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철의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문학동네 펴냄)은 불편한 감정의 동요 없이 담담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인 한편, 읽는 내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와 <구구는 고양이다>, 하루키, 김영하, 은희경의 인물들, 또 교양(성장) 소설을 일컬어 근대의 "상징 형식"이라고 한 프랑코 모레티의 소설론까지.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은 성장 소설이면서 성장 소설이 아니었고, '쿨'하지만 냉소적이지는 않은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기존 영화의 모티프를 그대로 차용하는 듯하면서 다른 길을 갔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이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일지도 모르겠다.
기왕의 것들을 적당히 '브리콜라주(bricolage)'하여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재능은 어느 날 찾아온, "장동건을 닮은 아주 잘생긴 고양이"에게 '사라다 햄버튼'이란 이름을 부여한 이 소설의 명명법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고양이는 '나'가 '울버햄튼'의 축구 경기를 보고 있을 때 아파트 베란다를 기웃거리며 들어와 '나'가 먹고 있던 '샐러드'를 "게걸스러워 보일 정도로 맛있게 먹어치웠다."
이렇게 해서 샐러드와 울버햄튼의 우리말 구어체식 합성어인 '사라다 햄버튼'이 탄생하게 되었다. 세련돼 보이면서 약간의 호기심까지 자극하는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이라는 제목과 그에 걸맞는 도도하고 우아한 고양이의 등장은 이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 실연 이후 백수가 된 '나'의 좌절과 불안을 각종 문화적 코드들로 드러낸/가려놓은 소설이 바로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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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김유철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방사선사였던 '나'는 부모님의 이혼 이후 어머니와 생활해 오다 2년 전 어머니마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 혼자가 되었다. 그러다 첫사랑이었던 S를 만나 1년 반에 걸쳐 동거를 하던 중 갑작스레 이별을 고한 S가 자카르타로 떠나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이혼 하고 나서 캐나다로 떠났던 새아버지와 '사라다 햄버튼'이 찾아와 '나'의 상처를 보듬어 준다. 또 가끔 찾아가던 '달러웨이'의 아르바이트생 R도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준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거쳐 '나'는 '사라다 햄버튼'을 전 주인에게 돌려주고 '결국' 혼자가 된다. 새아버지는 아내 나타샤와 갓 태어난 딸이 있는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고 R은 청혼한 일본인 교수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갈 것이므로 '나'는 결국 혼자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떠나간 S와 R의 할머니는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이고, 항상 고독과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을 남겼는지도.
하지만 이 소설의 인물들이 '절대 고독'에 빠지는 일은 없다. 특히 '나'에게는 어머니와 S가 떠나간 뒤에도 새아버지와 R, 홀연히 나타난 친아버지와 고양이탐정까지 우호적이고 능력 있는 조력자들이 함께 한다. 이 소설을 성장 소설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조력자가 필요한 삶에서 조력자 없이도 가능한 삶으로의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조력자가 없이도 가능한 삶이란 관계가 없는 삶이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관계가 가능한 삶을 말한다. 조력자-피조력자의 관계가 아니라 단독자와 단독자의 관계로서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하는 삶. 하여 S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음이 암시되는 PK에게 '사라다 햄버튼'을 되돌려주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타인을 단독자로 인정함으로써 나 또한 단독자로 서겠다는, "절망하는 쪽보단 새롭게 시작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으므로.
그러나 여기에는 프랑코 모레티가 지적한 근대적 젊음의 특정한 이미지, 즉 이동성(mobility)과 내적인 불안정성(interiority)이 빠져있다. 물론 '나'는 자발적 실업자가 됨으로써 유동적인 미래를 갖게 되었고 실연과 실업을 동시에 겪고 있는 '나'의 심리 또한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탈)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이동성과 내면성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실제 현실은 자본의 지나친 유동성으로 인해 비정규직 종사자와 실업자가 넘쳐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젊은이들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지만, 소설 속 '나'는 부모님이 물려준 20평대의 아파트에 목수로 성공한 새아버지와 디자인 회사의 사장으로 나타난 친아버지가 있으며 쉽지는 않겠지만 방사선사로서 재취업의 가능성 또한 높은 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좌절과 불안에 동의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R은 "오빨 보고 있으면 정말 세상살이의 근심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니까요"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R이야말로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장 달리웨이로 출근해 새벽 두시까지 일을 하고도 또 아침이 올 때까지 기말고사와 일본어능력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이 시대 '88만 원 세대'를 대변할 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 겪고 있는 좌절과 불안은 신자유주의의 횡행과 자본의 급격한 변동 속에 살고 있는 청년 실업자의 그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청춘의 아픔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이 착하고 따뜻한 인물들에 의해 동화적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를 비롯한 소설 속 인물들은 계급적 상승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세계와 갈등하지 않는다. '나'는 우호적인 시선 속에서 미래를 향해 한 발 내딛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이, 아픔이, 절망이 결국 너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는 진부한 경구는 어린 아이에게나 필요한 조언이다. '나' 스스로도 이렇게 고백한다.
"난 어쩌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그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어느 미래학자의 말을 들먹이며 "적어도 미래가 암울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거죠"라고 말한다. 청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고 순진한 미래관이지만, 적어도 '88만 원 세대'의 소망 정도는 될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은 이 세대의 것이 아니므로, 적어도 암울하지 않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찾고자 하는 이 시대 청년의 소박한 희망.
이렇게 보면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이 동화가 된 것은 '나'의 삶이 안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이 시대가 변화를 꿈꿀 수 없을 만큼 닫혀 있기 때문이다. '성장'할 수 없는 세대에게 필요한 성장기는 "적어도 미래가 암울하지 않다"는 위로이며 불안을 제쳐두고 순간의 고독을 즐길만한 한 줌의 '자유'이다. '나'와 '사라다 햄버튼'이 보내는 고독하고도 우아한 한 철이 '성장'없는 세대의 성장기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정적인 직장도, 계급적인 상승도, 낭만적인 사랑도 가능하지 않은 세대에게 고독하고도 우아한 고양이는 일종의 '로망'일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사라다 햄버튼'처럼, 그 고양이의 주인인 '나'처럼 고독하고 우아하게 살아가겠다, 아니 살아가고 싶다는 '로망'. 고양이가 등장하는 여느 소설이나 영화가 고양이의 날카로운 응시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면 <사라다 햄버튼의 겨울>은 독자가 고양이를 응시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독서를 편안하게 해준다.
'사라다 햄버튼'과 그 주인이 된 '나'는 이 시대 청년의 나르시시즘적 응시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IMF 이후 최고의 실업률" 운운하며 적당히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나'의 실연과 실업을 적당히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만들고 오히려 그 시간적 여유를 활용하여 독자가 즐기지 못하는 우아한 고독을 간접 체험하도록 만든다.
그들의 우아한 고독은 물론 적당히 낯익은 것들로 채워져서 즐기기에 편안하다. 하지만 소설이 독자를 편안하게만 놔두거나 독자 또한 즐기기에 편안한 소설만 찾는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성장'은 결국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