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런 책이 나왔어?"

오랫동안 독설과 야유, 비난과 조롱의 대상으로 살아온 정치인들은 가능한 한 정치 관련 글을 피한다. 읽을수록 지치기 때문이다. 정치학자이자 출판인인 박상훈이 저술한 <정치의 발견>(폴리테이아 펴냄)을 읽고 나는 모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이 책은, 진보파에게 말을 걸고 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 혹은 진보적 사회운동에 청춘을 바쳤던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진출했다. 어떤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어 스타가 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권에 진출한 진보 진영은 분열되었고,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왜일까?

이 책은 먼저 진보적 진영과 진보적 정치인들의 반(反) 정치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하진 못한다. 대신 그들은 정치와 정당, 정치가를 욕하고 비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위력을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 <정치의 발견>(박상훈 지음,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정치, 정당, 정치가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나 야유가 사실은 민주주의를 향한 공격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저자는 묻는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온종일 저주의 언어를 퍼붓고, 나는 분노하였으므로 진보적이었노라고 자족만 한다면 우리는 과연 도움을 절실하게 바라는 국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정치 참여를 망설이다가 파시스트와 나치주의자들에게 정치 공간을 내어주었던 과거의 진보주의자들은 정말 민중들을 위했던 걸까?

저자는 또 진보 정치인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한다. 정치 세계에서 의도의 선함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결과에 대한 신중한 판단을 중시하는 책임 윤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선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잘못이 없으며, 나쁜 결과는 다른 사람 탓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알리바이용 정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 정치인은 남 탓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적 정치인에게 주는 또 다른 질문은 근본주의적 사고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가에 있다.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당신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면, 한진중공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체제에 모든 책임을 돌리고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진보적 가치는 당대에 증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17대 국회의원 시절, 저마다 개혁적 정치인을 자처하며 경쟁적으로 국회 기자실에 서서 목소리 높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정작 양극화 때문에 고통 받던 노동자, 농민의 삶의 현장을 얼마나 찾아갔던가? 그들의 삶은 나의 주장과 활동으로 개선되었는가? 언론에 보도된 것으로 만족하면서 후원자와의 술자리, 혹은 자기 정파의 회의를 더 중요시하지는 않았던가? 부끄러워진다.

대한민국의 진보 정치인들 중에 운동과 정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경향도 존재한다.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혁명적 조직관과 노선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고, 촛불 집회 같은 커다란 흐름과 만나면,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에 열광하기도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대의제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수가 더불어 사는 거대한 현대 사회에서 직접 민주주의란 불가능하며,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민주주의 운동론'에서 '민주 정치론'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를 현대 민주 정치라고 한다면 이를 진보 정치가 거부해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의 진보는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하여 가난한 서민 대중의 삶의 현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하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려면 그 사안의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최대한 전환시켜야하는데, 민주 정치에서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조직이 정당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진보도 좋은 정당이 되어야 하고 집권해서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 유능한 정치 엘리트를 배출해야 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지지자를 대규모로 결집할 수 있어야 한다. 참 잘한다고 감탄할 만한 정치인도 많지만 상당수의 진보 정당은 지역에서 보면 정당보다는 동아리에 더 가깝게 운영된다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나의 관찰로는 그들은 정당인이라는 칭호보다 운동가로 대접받는 것을 더 좋아하며, 그들이 혜택을 주고자 하는 지역 주민 속으로 과감하게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정치인이라는 칭호는 낯간지럽고 고결한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처럼 여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하다. 시종일관 정치의 중요성, 정치 참여의 의미를 강조한다.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그래서 사회적 하층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정당을 잘 만들어서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고 집권의 가능성을 키우라고 독려한다. 그래야 진짜 '그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실 속에서 진보 정당이 왜 약화되었는지의 문제를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에서 찾았다.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는 파벌주의의 늪으로 가라앉는다고 했다. 강력한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정파의 폐해가 무제한으로 허용되었다는 점을 개탄한다.

진보적 관점의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합의 가운데 하나가, "강한 정당의 부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축소하고 선거를 중간 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라고까지 말한다. 그렇다면, 지도자 있는 민주주의를 위해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민주당의 고민이기도 하다. 강력한 지도부를 구성하고 특정인을 부각시키다보면 '이 당이 누구 개인 당이냐?' 하는 반발이 생긴다. 하지만 정파 연합 성격의 집단 체제로 운영하면, '그 당에는 왜 그렇게 인물이 없냐?'고 비판한다.

당을 대표할 만한 지도자를 분명하게 부각시키지 않으면, 그 당이 내세우는 가치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당 내부의 정파 간 권력 균형 문제는 내부 문제이고 강력한 지도부를 내세우는 문제는 국민과의 관계인만큼,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면 강력한 지도자를 내세우는 것이 우선 아닐까?

저자는 진보적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자극하지 않고 자신의 논점을 전달하기 위해 막스 베버의 고전적 저작, 혹은 사울 알린스키의 저술을 인용한다. 때로는 오바마의 감동적인 연설문을 인용하고, 민감한 문제에선 정치학의 건조한 문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다 했고, 지적할 만한 문제도 다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정당 관계자들이 화를 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저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 사회 진보파는 '운동성'을 강조하면서 정치를 멀리 하는데, 그러지 말고 민주주의에서 정치가 제공하는 엄청난 가능성에 주목하길 진심으로 촉구하고 싶다. 그들이 좋은 의미에서 제대로 '정치적'이 되었으면 좋겠고, 제발 정치적으로 성공하길 바란다."

"진보의 열정이 정치적 이성과 만나고 그것이 좀 더 넓고 풍부한 인간적 기초 위에서 성장해 갈 때 진보 정치는 매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는 진보 정치, 진보 정치인, 진보 정당이 '정치의 발견'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진보 정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성 정당 안에서 여러 가능성을 구현해보려고 고민했던 현실 정치인의 한사람으로써 이 책은 또 다른 성찰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기성 정당에서 겪은 우리들의 경험과 진보 정당의 경험이 만날 수 있는 접점은 없는 것일까?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하여 가난한 서민대중의 삶의 현실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민주 정치 시대 '진보의 기준'이라면,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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