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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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외할머니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며칠간 병원에 가 있었다. 가는 길에 가방에 이 책을 넣었다. 병원에 도착한 다음, 보조침대에 쭈그려 앉으며 책을 읽어나갔다. 몇 쪽을 읽다가 잠시 멈춘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할머니를 모시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그리고 다시 책을 든다.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 가슴이 북받친다. 또 덮는다. 할머니께 말을 건다. ‘감옥을 간 사람이 쓴 편지를 모아논 책인데 읽기가 힘드네. ‘ ‘그런 건 뭐러 읽니’. 밤이 되었다. 휴게실 소파에 나간다. 다시 책을 펼쳐든다. 도시의 하늘에도 얄궂게 별이 핀다. 그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이제 제법 눈에 들어온다.

병원을 다녀온 지 그러니까 책을 읽은 지는 꽤 시일이 지났으나 서평을 쓰기가 두려웠다. 몇 번이나 인터넷 창을 열었다가 다시 닫곤 하였다. 평(評)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저자와 독자의 관계가 평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디 한 구석이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평소 방자하고 트집잡기 좋아하는 나도 34000원을 지불하고 저자를 평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뻔뻔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리뷰를 쓰는 것은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해 발언을 해야 떳떳하겠다는 모순된 심정 탓이다.

서준식은 ‘생각’ 서문에서 ‘이성이 폭력적 구조의 벽에 부딪치는 지점부터는 어쩔 수 없이 입이 아닌 근육이 현실의 어둠을 뚫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모든 글쓰기는 미망(迷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옥중서한집은 이 깨달음을 어떻게 얻었는지에 대한 기나긴 회고록이다.

820여면 정도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실려 있다. 특히 사랑하는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우리들에게 보내는 신호와도 같다. 그리고 편지글 사이 사이에 가끔 감옥에서의 서준식의 동정이 딱딱한 기사문 형식으로 부언되어 있다. 보안관찰법에 항의하여 20일간 단식투쟁, 동료 둘의 죽음, 사회안전법 철폐를 요구하며 51일간 단식투쟁 등. 그 와중에 쓰여진 편지들은 다른 것과 다름이 없다. 17년간의 긴 호흡은 꾸준히 유지된다. 아, 인간은 존엄한 것이다. 존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현실에서 배우지 못한 그 자명한 진리를 서준식을 통해 체험한다.

절 만배를 하고 읽어야 할 책이다. 그리고 초조해하지 말아야 겠다. 참을성있게 나의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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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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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김규항의 글 덕분이다. 김규항은 자신이 운영하는 야간비행에서 서준식의 이 책과 '옥중서한'을 발간하면서 '이 놈들아, 이게 바로 책이다.'라는 심정으로 책을 낸다는 말을 했다. 나는 김규항과 서준식의 위치를 대충 가늠하면서도 좀 심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서준식의 책들을 읽어가면서 역시 나의 의구심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서문에서 운동가로서의 글쓰기라는 화두를 던진다. 수많은 성명서 투의 글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서준식은 수많은 운동가들의 땀과 눈물 어린 고된 활동의 결과물인 이러한 글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글들을 잡문으로 표현하면서 겸양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서준식의 글은 그들의 글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서준식의 문체는 투박하며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그러나 강퍅하지 않다. 진정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글. 우리가 어떤 글을 읽을 때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모르는 경우는 별로 없다. 다만 몰라서가 아니라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 서준식은 이 지점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도 결국 '입'이나 '잔머리'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의 글은 이렇듯 그의 '근육'으로 밀고 나가며 쓴 것이다.

출소 이후의 이력이 말해주듯, 보안관찰법, 인권운동, 유서대필사건, 청소년 인권문제 등 글의 주제는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문제는 별로 없다. 이럴 때 보면 세상은 너무 느리게 변하는 거 같다. 옆에서 쳐다보기만 해도 지겨운 판에, 전선에서 자신의 근육만으로 지탱하고 있는 서준식은 오죽할까? 그러나 그는 투정을 부리지도, 한 눈을 팔지도 않는다. 그의 힘의 근원을 읽었지만 가늠하지 못하겠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다.

안정되고 평범한 삶. 나의 힘으로, 나의 땀으로 나의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살리면서 음악을 듣고 책을 보고 글을 쓰는 자그마한 삶. 이것은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하지만 '고집불통이고 강고한 맑스주의자'일 것 같은 서준식의 꿈이기도 하다.

p.s 혹 이 책을 구입하지 못하더라도 서점에 가서 책의 뒤쪽에 노란 종이에 인쇄된 부분은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서준식이 두 딸들에게 보내는 80페이지 분량의 러브레터이다. 사랑은 이렇게 친절하고 사려깊은 것이구나. 어떤 동화보다 어떤 연가보다도 아름다운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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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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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에서 켄 로치의 영화가 언급된다. 97년 랜드 앤 프리덤을 처음 봤을 때 그 영화가 낡은 이야기라고, 그러나 99년도에 다시 보았을 때는 피가 끓었다고. 그 사이에 저자에겐 정신의 변화와 그 변화의 중심인 글쓰기가 있었다. 나 역시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마찬가지이다. 몇 년 사이 아찔할 만큼 인식의 곡예가 있었다. 그걸 그나마 잡아준 것이 최근의 글읽기였다. 때 마침 이미 좋은 글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도 그것의 일종이다.

이미 나온지 꽤 되는, 이제 제법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뒤늦게 읽어가면서 10여년간 놓아버린 정신을 수습한 그의 경로를 추적해 볼 수 있었다. 그의 글에는 일상경험에 대한 적절한 의미부여, 짙은 감상, 위선에 대한 강한 적대감등이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연필로 밑줄을 치고 싶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러한 필력으로 짐짓 냉랭한 듯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다. 후훗. 때문에 '기껏해야 씨네 21이나 사보며 현실을 위무하는 소시민들'에게 그의 비장함은 때로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할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A급이 아니라 B급 좌파라면 좀 명랑해질 필요도 있지 않나? 비분강개는 원래 우파의 표현양식이거늘. (이건 군말이다. 김규항을 읽는 것은 단연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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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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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박노자는 더 이상 낯선 이름이 아니다. 우선 그는 보통의 인간과는 좀 다르다. 구소련의 마지막 세대로서 유년기를 보내고, 부패한 러시아 정권과 여전히 국가병영체제를 갖추고 있는 남한 사회를 경험했으며 지금은 북구 사회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이력을 볼 때 의미는 없어 보인다. 이른바 세계 시민이다. 게다가 10년 정도의 학습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려하고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천재성을 가지고 있으며(정말 불가사의하다.), 예리한 시선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휴머니스트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부러워하는 푸른 눈과 금발의 잘 생긴 외모라는 비주얼적 상품성까지 갖추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이었을까? 이 책과 비슷한 부류들의 서적들이 쏟아져 나온 최근 몇 년간에도 별로 동요를 하지 않았던 나도 용케 박노자의 저작은 찾아 읽었다. 고종석이 <책읽기 책일기> 말미에서 '개인주의여 영원하라!' 라는 글을 보았을 때 나는 있을 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아직 거대담론의 숲에서 헤쳐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내가 개인주의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은 분명 박노자 덕택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나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등에서 서술된 우리사회의 전근대성과 사대주의, 패거리문화, 폭력과 양심적 병역거부권 등의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는 박노자 언어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발견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딴지일보의 김어준씨가 '박노자 씨의 말은 다 옳아요. 옳긴 한데 그 분 글을 읽으면 도무지 한국 땅에서 살기가 싫어지거든요.'라고 말했을 때 마음 속으로 응수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가 항상 미안해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살기 좋은 곳에 살다보니 자연스레 시선의 수준이 높아진 거 아닌가 하는 트집을 잡고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 박노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유행병이 우리가 저항을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습격해서 한국인들의 상당수가 감염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아직도 유행하고 있는 질환이라 완치가 어렵겠지만 우리의 몸도 많이 단련되었고 경험도 쌓였으니 이제부터라도 집중적으로 치료해보면 어떨까? 약간의 차도라도 보인다면, 건강한 상태의 우리 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p.23)'

그는 많은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선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깨닫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참으로 소중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전제한 뒤에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나'가 그 무엇의 수단이자 도구로 전락해 버린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그는 '나'를 배반한 역사라고 보고 있으며 그 본질은 제국주의 논리의 내면화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국민이라는 담론, 범아시아주의라는 새로운 인종주의, 개신교의 문제등의 각론에서 제국주의 논리가 어떻게 지난 100여년 동안 우리 안에 이식되어 왔는지 분석한다. 그리고 비록 19세기 말의 개화파부터 박정희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제국주의 논리의 내면화에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개인이 동시대의 시대사적 조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합리화하는 것은 금물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한용운, 조소앙, 나혜석 등의 선각자들로 인해 새로운 우리의 모습도 만들어 졌다고 말한다.

그도 제국주의적인 폭력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이상이 온전히 실현되는 역사를 기대한다는 것은 과욕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국주의적인 폭력이 영원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극복될 이러한 제국주의적 국가주의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지난 근대사를 박노자와 함께 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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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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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공리와 이를 거꾸로 뒤집은 미셸 푸코의 '정치는 전쟁의 연장'라는 주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기존이 대다수 한국전쟁의 연구자들이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라는 전쟁을 시작한 주체의 책임에 대한 규명작업에 집중한 것에 반해 저자는 '전쟁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에 한국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 에 주목한다.

이는 한국전쟁에 대한 공식화된 인식이 전쟁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과 전쟁에 의해 구조화된 질서로서의 오늘날의 한국정치와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인식 때문이다. 즉 저자는 한국전쟁과정(특히 피난, 점령, 학살을 중심으로)을 '현재화'시키는 작업을 이 책에서 수행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1) 피난 - 박노자는 노신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 사회를 '서로 잡아먹기를 탐하는 사회'라고 명한 바 있다. 저자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우리 사회를 '피난사회'라고 정의하는 데, 이는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모두가 피난지에서 만난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며 어떠한 질서와 규칙 속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당장의 이익 추구와 목숨보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사회를 말한다.(p.63) 저자는 이 피난 사회의 원인이 된 국가 내지 정부의 무책임성은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적 사고성격에도 있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당시 한국의 국가 자율성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 원인이 전쟁 이후 지속됨으로써 '피난'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후 만성적인 정치사회현상으로 구조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2) 점령 - 대다수 민중들은 인민군 치하를 지옥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국군이 들어오는 것을 해방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들은 남북한 어느 국가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전쟁의 중지와 평화 질서의 구축, 무서운 권력의 제거만을 원했을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쟁에 대한 공포가 특정 체제에 대한 공포로 상징화 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어찌 되었든 점령의 체험은 이승만의 권력을 안정화시켰고 대한민국의 국가 토대를 튼튼하게 해주었으나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지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권의 불안정성은 여전하다는 문제는 남아있었다고 본다.

(3) 학살 -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대량 학살만큼 전쟁의 성격과 경과 그 의미와 결과를 잘 보여주는 사실은 없다고 보면서 특히 학살의 정치사회학적 측면에 주목한다. 특히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취약한 권력기반을 극복하기 위한 마키아벨리즘적 과잉 진압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배경에 1인 중심의 독재정치와 군국주의적, 기술관료적인 합리주의로 구성된 일제의 유산, 그리고 전통적인 반역의 담론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국가의 학살은 이후 철저하게 은폐되어 4.19, 베트남전, 광주항쟁 등에서 반복, 재생산되는 현재진행형의 실체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저자는 근대국가의 진보성과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국가라는 물신화된 단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공동체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데 이것이 단순히 국가주의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인지 학살이 국가 탄생의 비밀이라는 일반론에 근거하여 국가 폐기론을 주장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존중될 수 있는 가치라는 지극히 당연한 언술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상식이라 할 수 없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전쟁 과정에서 민중이 당한 비참함과 인간 존엄의 훼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잔존하고 있는 야만의 흔적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p.309)은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부정적 유산을 청산할 길은? 그 대안적인 성찰은 아쉽게도 '항구적인 평화 질서의 구축과 인권의 실현'이라는 원론적인 수준이다. 내가 너무 조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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