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우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잘 나가는 금융인 남편 덕분에 돈 아쉬운 줄 모르고 살고 있다. 아이들도 학비가 비싼 훌륭한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엘리트로 잘 자란다. 넓은 정원과 수영장까지 갖춘 안락한 저택, 여자가 손수 차린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는 남편과 아이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스위트홈을 꾸렸다고 자부하는 여자는, 자신이 왜 아프고 힘겨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도 여자의 증상에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었다.

1950~60년대 미국사회 중산층 주부들이 앓고 있었던 그 증상, 완벽하고 안락해 보이는 삶에 등장한, 이름도 모르고 이유도 알 수 없는 우울과 두통, 허무함. 여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기에 해결책도 구할 수 없었다. 베티 프리단은 명문 대학을 졸업한 동창생들을 인터뷰하면서 여자들의 우울이 말하고 있는 바를 알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신비화하고 오로지 이 역할로 여자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는 것, 즉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istique)'로 포장된 현모양처가 되느라 여자들은 오랫동안 앓아왔던 것이다.

50~6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나아졌을까? 남자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고등교육을 받고 직장에서의 차별도 많이 해소된 지금, 여자들은 과연 '여성의 신비'에서 벗어났을까? 레슬리 베네츠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베네츠는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1950년대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한다.


▲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레슬리 베네츠 지음, 고현숙 옮김, 웅진윙스 펴냄). ⓒ웅진윙스
1950년대는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해놓고, 산뜻한 화장에 주름장식 앞치마를 두른 채 차가운 마티니 한 잔을 들고 문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현모양처가 미덕인 시대"였다. 젊은 여성들은 스위트홈을 꿈꾸며 하버드 대학 로스쿨 졸업이라는 학력과 변호사라는 커리어를 뒤로 한 채, 1950년대의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한다. 자신이 손수 요리한 음식을 가장 좋아한다는 가족을 위해서 말이다.

이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신전통주의와 관련 있다. 사회는 여성들이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데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데 미온적이고, 언론은 여자가 가정을 '지키면서' 갖게 되는 여러 장점을 강조한다. 아이의 발육이 '정상적'이라는 그런 류의. 덕분에 2005년의 전업주부는 10년 전보다 120만 명이나 늘어났고, 집안일에 12시간 이상을 보내는 여성들의 수가 전후 베이비붐 세대보다 1970~80년대에 태어난 X세대에서 2배나 많다. 여성들은 대학 졸업장을 직업 경력을 갖는데 쓰지 않고, 강도 높은 육아 활동과 집안일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쓴다. 모든 에너지를 가정에 쏟아 자녀를 최고로 키우기 위해 '사커맘'(축구장을 따라다니면서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는 중산층 주부)이 되는 여성들을 두고, '신종 아내'라는 말까지 생겼다.

'신종 아내'들이 1950년대 현모양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발적인 '선택'으로서 전업주부의 삶을 설명한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가정을 지키는 사람으로서의 의무감을, '강요'나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선택'이라고 말한다. 보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싫어서, 혹은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서비스를 가족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유로 여자들은 직장을 버리고 가정에 안주한다. 그런 선택에 후회 없다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가정으로 '귀환'한 여성들에게 보수 언론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가정에 안주하는 것을 선택했고, 후회란 없다는데 다른 말이 무에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스위트홈의 환상은 깨지게 마련이고 남편에게 귀속시킨 삶을 선택한 대가는 언젠가 되돌려 받게 되어 있다. 세상 누구보다 활기차 보이는 전업주부들은 그 완벽한 모습 뒤에 좌절과 환멸, 걱정, 분노와 두려움이 범벅된, 이름붙일 수 없는 감정들에 휩싸이고 있다.

아이와 함께 있어주어야 좋은 엄마라 생각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지만, 끝없는 집안일과 존중받지 못한다는 자존감의 상처를 안고 산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전업주부로의 선택을 지지해주었던 남편은,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노골적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아내를 구박한다. 영원히 잘 나갈 것 같았던 남편이 실직한 후 겪게 된 경제적 어려움은 직장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도록 만든다.

이는 여성들이 '선택'이라는 말 속에 숨어있는 함정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베네츠는 말한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음에도, 여성들에게 결혼과 함께 퇴직을 강권하는 기업 문화는 여전하고, 여성들 스스로도 노동 시장에서 부딪치는 장애를 극복해 낼 만큼 투철하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업주부로의 '선택'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사회적 개인의 자발적 표현이 아니라, 여성을 아내나 어머니로 국한시키려는 사회적 분위기와, 자신의 운명을 남편에게 귀속시키는 것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는 여성들의 무지함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성을 노동 시장 밖으로 몰아내려는 체제와 그 체제에 도전하지 못하는 여성 개인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이유에 대해 베네츠는 "전업주부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선택이 가족에게 이로운 일이며 자신에게 최선인지 대부분의 여성이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면서 이는 "사회가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름을 내세워 자신의 이익보다는 가족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하도록 여성을 부추긴 탓"이라 설명한다. 전업주부의 삶에 안주한 여성들은, 영원히 남편이 자신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환상에 중독되어, 남편과 아내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책의 원제목인 '여자들의 오류(The Feminie Mistake)'이다. 수백만 달러를 벌고 있는 남편이 어느 날 아침 "사랑이 식었다"며 이혼을 선언하면서 빈털터리로 쫓겨나고, 가정의 재정 문제는 남편이 알아서 할 것이라 밀쳐두었다가 남편이 파산한 걸 뒤늦게야 알고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내들이 수도 없이 많건만, 여전히 여성들은 그런 일이 자기 삶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며 자신의 생계를 남편의 통제 하에 둔다. 이런 여성의 삶을, 숙주의 운명과 함께 하는 '기생충'의 삶이라고 저자는 주저 없이 말한다.

그렇다면 자기 삶의 통제권을 스스로 갖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베네츠는 몇 가지 도움말을 들려주는데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경제적 위험이 자신만은 피해갈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계획을 세울 것, 둘째, 경제적 자립을 통해 인생의 주인이 될 것. 셋째, 일을 중단했다면 다시 일을 찾기 위해 전략을 세우고 움직일 것. 넷째,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방법을 찾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꾸려나갈 것.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건 간에 엄마나 아내라는 역할이 아닌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나갈 것.

이 책의 한국 제목이기도 한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확고하게 답하고 있다. 여자에게 일은 생존이며 자립이고 자존감이며, 잠재력을 성취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고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다. 일하는 여성이 결혼 생활을 더 평등하게 만들어나가며 행복지수도 높고, 일하는 엄마를 둔 자녀들이 전업주부 엄마를 둔 아이들보다 사회성이 일찍 길러진다는 등, 저자가 책의 구석구석에서 강조하는 효과는 사실 부수적인 것이다. 일은 그 자체가 여성에게 사회적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부여해주며,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베네츠의 거침없는 충고는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디디려는 젊은 여성들이나, 가정과 직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여성이 행복해지기 위해 가정과 직장 중 하나의 영역에만 머무를 필요는 없으며,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능력 있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필요도 없다. 아이는 자라고 육아는 10년이면 족하니, 그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티고 견디면 된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나서 얼마나 힘든 상황에 직면하는지를 알고 하는 소리이기에 더욱 설득력 있다.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한 여성들은 육아 이후의 기나긴 삶 동안, 엄마의 손길이 그다지 필요치 않을 만큼 성장한 아이에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는 엄마 역할을 멈추게 해줄 다른 역할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직장 생활에서 어려움에 부딪힐 때 구질구질한 삶을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결혼을 감행한 여성들은, 스위트홈에 대한 질긴 환상을 부여안으며 스스로의 삶에 위안을 얻을 것이다. 이렇듯 무지와 무책임과 근거 없는 환상이 삶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여성들은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심정으로 자신의 생활을 세세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여성이 '여성의 신비'에 도전하고 여성을 둘러싼 편견과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일이, 온전히 여성 개인만의 책임으로 국한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대학 교육까지 받고, 삶의 통제권을 자신이 쥐고 있으며, 경제적 자립을 실현하는 '잘난 여성'이 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베네츠 자신이 잘 나가는 기자인데다 가정과 양육을 성공적으로 잘 해낸 인물이고, 인터뷰하는 많은 여성들이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리는 여성들이기에, 자칫 '일을 놓지 마라'는 저자의 조언은, 자아의 성취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평생 일해야 하는 여성들에게는 뻘쭘한 이야기일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기를 쓰고 전략을 세워도 경제적 자립을 성취하기에 너무나 열악한 조건에 처한 여성들도 많다. 사실 이 여성들에게 '일을 통해 독립을 성취하라'는 조언보다는, 그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는 싸움에 함께 하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또 한 가지, 이 책에 등장하는 '기생충의 삶'과 '찌르레기의 삶'의 대립 양상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지불 되지 않는 가사 노동을 수행하는 전업주부는 경제적으로 가장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기생충으로 비유되고, 아이를 자기 손으로 기르지 않고 남의 손에 맡긴다는 의미에서 직장 여성들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의 새가 키우도록 하는 찌르레기와 비유된다.

미국에서 전업주부와 직장 여성 간의 대립 양상과 찬반 논란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서로의 삶을 비하하여 빗대는 말로 쓰는 문구들이다. 직장 여성은 모든 것을 챙겨주는 전업 아내를 둔 직장 남성과 경쟁해야 하며, 이는 가장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면서 직장 여성의 노동 수행 과정을 힘들게 한다.

전업주부의 입장에서 직장 여성은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 있으며 경제적 풍족함을 누리면서 남편의 직업을 위협하는 존재로 와 닿는다. 그러나 전업주부와 직장 여성의 이 같은 대립은 남성 가장 이데올로기를 부각시켜 여성 내부의 차이를 조장하고 대립하게 하는 사회와 언론이 만들어놓은 대립각이지, 서로가 적대적인 이해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직업 여성이 남성의 보완물이 아니라 완전한 노동력으로 인정받으면서 노동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면, 모든 여성들의 노동은 평가 절하될 것이며, 언제든 노동 시장에서 여성을 퇴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업주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의 노동 또한 존중받지 못한다.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하여 그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여성 노동의 증가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이 책을 집필한 베네츠의 목적은 직장과 가정의 조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남편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여성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다. 이는 누군가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사회로 치닫고 있는 배경이 깔려 있다. 베네츠의 말대로 이제 부부 둘이 벌어도 번듯한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고, 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는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을 실직자로 만든다.

"여자라고 해서 육아를 이유로 그렇게 오랜 시간 당당하게 휴직할 권리는 없다"는 책 속 인물의 이야기처럼, 육아와 가사에 집중하는 시기에 자본주의적 노동이 면제되었던 여자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노동 시장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남자의 경제력으로 평생 가계를 꾸려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싱글 남성들의 80%는 돈 버는 아내를 원하고, 기혼 남성들 대부분은 가장 훌륭한 내조는 맞벌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성들이 사랑과 결혼 속에서도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질구질한 직장 생활에서 여자를 구원해 주고, 위험한 사회로부터 안전막이 되어줄 결혼이라는 환상이 깨어진 지 오래인데, 정작 여자들만 그것을 모르고 있다. 여성들은 안전을 찾아 결혼을 하지만, 그 안에서도 독립성의 온전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하는 무한 책임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냉혹함을 느끼고 사는 이라면, 일이 여성에게 생존이며 자립이라는 저자의 말을 더욱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신비화하는 '여성의 신비'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남편이 영원히 나를 책임질 것이라는 '여성의 실수'를 범하지 않을수록, 여자들은 무한 책임의 시대적 조류에 표류하지 않고 유영할 자유를 얻게 되리라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