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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 PDE
이혜경 지음 / 북레시피 / 2026년 9월
평점 :
삶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헤쳐 드리는
소울맘코치 박상림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 죽음을 설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살인일까?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마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상처를 이해하고,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며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능력을 정반대로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직접 명령하지 않았고, 직접 행동하지도 않았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심리 스릴러 <처방 PDE>을 소개합니다.
'우리는···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끝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한 깊은 연민이 가슴을 짓이겼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눈치를 보며 허세를 부릴 필요도, 술에 취해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선영 역시 공포에 떨며 웅크리지 않아도 된다. 같은 아픔으로 연결된 두 사람이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하나가 되고자 했지만, 결국 서로를 찌르는 칼날이 되고 말았다. 그 비극의 고리가 비로소 끊어진 것이다.
P37
소설의 중심에는 전선영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합니다. 외상도, 명백한 범죄의 흔적도 없는 죽음. 사건은 사고사로 처리됩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죽음의 이면을 알게 됩니다.
전선영은 남편의 죽음에 이르는 선택을 했고, 그 과정에는 정신과 의사 이수현의 심리적 개입이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선영 자신조차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기 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수현이 원했던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자신은 직접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환자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렇기에 PDE는 단순한 살인 실험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를 어디까지 조종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실험이 됩니다.
'내가 해냈어.'
선영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그 짐승을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다. 날카로운 법의 눈과 까다로운 의학의 메스조차 속여 넘기고 완벽하게 치워버렸다. 경찰은 '단순 변사'로 결론지었고, 보험사는 10억 지급을 약속했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자신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선영의 전신을 전류처럼 훑고 지나갔다. 슬픔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도취감이었다. 손끝 하나로 생과 사를 갈랐다. 남편의 운명을 결정짓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썼다. 이제 그녀는 방구석에서 웅크리고 매질을 견디던 피해자 아니었다. 그녀는 심판자였고, 집행관이었으며, 마침내 승리자가 되었다.
P47
남편의 죽음 이후 선영은 자유로워지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책감과 공포, 우울과 환각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심리적 늪으로 빠져듭니다. 약을 먹으면 또 다른 고통을 마주하고, 먹지 않으면 불면의 고통에 시달립니다.
가정폭력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폭력이 끝났다고 해서 폭력의 결과도 끝나는 것일까? 수현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과정 자체를 실험합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결과는 환자의 삶에 계속해서 흔적을 남깁니다. 이 작품에서 ‘처방’은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는 장치가 됩니다.
'PDE' 그리고 그 아래 'Patient Diagnosis & Evaluation (환자 진단 및 평가)'
성공적으로 치료하지 못한 자들의 무덤이었다. 진료 도중 증세가 악화되어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거나, 혹은 어디론가 사라져 소식이 끊긴 불행한 영혼들 ··· 병원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하고도 지켜내지 못한 이들의 마지막 흔적들일 것이다.
p198
'Psychic(심리)··· Domination(지배)··· Experiment(실험)···.'
이것이 검은색 파일 PDE의 진짜 이름이었습니다. 바로 ‘심리 지배 실험’입니다. 수현에게 환자는 치료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 대상입니다. 그는 환자의 심리를 분석하고, 기억과 감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특정한 언어와 정보를 무의식 속에 심어놓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발 물러납니다. 환자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다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를 직접 밀어 죽이는 것도 아니고, 흉기를 휘두르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말하고, 해석하고, 기다립니다. 상대방이 가진 불안과 죄책감, 욕망과 공포를 이용해 스스로 특정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설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단순히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소설과는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의 선택을 조종한 사람에게도 살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법이 판단하는 것은 결국 드러난 행동과 증거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언어와 심리적 설계가 한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과정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소설의 절정은 전선영이 남긴 유작 ‘처방’에서 폭발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캔버스에 펼쳐진 황금빛 형상을 보고 ‘비운의 예술가가 남긴 구원과 희망’이라 칭송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수현에게 그것은 소름 끼치는 공포입니다.
그 황금빛은 남편의 몸속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던 치사량의 위스키이자, 수현 자신이 설계했던 살인의 경로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말로 입증할 수 없어 법정에 세울 수 없었던 살인의 증거가, 가장 시각적인 예술의 형태로 온 세상에 영원히 전시되는 순간입니다.
법이 다 정의하지 못하는 ‘죄’의 경계, 그리고 언어가 인간의 뇌를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서늘한 통찰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정교하게 조율된 심리 묘사와 서늘한 서스펜스를 즐기는 독자라면 책장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서늘한 여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