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생각하는 이분법

아직도 '지식인/대중' 또는 '엘리트/대중'의 이분법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을까?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우파와 (소위) '지식인'의 일부가 그렇다.

그러한 이분법적 인식은 쉽게 재생산된다. 기실 매우 속편하고 별로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런 인식은 사고의 주체로 하여금 자신이 '엘리트'나 '지식인'이라는 허위의식을 누리게끔 해준다. 허점 많은 현대 민주주의 제도나 신자유주의라는 일종의 과두제가 대다수의 인간과 주권자(대중·민중·인민 등으로 호명되는)를 소외시키는 '물적 토대'일 것이며, 또 그것은 '지식인/대중' 또는 '엘리트/대중'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의 토대이기도 하다. 그 이분법은 '제도'나 '구조' 또는 그 작용의 결과인 '권력'의 자리에 주체(엘리트 혹은 지식인 등)를 놓은 논리적 오류의 소산이 아닐까?


▲ <군중과 권력>(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강두식·박병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바로 이런 점에서 재출간된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강두식·박병두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은 특별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결국 권력이며, 권력을 배태시키는 인간 경험의 궁극적인 심급은 '(삶/)죽음'이라는 것이 책의 메시지이다.

따라서 이 책을 '대중은 무지한 일종의 개떼이다'는 식의 명제에 기초한 존재의 이분법을 증명하거나, 대중 행동의 양식을 설명하기 위한 참고서로 읽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라 생각한다. (물론 오독은 자유다.) 또한 이 책 첫 장에서 제출되는 '군중은 언제나 팽창하기를 원한다', '군중은 평등을 지향한다', '군중은 밀집 상태를 원한다' 등의 명제는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현대적인 대중 현상을 직접 설명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군중과 권력>의 내용적 본령도 아니다. 다만 도입에 불과하다. 아마도 이 첫 장을 읽고 지레 만족하거나 책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리라. 십수 년 전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도 그랬던 듯하다.

그러나 카네티는 '군중'에서 출발하여 장장 650쪽에 걸친 멀고 긴 길을 간다. 우선 종교로, 그리고 권력과 죽음의 문제로, 그리고 거기서 '살아남음'과 권력의 메커니즘으로. 긴 장정에서 결국 카네티가 멈춘 곳은 다니엘 파울 슈레버의 편집증 증례에서이다. (마침 최근에 이 권력자-정신병자의 자서전이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김남시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알다시피 슈레버는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환자' 중 하나이며, 프로이트 이후에도 라캉 등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석 달기를 했던 20세기 초 독일의 미친 판사이다. 카네티는, 신의 여자가 되기를 원했다는 슈레버의 편집증 망상으로부터 권력의 근원적 속성을 논하여 전체 책의 대단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권력은 일종의 편집증이며, 권력자는 궁극적으로 다른 인간 전체를 살해하여 '살아남는' 유일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때 '살해'는 상징이면서 또한 '심리적 현실'을 가리키는 그런 기표이다.

카네티의 장대한 사유의 드라마를 따라잡는 일은 쉽지 않다. 더구나 그의 서술은 다분히 비체계적이고 묘사적이라 사회'과학'과는 거리가 있어 뵌다. 때로 아포리즘에 가까울 정도로 '문학적'이다.

한국에서의 대중론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분명 '대중(대중 현상)'에 대한 우파적인 공포와 엘리트적인 불안을 담은 구스타브 르봉이나 오르테가 이가세트의 책과는 비교되기 어려운 차원에 있다. 유럽에서의 민족주의의 대두와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의 대중 현상에 근거해서 쓰인 구스타브 르봉의 <군중 심리>나 오르테가 이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등은 국내에서 읽히는 대중론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들 책이 읽히는 이유는 물론 근대 초기의 대중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단히 초기적이며 유럽 국민주의의 대두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설명력은 매우 낮다. 원론적이고 1차원적인 논의가 대부분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파시즘·나치즘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전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서, 그 야만의 뜨거움(전체주의적 광기)과 차가움(기계화된 관료주의 살인 시스템)을 처절하게 체험하고 난 뒤에 비극의 톤으로 써진 베냐민·아도르노·라이히 등의 책과는 격이 다르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중의 반역> 같은 책이 대중론의 대표격으로 이해되거나 때로 심지어 고전으로까지 간주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귀족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급격히 (소)부르주아 국민주의의 그것으로 대체될 때 토로된 불만이, 오늘날 한국에서 귀족연하는 '지식인'의 구미에 잘 맞거나 대중 현상의 표피를 설명하는 (우파적) '개론'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지는 않은가?

한편, 유럽과는 다른 맥락을 가진 한국이나 아시아에서의 대중과 국민주의의 출현의 역사를 다룬 적절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대중과 군중 개념의 정초자들이 중국과 인도, 혹은 터키나 인도네시아 등의 민중이 대중이나 국민으로 되는 과정과 제3세계 민족주의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상당히 다른 논점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한국의 대중 현상과 그 역사성에 대한 논의도 이제야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최근 발간된 <좌우파 사전>(구갑우 외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에서 한국 대중론의 쟁점을 정리해 놓고 있다.)

요컨대 카네티의 책도 <군중 심리>나 <대중의 반역> 등과 맥락과 논점 자체를 달리하기에, 동렬에 놓고 읽혀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카네티의 책과 비교되어야 할 것은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마르쿠제·아도르노의 저작들, 그리고 혹은 아예 다른 지적 배경을 품고 대중사회를 논한 버밍엄 학파의 논변이 아닐까 싶다.

군중의 함축과 카네티의 발상법

다시 <군중과 권력>으로 돌아가자. 필자는 허두를 대중 인식의 문제로 시작했다. 하지만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군중과 권력>은 대중에 관한 책이 아니라, 군중에 대한 책이며 권력(의 본성)에 관한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군중'은 우리가 흔히 쓰는 '대중'이나 '민중' 등과는 다른 함축을 가진 어휘이다. 독일어 'Masse'의 뉘앙스는 모르지만, 역자들이 국역본 제목에서 '대중'이 아니라 '군중'을 택한 것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어에서는 '군중'과 '대중'의 어의·어감 차이는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군중'은 어떤 공간에 있는 무리와 그 무리가 만들어내는 인간 현상을 가리킨다. 또 그 함축은 거대한 무리가 운동하고 감흥하는 동적 상태와 연관되는 데 적절하다. 따라서 공간과 운동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군중론의 핵심 요소가 될 수 있다.

'대중'은 좀 다르다. 그것은 우선 '민중·공중·국민·다중' 등의 단어들과 인접어이다. '대중'은 또한 매스미디어와 자본주의, 민족주의와 대의제 같은 개념과 직접적인 환유관계에 놓인다. 또한 '대중'은 곧바로 '현대'와 그 주체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나 '군중'은 그에 비해 좀 더 원형적이고 초역사적이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에 대한 논변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이나 인류사의 원(遠)과거로 환원된다. 서문에도 명기되어 있는 바, 그는 아주 구체적인 모티프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저자가 직접 체험한 20세기 초 중부 유럽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야기한 대중 현상과 나치의 개전(開戰)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논변은 책의 거의 모든 곳에서, 원시 부족과 전제국가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전설과 신화를 끌어들여 전개된 것이다. 이런 점은 <군중과 권력>의 발상법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라 보인다. 그에게는 나치가 설쳐대던 1930년대의 "독일이야말로 원시적인 형태를 띤 전쟁이 마지막으로 터진 현장(617쪽)"이라고까지 여겨진다.

인류사의 원과거와 나치 독일이 연속선상에 있다기보다, 나치 독일이 벌인 일들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게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쉽겠지만, 기본적으로 카네티는 인간의 원초적인 성벽이나 프로이트주의적인 유적 인간론을 믿는 듯하다.

카네티는 확실히 전쟁과 학살에 들려있다. 이런 발상법이 유태계 후손인 그의 고유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부 유럽 지성의 한 풍경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대학살이 벌어진 시체 더미 속에서 일어서는 인간'이라는 바운드 모티프가 <군중과 권력>을 시작하고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발상과 논법은 그의 글을 상당히 문학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환원론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나치 이외에는 20세기의 권력 현상을 구체적으로 다루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심을 염두에 둔 것인지, 카네티는 최후의 장 <에필로그>에 가서야 문득 길고 긴 상념에서 깨어난 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재 하나의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생산에 대한 신앙, 즉 증식에 대한 근대의 열망이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국민은 잇달아 그것에 굴복하고 있다. 이 생산 증가의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는,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결핍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면 할수록 더 많은 소비자를 필요로 한다. (…) 비록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기업은 모든 영혼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세계 종교들과 비슷하다. (616쪽)

오늘날에는 단 한 사람이, 그의 조상들의 모든 세대가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인간을 단번에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이토록 엄청나게 급성장해 있는 살아남는 자를 다루는 방법이 도대체 있는가의 여부가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현대 생활의 전문화 및 유동성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갖는 단순함과 긴박함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619~620쪽)

기업(시장)의 권력과 군중의 관계, 그리고 '전문가주의' 때문에 더욱 매개성이 강해진 현대 정치에 대한 예리한 논변이라 하겠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하다. '살아남음'론은 상당히 다의적으로 느껴진다. 카네티의 책은 전쟁과 학살 같은 어떤 궁극의 순간들에 꺼내 봐야할 묵시록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권력이라는 정신병 또는 권력자-신경증자 분석의 필요

그럼에도 그의 통찰은 권력과 군중의 역동(dynamics)에 대한 '다른 인식'을 제공해준다. 카네티의 정치학은 영미식 정당론이나 대의제론들은 결코 다루지 않을 주제와 문체로, 원초적인 도덕 감정과 무의식의 힘으로 행해지는 정치 행위의 심층을 사유하게 한다.

그래서 이번에 이 책을 재독할 때,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보아왔던 또한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정치 권력과 그 담당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의 정치사 또한 '죽음/살아남음'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전개되어 왔다. 그 속에는 학살과 전쟁, 그리고 쉼 없는 '예외 상태'가 개재되어 있다.

그 경험들은 어떤 정치적 (무)의식으로 작용해왔던가? 수없이 많은 의문들이 새삼 다시 떠오른다. '업적'이 아니라 죽음이 그들의 권력과 그들이 운영했던 국가성(stateness)을 재고하게 한다. 왜 4·19의 군중은 학살자 이승만을 살려줄 수밖에 없었는가? 누구보다 '살아남은 자'의 개념에 잘 들어맞는 절대 권력자 박정희는 왜 그런 식으로 부하에게 총살당했는가? 등등.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군중'. '살아남음'과 '죽음'이라는 모티프로 정치를 생각한다면 당분간 그들을 피해가기 어렵다. 하다못해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기도 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정부에 대해 사람들이 품는 의혹은 일종의 멸시로 변하는 경우도 흔히 있는데, 이것은 비밀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 독재에 부수되는 위엄의 대부분은 비밀의 집중된 힘이 있기 때문에 생긴다.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비밀이 여러 사람들에게 분산되어 그 힘이 약화된다." (397쪽)

카네티에 의하면 권력의 깊은 핵심은 비밀이다. 권력은 그 내면을 간파당해서는 안되기에, 권력자는 과묵해야 되고 그 신조나 의도는 아무도 몰라야 한다. 권력자는 과대한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밀이 많고 타인들이 서로 감시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밀을 체계화시킨다. 많은 '국민'을 살해한 1960~80년대의 절대 권력은 수없이 많은 의문사와 의혹 사건들을 저질렀다. 반면 '민주정부'는 '진실규명위원회'를 만들어 많은 사건을 다시 조사하고 재심의해야 했다. 이야말로 '민주정부'의 '업적'이었다.

도대체 '민주정부'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스스로 '대통령 못 해 먹겠다'던 식의 솔직함으로 '권위'를 해체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권력'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였다. 아마도 이전까지의 권력과는 판이한 권력이 되기 위해서 '민주정부'는 배전의 노력을 기울인 듯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자기 해체와 중증 신경증 환자들의 집요한 공격적 선동이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권력인 언론 재벌이 이리 저리 휩쓸어 몰고 다니는 인간 무리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군중' 개념에 잘 맞는 존재들이다. 왜 '민주정부'는 자신의 역능을 탈취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단지 신문(언어)의 '프레임'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 카네티의 가르침일 것이다.

물론 반격도 있었다. 카네티의 말대로 "살아남는 순간은 권력의 순간이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서 가장 저급한 형식은 살해이다." 아쉽게도 카네티가 자살의 권능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를 펼치지는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살아남음'이 아니라 '죽음'의 힘을 통해 '살아남음'을 이룬 드문 경우이다.

평범 이하 수준의 권력인 현 정권이 끝내 그 죽음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물론 그들도 만만치 않다. 그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길들이기 위한 가장 세련되고 문명화된 수단'이나, 전쟁과 학살에서 살아남아본 세력의 후원도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한부이다.

민주주의는 궁극의 순간들의 기폭장치를 서서히 풀어 해체하고, 죽임과 주검들 사이에서 일어선 광인이 권력을 갖지 않게끔 죽임과 죽음의 미혹을 이성의 힘으로써 조절하는 것일 테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이 땅은 조짐은 꽤 불길하게 느껴진다.

가장 원초적인 힘을 가진 권력의 부족들-슈레버보다 더 지독한 신경증에 시달리는 법복 무리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수단으로든 권력 세습을 강행하는 이런저런 씨족들, 그리고 죽임이 왜 가장 천박한 수단인지조차 이해 못하는 백치 같은 권력자 무리들이 발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한국에서의 '권력-정신병'의 역사를, 또한 '권력자-신경증 환자'의 증상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거기에는 병이 어떻게 군중의 힘으로 "방전(放電)"되거나 전위(轉位)되는지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는 문화학이나 정치학의 새로운 (그러나 오래된) 숙제겠다. 너무 정신분석주의적인 결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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