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이 우리 앞에 놓여 있거나 눈에 띄게 될 때, 우리는 그림과 교감하거나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가끔은 순식간에 그림과 소통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기도 한다.

고연희의 <그림, 문학에 취하다>(아트북스 펴냄)는 조선 시대 옛 그림의 화제나 소재로 사용된 문학 작품을 찾아내 꼼꼼히 살피고, 그림과 문학과의 관계를 살핀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문학이 어떻게 그림과 어울렸는지 확인함으로써, 그림을 더욱더 깊은 소통을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살펴보자. 고연희는 주희, 율곡과 같은 학자들의 시를 그림으로 옮긴 작품에 시선을 둔다. 주희의 '무이도가'를 그림으로 그린 이성길의 <무이귀도>,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그림으로 그린 <고산구곡시화병>이 그 예이다. <무이귀도>는 정조가 모범적인 문체로 주희를 거론하자, 김홍도가 왕의 뜻을 알리고자 그린 그림이다.


▲ 이성길의 <무이귀도>(비단에 수묵담채(부분), 1592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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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문학에 취하다>(고연희 지음, 아트북스 펴냄). ⓒ아트북스
강세황의 <지상편도(池上篇圖)>, 이재관의 <오수도>, 박제가의 <어락도> 등에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같은 새로운 문체에 대한 당대 지식인의 열망이 깔려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그림들과 <무이국곡도>을 보면서 정조를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이 가졌던 두 가지 열망의 큰 간극을 확인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가 그림을 국가의 통치 철학과 당시의 사회 사이를 제도적으로 매개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저자의 판단 역시 예리하다. 세종대왕이 백성들의 도덕적 교화의 목적으로 출간한 일종의 그림책인 <삼강행실도>는 충·효·열의 문화를 제도화하고 교육하기 위한 일종의 윤리 교과서와 같은 책이다.

저자는 판화, 찬문, 찬시로 이루어진 <삼강행실도>의 구조 자체가 교화에 적합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특히 <삼강행실도>의 '루백포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흥미로웠다. 저자는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응징한 최루백의 이야기에 실린 그림(호랑이 앞에 서 있는 최루백)을 해설하면서, 사실은 절대 복중을 욕망하는 왕의 의도가 이음을 지적한다.

<구운몽(九雲夢)>은 또 다른 욕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조선 말기 화려한 병풍으로 유행했던 <구운몽>은 연애 이야기와 불법의 득도라는 상반된 두 개의 차원이 얽혀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병풍도를 살피면서 '석교기연'이라는 장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석교기연'은 구운몽 판화나 병풍으로 그릴 때 빠지지 않는 장면이다.

저자는 <구운몽>을 그린 병풍의 유행을 선녀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과 연결한다. 즉 <구운몽> 병풍의 유행에는 미인 선녀/지상 미인을 원하는 남성들의 욕망 코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석에 다르면, 꿈속에서 미인들과 연애를 하면서 살아온 양소유의 쾌락이 주목받은 것도 당시 남녀 엘리트의 자유연애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문학과 그림이 상호 관계를 맺는 다양한 양상을 짚어보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나름대로 성공했다.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알고 있듯이 문학과 그림의 관계는 주종이나 시원의 앞뒤를 다투기 어려울 정도로 따질 것이 많은 영역이다. 저자 역시 이 책에서 문학과 그림의 선후를 짚으면서도 굳이 어느 것이 좋다거나 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는다.

역시 이 책의 면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문학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와 문장들의 원래 의미를 살핀 후에 조선 시대의 문인이나, 선비 또는 화가들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역사적· 지리적 거리와 단층들이 어떻게 해석되고 수용되었는가를 살펴 본 점들이다. '욕망과 인정' 부분을 제외하고 책 전반에 걸쳐있는 대부분의 그림과 화제들이 중국을 기원으로 하고 있고 시간적으로는 많게는 1000년, 짧게는 동시대의 거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시·공간적인 거리를 뛰어넘는 재해석과 수용의 배경에는 역시 조선 시대의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치·사회·경제적인 상황이 놓여 있다.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아끼고 있다. 그 틈으로 "중국의 문화를 우리 것인 양 마음껏 누리며 향유 하였던 문화적 스케일로, 문화적 수준의 고양을 위하여 옛 지식인들이 기울였던 문화 수용의 노력과 능력으로 존중하며 감상하기"를 권하는 저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시문과 그림의 형상을 넘어서 독자들이 발견하거나 음미하게 되는 '그 시절의 무엇'은 저자의 의취를 따라 흘러갔던 '언제 어디'이다.

작가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그 시절의 무엇'이 애매하게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은 한참 아쉬움으로 남는다. 문화라는 것이 인간이나 사회의 욕망이 충돌하는 때와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드러냄이 갈등과 힘의 경쟁, 수용이나 정화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책과 만나서 이끌려진 미묘한 경계는 저자의 의취로만 남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은 옛 그림에 대한 확장된 시선을 갖추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 책이 옛 그림을 읽는 신선함과 속 깊은 성찰의 짬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점은 여러 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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