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파란 눈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훼손’이라고 쓰다니. 가슴을 세게 맞은 느낌. 아 역시 토니모리슨… 책 서문부터 가슴을 붙잡으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파란 눈을 가진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고, 그러자 반감이 일었다. 슬픔이 담긴 친구의 목소리가 동정을 바라는 투라서 동정을 꾸며 보이긴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구가 그런 훼손을 원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그애에게 ‘화가 치밀었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메를로-퐁티MauriceMerleau-Ponty는 "투표가 직업과 생활 바깥에서, 휴식중인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그러니까 개인화와 추상화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의투표는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자 다른이들의 투표를 거부한다."
노동 계급은 인민의 ‘일반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만인에 의한 만인의 규정을내리는 데 협력하려고 하지 않으며, 합의를 정교화하려한다든지 소수파가 승복하기를 기대할 만한 다수파의 출현에 이바지하지도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노동 계급혹은 노동 계급의 일부는 이 ‘다수‘의 관점을 노동 계급의이해에 맞서,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수호하려는 적대 집단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선거에서의 다수가 ‘일반적’ 관점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이는 다른 계급들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좌파가 권력을 잡을 때면 매번 부르주아지가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 P1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어떤 정치적 서사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실제로 누구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서사가화제로 삼고 해석하는 개인들의 삶을 구축된 허구로부터빠져나간다는 이유로 비난하기에 이른다면, 대체 무슨의미가 있겠는가?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 역사적시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서이다. 노동 계급은 변화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지 않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노동 계급은 1930년대나 1950년대의 노동 계급과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P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베세데르L‘Abécédaire」에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좌파라는 것"은 "먼저 세계를 내다보는 것" "멀리내다보는 것"(우리 동네의 문제보다 우리에게 더가까운 제3세계의 문제를 긴급한 사안으로 인식하는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반대로 "좌파가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있는 고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제안한정의는 내 부모님이 구현했던 것과 정확히 반대편에놓여 있다. 민중 계급과 ‘노동 계급‘에게 좌파 정치는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감내하는 것들을아주 실용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 P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결국 자신이 던진 질문의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여정인 셈이고, 작가들은 그 도구로 창작을 선택했을 뿐이다. - P2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