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보장을 받은 정교수이며 대학 강단에 선 지 30년이 가깝지만 나는 한국 대학의 역사에 밝지 못하고, 현재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학교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 전사(前史)인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를 포함하여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이런 사정은 우선 나 개인의 문제이지만 한국 대학 교수들 다수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허점이기도 하다.

클라이드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박거용 옮김, 문화과학사 펴냄)는 오랜 기간 한국 교육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천착해온 박거용의 번역으로 나왔다. 이 책을 통독하며 맨 먼저 드는 생각은 적어도 저자 바로우는 미국 대학의 특정 시기에 대한 역사를 탐구할 때 풍부한 역사적 기록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클라이드 바로우 지음, 박거용 옮김, 문학과학사 펴냄). ⓒ문학과학사
가령, 식민지 대학으로 출발한 서울대는 전쟁과 환란이라는 우여곡절의 역사 탓에 자신의 기록을 온전히 보관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역사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체제를 구축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몇 년 전 내가 소속된 단과 대학의 30년사 발간을 위해 영어영문학과의 지난 30년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그 점을 뼈저리게 실감한 경험이 있다.

지식의 생산, 보존, 전수를 담당하는 최고의 고등 교육 기관이 자신의 역사적 기록을 체계적으로 간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대학으로서의 자기 역할에 어떤 심각한 맹점이 없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일이어야 옳을 것이다. 엉뚱한 발언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2010년 12월 정부 예산안 등을 국회가 날치기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덤으로 얹어 서울대 법인화법이 통과된 어이없는 사태는 서울대 구성원들이 서울대의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적 인식이 부족하고 국립대학의 '맏형'으로서 자신의 해온 역할과 책무에 대한 망각이 없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서울대 측이 애초에 제시한 법인화 안도 아니고 정부가 내놓은 입법안에 대응해서 서울대 측이 다시 내놓은 수정안도 아닌 정부 원안이 그나마도 몰골사나운 절차를 통해 그대로 법으로 확정되었다. 이처럼 부실한 절차를 통해 서울대뿐만 아니라 전체 국립대학 체제를 뒤흔들 큰 변화가 생긴 마당에 내부 구성원 다수의 강력한 문제제기가 없다는 것은 자기 조직에 대한 역사의식의 실종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고 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우의 저서는 국내외 대학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인식과 논의를 위한 촉매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모두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대공황이 터지기 직전까지 미국이 산업혁명을 완수하고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통해 사실상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에 미국 대학이 어떻게 '기업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개조되었는가를 다루고 있다. 다루는 시기는 훨씬 앞서지만, 그 때의 대학 체제 개편이 오늘날 미국 대학의 골간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1980년대 이후 흔히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시장 만능주의의 (더욱 철저해진) 대학 재편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현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읽어가노라면 대목대목마다 오늘날 우리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당연시하는 미국 대학 제도들의 역사적 연원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들이 담겨 있다. 대학의 지배 구조, 운영 체제를 예로 들어보자. 기업의 관점에서 대학 개혁을 추구하던 프리체트(Henry Pritchett)가 1905년의 보고서에서 당시 미국과 유럽의 대학 6개씩을 비교한 후에 유럽이 미국보다 효율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미국 대학의 행정을 이사회에 부여하는 대신에 유럽처럼 교수진에게 넘겨준다면 미국 대학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남겼다는 사실(112~13쪽)은 오늘날 대학 법인화 추진의 핵심인 대학 지배 구조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물론 프리체트는 기업 자유주의에 충실하게 사업가들이 무조건 우수한 행정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만다.

청교도가 헤게모니를 쥔 신생 국가답게 1861년 시점에 미국 대학 책임자의 대다수는 개신교 목사 출신이었고, 1890년까지 대학 총장의 절반은 교수 출신이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전문적인 행정가이지만 교수진과 긴밀한 관계가 없는 대학 책임자 집단이 출현해서 대학을 기업인이나 경영 간부의 입장에서 운영하게 된다. 심지어 교수 출신이라 하더라도 대학 경영진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순간 그 집단의 논리에 흡수되면서 쉽게 변질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총장이 CEO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총장의 역할을 아예 뒷전으로 밀어내지만 그것은 근대 대학의 역사에서 그렇게 오래된 일이거나 당연한 일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은 7장과 8장에서 점차 자본의 요구에 의해 환골탈태한 대학들이 학문의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제약하게 된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우리 독서계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에 대한 해직과 탄압도 소상하게 나오며, 리처드 엘리(Richard Ely)나 존 커먼스(John Commons) 같은 정치경제학자들이 어떻게 기성 체제와 타협하면서 오늘날 미국의 비판적인 대학 교수들이 흔히 취하는 어정쩡한 모습의 선구적 모델이 되었는지도 명쾌하게 파헤쳐진다.

이 과정에서 미국식의 대학 정년 보장 제도인 테뉴어(tenure) 제도가 갈등과 타협의 산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한국에서 국립대 법인화나 대학 개혁이 '경쟁력' 강화의 이름으로 목청높이 외쳐지지만, 이사회를 비롯한 지배 구조에서 교수진의 발언권이 사실상 소거됨으로써 대학의 연구자들이 자신의 학문과 양심의 명령에 따라 내놓는 소중한 비판적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혹은 교묘하게 감시받고 통제되는 일은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 대목들에서 쉽게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끝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작은 불만을 덧붙이자면, 해당 시기에 이루어진 대학 재편 과정에서 어떤 요소들이 현실의 변화에 따른 대학의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치밀한 설명이나 입장이 좀 아쉽다. 기업 자유주의의 물결이 닥치기 전에 성직자들이 다스리는 19세기 중엽의 엘리트적인 미국 대학이 저자의 시각에서 결코 이상적인 모델일 수 없을 터이고, 존 듀이나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만만찮은 학자나 사상가의 대학에 대한 성찰을 자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대학의 변화에서 타락하고 후퇴하는 측면과 불가결한 현실 적응의 측면이라는 변별하기 어려운 양면을 엄정하게 가려내는 노력이 좀더 있었더라면 더욱 입체적인 서술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학간사회주의협회'(ISS, Intercollegiate Socialist Soicety) 등의 대안적 활동을 내세우는 대목들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면서 고정관념에 해당하는 진보적 시각이 관철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조금 더 보완했더라면 그 당대로서 가능했던 최선의 현실적 대안이 좀 더 독자에게 뚜렷하게 다가오면서 오늘의 도전에 맞서는 실천적 의지를 북돋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남는다.

그러나 어쨌든 이 저서는 우리 대학이 현재 직면한 갖가지 엄중한 시련을 실감한 사람이라면, 또 그러한 시련과 도전을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대학 구성원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소중한 문헌이다. 앞으로 오늘의 인류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한 더 진전된 논의를 가능하게 할 번역서들과 저서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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