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사석에서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화제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박현채의 계승자는 누구인가?" 몇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던 참에 (나는 몇 가지 전제를 달고 '장하준'이라고 답했었다) 동석하던 한 경제학자가 이렇게 답했다.

"박현채의 문제의식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지식인이라면 박승옥이 아닐까?"

물론 박승옥은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는 당시 박현채의 제자들을 닦달해 '고 박현채 10주기 추모집·전집 발간위원회'를 꾸려서 한창 <박현채 전집>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이 <박현채 전집>은 지난 2006년 한 작은 출판사에서 일곱 권으로 묶여져 나왔다. 박현채의 계승자로 박승옥을 지목했던 그 경제학자는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상식 : 대한민국 망한다>(박승옥 지음, 해밀 펴냄). ⓒ해밀
최근에 박승옥이 지난 10년간의 고민과 실천을 갈무리한 <상식 : 대한민국 망한다>(해밀 펴냄)를 펴냈다. 이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천천히 읽으면서 나는 "박현채의 진짜 계승자는 박승옥"이라는 그 경제학자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승옥이 바쁜 중에도 박현채의 유산을 정리하는데 혼신의 에너지를 쏟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박현채(1934~1995년)는 누구인가? 그의 이름이 생소한 독자라면 10대에 빨치산 활동을 하다 잡히고 나서 "역사 속에서 투쟁하겠다"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소년 전사 조원제를 떠올리자. 광주서중 3학년 때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살아남은 박현채는 이 조원제의 실제 모델이다.

박현채는 조원제의 다짐처럼 평생을 노동자·서민의 편에 선 '실천적' 경제학자로 살았다. 그의 평생의 고민과 실천을 모은 책이 바로 1978년 '박정희식 근대화'를 비판하며 나온 <민족경제론>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민중의 삶이 나아지려면 경제학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았다.

박현채는 재벌에게 외국 자본을 유치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면서 경제 성장을 유도하는 박정희 정권의 방식으로는 노동자, 농민과 같은 대다수 서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외국 자본에 대한 한국 경제의 종속만 심해지리라고 보았다. 박현채는 보통 사람의 삶이 나아지는 '자립' 경제의 틀을 구상했다.

세계화의 시대에 박현채의 이런 문제의식은 경제학계 내에서는 보수, 진보할 것 없이 찬밥신세다. 하지만 박승옥은 다르다. 그의 <상식>을 꿰뚫는 열쇳말이 바로 '자립'이기 때문이다. 먹을거리, 에너지 등 삶의 모든 면에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따져 묻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는 박현채를 넘어선다.

박승옥이 특히 먹을거리와 에너지를 자립의 핵심 조건으로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화수분처럼 여기는 그 둘을 둘러싼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우선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특히 화석연료의 공급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빠르면 수년, 늦어도 20~30년 내에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연료의 공급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리라고 여긴다. 이런 경고가 현실화된다면 석유의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에서 들여오는 한국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런 에너지 위기는 곧바로 먹을거리 위기로 이어진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지금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태워가면서 이동한 먹을거리에 의존한다. 고작 25% 안팎에 불과한 한국의 식량 자급률은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쌀을 제외한 먹을거리의 자급률은 고작 5%에 불과하다.)

만약 에너지 공급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런 식의 먹을거리 공급 상태는 유지될 수 없다. 소련으로부터 싼값에 들여오던 석유가 끊기자, 도시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속출한 1990년대 초반의 쿠바의 모습을 기억하자. 당시 쿠바 외곽의 농촌 창고에서는 기름이 없어서 도시로 옮기지 못한 먹을거리가 썩고 있었다.

박승옥이 간략하게 언급하는 지구 온난화가 초래하는 기후 변화도 먹을거리와 에너지를 둘러싼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당장 식량 생산 급감과 같은 기후 변화의 부정적인 양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또 이런 상황이 인류의 눈앞에 펼쳐지면 탈(脫)석유 시대를 앞서 준비해온 제1세계를 중심으로 화석연료 규제에 나설 게 뻔하다.

박승옥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 등 서민이 살 길은 자립을 도모하는 것이며, 그 자립은 먹을거리, 에너지를 포함한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런 자립의 수단으로 박현채가 주목했던 중소기업 대신 공동체에 기반을 둔 협동조합에 주목한다.

박현채(중소기업)와 박승옥(협동조합)의 차이는 약 30년에 걸친 시간차를 염두에 두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박현채가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공업에 기반을 둔 (내발적) '근대화'를 꾀했다면, 박승옥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적용이 가능한 협동조합이 주도하는 '탈근대화'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승옥은 수년간 시민들이 주도해 태양 에너지를 보급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공동체에 기반을 둔 장례 문화를 협동조합을 통해서 모색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 정도면 독자에게 "책상물림의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나 자신부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라고 권고할 자격이 충분한 저자다.

박승옥의 <상식>을 읽는 한국의 독자는 자신의 '상식'에 반하는 이 책의 내용에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당혹감을 느낀 많은 이들이 함부로 그에게 '몽상가'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갖가지 대안은 이미 전 세계 곳곳에서 '몽상'이 아닌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만 예를 들자. (G20이 아닌) G7 국가인 이탈리아의 볼로냐는 유럽연합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5개 지역에 속한다. 이 볼로냐에만 4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있다. 볼로냐가 속한 주는 경제 활동의 약 3분의 1이 협동조합에서 이뤄지는데,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의 타격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협동조합에 기반을 둔 자립 경제는 이렇게 '현실'이다.

박승옥의 구상도 박현채의 그것처럼 꿈으로 끝날까? 100년도 더 전에 그와 비슷한 이상을 펼쳤던 윌리엄 모리스는 한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 대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꿈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에코토피아 뉴스>(박홍규 옮김, 필맥 펴냄))

장담하건대, 박승옥이 본 대로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다면 '대한민국은 산다.'


함께 읽기

최근에 이탈리아 볼로냐의 협동조합을 현장 취재해 소개한 책이 한 권 나왔다. 협동조합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은 박승옥의 <상식>에 덧붙여 이 책을 읽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협동조합 도시 볼로냐를 가다 : 약부터 집까지 협동조합에서 산다>(김태열·김현경·우미숙·전홍규 지음, 그물코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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