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집안은? 루스벨트? 부시? 케네디? 2009년 브루킹스 연구소는 정치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케네디 가문을 첫 번째로 꼽았다.

케네디 가문은 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4명, 장관 1명을 배출했다. 케네디 가문을 1위로 만든 사람들은 재선 상원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법무부 장관과 상원의원 출신의 로버트 케네디, 9선 상원의원을 지낸 에드워드 케네디 등 케네디 3형제였다.

기실 케네디 형제는 미국 정치의 산 증인이다. 그중 2009년 8월 25일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케네디는 1962년 상원의원이 된 이래 47년간 미국 민주당의 진보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가난한 서민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중요한 법안 제정을 주도했다.

1964년 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 1990년 장애인법, 2002년 낙오아동방지법 등 중요한 개혁 법안을 추진한 그는 명연설로 '상원의 사자(lion)'라고 불리기도 했다. '검은 케네디'라고 불린 대통령 오바마는 그를 "이 시대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자 "미국 민주당의 혼(soul)"이라고 불렀다.

케네디와 미국 정치


▲ <케네디가의 형제들 : 에드워드 케네디 자서전>(에드워드 케네디 지음, 구계원·박우정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최근 출간된 <케네디가의 형제들 : 에드워드 케네디 자서전>(구계원·박우정 옮김, 현암사 펴냄)은 에드워드 케네디가 50여 년간 모아 둔 일기와 메모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책을 쓴 시간도 길다. 2004년부터 5년 동안 버지니아 대학교 밀러센터에서 자신의 생애에 관한 구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퓰리처 상 수상자인 작가 론 파워스와 긴밀하게 협력해 이 회고록을 완성했다. 이 책은 미국 의회와 백악관 구석구석의 정치 일화를 소개하면 미국 정치의 진면목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한다.

1960년 대통령 케네디가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무장 게릴라를 피그만에 보냈다가 참담하게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케네디는 "제가 정부의 총책임자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참모에게 "침공 작전에 대해 국방부 사람들을 너무 믿었다"고 말했다.

그가 의기소침해지자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당시 법무부 장관)는 형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버지에게 전화하자고 제안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원자이자 영국 대사를 지낸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잘했다, 네가 모든 책임을 졌다. 그게 국민이 지도자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내 말 명심해라. 국민은 당당하게 책임을 지는 지도자를 좋아한다. 이 일은 틀림없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그 후 18개월 뒤 미국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 직면하여 핵전쟁의 가능성이 커졌을 때, 케네디는 군부의 조언대로 따르지 않았다. 피그만 참사로 교훈을 얻은 케네디는 평화적 해결방안을 선택했다. 이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영화 <13일간(Thirteen Days)>에 자세하게 소개된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다

1961년 대통령 케네디는 경제 원조, 문맹 교육, 사회 계획, 민주 정부를 위한 체계를 구축하고자 '진보를 위한 동맹'이라는 10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개발도상국에서 봉사하는 '평화봉사단'을 창립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공산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힌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케네디는 베트남에 미국 군사 고문단을 보내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케네디가 1963년 암살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통킹 만 사건(1964년) 이후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을지는 미지수이다. 아마도 에드워드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의 책임이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있다고 믿는 듯하다.

1967년부터 케네디 형제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반전운동에 뛰어들었다. 셋째인 상원의원 로버트 케네디는 의회에서 "폭격을 중단하라. 그리고 북베트남과 평화 협상을 하라"고 주장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 케네디가 남긴 유산이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68년에 단호하게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공약으로 내세우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 안타깝게도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은 "위대한 나라, 이타적인 나라, 인정 많은 나라"라고 선언하고서, 총탄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케네디 형제가 죽지 않았다면…

케네디가 진정 꿈꾸던 일은 미국인의 달 착륙, 핵무기 축소, 공민권 법안의 통과였다. 형의 이상을 실현하려던 로버트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 반대, 빈곤과 불평등의 추방,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했다.

만약 이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도, 닉슨의 당선도, 워터게이트 도청 사건도, 건강보험법의 연기도 없었을까? 역사를 가정하기는 어렵지만, 케네디 형제가 미국 민주당과 진보파에게 커다란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의 어느 정치인보다 자신의 이상을 아름다운 문구로 탁월하게 표현했다. 그는 1968년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베트남 전쟁, 도시 폭동, 인종 불평등, 빈곤을 언급하며 사회 정의와 공동선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의란 단순히 국민총생산의 규모와 분배에 그치지 않고 더 높은 도덕적 목적과 관련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이 당선되었어도 미국이 유럽 복지국가처럼 한 번에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과 대립하는 냉전도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 형제의 꿈과 이상은 미국 민주당의 정책이 되어 서서히 미국 사회를 바꾸는 추동력이 되었다.

케네디 형제의 꿈은 헛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미국 민주당은 인종차별을 폐지하는 역사적인 공민권과 투표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저소득층 학생을 지원하는 연방 지원 프로그램인 '헤드 스타트(Head Start)'를 실행했다. 대통령 존슨은 '빈곤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복지국가를 향한 '위대한 사회'라는 목표를 추구했다.

클린턴은 1963년 학생 시절 '보이스 네이션(Boys Nation)'의 대표로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나고 나서부터 정치인이 되는 꿈을 키웠다. 그는 대학생 시절 반전 운동에 참여해 징집을 거부했으며, 베트남 전쟁 이후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1995년 베트남과 미국은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두 형이 떠난 후에도 에드워드 케네디는 우물쭈물하는 미국 민주당을 진보적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레이건 정부의 군비 확대와 '스타워즈' 계획에 반대했다. 건강보험 개혁에 앞장서고, 교육 개혁을 추진하고, 이라크 전쟁을 비판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이라크 전쟁이 '애국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라크에 선제 행동을 취하는 예방 전쟁은 국제법 원칙에 위배"된다고 역설했다. 네오콘이 이끄는 부시 정부에 맞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념의 정치인이었다.

건강 보험 개혁에 앞장서다

2010년 3월 24일 미국에서 역사적인 건강 보험 개혁 법안이 통과되었다. 평생 의료 제도 개선의 대의를 위해 싸운 에드워드 케네디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의 일이다.

에드워드 케네디가 건강 보험 개혁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개인적 체험도 영향을 미쳤다. 1973년 에드워드 케네디는 자신의 아들 테디가 암에 걸려 투병하자 아동 병원에서 밤새 간호하며 다른 부모들을 만났다. 그는 보고 느낀 것을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대부분 세일즈맨, 비서, 노동자, 교사, 택시 운전사와 같은 근로자였다. 가족들은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빚을 졌다. 보험에 들지 않았거나 일부만 가입한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 후 에드워드 케네디는 모든 관심을 그 투쟁에 쏟았다. 그는 평생 동안 건강 보험, 교육과 직업 훈련의 부담을 줄이려는 신념을 실천했다.

가족의 비극을 넘어서


▲ 케네디가의 형제들. 왼쪽부터 둘째 존 케네디,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 셋째 로버트 케네디. ⓒ현암사
<케네디가의 형제들>은 한 가족의 비극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두 형의 암살과 가족의 잇따른 사망 속에서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부모님을 포함해 일곱 형제들의 죽음을 견뎌내야만 했다.

첫째 형 조 주니어 케네디가 제2차 세계 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하여 독일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했다. 둘째 누나 캐슬린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인 대통령 케네디가 1963년 암살로 떠난 지 6년 만에 셋째 형인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로 목숨을 잃었다.

세상이 말하는 '케네디가의 저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 케네디의 아들 존 케네디 주니어와 로버트 케네디의 아들 데이비드 케네디, 마이클 케네디 등 조카들도 잇따라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큰누나 로즈메리의 정신 지체, 아버지의 뇌졸중, 자식의 투병을 지켜보아야 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자신도 비행기 추락 사고와 자동차 사고를 겪었으며, 스캔들과 이혼으로 많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케네디 가문의 기둥이 되어 가족을 돌보았으며 케네디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최후까지 노력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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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한국의 민주화운동

에드워드 케네디는 그보다 1주일 전 서거한 전 대통령 김대중과 각별한 인연을 가졌다. 그는 1980년 김대중이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구명 운동에 앞장섰다. 훗날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환영 리셉션을 열어주고 한국으로 다시 귀국할 때도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1987년 군사 정부에 의해 투옥되고 고문을 당한 전 국회의원 김근태에게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여한 것도 그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념을 가진 정치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자서전 <케네디가의 형제들>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여 케네디 형제들의 정치적 이상과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독자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20세기 파란만장한 국제 정세는 물론 미국의 선거운동과 정치 비사에 관한 사례도 흥미진진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736쪽의 두께가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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