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류는 전에 없던 역사적 경험을 하고 있다. 세계 사상 초유의 전 지구적 대립 전선이 등장한 것이다. 누구는 이것을 두고 '세계 정부 대 세계 민중'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고까지 이야기한다. 다름 아니라 <위키리크스> 이야기다.

줄리언 어산지는 이제 미국에게 김정일, 카스트로보다 더 성가신 인물이 되었고, <위키리크스>의 작전 행동은 알 카에다보다 효율적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비교 자체가 사실은 어불성설이다. 어산지가 암살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위키리크스>가 사이트 폐쇄 압력 따위에 굴하지 않는 것은 그들 뒤에 인터넷으로 무장한 세계 시민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드디어 정치적 실체로서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놀라운 '사건'을 바라보면서 누구보다 먼저 이탈리아 출신 정치사상가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름은 안토니오 네그리. 어산지가 열국(列國)의 대적이 되기 훨씬 전인 1970년대 말에 이미 그의 조국에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수인(囚人) 신세가 되었던 인물이다.

1999년 11월 '시애틀의 전투'와 함께 신자유주의 지구화 반대 운동이 막 수면에서 떠오르던 무렵, 네그리는 미국 학자 마이클 하트와 함께 <제국>(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이라는 책을 내놓았었다. 이 책은 지금 인류가, 새로 등장하는 전 지구적 제국과 이에 맞선 대항-제국의 서사시 한 가운데에 서 있다고 단언했다.

이것은 바로 <위키리크스> 사건이 열어놓은 대립 전선 그것이 아닌가! 요즘 언론을 접하면서 '네그리'라는 이름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국>보다 쉬운, <제국> 길라잡이


▲ <네그리의 제국 강의>(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서창현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하지만 <제국>은 읽기 녹록한 책이 아니다. 네그리와 하트도 유럽 철학의 후예인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번잡한 철학 개념과 과도한 문학적 수사, 서양 고전 인용으로 넘쳐나는 글쓰기를 한다. 더구나 우리는 그들의 인도·유럽 어족 계열 언어를 한국어로 (억지로) 바꾸어 접해야 한다. 그러니 <제국>과 같은 책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이 땅의 독서인에게 부끄럼이 될 수는 없다.

이런 참에 최근 <네그리의 제국 강의>(서창현 옮김, 갈무리 펴냄, <제국 강의>)라는 책이 나왔다. 네그리 본인이 <제국>의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유럽과 아메리카 대륙뿐만 아니라 중국까지)에서 강의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다.

각각의 강의는 주제가 조금씩 다르다. 어떤 강의는 <제국>의 주장 중 철학적인 데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강의는 미학이 관심사다. 또 어떤 강의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제국>의 명제들을 재음미하는 데 반해 또 다른 강의는 유럽연합(EU) 헌법 문제와 <제국>의 전망을 중첩시킨다. 아무튼 36개에 달하는 강의를 일관하는 것은 <제국>의 그림자다.

여전히, 쉽지는 않다. 어떤 강의는 <제국> 자체보다 더 어렵게 읽힌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제국>의 해설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아무래도 청중을 마주하고 입말로 풀어내는 강의라서 그런지, 네그리는 이 책에서 참으로 친절하게 <제국>의 명제들을 설명한다. 낯선 개념들의 뿌리가 무엇인지, 그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여러 개념들이 서로 어떤 연관을 맺는지, 하나하나 짚어준다.

그래서 이 책을 <제국>을 읽기 전에 입문서로 먼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제1장 '제국과 그 너머'에 모인 14개의 강의가 그렇다. 여기에서 우리는 21세기 초 지구 사회를 바라보는 네그리의 시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동시대 역사와의 끈질긴 대결의 성과 : '제국'과 '다중'

이 책에서 네그리는 이제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인류의 미래를 밝힐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그는 미국 등의 몇몇 주도적 국민국가들을 부각시키는 제국주의론을 더 이상 주된 이론 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이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전 지구적 제국 건설의 경향이다. 제국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공존하는 '혼합된 구성'체다. 미국의 군사적, 화폐적, 문화적 헤게모니(군주정)가 전 지구적 금융 체제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다국적 기업들의 공동 통치(귀족정)와 함께 하며 서로 얽혀든다.

이 지구 질서의 '바깥'은 이제 없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과거와 같은 국민국가 단위의 투표나 노사 교섭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도 없고, 진보적이지도 않다.

제국의 정치는 '삶정치'다. 노동자가 공장의 생산 과정 안에서 자본에 지배당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을 쓸 당시의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다. 이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민중이, 생산 과정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자본의 지배에 종속된다. 사회의 모든 잠재력이 자본의 전 사회적인 '삶권력' 안에 포섭된다. 정치의 이 일반화된 지평을 네그리는 '삶정치'라 이름 붙인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것은 더 이상 비관적일 수 없는 디스토피아가 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나 미셸 푸코의 어떤 저작에서 마주치는 것과 같은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그러나 네그리는 마르크스 사상의 특정한 측면을 충실히 계승한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죽은 노동'의 무시무시한 지배력이 사실은 '산 노동'의 잠재력이 거꾸로 선 것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이 대오각성 덕분에 더 할 나위 없던 비관론은 불굴의 낙관론으로 뒤바뀐다. 현실의 엄혹함은 오히려 이 엄혹함을 극복할 주체의 역량을 입증하는 지표가 된다.

네그리는 삶정치가 등장하고 제국이 출현한 것 자체가 자본이 그 적대자들의 성장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공장 안에서 노동의 저항이 분출하니까 자본의 지배를 사회 전체로 분산시켜야만 했고 그래서 삶정치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삶권력에 맞설 주체들의 성장을 낳았다. 이 주체들이 바로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하는 대항-제국, 즉 '다중'이다. 네그리는 다시 한 번 주장한다. 제국이 먼저 있고 대항-제국이 거기에 맞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역이다. 다중의 성장 때문에 국민국가를 넘어선 제국이 건설되고 있는 것이다.

다중은 과거 공장 노동자와는 달리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비물질 노동'의 그물망에 참여한다. 이것이 이들의 초개인적인 역량, 네그리 식으로 말해 '포텐차(potenza)'의 기반이다. 이러한 포텐차에 맞서 비물질 노동을 착취하려는 것이 곧 작금의 전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라는 게 네그리의 주장이다.

이러한 네그리의 사상은 그 뿌리가 깊다. 그는 1960년대에 케인스주의적 자본주의가 막 위기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그 위기를 끈질기게 추적해나갔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처음 등장하던 1970년대에는 당시 자본주의의 위기가 포드주의적 대중 노동자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했다. 1980년대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과거와 다른 지적이고 사회적인 노동자들의 성장에 맞서려는 자본의 자기 변신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네그리의 '제국-다중' 이론은 한 사상가의 생애 전체를 일관하는 강인한 사색의 성과물이다. 그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동시대 역사에 대한 성실하고 용기 있는 대결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이론과 그 사상적 여정을 적절히 버무려 이야기를 풀어내는 <네그리의 제국 강의>는 <제국>보다도 더 강하게 이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남는 의문들 : 금융 자본주의, 국민국가…

그러나 '제국-다중' 이론의 모든 주장에 다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특히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변모를 노동 혹은 다중의 성장에 맞선 자본의 대응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 아닌지 의문을 느낀다. 과거 케인스주의적 자본주의의 동요에 대한 네그리의 설명도 그러했고,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격동에 대한 분석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이것은 분석이라기보다는 거창한 철학적 전제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실제로 자본-노동 관계의 변화는 자본주의의 형태 변화에 중요한 요인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의 등장을 이것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새로운 저항에 맞선 대응이면서 동시에 자본 자체의 필요에 따른 거대한 전환은 아니었던가? 금융화의 이면에는 자본의 피할 수 없는 자체 진화의 논리가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은 계급 투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분석 과제는 아닐까?

이런 한계 때문에 네그리의 지구적 금융 자본주의 비판은 전반적으로 미완성작의 느낌을 준다. 지구 금융 질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자본 분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 대신 '군주정', '귀족정' 따위의 현란한 비유만 가득하다. 그래서 이들 자본 세력과 민중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 역시 기대하기 힘들다. '제국-다중'의 거대 서사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다.

국민국가에 대한 접근에서도 미래학적 예단이 구체적 분석을 대신한다. 네그리는 지금이 '국민국가의 사멸과 제국의 정초 사이의 공위(空位)기'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화 경향이 결국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내비친다. 그래서 국민국가는 더 이상 거대 자본에 맞선 민중 투쟁의 주된 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전 지구적 시민권을 요구하며 초-국민국가적 수준에서 제헌 국면을 여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현실에서 유럽 통합이나 라틴아메리카 통합에 대한 긍정론으로 이어진다. <네그리의 제국 강의>의 제2부 '유럽 : 투쟁을 위한 기회'는 유럽 통합을 대항-제국 형성의 중요한 계기로 바라보는 강의들로 채워져 있다. 네그리는 2005년 유럽 헌법안 국민투표 때도 다른 급진 좌파 사상가들이 '반대' 운동에 합류한 것과 달리 '찬성' 입장에 가까웠다.

하나 네그리가 '다중'이라 부르는 우군의 대다수는 이 투표에서 '반대' 입장을 택했고, 유럽 헌법안은 부결됐다. 대중은 이미 존재하는 공화국의 주인됨을 확인하는 것을 미뤄둔 채 새로운 정치 무대를 찾아나서는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국민국가 내부의 투쟁은 여전히 중요했다. 그것은 새로운 초-국민국가적 정치 세계의 구축 방향을 결정지을 만큼의 중요성을 잃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거대한 문제 제기로 읽어야 할 <제국> 혹은 <제국 강의>

그렇다고 국민국가를 넘어선 정치 단위를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는 네그리의 주장을 가벼이 보자는 게 아니다. 이것은 보기 드문 혜안이다. 하지만 이 도전을 위해서도 우리는 국민국가와 지구 질서 사이의 여전한 변증법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역동적 관계에서 눈을 떼지 않을 때에만 오늘의 실천 지침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위키리크스>를 둘러싼 대립 전선에서 드러나듯, 네그리의 사상에는 분명 선지자의 예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사회과학 이론은 서로 다른 무엇이다.

요컨대 <제국> 혹은 <제국 강의>는 거대한 문제 제기로서 빛을 발하는 책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지난 100여 년간 변혁 세력에게 익숙했던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태에 대한 깊이 있고 예리한 문제 제기와 마주하게 된다.

하나 거기까지다. 네그리에게서 지침을 발견하려고 하지는 말자. 그것은 다른 이들의 또 다른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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