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아벨라의 <두뇌를 팝니다>(유강은 옮김, 난장 펴냄)를 단지 미국의 냉전주의 외교 전략의 산실에 대한 이야기로만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이 책의 화두는 더 크고 의미심장하다.

이 책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제국의 역사를 어떤 렌즈로 들여다보는 것이 적합한가를 묻고 있다. 민주당 대 공화당 정치 질서? 진보 대 보수의 시대? 뉴딜 대 레이건 시대? 이 모든 시기 구분은 일정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호하게 지난 시대는 다름 아닌 '랜드 연구소의 시대'라며 한 단어로 압축하고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정치 질서도 랜드 연구소라는 렌즈로 보면 큰 차이가 없다.

랜드 연구소가 그렇게 대단한가? 이 책을 정독하다 보면 랜드를 연구소라고 부르는 것에 곤혹감을 가지게 된다. 이는 마치 한국 보수 정당에게 있어서 <조선일보>를 단지 언론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는 것과도 유사하다. 오히려 랜드 연구소는 보수와 자유주의를 아우르는 전위적 정당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해 왔다.

왜냐하면 시대의 거대한 방향, 주요 담론, 과학적 혁신, 핵심 기간요원 양성 등에서 전위적 역할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1948년 창립된 이래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연구의 그저 부산물(!)로 인터넷 발명에 기여하고, 1600명의 직원이 글로벌하게 활동하며, 베트남 전쟁에서 워터게이트, 별들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촉수가 뻗어있지 않은 곳이 없는 곳을 단지 연구소라 부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그리고 이 책을 단지 미국 제국의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이다. 이 책은 동시에 한국의 현대사와 우리의 삶 전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것은 뜻밖에도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과의 개인적 인연이다.

차명진 의원이나 김문수 지사는 과거 한국의 탁월한 운동권 출신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들은 급진 운동권 출신이면서 외교 안보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는 의미에서 좌파 출신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 1세대와 매우 유사하다. 대학원 시절 차명진 의원은 참으로 명석하고 시대의 흐름을 앞서 이해하였다. 그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집단주의 담론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반대로 개인의 합리적 선택으로 사회를 이해한 이론에 심취한 바 있다. 당시 난 대학원 수업에서 골수 운동권 출신인 그가 이 이론에 그토록 매료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실 차명진 의원의 행보는 이 책에서 랜드 연구소의 행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가 보기에 랜드 연구소의 가장 큰 화두이자 미국 사회에의 업적 두 가지는 바로 강경 외교 안보 전략과 합리적 선택 이론이다. 랜드 연구소는 소련 공포증에 사로잡혀 '선제공격 독트린' 등 대응 전략을 세우는 과정에서 합리적 선택 이론의 정교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또 이 책은 계급 집단성 대신에 랜드 연구소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 등이 발전시킨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패러다임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가장 큰 사상적 무기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한다.


▲ <두뇌를 팝니다>(알렉스 아벨라 지음, 유강은 옮김, 난장 펴냄). ⓒ난장
이러한 랜드 연구소의 두 가지 화두는 한국 진보주의에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강경 외교 안보 전략은 한국의 네오콘을 만들어냈다. 합리적 선택 이론은 한국의 진보 486들로 하여금 정부를 개인의 합리적 선택에 장애물로 작용하는 이기적 괴물로 간주하는 작은 정부론 등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기울어지게 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이자 바로 오늘날 한국 정치 지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이 연구소의 주적이었던 레닌이 미국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있다면 미국판 전위 정당인 바로 이 랜드 연구소일 것이다. 레닌은 평소 입버릇처럼 볼세비키적 정신과 미국적 효율성의 결합을 언급하곤 했다. 랜드 연구소야말로 이 두 가지의 융합이라 할 수 있다. 랜드 연구소는 볼세비키적 열정을 가지고 소련 공산주의와 사상 투쟁을 벌이며 동시에 미국 자본주의의 위력에 근거한 과학적 혁신 투쟁을 전개하였다.

랜드 연구소 국방 연구의 부산물인 인터넷이야말로 이 사상 투쟁과 과학적 혁신의 융합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인터넷의 개방성 철학은 폐쇄적 공산주의 체제와의 사상 투쟁 자체이며 동시에 과학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은 이제 트위터 등 소셜 웹을 통해 이란 등 이른바 전체주의 체제의 붕괴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랜드 연구소의 두 대표 상품인 강경 외교 안보 사상과 합리적 선택 이론의 결합내지 공존은 다소 기묘하다. 왜냐하면 전자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영화에서 보듯이 핵 선제 공격 등의 광적인 이론이고, 후자는 냉정한 개인 합리성에 대한 과학적 이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결합하면 과학적으로 계산된, 절제된 광인 전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성공적 해소 이후 미국 외교 안보 전략의 최대 기둥인 강압적 외교 전략이다. (소위 '불량 국가'는 이를 '벼랑 끝 전술'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나쁘게 작용한다면 전자는 네오콘의 광적인 선제공격 독트린으로 나타난다. 이는 냉전 시절 소련이 더 크기 전에 절멸시키고자하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랜드 연구소의 가장 걸출한 스타이자 네오콘의 대부이기도 했던 앨버트 월스테터의 소련 공포증은 우주로까지 전쟁을 비화시키는 별들의 전쟁 프로젝트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냉전이 사라진 21세기에 9·11 테러 덕분에 부시의 선제공격 독트린으로 잠시 부활하기도 했다.

후자인 합리적 선택 이론은 다시 두 가지 부작용을 양산한다. 그 중 하나인 국제 관계에서 개인 행동에 대한 수학적 계산 가능성에 대한 신화는 베트남 전쟁 등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걸어 다니는 슈퍼컴퓨터 국방장관 맥나마라가 베트남 민족주의를 계산에 넣지 못했고, 가장 준비된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이라크 반미주의를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은 가장 극적인 예일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이 이론은 정부를 약화시키며 미국 공동체를 분열시켜 결국 제국의 기초를 안으로부터 침식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 이론의 실험장이자 '미국의 빛나는 아침'으로 명명된 레이건 시절은 바로 양극화의 심화이자 미국 공동체의 해체 과정이기도 했다. 인문학 토대가 취약한 랜드 연구소라 그런지 이들은 자신들의 대표 상품들이 미국 문명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것들의 관계가 어떤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을 낳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상품의 결합 내지 공존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월스테터는 자유주의자 케네디가 소련과의 미사일 격차라는 자신의 소련 공포증을 이어가는 것에 대만족을 표시한 바 있다. 결국 냉전 자유주의자인 케네디, 존슨 등은 비록 공군 사령관 르 메이 등 랜드 연구소 스타들과 사사건건 대립하기도 했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등에서 랜드 연구소의 담론과 인맥의 자장 안에서 움직였다.

국내적으로도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랜드 연구소의 최대 상품인 합리적 선택 이론의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1970년대 이후 민주당 내 새로이 부상한 계파인 신자유주의 그룹과 그들의 대표 상품인 클린턴, 고어, 하트 등은 이의 상징이다. 이들은 이후 '우리는 모두 작은 정부론자이다'라고 인정하며 작은 정부론 담론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면서 자신들 스스로가 레이건 시대 민주당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랜드 연구소판 민주당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랜드 연구소의 화려한 두 상품은 처참한 기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소련 공포증에 기반을 둔 선제공격 독트린은 이제 영화 속 웃음거리의 대상이다. 랜드 연구소의 예상과 달리 소련은 선제공격 없이도 붕괴했고, 레이건은 때로는 변절하여 고르바초프와 손을 잡았다.

더 큰 문제는 냉전과 소련 붕괴의 시도 과정에서 오히려 미국이라는 거인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것을 수학적 계산으로 환원시킨 합리적 선택 이론은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계산하지 못했고 중동의 반미주의를 계산하지 못했으며 오늘날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을 계산하는데 자주 실패했다.

더구나 과거 영국과 달리 공납이 가능한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미국은 과잉 팽창된 제국을 유지하느라 허덕이고 있다. 과거 이라크 전쟁에서 마치 랜드 연구소처럼 광인 이론을 주창하던 <뉴욕타임스> 보수 컬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제 공공연하게 아프간 전쟁에서 발을 빼고 미국만 돌보자고 선동하고 있다.

프리드먼의 선동이 실감나는 것은 그간 작은 정부론 패러다임의 결과로 미국이 자본을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놓아버렸고 합리적 선택 대신에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는 홉스적 야만의 상황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 시절 카트리나 재난은 미국 공동체가 어디까지 파괴되어 있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미국의 공동체주의 철학자이자 오늘날 한국에서의 스타인 하버드 대학교 교수 마이클 샌델은 "연대가 무너지면 비극이 발생한다"고 한탄하고 있다.

여전히 군산 복합체 미국에서 랜드 연구소의 영향력은 크다. 하지만 랜드 연구소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미국은 이제 랜드 연구소의 군사주의보다 트위터, 구글, 애플이 주는 외교 안보 전략의 함의에 더 주목한다. 말하자면 소프트 파워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군사주의보다 중동 국가의 내수 부양을 통한 실업자의 테러리스트로의 전락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테러 방지 전략이 시도되고 있다. 합리적 선택 이론도 이제 빛바래고 그 대신 선스타인의 '넛지'처럼 인간의 복합적 심리에 주목한 행동 경제학이나 마이클 샌델, 왈저 등의 공동체주의가 상종가를 누리고 있다.

소프트 파워와 공동체주의를 구현하는 오바마의 당선이야말로 랜드 연구소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오래전 랜드 연구소 등이 열어젖힌 판도라의 상자로 인해 그 무수한 부작용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오바마는 과잉 팽창된 미국을 대폭 축소하지도 그렇다고 유지하지도 못하는 곤혹스러운 상황 안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 책은 깊이 있게 맥락과 그 결과, 시사점을 보지 못한 채 미국의 최신 담론과 상품을 수입하는 한국의 수많은 랜드 연구소의 사생아들에 대한 중요한 경고장이다. 이제 모두 숨을 고르며 생각의 시간을 가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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