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크리스토프 사를은 <공간적 사회적 위치 : 19세기말 문학장의 사회적 지리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수도 파리 내부의 사회적 격차에 의한 차별적인 공간 점유와 문학장에서의 위치에 따른 주거지 관계를 고찰한 바 있다.

당시 파리는 부르주아지의 주거지인 파리 중심·서쪽/서민 계급이 사는 파리 주변부와 북부로 특징지어지는데, 전반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작가들은 파리 서쪽에, 가난한 작가들은 대부분 파리 북부나 라틴 구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분석함으로써, 글쓰기라는 내면적이자 존재론적 경험이 어떻게 그들의 생활 양식과 관계 맺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파리 서부 거주자들인 부르주아 작가들은 대개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인거나 성공을 거둔 작가들, 대부분 대학 종사자들이었던 심리주의 소설가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지방 출신들이 대개 당시 돈과 무관한 아방가르드 시인, 통속극 작가, 자연주의 소설가였다는 것은 작가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형편이 어떻게 문학적 지향성이나 당파성을 좌우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를 지금의 한국에 적용해본다면? 일산에 밀집해 있는 작가군과 홍대 근처를 중심으로 한 작가군, 그리고 수도권 외곽과 지방 거주 지역의 작가들의 문학적 성향과 수입을 비교해보면 주거지와 한국 문학 지형도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한 가설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논외로 하고, 분명한 것 중 하나는 강남에 거주하는 작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작가들이 강남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문학이 부와 크게 인연이 없다는 말일 게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왜 문학과 거리가 먼가? 그들에게는 내면이란 없는 것일까, 혹은 상처가 없다는 것일까, 문학 예술에 흥미가 없다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존재론적 상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있고 심지어 그런 글쓰기를 했다 하더라도 이를 생업으로 발전시키지 않았거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 이는 작가, 예술가 집단이 어떻게 과거 귀족의 후원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획득하고, 부르주아와 서민 대중들을 새로운 패트론으로 설정하면서 또 어떻게 상업화되어갔는가라는 또 하나의 묵직한 문학사회학을 요구할 터이나, 각설하고.


▲ <오렌지 리퍼블릭>(노희준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노희준은 강남 출신의 작가이고 <오렌지 리퍼블릭>(자음과모음 펴냄)은 그러한 자전적 사실에서 길어 올린 강남 오렌지족들의 삶과 풍속에 대한 기록이다. 주인공 노준우의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입학까지를 그렸으니 성장 서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우리가 읽어왔던 성장 소설과는 차원이 다르다. 어른과의 단절, 가정 불화, 제도 교육과의 갈등, 첫사랑, 우정, 성, 죽음 등 성장 서사의 키워드는 공통되지만, 이들을 채우는 '세트'와 '소도구'들은 낯설어서,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강북 출신인 필자의 관점일 수도 있을 터이나, 어쨌든 이 강남 오렌지족들의 성장 서사는 <회색노트>로 상징되는 교환 일기나,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자율학습 땡땡이, 하루 동안의 가출 등 1980년대의 평범한 강북 청소년들의 반항 소품과는 이질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또 하나 이 작품은 청소년기의 방황을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 방황을 거쳐 인물들이 성숙한 주체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성장 소설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는 랭보의 말마따나 이들에게도 그들만의 상처가 있고, 작가 노희준은 그 상처의 속살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펼쳐놓는다.

주인공 노준우의 왕따 진입은 이렇게 출발한다.

"아시안 게임이 끝나자마자 강남의 중학교에는 순식간에 나이키 물결이 밀어닥쳤다. 나이키는 바라지도 않았다. 퓨마나 프로스펙스도 바라지 않았다. 월드컵이나 까발로 정도만 돼도 황송했다. 나는 기차표를 신고 있었다."

나이키를 신지 못해 왕따를 당해야했던 중학생은 한국 정치, 경제, 법조계의 거물들을 낳았던 명문 X고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만의 '신분 계급' 질서 속에서 자신의 초라한 위치를 발견한다. 1980년대 개발 붐에 의해 형성된 강남의 계층 구조란 작가에 의하면 이렇게 나누어진다.

"재래종인 감귤, 개발 전부터 살던 원주민이거나 개발 초기에 집값이 싸다는 이유로 들어온 사람들로, 운이 좋은 편이기는 했으나 부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신흥 귀족을 형성한 것은 1980년대 유입된 외래종으로 그들 중 일부가 이후 '오렌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온 '탱자'가 있었다. 강남에 살지만 온몸으로 강북인 애들. 자연산 토종이지만 재배종은 아닌 경우."

감귤 노준우는 오렌지족들에 의해 '이름 없는 애'로 취급당하다가, 비상한 전술과 음모로 오렌지족의 비행을 은폐시키고 해결해 준 대가로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학년 캡인 짐승과 입술, 외교관 아들 성빈, 킹카 하진, 국회위원 병신 등으로 이루어진 이들 그룹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부와 권력을 향락하지만 그는 곧 그들의 실체를 목격하게 된다.

카페에서 만난 여자들을 꼬셔 여관에서 스트립 포커를 치고 집단 강간하는 성빈과 입술의 야만성과 폭력성. 감귤 노준우는 이들을 배제시키고 킹카 하진, 조폭 아들 세한, I여대 1학년 퀸카인 예은과 성북동 저택의 재벌 딸 신아를 구성원으로 하여 'un'(그 무엇도 '아닌', 하지만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은'이라는 의미)이라는 모임을 형성하고 그 수장이 된다. '소수 정예의 부르주아 공산당'으로 규정한 'un'은 3대 강령으로 '모든 것을 공유하는 공산주의, 모든 인간과 모든 가치가 평등하는 평등주의, 속물들의 사회에 구체적으로 저항한다는 실천주의'를 내세우고 강남 유흥가 일대를 돌며 활약한다. 그들의 활약이란 여장하고 백화점 돌기, 메이커 옷이 아닌 양아치, 빠순이 복장을 하고 나이트에서 놀기 등인데, 결국 이들의 놀이는 이태원 외국인 클럽에서의 끔찍한 성폭력으로 일단락된다.

이러한 오렌지족의 유희적, 극단적 행동주의의 한 편에는 연인 관계인 노준우와 신아가 서로 다른 이성들을 만나 자는 '하룻밤 서기(onenight stand)' 경쟁, 예은을 하진과 준우가 공유하는 위악적 사랑 놀음이 들어있는데, 결국 세한의 죽음을 핑계로 댄 이들의 끝 모를 자학, 가학적 행위는 부산에서의 레이스에서 끝나고 이들은 독일 음악학교와 대학교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작가는 이들 오렌지족들의 화려한 복장, 술과 나이트, 난잡한 성행위 이면에 있는 이들의 상처를 들춰내 보여주기도 한다. 노준우의 애인인 신아는 재벌 딸이지만 아버지가 어린 여자만을 밝히는 유아 성애자이고, 킹카 하진은 재벌 2세의 첩인 어머니를 둔 데다가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다섯 번의 성형 수술을 받아야 했고, 조폭 아들인 세한은 새엄마를 아버지와 공유하고, 병신의 아버지인 국회위원은 정치 비리인이고, 예은은 재력가의 현지처이고 등등.

그러나 이들이 결성한 'un'의 위악적 행위가 향락이 이들의 상처를 구원해줄 것인가? 작가가 밝히고 있듯, 결국 'un'은 이들 가정환경의 상처보다 더 끔찍한 내면적 상처를 만들어준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이들의 일탈과 반항이 결국, 나이키를 신지 못한 노준우의 '상처'와 흡사한 인식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맨몸으로 모든 걸 갖고 태어난 놈들을 이겨보"기 위해 오렌지족에 합류한 노준우가 그들의 부에 기생하면서 한껏 그들을 조롱했듯, 이들의 강남 속물에의 반항은 진지한 의미에서의 퇴폐라 할 것도 없는, 지극히 속물스러운 것이다.

쇼윈도가 되어버린 압구정동의 맥도날드 2층의 통유리, 거리와 나이트클럽, 술집의 모든 시선들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무심을 쏘아주는 우아함, '자기만족을 위해 꾸민다는 말은 타인의 시선들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본다는 뜻'을 알아버린 주인공 노준우의 깨달음처럼 이들의 청춘의 방황과 탕진은 자신이 아닌 온전히 '타인 지향형'에 바쳐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방황은 극단적이지만 치열하지 않고, 충격적이지만 감동이 없다.

주인공 노준우가 대학에 입학해서 운동권에 저항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소비 지향적인 삶과 전체주의에 요요마, <마의 산>, <적과 흑>, <옥중 수고> 식의 교양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운동권이냐 오렌지족이냐, 혹은 리바이스 501 버튼 플라이냐 요요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행동과 사고가 타인에 대한 반응에서부터 작동한다는 것, 타인의 방식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결국, 그 자장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인정욕구에 의한 반항과 모방은 텅 빈 실체이자 허울뿐인 '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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