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교사
퇴계 이황(1501∼1570년)은 외척권신이 온갖 권세를 부리며 국정을 요리하고 임금 또한 속수무책이었던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시대를 살았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백성을 살리는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유학의 논리가 퇴색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 퇴계는 공부를 통하여 시대의 어둠을 뚫고자 하였다.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이치(理)를 통하여 도덕 문명과 학술 사회를 소망하는 평생이었던 것이다. 퇴계의 리(理)는 우주 자연의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즉 인간다움을 향한 바른 길이었다. 추상과 이론을 넘어서 일상의 실천을 겨냥한 공부였던 것이다.
이러한 대학자 퇴계를 포근하고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아담한 책 <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푸르메 펴냄)이 나왔다. 몇 년 전 퇴계와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년)이 주고받은 편지를 풀어낸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펴냄)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향한 소통과 공부의 깊이를 드러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영두가 이번에는 독자를 퇴계 앞으로 다소곳 데려다 준다.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년)이 편찬한 <퇴계어록(退溪語錄)>을 옮기고 풀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의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과 하나하나 대조하며 원문의 오탈자를 바로 잡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간명하고 친절한 주해를 덧붙였다. 따라서 이 책 마지막 '퇴계어록에 대하여'부터 읽으면 좋다.
'지금-여기'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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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김영두 지음, 푸르메 펴냄). ⓒ푸르메 |
퇴계는 옛 성인의 고례(古禮)를 회복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실천하고자 하였지만,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내 생각에는 옛 법을 반드시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고 집안 형편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다만 지나치게 분수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 주자를 인용하였다. "어찌 고례에 맞지 않는다고 조정에 건의하여 하나하나 잘못을 씻어내고서야 시원하다고 하겠느냐?"
이렇듯 퇴계의 시선은 '지금-여기'에 꽂혀 있었다. 역해자도 간명하게 안내하였다.
"퇴계는 주자가례의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그가 발을 딛고 서 있던 16세기 조선에서 예를 실천하여야 한다는 현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의례에 대한 인식에서 보듯이 퇴계의 일생 사업은 진실의 추구이며 일상의 실천이었다. 이른바 덕성을 존숭하고 학문에 힘쓴다는 존덕성도문학(尊德性道問學)이었다. '존덕성'과 '도문학'은 어느 한편의 소홀함이나 우선함을 전제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퇴계에게 물러설 수 없는 신념이었다.
학문의 힘
그랬음인지 시대의 어둠을 바른 마음과 곧은 실천으로 돌파하려다가 아쉬운 희생을 치렀던 선현에 대한 회상은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같은 유학자들은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는 가까운 시대인데도 (그 학문을) 연구할 자료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혹은 "한훤당의 학문은 비록 실천이 돈독하기는 하였지만 학문을 연마한 도문학 공부는 미진하였던 것 같다. (…) 그만큼 남아 있는 저술이 없고 또한 밝힐 만한 문헌도 없어서 학문의 경지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다."
이렇듯 당대 선현 평가가 인색하리만치 원칙적이었다. 일세의 중망이었던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에도 냉정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다." 학문의 힘이야말로 도덕 정치와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바탕이라는 믿음이 컸다.
동아리(我同人) 키우기
학문의 힘은 홀로가 아니라 '다름과 사이'의 동아리가 키운다. 퇴계의 동아리는 자못 엄격하였다. "명예와 이익에만 빠지는 마음이 있나 준열하게 되돌아보면서 소인으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럼에도 동아리 넓히기는 지극정성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에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공손하며 조심스러웠다.' 또한 제자나 문인에게도 '너'라고 호칭하지 않고 존중하였으며, 누구와 논변할 적에는 친절하고 소상하고 기꺼워하였다.
다음은 이 부분을 위한 역자의 해설이다.
"평범한 교사는 말만 하고 좋은 교사는 설명을 하며 훌륭한 교사는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교사는 제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 퇴계의 유산이 오늘날까지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은 그의 학문적 성취가 남달랐다기보다는 그가 끼친 삶의 향기가 제자들의 가슴에 일으킨 반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퇴계는 향기를 품어내는 교사였다.
회한의 깊이
이렇듯 퇴계는 공부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성취는 더할 나위가 없었지만 곤혹스러움이 적지 않았다. 특히 조정의 여건은 나아갈 만하지 않는데 임금은 자주 불렀을 때였다. 그러나 이미 급제하고 벼슬에 들었던 터라 처음부터 벼슬할 생각을 접고 과거를 보지 않는 처사와 출처가 같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렵게 나갔다가 쉽게 물러나왔다. 그래도 종내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중종 9년(1514년) 별시를 통과한 이래 '청렴 근실함이 남쪽 선비 중에서 으뜸'으로 일컬어지던 박수량(朴守良, 1491∼1554년)은 천재지변이나 변방의 급보라도 들리면 두 아들에게 항상 일렀다. "내가 초야로부터 일어나 외람되이 정2품에 이르는 분수 넘친 광영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들랑 삼가 시호를 청하지 말고 비를 세우지 말라." 그러나 분묘를 표시하는 묘표마저 없을 수 없어서 글씨를 하나도 새기지 않는 백비(白碑)을 세웠다. 또한 속리산 아래에서 '허수아비'를 자칭하고 살았던 대곡(大谷) 성운(成運) 또한 유언하였다. "묘표(墓表)도 세우지 말라." 김인후(金麟厚)도 일렀다. "을사년 이후 벼슬은 적지 말라."
퇴계 또한 세상을 뜨기 직전 묘비가 아니라 묘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적으라고 유언하였다. 굳이 푼다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비록 물러났지만 본의 아니게 높은 벼슬을 받았다가 만년이 되어서야 숨었다는 곤혹스러웠던 평생 회환이 읽힌다. 이렇듯 적은 묘석과 조정에서 받은 관직조차 적지 않는 장묘 의식은 시대의 변화와 발전의 방향에 섰던 선비들의 삶과 앎의 차원을 전해주는 것이지만 퇴계 역시 그 일익을 감당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