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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공리와 이를 거꾸로 뒤집은 미셸 푸코의 '정치는 전쟁의 연장'라는 주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기존이 대다수 한국전쟁의 연구자들이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라는 전쟁을 시작한 주체의 책임에 대한 규명작업에 집중한 것에 반해 저자는 '전쟁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에 한국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 에 주목한다.
이는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화된 인식이 전쟁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과 전쟁에 의해 구조화된 질서로서의 오늘날의 한국정치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인식 때문이다. 즉 저자는 한국전쟁과정(특히 피난, 점령, 학살을 중심으로)을 '현재화'시키는 작업을 이 책에서 수행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1) 피난 - 박노자는 노신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 사회를 '서로 잡아먹기를 탐하는 사회'라고 명한 바 있다. 저자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우리 사회를 '피난사회'라고 정의하는 데, 이는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모두가 피난지에서 만난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며 어떠한 질서와 규칙 속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보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사회를 말한다.(p.63) 저자는 이 피난 사회의 원인이 된 국가 내지 정부의 무책임성은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적 사고성격에도 있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당시 한국의 국가 자율성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 원인이 전쟁 이후 지속됨으로써 '피난'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후 만성적인 정치사회현상으로 구조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2) 점령 - 대다수 민중들은 인민군 치하를 지옥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국군이 들어오는 것을 해방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남북한 어느 국가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전쟁의 중지와 평화 질서의 구축, 무서운 권력의 제거만을 원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쟁에 대한 공포가 특정 체제에 대한 공포로 상징화 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어찌 되었든 점령의 체험은 이승만의 권력을 안정화시켰고 대한민국의 국가 토대를 튼튼하게 해주었으나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지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권의 불안정성은 여전하다는 문제는 남아있었다고 본다.
(3) 학살 -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대량 학살만큼 전쟁의 성격과 경과 그 의미와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실은 없다고 보면서 특히 학살의 정치사회학적 측면에 주목한다. 특히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취약한 권력기반을 극복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즘적 과잉 진압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배경에 1인 중심의 독재정치와 군국주의적, 기술관료적인 합리주의로 구성된 일제의 유산, 그리고 전통적인 반역의 담론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국가의 학살은 이후 철저하게 은폐되어 4.19, 베트남전, 광주항쟁 등에서 반복, 재생산되는 현재진행형의 실체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근대국가의 진보성과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국가라는 물신화된 단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공동체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국가주의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학살이 국가 탄생의 비밀이라는 일반론에 근거하여 국가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존중될 수 있는 가치라는 지극히 당연한 언술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상식이라 할 수 없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전쟁 과정에서 민중이 당한 비참함과 인간 존엄의 훼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잔존하고 있는 야만의 흔적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p.309)은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부정적 유산을 청산할 길은? 그 대안적인 성찰은 아쉽게도 '항구적인 평화 질서의 구축과 인권의 실현'이라는 원론적인 수준이다. 내가 너무 조급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