형태이건 관습법의 형태이건 간에 제도와 별개일 수 없는 점은 자명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율곡 이이 역시 <동호문답>에서 '힘써 실천하는 것이 (군주의) 수기이다'라는 테제를 한 장(章)의 제목으로 걸기도 했다. 요컨대 정치인에게 있어서 수양의 실체란 바로 정치적 실천을 말하는 것이고, 정치적 실천이란 곧 법령 혹은 제도의 정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점을 인정할 때 <중용>에서 말하는 '중용의 위대한 위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피력하는 것으로 평자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중용>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시하는 중용을 향한 수양의 주체 혹은 대상은 기본적으로 정치가이다. 음악가의 수양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열매를 맺듯이, 화가의 수양이 멋진 그림으로 화답하듯이, 중용을 향한 정치가의 수양은 훌륭한 정치 제도, 각종 정책, 공정한 인사 등의 정치적 산출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보편적인 공정성'으로서의 중용이 기실은 개인적 수양의 덕목이기보다는 정치적 덕목이기에 그 결과가 정치 공동체 전반에 사랑과 정의가 흘러넘치는 인정(仁政) 사회가 기대되고, 만물이 제자리를 찾는 각득기소(各得其所)의 사회가 기대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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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의 소임상 어쩔 수없이 평자의 단견을 피력했지만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재미와 감동이 교차되었고 배운 점이 많았다는 속내를 거듭 밝힌다. 하여 저자께 고맙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